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는 흔히 <내가 고자라니>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존인물 심영(1910-1971?)은 일제강점기 유명 배우우이자 친일 연극인이었고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로 전향하여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한반도의 연예인들 중에서는 심영처럼 친일/좌익 콤보를 밟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에는 고자라니 말고 '진짜' 심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존인물은 적어도 고자는 아니었다는군요]



1. 조선의 슈퍼스타 심영


 -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입니다. 일단 심영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의견이 나뉘어 있는데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어릴 적 서울로 이주하였다는 주장이 있고, 아예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심영이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분명한데, 의정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現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고 합니다(인터넷에서 찾은 정보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


 - 이 무렵 심영은 무용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데, 단순히 무용만 하러 다닌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던지 심영은 사회활동 참여를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심영은 한국 최초의 극단(劇團) 중 하나인 '토월회'와 연을 맺게 되는데, 토월회 연구생 신분으로 몇몇 연극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였습니다. 


 - 심영은 1929년 <간난이의 설움>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연극계에 데뷔하였고, 여기서 호평을 받은 그는 다음해 <남경의 거리>의 1막 주인공으로 깜짝 캐스팅된 것을 계기로 스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심영의 연기력은 바다 건너까지 알려져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가히 1930년대 초 심영은 조선 최고의 인기스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30년대 심영.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잘 생겨 보이긴 합니다. 1937년 12월 2일 동아일보]


 - 다만 193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대스타 황철(1912-1961)이 등장하며 심영은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두 배우는 <춘향전> <단종애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에서 함께 출연하여 인기 경쟁을 벌였는데, 1936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심영과 황철이 각각 홍도 남편(이쪽이 악역), 홍도 오빠('홍도야 울지 마라' 노래에 등장하는 그 오빠)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둘의 인기는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2. 친일에서 좌익으로


 - 인기를 빼앗겨 삐뚤어진 것인지, 심영은 이 무렵부터 친일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1939년 심영은 극단 고협 대표로 취임하였는데 이 극단은 적극적인 친일 성향 단체로, 주로 한다는 일이 농어촌을 순회하며 일본 프로파간다 공연을 한다든지 만주에서 중일전쟁 참전 중인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한다든지 하는 짓이었습니다.


 - 심영은 극작가 박영호, 연출가 나웅 등과 함께 고협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은 현재의 서울 불광동 일대에 '고협촌'이라는 연극인 마을을 만들고 집단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협은 1940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조선연극문화협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심영은 여러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일본 프로파간다를 위한 연기 활동에도 다수 참여하였습니다.


 - 1943년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심영은 일어극(日語劇) 부문 개인연기상을 수상하였고, <너와 나> 등 친일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여 연기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주도하는 고협에서도 <빙하>니 <해당화 피는 섬>이니 하는 일본 프로파간다 연극을 다수 공연하였고, 거기에 심영이 출연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적극적 친일파로 맹활약하던 도중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습니다.


 - 기대고 있던 기둥을 잃어버린 심영의 선택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좌익'이었습니다(이전 글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당연히) 극렬한 반공주의 집단이었습니다). 심영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좌익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광대'였던 연예인들이 (친일을 했든 않았든)만인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 고자......는 되지 않았지만


 - 어쨌든 심영은 해방 후 좌익 계열 연극단체인 '연극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이번에는 친일 대신 좌익 성향의 연극을 다수 공연하고 다녔습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에 심영은 당연히 우익 쪽의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1946년 박영호 작 <님>(<야인시대>에도 등장하지만 실존 작품이기도 합니다)을 공연하고 이동하던 도중 김두한 일파에게 습격을 받고 영 좋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심영 피습사건 기사. 1946년 3월 16일 동아일보]


 - 그 때 김두한은 실제로 심영이 입원한 병원에 쳐들어갔고, 그에게 해코지를 하려다가 그의 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누그러져 협박만 하고 나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김두한 본인의 증언으로 100%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이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 <야인시대>의 해당 부분). 심영은 총상에서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 아마 이쯤 되자 남쪽에서는 더 이상 좌익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심영은 1947년 말 월북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좌익 활동을 용인하던 미군정이 점차 좌익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며, 이를 버티지 못하고 남로당 등 많은 좌익 계열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담으로) 심영의 라이벌이었던 황철 역시 좌익 계열 활동을 하다가 1948년 8월, 즉 분단 막판에 월북하였습니다.


 - 월북 이후에도 황철과 함께 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습니다(황철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었고, 의수를 끼고도 열연을 거듭하여 최초의 '인민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점령지에 남아 있던 연극인 등 여러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끌려갔다가 탈출한 최은희(1926-)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군복 차림으로 와서 여러 연예인들을 납치해갔다고).


 - 그렇게 요란하게 북한으로 건너간 심영이지만, 최후는 분명치 않습니다. 남로당 숙청 때는 같이 숙청되었다가 어찌어찌 복권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971년 다시 숙청되어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5. 정리 : 연예인의 친일


 - 우리에게 이상한 쪽으로 잘 알려진 심영을 선택하였는데,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노선을, 해방 직후에는 좌익 노선을 택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블로거는 그들의 선택을 '광대'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 일제강점기 이후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인기 연예인들은 사회적 관심을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연예인에 열광하면서도 그들을 조선시대까지 천시당하던 '광대' 취급하곤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으레 복잡한 행보를 거듭하기 마련, 많은 수의 연예인들은 권력에 영합하여 입지를 넓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세상에 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런 그들에게 만인 평등을 외치는 사회주의는 하나의 복음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친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방 이후 좌익에 경도된 것은 이상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심영 뿐 아니라 황철, 문예봉, 신불출 등 당대 인기 연예인 중 많은 수가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월북하여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북한 역시 그들이 생각하는 평등 사회는 아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숙청 등으로 쓸쓸하게 퇴장하였습니다.


 - 그들의 생각과는 별개로, 인기 연예인의 친일 행위는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용한 통치 수단이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체제에 영합한 연예인들은 각종 공연과 위문행사 등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당대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심는 데 앞장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 연예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근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의 정치적 행보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들이 정치적으로 가진 영향력과 이를 부당한 권력 유지를 위해 악용해 온 과거 때문일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연예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20233#url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388568 (황철 일대기 1부. 중간에 심영과의 라이벌리가 언급되어 있음)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0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67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곳과 설명이 좀 다른데 참고용으로 링크)



1.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1)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 아직까지 전문가들과 학생들의 전유물이던 비디오게임이 일반 대중에게 급속히 전파된 시발점은 1972년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를 피해 어릴 적에 미국으로 이주한 전기공학자 랠프 헨리 베어(1922-2014)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군수업체 샌더스 어소시에이츠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던 1966년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던 중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꼭 대형 컴퓨터로만 게임을 즐겨야 하나? 기기를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서 가정용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할 수는 없을까?"


 - 메모광(?)이었던 그는 이를 잊지 않고, 2년 정도 틈틈이 작업하여 그럴 듯한 기계를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이 기계의 겉면은 나무 무늬 테이프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브라운 박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어진 이 기계는 그의 직장인 샌더스 사에서는 출시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사정 끝에 TV 제조업체인 마그나복스와 계약을 하여 1972년 10월에야 정식 출시되었습니다. 출시 당시 명칭은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 이 기계는 사실 아주 단순해서, TV 화면에 몇 개의 점을 띄워놓고 이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정도의 기능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해당 게임에 맞는 셀로판지를 TV에 붙이고 그것에 맞추어 점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ㅡㅡ; 그래도 선으로 연결된 조종기라든지, 게임의 종류를 바꾸는 일종의 카트리지(사실 이 때는 단순히 회로의 연결을 조작하는 스위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트리지라기엔 애매하지만) 개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 개발자인 베어 본인이 화면에 대고 쏘는 광선총을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정작 그렇게 큰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가격이 $100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비싼 편이었기도 하고(1970년대 초입니다), 마그나복스 대리점에서만 판매하는 바람에 많은 소비자들은 이 게임기가 마그나복스 TV 전용 기기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도 첫 해 10만 대, 최종 33만 대가 팔려나가며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제시하였습니다. 한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플레이하는 모습]



2. 1972 아타리 오디세이 : (2) 최초로 성공한 아케이드 게임기


 - 1편 끝에 잠깐 등장한 놀런 부슈넬, <스페이스워!>를 보고 흥분했던 이 사람은 1971년 이 게임의 아류작인 <컴퓨터 스페이스>를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기)은 그럭저럭 주목을 받아서 2500대 정도가 팔려나갔는데, 개발 및 생산비용이 만만찮게 들어서 최종적으로는 적자를 냈다고 합니다.


 - 그래도 이게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판단한 부슈넬은 뛰어난 엔지니어인 앨런 알콘(1948-) 등을 끌어들여 아타리(Atari)를 창업하였습니다. 아타리는 바둑용어 '단수(單手)'의 일본식 용어로, 바둑팬이기도 했던 부슈넬이 직접 지은 이름이라는군요. 그 부슈넬이 알콘을 부추겨(큰 계약건이라고 구라(?)를 쳤다고 함) 1972년 말 2인용 탁구 게임을 개발하였으니 그 이름은 <(Pong)>입니다.


 - 아직 시작 단계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 부슈넬은 일단 자신과 친분이 있던 어느 선술집에 기기를 설치하고 운영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선술집 사장이 "기기가 고장났다"고 알려와서 달려갔더니, 기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 동전이 가득 들어차 동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에 확신을 얻은 부슈넬 일당(?)은 이 게임기를 대량생산하여 팔기 시작했고, 공전절후의 히트를 쳤습니다.


[퐁]


 - 이 게임기는 동전을 넣고 플레이하는 형태였고, 그래서 비슷한 형태의 게임기(하지만 비디오게임은 아닌)를 운영하던 '아케이드(오락실)'에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퐁>의 성공에 자극받아 이후 수많은 게임기들이 나왔고, 핀볼 등 컴퓨터 없는 게임기들이 있던 아케이드는 머지않아 비디오게임 일색으로 변신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퐁>을 가정용 게임기로도 출시하여 역시 대히트를 쳤습니다.


 - 그런데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와 부슈넬에게 느닷없이 태클이 날아왔으니, 마그나복스와 베어가 특허 위반으로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 <퐁>과 비슷한 탁구(?) 게임이 있었고, 나중에 출시된 <퐁>이 자기들 게임을 베꼈다는 거죠. 이 소송전은 결국 아타리가 이들에게 돈을 주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특허 관련 소송으로 오디세이 게임기 판매 수익보다 더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ㅡㅡ;



3. 1970년대 후반 : 게임 '산업'이 열리다


 - 오디세이와 <퐁>은 그 때까지 축적된 가능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아타리 뿐만 아니라 미드웨이, 콜레코, 마텔 등 많은 기업들이 비디오게임에 돈을 투자하고, 들어오는 돈과 인력에 비례하여 게임 분야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1976년에는 페어차일드 사에서 '채널 F'라는 가정용 게임기를 출시하였는데, 최초로 '프로그램'이 내장된 카트리지(흔히 말하는 게임팩)를 쓰는 게임기였습니다.


 - 한편 1977년에는 아타리에서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VCS), 통칭 '아타리 2600(이하 2600)'을 출시하였습니다(2600이란 당시 컴퓨터 해커 사이에서 상징성 있는 숫자인데, 아마 여기서 따온 명칭으로 추정). 8비트급 CPU에 128바이트 RAM을 장착한 위엄 넘치는 물건이었던 2600은 처음에는 흥행이 시원찮았지만, 이후 급성장하여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릅니다.


[(左)아타리 2600, (右)2600용 게임 <핏폴> 플레이 화면]


 - 이렇게 게임들이 잇따라 흥행하고 대자본이 몰려들면서, 비디오게임은 단숨에 거액을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더 많은 자본과 더 많은 인력을 끌어모았고, 시장은 끝없이 커져갔습니다(다만 이것은 거품이었다는 것이 몇 년 후에 밝혀집니다). 1977년에 출시되어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개막한 애플 II 또한 게임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PC에서도 게임을 만들고, 플레이할 수 있었으니까요.


 - 미국에서의 열기는 다른 지역으로도 번졌고, 특히 당시 전자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일본에서는 타이토, 닌텐도, 남코 등 많은 기업이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1978년에는 타이토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출시하면서, 일본은 미국에 버금가는 게임 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일본 내에서 이 게임의 인기는 엄청나서 일본 내에 동전 품귀현상이 발생하고, 동전 수거를 크레인 달린 트럭으로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ㅡㅡ;


 - 이렇게 시장이 급성장하는데, 정작 시장의 선두주자인 아타리는 그에 걸맞는 투자를 받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고민 끝에 부슈넬은 자본이 충분한 대기업의 밑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1976년 회사를 워너브라더스에 28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그 산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앙의 씨앗이 될 줄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겠지요.



4. 아타리 쇼크 : 초고대문명의 멸망


 - 문제는 워너와 아타리의 분위기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아타리는 설립자인 부슈넬부터가 히피 출신이었고, 히피 아니면 오타쿠(?)가 모인 기업이다보니 회사 내에서 대마초를 피우면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심히 화기애매(?)한 가축적(?)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ㅡㅡ; (당시 아타리의 직원 중에는 히피짓을 하던 때의 스티브 잡스도 있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를 새 주인이 된 워너가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 결국 2600의 초기 판매부진을 빌미로, 워너는 1978년 부슈넬을 해고하고 레이 카사르(1928-)를 새로운 CEO로 앉혔습니다. 이 양반은 나름 베테랑 경영인이라 회사의 급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2600 버전으로 출시하는 등의 노력으로, 초기 판매가 부진하던 2600을 시장의 1인자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카사르는 게임 개발자들의 성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회사의 영광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새기지 못하게 하는 방침에 불만을 품고, 아타리의 한 개발자는 1979년 말 출시된 <어드벤처>라는 게임에 '특정 방식으로 플레이하면' 자기 이름이 나오도록 몰래 만들어 넣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스터 에그'의 시초]


 - 아타리의 분위기는 기껏 개발한 게임이 대히트를 쳐도 보너스는 커녕 크레딧에 개발자 이름 넣는 것 하나 허용되지 않을 만큼 경직되어 버렸고, 이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익숙한 개발자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항의하러 찾아간 개발자들에게 카사르가 '타월 디자이너' 운운하며 엿을 날렸다는 일화는 유명).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개발자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나갔고, 이들은 대부분 액티비전과 일렉트로닉 아츠(EA)에 모여 '서드파티'라는 개념의 게임회사를 만들었습니다(설명은 후술).


 - 유능한 개발자들이 사라진 아타리는 저질 게임을 양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들 뿐만 아니라, 1980년을 전후하여 나온 게임들은 몇몇 명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양에 비해 질이 크게 떨어졌고, 심지어는 그 조악한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19금 포르노 게임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기까지 했습니다(2600용으로 나온 포르노 게임을 '아타리 포르노'라 부르기도 합니다). 시장은 초 호황이었지만, 밑둥부터 썩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 거기에 1980년 전후 벌어진 2차 오일쇼크로 경제불황이 찾아오자 그동안 잔뜩 끼어 있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게임계의 최전성기라던 1982년, 아타리는 4분기 실적 예측을 이전보다 낮춰 잡았고 이는 곧바로 워너를 비롯한 게임회사들의 주가 폭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화된 시장의 축소에 위기의식을 느낀 아타리와 워너는 부랴부랴 스티븐 스필버그와 계약, 당시 최고의 영화 <E.T.>를 게임으로 만들어 출시하는데......


[AVGN의 <E.T.> 리뷰. AVGN 영상의 특성상 온갖 욕설이 난무하니 주의]


 - 이런 걸 게임이라고 내놨습니다. ㅡㅡ; 애초에 개발자들에게 주어진 개발 시간은 단 5주. 좋은 게임이 나올리가. ㅡㅡ;; 오죽하면 그 카사르마저도 "이건 무리"라고 반대했다지만, 워너 경영진은 달랑 저 시간을 주고서는 개발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날림으로 나온 게임의 운명이란 뻔했습니다. FXck!! 재고가 엄청나게 남았고, 아타리는 남은 카트리지를 모두 애리조나의 사막 한가운데 묻어버리는 위엄 넘치는 짓을 하였습니다. ㅡㅡ;;;


 - 결국 거품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던 게임 시장은 이 한 방을 맞고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판매량에서는 선전했지만, 이는 가격을 거의 1/10까지 떨어뜨리는 무시무시한 덤핑의 결과물로 회사들이 거두는 수익은 크게 줄었습니다. 결국 이를 버티다 못한 대기업들은 잇따라 게임 시장에서 철수해버렸고, 거기에 빌붙어 게임을 만들던 중소 개발사들은 대부분 파산, 액티비전과 EA 등 PC 게임으로 갈아탄 극소수 회사만 살아남았습니다.


[미국 비디오게임 시장 규모를 나타낸 그래프. 출처]


 - 그리고 아타리는 1982년 말 2600의 후속작으로 아타리 5200을 출시하지만 폭망했고(컨트롤러의 감도가 개판이었다고 합니다), 적자가 계속되자 결국 워너마저 아타리를 매각하고 게임 시장에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비디오게임 시장 자체가 붕괴했고, 특히 가정용 게임 시장은 1985년 무렵에는 전성기(그래봤자 1982년)의 2%까지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비디오게임 산업은 한때의 광풍으로 끝났습니다. 아니, 끝난 줄 알았습니다. (계속)



###게임회사 분류에 관한 보충설명###

 1) 퍼스트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직접 만든 게임. 당연히 게임기 제조사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ex. 슈퍼마리오 시리즈)

 2) 세컨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가 자회사나 다른 게임 개발사에 하청을 주어 만든 게임. 시장에 나올 때는 게임기 제조사의 이름으로 출시됩니다. 말 그대로 하청.

 3) 서드 파티 : 게임기 제조사와 무관한 게임 개발사가 그 게임기에서 돌아가도록 자체적으로 만든 게임. 게임 개발사의 이름을 붙여 출시됩니다. 다만 게임기 제조사에서 '이 게임기용으로 게임을 출시해도 좋다'는 라이센스를 게임 개발사에 걸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 43. "기본교양 콘솔사의 잉해"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503754 (놀런 부슈넬과 아타리의 일대기)

http://thisisgame.com/webzine/series/nboard/212/?series=113&n=57382 (마그나복스 오디세이)

http://vgsales.wikia.com/wiki/Video_game_industry (게임 시장 관련 데이터)

Google 도서 검색 (1) (2)



0. 서문

 - 게임의 역사를 논하기에 앞서, '게임'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게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출처 : 한컴사전]


 - 즉 엄밀히 말하면, 게임은 '누군가와 승패를 겨루거나' '혼자 혹은 여럿이 즐기며' '일정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통칭합니다. 어릴 적 즐기던 팽이치기나 땅따먹기도 게임이요, 혼자서 즐기지만 일정한 규칙이 있는 낱말맞추기 퍼즐이나 직소, 네모로직같은 것도 게임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게임이란 단어는 그러한 넓은 의미보다 소위 '비디오게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화면 등을 통하여 출력되는 정보를 보면서, 프로그램에 설정된 규칙에 따라 플레이를 진행하는 그러한 형태의 게임 말입니다. 최초의 컴퓨터가 발명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꾼 컴퓨터는 인류의 놀이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비디오게임의 역사는 컴퓨터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합니다. 지극히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필요에 따라 발명된 컴퓨터가, 그 자체로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용도로 쓰인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유희'라는 것 자체가, 자원을 쓸데없이 낭비함으로써 정서적 만족과 쾌락을 얻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게 무의미하다는 건 절대 아니지요. 이러한 행위는 인간에게 상상력을 더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훨씬 더 생산적인 자연의 입장에서는 파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게임을 현실로 구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버티드 헤어핀(와일드 마우스) 롤러코스터'는 본래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게임이 흥행한 이후 실제로 건설되어 중국에 실물이 존재.]


 - 이제 우리는 인류 유희의 역사에 전례없는 대격변을 불러일으킨 비디오게임의 발자취를 짚어나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비디오게임이 인류의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고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큰 의미 없는) 최초의 게임들 

 - 최초의 컴퓨터는 '컴퓨터'의 정의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콜로서스(1943)와 에니악(1946)을 들고 있습니다(콜로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군용으로 쓰였기 때문에 공개가 늦었고, 오랫동안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군용(미사일의 탄도 계산이라든지), 나아가서는 과학과 수학 계산용으로 쓰였습니다. 


 - 사용 목적이 그러했고, 크기 자체도 워낙 거대했다보니(에니악의 경우 전원을 올리면 주변 동네들의 가로등이 깜빡거릴 정도로 전력 소모가 심했다고) 컴퓨터는 정부기관이나 국책 연구기관 등에 극소수만 존재했고, 당연히 이를 접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적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이것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아가서는 이를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목적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최초의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이 출현하게 됩니다.


[OXO]


 - '최초의 게임'이 무엇인가를 논할 때 다양한 게임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음극관 놀이장치(1947)나 튜로챔프(1948, 체스 시뮬레이션) 등이 언급되지만 이들은 실제 프로그램으로 완성된 건 아닙니다. 실제로 완성되어 실행된 게임으로는 '틱택토'를 구현한 <OXO>(1950)과 '님'을 구현한 <님로드>(1952)를 최초로 꼽는데, 이들은 모두 기존의 보드게임을 프로그램화한 것입니다. 둘 다 연구 및 홍보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게임의 역사에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 1958년에는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의 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덤(1910-1994)이 <테니스 포 투>라는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연구나 홍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유희'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게임으로 평가됩니다. 오실로스코프(병원에서 심장 박동 표시하는 그런 장치) 화면상에서 일종의 테니스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만들어졌는데, 히긴보덤은 어디까지나 '손님들이 가지고 놀며 즐기는' 목적으로 이를 만들었고 그 존재는 한참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테니스 포 투> 플레이 화면]


 - 지금까지 언급한 최초의 게임들은, '최초'라는 것 이외에 역사에 중요하게 언급될 요소가 딱히 없습니다. 이들은 당시 컴퓨터를 접할 수 있는 극소수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거나 내부적으로만 활용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그래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후의 게임들에게도 별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니, 그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면 크게 의미있는 존재라고 보기 어렵겠지요.


 -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의 시작점, 진정한 의미의 '최초'는 과연 무엇일까요? 조금 더 지나서, 1962년으로 가 보겠습니다.




2. 진정한 최초 : <Spacewar!>


 - 1948년 발명된 트랜지스터는 극초기 진공관 컴퓨터보다 훨씬 작은(그래봐야 방 하나에 꽉 차는 수준이었지만)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고, 반대로 성능은 크게 향상되어 좀 더 다양한 용도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1950년대 말부터는 이보다 더 작은(물론 그래봐야 장롱짝 크기는 되는) 컴퓨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1959년 출시된 PDP(프로그램 데이터 프로세서)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PDP-1]


 - 최초 모델인 PDP-1은 입력을 키보드로 하는 최초(!!)의 컴퓨터였고(이전의 컴퓨터는 천공카드와 종이테이프를 사용), 이것이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들어온 것은 1961년이었습니다. 당시 MIT의 학생들은 이 컴퓨터를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했는데, 그 학생들 중에 스티브 러셀(1937-)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 러셀은 '화면에 그래픽을 띄우고, 이를 보면서 컴퓨터를 가지고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주변 학우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1890-1965)의 우주 SF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우주선끼리 서로 쏘아 맞추는 형태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러셀은 매우 게으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ㅡㅡ; 주변 친구들이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의욕을 북돋워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 그렇게 완성된 게임은, 처음에는 그저 우주선 두 대가 미사일(로 간주되는 점)을 발사하여 서로를 맞추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러셀 일당(?)이 이 게임을 완성하고, 사람들(시대가 시대였으니, 그들 모두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게임에 여러 요소가 추가되기 시작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이 "이런 게 있으면 더 재미있겠는데?"라며 직접 프로그램을 수정했던 것.


[<스페이스워!> 플레이]


 - 누군가는 우주공간을 연상케 하는 배경을 추가하여, 게임에 사실성을 더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화면 가운데 별을 놓아서, 거기에 가까이 가면 중력의 영향을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위기를 피하기 위해 우주선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동 위치가 랜덤이라 때로는 별 바로 옆으로 이동하여 별에 부딪혀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 게임은 1960~70년대 컴퓨터의 확산과 함께 미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10년을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살이 붙게 됩니다(개중에는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버전, 동전을 넣고 플레이할 수 있는 버전도 있었습니다!). 이 게임의 이름은 <스페이스워!>. 그저 재미로, 아무 경제적 대가 없이 만들어졌으며 프로그램 코드 역시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오픈소스' 게임이라는 타이틀도 추가로 붙습니다.


 - <스페이스워>는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용도로 쓸 수 있음을 모두에게 알렸고, 이에 컴퓨터 좀 다룬다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발전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의 게임을 연구하고 개발하고자 잉여력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유타대학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놀런 부슈넬(1943-)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계속)




참고 :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딴지라디오)> 中 42. "기본교양 게임사의 잉해"



[노년의 하이든]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말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를 넘어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대작곡가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1809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질 법도 했지만,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도중으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신나게 털리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ㅡㅡ; 큰 행사를 벌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 거기에 하이든 본인의 유언도 있고 하여, 시신은 간단한 장례 이후 비엔나 구역 내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치됩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 1820년, 하이든의 옛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하이든의 시신을 이장하여 자신들의 가문 묘지에 안치하기로 결정하고 무덤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은, 머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하이든의 반쪽짜리 시체였습니다.



1. 누구의 짓인가?


 - 당연하게도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시 가문의 수장 니콜라우스 2세(1765-1833)는 범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이전부터 나돌던 소문을 바탕으로 요제프 칼 로젠바움(1770-1829)과 요한 네포무크 페터(?-?)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로젠바움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비서였고, 하이든이 결혼을 주선한 적이 있을 만큼 그와 친분이 있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 당연히 니콜라우스는 로젠바움과 페터의 집을 수색하여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아나섰지만, 로젠바움의 부인 테레제 가스만(하이든에게 소개받은 그 사람)이 두개골이 숨겨진 매트리스를 깔고 앉아 버티는 바람에 찾아내는 데 실패합니다. 이후에도 니콜라우스는 로젠바움을 계속 추궁하고, 결국 사실을 실토한 로젠바움은 두개골을 니콜라우스에게 전달하는데 이게 또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ㅡㅡ;


 - 1829년 로젠바움이 사망하면서부터 하이든의 머리는 기나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단 범행 동료인 페터에게 머리가 전달되었고, 이후에는 그의 주치의 칼 헬러, 그 다음에는 의사 겸 병리학자인 칼 폰 로키탄스키(1804-1878)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사방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1895년에는 비엔나 악우(樂友)협회가 하이든의 머리를 기증받고, 협회 내에 전시하기에 이릅니다.



2. 왜 그런 짓을?


 -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선 골상학(骨相學, Phrenology)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는 근대 의학의 태동기에 유행한 분야로, 현재는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뇌 각 부분의 지능이나 정신작용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연구자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부류가 범죄자와 천재의 두뇌였습니다.


 [골상학은 현재는 유사과학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 하필 로젠바움과 페터는 이 골상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에게 음악천재 하이든의 두뇌는 최고의 연구재료였던 것입니다. 하이든이 매장되고 며칠 후 두 사람은 묘지 관리인들을 매수한 후, 하이든의 머리를 도굴하여 빼돌렸던 것입니다. 페터는 실제로 하이든의 뇌를 연구해본 후 "음악과 관련된 부위가 매우 발달해 있었다"고 말했다는데, 과학적 신빙성은 저 너머에.


 -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는, 천재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으면 자신과 자손들이 천재가 된다는 이상한 미신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예술가들은 사후 머리를 도난당하기 일쑤여서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베토벤 역시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친구들이 밤새 묘지를 지킬 정도였고, 매장지가 알려지지 않은 모차르트의 경우 매장에 참여한 인부에게 도굴을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3. 머리를 되찾기까지


 -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받은 가짜(?) 머리가 진짜인 줄 알았고, 그 사이 하이든의 진짜 머리는 비엔나 악우협회에서 방문객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새로운 당주 파울(1901-1989)은 머리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었고 하이든의 머리를 되찾아 온전한 유해를 안치할 계획을 세웁니다.


 - 이러한 계획에 따라, 하이든 탄생 200주년인 1932년에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젠슈타트의 교회에 하이든을 위한 영묘를 만들고 비엔나 악우협회에 머리의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악우협회의 비협조 속에 사태는 법정싸움으로 번졌고, 이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분쟁은 한참 동안이나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 결국 1954년에야 모든 소송이 마무리되고, 하이든의 머리는 죽은지 145년만에야 자신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하이든의 시신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대한 추모행사와 함께 영묘에 안치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간 하이든의 몸과 함께한 가짜 머리 또한 함께 안치되어, 현재 하이든의 시신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군요.



 [하이든이 안치된 영묘]


참고자료 :

영문 위키피디아 "Haydn's head"

정준극씨 블로그 "하이든 머리 수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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