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8 춘계답사 - 1일차

일시 : 2018. 3. 22. ~ 23.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이번 답사 지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입니다. 처음에는 충주라고 해서 거기에 뭐 그리 찾아볼 게 많이 있나 싶기도 했는데, 충주는 어느 큰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없었을 뿐 한국사 전체를 두고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어쩌면 요즘이 충주의 최대 침체기라고 볼 수 있을지도), 생각보다 역사적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출발 전날에 뜬금없이 날이 추워져서 다들 걱정을 하였는데(더구나 충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도시 중 하나), 다행히 출발일에 날이 조금 풀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충주로 출발. 처음 도착한 곳은 충주박물관입니다.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답사 당시에는 1관은 내부공사중이었기 때문에 2관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2관과 야외전시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야외전시관에는 다양한 석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블로거의 눈을 끈 것은 아주 작은 크기의 승탑이었습니다. 종 모양으로 아주 단순 간결하게 생긴 이런 형태의 승탑은 조선시대에 유행한 형태라고 합니다.



 충주박물관 2관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큰 박물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알찬 유물 구성을 보여줍니다.



 충주에서 나온 유물은 아니지만 단양 신라 적성비의 모형도 이 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고, 충주의 역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유물이라 모형이나마 전시를 해 둔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영정(아마 현대에 와서 그려졌을)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충주박물관은 특이하게도 국가에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충주시민이 기증한 유물들을 중심으로 전시관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박물관으로 승격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곳은 국립박물관이 아닌데, 몇몇 장소에 국립박물관 승격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블로거가 생각하는 박물관의 핵심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바로 근처에 우뚝 솟아 있는 탑평리 7층석탑, 통칭 '중앙탑'입니다.



 중앙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신라 최대 높이의 탑입니다. 당시 충주는 신라 국토의 중앙으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국토의 남북에서 같은 보폭을 가진 사람이 걸어와 마주친 곳에 지었다고 하여 '중앙'탑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탑신 위 꼭대기(상륜부)에는 상륜부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노반'이 있는데, 저렇게 노반이 2층으로 겹쳐 있는 것은 신라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탑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혹은 그런 상징을 가진 곳)이라 탑이 있는 곳에는 절이 함께 있는 게 당연한데, 탑평리 7층석탑에는 특이하게도 근처에 이렇다 할 절터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배경에는 이런저런 설(단순한 기념탑이라거나, 신라 전국토가 하나의 사찰이라는 개념이었다거나)이 있지만 모두 확실치는 않습니다. 일단 탑 근처에서 이런저런 발굴 작업은 계속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답사란 이런 게 좀 아쉬운데, 한 곳당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뭔가 감상할라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찾아갈 곳은 충주 고구려비가 있는 곳인데, 5세기경 고구려가 충주를 점령하고 만든 충주 고구려비는 비석이 발견된 장소에 번듯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하는데 이는 발견 당시 충주시의 영역이 충주시+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비석만 덜렁 있으면 재미없으니 고구려와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 원본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



 이것이 바로 충주 고구려비입니다. 일설에는 마을의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ㅡㅡ; 말도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무근이고, 근래까지 마을의 선돌(수호신 역할을 하는 돌) 노릇을 하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비석에서 글자를 새긴 흔적을 발견하고, 고구려가 세운 비석으로 밝혀진 것은 1979년입니다. 이 비석이 서 있던 곳은 선돌에서 이름을 따서 '입석마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비석의 글자가 전반적으로 마모가 심해서, 정확한 해독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2) 그나마 저 정도는 양호한 편이고 사진에 나오지 않은 다른 면의 탁본은 거의 TV 노이즈 화면 수준이라 글자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ㅡㅡ;



 충주 고구려비는 이쯤 보아두고 다음 장소인 누암리 고분군으로 이동합니다. '루암리'라니 두음법칙 무시 보소



 딱히 왕릉같은 건 없을 것 같은 동네에 큰 규모의 무덤이 이렇게 무더기로 있다는 것이 신기한데, 충주는 신라 진흥왕이 점령한 후 소경(小京)을 처음 설치했고 당시 경주의 귀족들과 가야 유민 일부가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당시 이주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언덕을 따라 무덤들을 짓는 건 대체로 신라보다는 가야 스타일에 가깝다는군요.



 무덤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어서 빙 둘러볼 수 있습니다. 거의 공동묘지 수준으로 무덤이 많습니다. ㅡㅡ; 사실 이것이 다가 아닌 것이 누암리 고분군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이곳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는 우륵과 신립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탄금대입니다. 좀 멀찍이 있는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어가면



 신립 장군 순절비가 있는 작은 누각이 나옵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 대장)과 조선군(대장 신립)이 전투를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와 전술 착오 등의 이유로 신립을 비롯한 조선군이 말 그대로 전멸당한 곳으로 유멍합니다. 이곳에서 발표와 설명을 듣고,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 열두대를 관람하기로 합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우륵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석에는 가야 출신으로 가야금과 노래들을 만들고, 신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파한 우륵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쓰여 있습니다. 우륵에 대하여는 비석과 전설 외에는 남아있는 흔적이 많이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군요.



 한참을 낑낑거리며 올라가서, 이번엔 한참을 내려가 마침내 열두대에 도착했습니다. 열두대는 신립 장군이 몸을 던져 자결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열두대'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신립 장군이 열두 번 패배한 끝에 절망하여 투신하였다는 설, 전투 도중 열두 번이나 올라와 전황을 확인했다는 설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합니다. 이곳의 절벽 위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고



 아래는 가파른 절벽 아래 남한강이 흐릅니다. 열두대 위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풍경은 정말 끝내줍니다. 미세먼지가 좀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절망 끝에 몸을 던지는 신립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쨌거나 답사인원들은 이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더랬습니다.



 열두대를 지나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도중에 '탄금대기'라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1954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막 끝났을 때인데 그럼에도 이런 비석을 세웠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소박한 기념비를 지나면 이번에는 쓰잘데 없이 거대한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신립장군과 팔천 영령 충혼비'인가 뭔가하는 거창한 이름인데 팔천 영령들이 저승에서 이걸 보고 한숨이나 쉬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심지어 그 곁에는 다른 비석이 하나 더 있고, 아래에는 인공 반지하(?) 방에 '호국영령위패실'이라는 어마어마한 방이 있습니다. 거대한 철문이 육중하게 닫혀 있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위패실 위에는 또 다른 바벨탑기념탑이 서 있고, 그 뒷면에 무슨 상이용사회니 장병보훈회니 하는 이름이 당당히 새겨져 있는데 그냥 사진은 올리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탄금대를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약도에서 보이다시피 탄금대의 보행로는 한 바퀴 빙 둘러서 돌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날의 답사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숙소에 돌아가 저녁식사와 이후 일정을 진행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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