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베트남 전쟁 : 끝없는 수렁에 빠지다


 - 베트남 개입 확대에 반대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얼떨결에 대통령에 취임한 린든 존슨(민주당)은 베트남전 확전을 결정하고, 1964년 통킹 만 사건(하노이 앞바다의 통킹 만에서 미국 함선이 공격당한 사건으로, 현재는 이 사건 자체가 조작 혹은 왜곡일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공군기지 방어를 위해 상륙한 미국 해병대]


 - 미국은 처음에는 남베트남군까지 포함한 압도적 전력차이를 가지고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고,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지는 등 처음에는 미국의 계획대로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특히 전쟁을 끝없는 수렁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남베트남 내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이었습니다.


 - 베트콩은 무성한 정글과 여기저기 파놓은 땅굴 등, 지리적 이점을 총동원하여 미군(과 기타 동맹군)을 괴롭혔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북베트남에서 인적, 물적 지원도 받고 있었던지라 이들을 상대하는 미군과 남베트남군, 동맹군(이하 '미군'으로 통칭)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미군은 고엽제를 대량 살포하여 정글을 초토화하고, 농촌 마을을 폭하는 등 무리수까지 두었지만 전황은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유명한 사진 <소녀의 절규>. 사진 가운데의 판티킴푹(1963-)의 마을은 미국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불탔으며, 판티킴푹은 이후 여러 차례의 대수술로 생존한 후 현재는 


 -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습니다. 애초에 미국과 남베트남은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2년 후 총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명분에 있어서 북베트남에 크게 밀리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미국이 극도의 부정부패에 시달리던 남베트남 정부를 도와 전쟁에 개입하고, 남베트남 민중과도 적대하게 되면서 베트남의 민심은 갈수록 베트콩과 북베트남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


 - 부족한 명분은 미군의 전쟁 수행에 큰 제약을 가했습니다. 일단 육군은 소수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고(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글에 만든 '호치민 루트' 또한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정치공작을 통하여 호치민 루트를 묵인하는 캄보디아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정작 혼란을 틈타 공산주의 반군(크메르 루주)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이 더 꼬여버렸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1975년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한 후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 이 때 남베트남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쿠데타가 횡행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고, 대규모 징병을 통해 겉으로는 100만 대군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썩어 있었습니다.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을 남베트남의 장교들은 뒤에서 몰래 팔아먹었고, 나중에는 이러한 무기를 베트콩이 사들였기 때문에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이 사이좋게(?) 미국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ㅡㅡ;




8. 미국의 GG선언, 모래성처럼 무너진 남베트남


 - 더 무너질 것조차 없던 남베트남군은 그렇다 치고, 명분 없는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 역시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탈영이나 군무이탈 같은 문제는 일도 아니었고, 곳곳에서 병사가 상관을 공격(하극상)하는 사건이 빈발하였습니다. 오죽하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프래깅(본 의미는 수류탄을 터뜨려 사고사로 위장한 상관 살해. 흔히 상관 살해를 통칭하는 말로 쓰임)'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


 - 그래도 미국은 대외적(특히 미국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이 곧 승리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라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선전을 무력화하고, 결국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태가 터지니 바로 1968년 초의 '테트(설날) 공세'였습니다. 본래 베트남도 나름 중국문화권이기 때문에 설날을 명절로 치르고,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설날(베트남어로 '테트') 전후에는 (남베트남군 한정으로) 암묵적 휴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테트 공세 때, 공격을 개시하는 베트콩 부대]


 -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테트 시기의 풀어진 분위기를 역이용하여, 남베트남 전역의 주요 도시에 베트콩 부대를 침투시켜 대공세를 가하기로 계획합니다. 1968년 1월 30일 새벽, 명절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 침투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남베트남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길게는 일주일 이상 치열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하지만 원래 예정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베트콩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섬멸당하고 말았습니다.


 - 이 공세를 통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이 사실상 일망타진되었으니, 전술적으로는 북베트남의 완패였습니다. 하지만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이 건재함을 세계, 특히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참혹한 전투가 TV 등을 통하여 그대로 미국인들에게 전해지면서 미국 내 반전여론이 대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베트콩 부대원이 남베트남군 장교에게 즉결처형당하는 사진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반전여론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문제의 그 사진. 왼쪽은 사이공 경찰서장 응우옌응옥루안(1930-1998), 오른쪽은 베트콩 암살부대 소대장 응우옌반럼]


 - 결국 베트남 전쟁 확전을 주도한 존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를 낙선도 아니고 불출마(첫 번째 후보 경선에서 탈탈 털리고 GG)하게 되었고, 본선에서도 '베트남 개입 중단'을 내건 리처드 닉슨(공화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닉슨은 1969년부터 베트남 파병군의 단계적 철군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후의 전쟁은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버티기'에 불과했고, 1973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 휴전을 약속하고 완전 철군하였습니다(대한민국 국군도 이 때 함께 철군).


 - 이후의 남베트남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사라지자마자 휴전 약속에 "ㅗ"를 날리고 총공세를 시작, 남베트남군은 미국에게서 무기 지원은 받았지만 탄약 등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ㅡㅡ; 지리멸렬을 거듭하였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전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자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야반도주, 이 와중에도 쿠데타는 계속되었고, 최후의 순간에 다시 대통령직에 오른 즈엉반민은 북베트남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결국 남베트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사이공 대통령궁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베트남군 전차]




9. 결론 :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 남베트남의 패망 자체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한국 역시 분단 상태이기 때문이겠죠. 오랫동안 한국 정부에서는, 남베트남의 패망을 두고 "전국민이 일치단결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하여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남베트남처럼 패망한다"라고 프로파간다를 하였고, 이는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훌륭한(?)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블로거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 것은 남베트남 국민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남베트남 권력자들의 잘못입니까? 남베트남의 다수 민중이 베트콩 게릴라를 지지했던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너무나도 썩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국이 전쟁으로 황폐화되는 때에 권력층은 내부에서 권력투쟁에만 몰두했고, 결국 미국까지 등에 업고도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블로거는 농지개혁법이야말로 이승만 최대의 업적이라 감히 단언합니다.]


 - 남베트남의 사례는 오히려 '남한은 왜 북한에 패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좋은 반례이기도 합니다. 남한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농지개혁을 비교적 성공적(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토지를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한 것' 자체가 충분히 성공)으로 수행하였고, 새로 토지를 갖게 된 대다수 농민들은 남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북한과 싸웠던 것. 국민의 '일치단결'이 중요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열쇠는 오히려 권력 스스로가 쥐고 있는 셈입니다.


 - 블로거는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민주적이지도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도 않는,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일치단결을 핑계로 국민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것을 경청하는 민주적인 권력이야말로 건강하게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을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ravel.tourism.vn:808/main/publish/view.jsp?menuID=002001002017&type=P (베트남 독립운동)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521897627 (응오딘지엠)

http://gesomoon.com/Ver2/board/view.php?tableName=comm_discuss&bIdx=408793 (틱광둑 소신공양과 쩐레수언)

http://ppss.kr/archives/22141 (베트남 전쟁 관련)


4. 건국해놓고 보니 개판


 - 응오딘지엠이 성공적으로 권좌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남베트남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계속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정권이 바뀌었다보니, 내부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파벌(작게는 학연, 지연으로부터 크게는 왕당파도 있는 등등)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응오딘지엠은 이러한 혼란상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족과 측근세력을 정부 요직에 대거 앉혔습니다.


 - 그런데 이래놓고 보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응오딘지엠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고, 새로 등용한 친척이나 측근들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겁니다(당시 베트남의 기득권인 지주 계층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았음). 이건 그냥 봐도 문제인데, 하필 베트남이 불교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게 문제를 더 키워버렸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전국민의 90%를 넘었습니다.


[호치민(사이공) 노트르담 성당]


 - 이렇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독재와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민중이 원하던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 속에 흐지부지되었고, 이승만이 이거 하나는 정말 잘 한 겁니다...... 나름 미국의 지원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것이 대다수의 민중에게 제대로 분배될 턱이 없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남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막대한 토지와 이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도강 중인 베트콩 부대]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 내의 베트민 지지세력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을 형성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은 착취와 부정부패에 지칠 대로 지친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베트남 정부를 끊임 없이 괴롭혔습니다. 이런 썩은 국가의 군대도 제정신이 박혀있을 리 없어서, 남베트남군은 무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반정부 게릴라 하나 제대로 상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5. 틱광둑의 소신공양과 쩐레수언의 패드립


 - 이런 지옥도가 몇 년 이상 흐르면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국내 각계 각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 성향 정부 하에서 불교기(旗) 게양조차 금지당할 정도의 탄압과 차별을 당해온 불교계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정부는 수십 명의 사망자까지 내며 강경진압을 일삼았습니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장면(칼라를 첨가한 흑백사진). 잔인한 장면일 수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의 저명한 고승 틱광둑(1897-1963)이 소신공양(분신)을 감행하며 남베트남의 참상이 전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63년 6월 11일, 승려들의 침묵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틱광둑은 다른 승려들의 협조로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하였습니다. 이는 사진과 영상을 통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인은 '반공의 선봉장'이 아니라 '독재와 부패의 지옥'을 목도하였습니다.


[쩐레수언]


 - 물론 응오딘지엠 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며, 특히 응오딘지엠의 제수(동생 응오딘뉴의 아내. 통칭 '마담 뉴')이며 부정부패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쩐레수언(1924-2011)이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도 과격한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쩐레수언은,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에 남을 패드립을 시전하였습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불교 지도자들이 한 게 대체 뭐가 있나요? 그들이 한 거라곤 승려 한 명을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실제로 한 말





 - 이 발언은 남베트남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분노를 당연히 샀고, 어떻게든 응오딘지엠을 밀어주려 했던 미국은 마지막 인내심마저 접고 응오딘지엠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6. 대 쿠데타 시대가 열리다


 - 몇 달 지나지 않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군의 즈엉반민(1916-2001) 장군은 미국의 묵인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미국으로 망명시킬 계획이었지만, 정작 응오딘지엠 본인은 망명을 거부하고 대통령궁에서 동생 응오딘뉴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정작 패드립의 주인공 쩐레수언은 유유히 미국으로 도망).


 - 이것으로 남베트남의 혼란이 종식......될 리가 있나. 이때부터 남베트남은 허구헌날 벌어지는 쿠데타로 더욱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의 주역 즈엉반민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동료 응우옌칸(1927-2013)의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가,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가 그나마 좀 오래 집권했다가, 베트남 전쟁 막판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나고...... 웃기게도 이 혼란상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첫 쿠데타를 일으킨 즈엉반민이었습니다. ㅡㅡ;


[그나마 오랫동안 권력을 지킨 응우옌반티에우]


 - 이렇게 쿠데타가 빈발하던 시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는 게 이 상황의 막장성을 더합니다. 미국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시작하였고, 남베트남군에도 많은 지원을 퍼주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라고 준 거였는데, 남베트남군은 전쟁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쿠데타를 일으키기 바빴으니 제대로 전쟁 수행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ㅡㅡ;


 - 그나마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대부분 응우옌반티에우 집권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역시 별로 유능한 인물은 되지 못했고, 지속되는 부정부패와 남베트남군의 거듭된 삽질을 어떻게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전쟁 막판에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글쎄요 그들이 딱히 누굴 욕할 처지가...... (계속)



1. 배경 : 식민지 베트남과 독립운동

 - 베트남은 1857년부터 정확히 30년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후 기존 왕조(응우옌(阮) 왕조)는 '존속'은 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가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한 방에 날아간 이후, 사실상 관리 불능 상태가 된 인도차이나 반도를 낼름 집어먹은 건 다름아닌 일본 제국.

[사이공에 입성하는 일본군]


 - 일본은 처음에는 군대 주둔과 관련 시설 이용권 확보에서 시작하여 1945년 3월에는 프랑스 총독부를 완전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명목상' 황제인 응우옌푹티엔(바오다이保大, 1913-1997)을 역시 '명목상' 황제로 앉혀 베트남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 동남아시아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대규모 식량 수탈을 자행했고, 여기에 연합군 공격으로 인한 교통난까지 겹쳐 1945년 초에는 200만여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까지 발생했습니다.

 - 당연히 프랑스 식민 시기에도, 일본 식민 시기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식민제국 프랑스가 일본에게 굴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사기탱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호찌민(1890-1969) 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월맹))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본과 프랑스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확장한 베트은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무섭게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 하지만 해방도 잠시, 중국(중화민국)군과 프랑스군(프랑스군 진주 이전에는 영국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베트남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베트민, 중국, 프랑스는 1946년 초 베트남 독립 문제에 관해 합의를 보았으나, 여기에 대한 의견차이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재개되면서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됩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당연하게도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프랑스가 압도적이었는데, 여기에 대항하여 베트민은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며 농촌과 지방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민에 의해 쫓겨나 외국으로 도망친 바오다이를 다시 불러와, 남부 최대도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를 만들었습니다. 

 - 그런데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공세력의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도 사회주의 세력의 손에 떨어진 마당에, 사회주의 성향의 베트민이 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이에 사회주의권의 소련-중국은 베트민을 지원하여, 전쟁은 점차 국제전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프랑스군은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1953년 들어 베트민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진격할 태세였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거점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베트민군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디엔비엔푸는 험준한 산악지대 가운데 분지 지형이었기 때문에, 베트민군이 들어올 길이 제한되었습니다(라고 프랑스군은 생각했습니다).

[디엔비엔푸의 대략적 위치]


 - 이는 육상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데다 산악지대를 베트민군이 확보하면 프랑스군이 그대로 포위되는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주변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대포 등의 중화기를 부품 단위로 분해, 인력과 자전거 등을 이용하여 산 위까지 실어날라 다시 조립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성을 선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 산 위에서의 포격에 물자수송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하필 그 산은 정글이 우거진 곳이기까지 해서 공습으로 베트민군을 쫓아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비행장까지 점령당하자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1만 6천 명 중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습니다. 베트민군은 포로를 상당히 가혹하게 대우해서, 최종적으로 풀려난 프랑스군 포로는 3천여 명에 불과했다는군요(다만 베트민에서는 프랑스군의 베트남인 학살을 들먹이며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디엔비엔푸에 입성하는 보응우옌잡]


 - 결국 북부는 완전히 베트민의 손에 들어왔고, 프랑스군은 GG를 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954년 제네바 합의(한국전쟁 정전 문제가 논의된 그 회의)에서 프랑스군 완전 철수, 2년간 한시적 정전선 설정 이후 1956년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 등의 내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사라진 무대에,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3. 남북분단과 베트남 공화국 건립

 - 일단 2년 후 총선거가 실시되면 베트민이 정권을 잡을 것은 거의 확실했고, 이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정전선으로 결정된 북위 17도 이남에는 일단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미국의 후원 하에) 다시 들어섰고, 베트남국과 미국은 합의 내용 중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오딘지엠]


 - 다만 바오다이는 사실상 바지황제(?)였고, 미국이 밀어준 실세는 총리에 임명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1901-1963)이었습니다. 응오딘지엠은 이전에도 바오다이 정부의 각료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항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본 패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미국 등지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총리 응오딘지엠은 1년 후인 1955년, 국민투표를 주도하여 바오다이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 자세히 보면 뭔가 냄새가 나지요? 실제로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적극 밀어주었고, 그의 '선거 쿠데타'와 대통령 취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바오다이 정부가 자신들의 목적(동남아시아 공산화 저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우익 성향 인사이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커리어를 많이 쌓은(항일운동 등) 응오딘지엠에게 권좌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응오딘지엠]


 - 여기까지는 미국의 의도대로, 나름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공화국 또한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였고(아무리 그래도 총선거를 하면 남쪽이 이기기 어려우므로), 베트남의 남북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남베트남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였고 다른 하나는 응오딘지엠의 '종교'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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