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조선'이라는 말이 중요한 화두가 될 정도로 요즘 한국인들에게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아예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뭘 해도 안될 열등종족'으로 비하하며 소위 '선진적'인 다른 사회를 찬양하는 극단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요즘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한국인은 답이 없다'로 일관한 신념형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중양. 1900년경]



1. 근성으로 출세한 가난뱅이


 - 박중양의 출신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아버지 박정호는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지주 집 마름 노릇으로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출신이 이렇다 보니 그의 초년은 분명히 알려진 게 별로 없는데, 일단 출생년도가 1872년인지 1874년인지 분명치 않고, 심지어 그가 반남 박씨인지 밀양 박씨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ㅡㅡ; 초명은 박원근이었고, '중양'은 성인이 된 후 개명한 것입니다.


 - 초년의 박중양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출세욕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처음 실시된 일본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지만 여러 차례 낙방하였습니다. 그는 급진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을 존경하였는데,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일파가 죽거나 망명하고 결국 김옥균이 암살까지 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씨 조난사건>.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유학생 선발에 계속 도전하면서, 박중양은 서울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타진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드디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약 7년간 일본에 국비장학생으로 유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비유학생인데도 생활비는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는지, 유학기간 내내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는군요.


 - 박중양은 우선 기독교 목사인 혼다 요이츠(1848-1912)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그가 운영하던 아오야마학원(現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중학부로 진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토는 그에게 경찰, 행정 쪽으로 집중해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


 - 그렇게 그저 가난한 유학생1에 불과했던 박중양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내가 바다에 빠져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하필 거기 있던 박중양이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그를 구했던 것. 자기 아내를 살려주고 그에 대한 사례와 선물도 일절 사양한 박중양의 태도에 이토는 꺼뻑 죽었다고 합니다. ㅡㅡ; 이후 박중양은 이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박중양 또한 (의외로) 한국인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이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2. '한국인은 답이 없다'


 - 그런데 이 시기 고종 황제와 대립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와 관련하여, 박중양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혹시 박영효의 일파가 아닌가' 의심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학비와 자객을 동시에 선사하는 고국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점차 키워가게 됩니다.


 - 일본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이토의 조언을 따라) 경찰과 행정 업무 쪽이었습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박중양은 도쿄 부기학교에서 금융 업무를 전공하였고, 동시에 도쿄 경시청(경찰청)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분야를 깊이 공부하게 됩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매우 성실해서 다른 유학생들이 흔히 빠지는 유흥과 잡기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성을 쓰며 일본의 엘리트 계층과 활발한 교유를 했다고 합니다.


 - 1903년 귀국하여 곧바로 관리서(管理署) 주사(主事)로 임용되었지만, 개혁세력을 적극 등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상소가 황제에게 올라가지도 못하는 일을 겪은 후 바로 관직을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다음 해 러일전쟁이 터지자, 박중양은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취직(?)하여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활동하였습니다. 유학시절과 일본군 종군시절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친절함에 매료되었고 ㅡㅡ; 이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 1904년 11월 농상공부 주사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상소가  외면당하자 자청하여 대구로 내려가 한국인 관료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박중양은 상대적으로 일본 편을 들거나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였고, 일본인들의 신뢰와 호의를 얻게 됩니다. 1905년 2월에는 잠시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에 임명되는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유명한 촉석루를 제외한)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는 위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ㅡㅡ; 지방관으로 가서 반달리즘이라니


[진주성은 해방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됩니다]


 - 이후 6월에는 의친왕 이강을 대표로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난 박중양은 "한국은 도저히 답이 없으니, 미국 유학이나 하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토는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관직에 있을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수행원 임무가 끝난 이후 도쿄에 남아 다시 유학하고, 다음 해 귀국하였습니다.


 - 귀국한 박중양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임용되었고, 이후 그는 이토와 통감부를 뒷배경으로 쾌속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06년 7월 대구 판관으로 파견된 박중양은 그 길로 대구군수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하자마자 대구군청 신축부터 강행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대구군수 재임기에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위업을 세웠습니다. ㅡㅡ; 성곽 해체 전문가


[당시 대구 동쪽 성벽을 허문 자리에 개설한 도로가 그 유명한 대구 동성로]


 -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생각은 있었는지, 을사조약과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후 평안남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북도 관찰사(도지사)를 역임하였으며 한일병합 직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한일병합 당시에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국민이 충성할 의무는 없다"며, 슬퍼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라



3. 일제강점기의 활약(?)상


[박중양의 친필 휘호]


 - 병합 이후로도 박중양은 지방과 중앙을 오가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1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두 번에 걸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1940년대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충청남도, 황해도(2회), 충청북도 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 관료로서 활동도 두드러집니다.


 - 3·1운동 때는 자제단(시위 중단을 설득, 종용하며 적극 참여자를 신고하는 일을 하였던 친일 성향 단체)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경성(서울)과 대구 지역 자제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박중양 개인은 한국인 노점상을 괴롭히던 일본인을 아끼던 지팡이로 두들겨 팬다든지, 일본인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딱히 한국인으로서라기보단 '조선인도 똑같이 일본 신민이 되었는데 왜 사람 차별하는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1923~25년 사이 충북도지사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이런저런 스캔들을 일으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4년 속리산을 유람하던 중 비 내리는 진흙탕 길(現 말티재)에서 진종일 고생한 박중양은, 빡친 나머지 보은군수에게 대대적인 신작로 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공사 과정에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을 해야 했고, 심지어 농번기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토목기사와 순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소요사태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박중양이 지시한 도로공사와 농민 소요 기사.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


 - 그해 말에는 더 큰 스캔들을 일으켰으니, 속리산의 산사(山寺)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귀빈을 대동하고 술자리를 가진 후 취중에 여승 한 명과 성관계를 하고, 그 여승이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권력자의 성추문'이라는 특성상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다가, 다음해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등의 폭로로 세간에 알려졌고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박중양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이런 대형 스캔들을 연달아 일으키고도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유용한 인물이었으니, 이후로도 박중양은 중추원과 지방행정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박중양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엔 좋은 취지같지만 일본 중의원에 조선인 쿼터를 허용해달라는 등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같은 시기 유행한 자치론과도 통합니다).


 - 당연하게도, 193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로 참여하였고, 1945년 초에는 조선인 몫으로 할당된 일본 귀족원 의원 7명(박중양, 윤치호 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1942년에도 선임되었으나 본인이 거부). 당시 일본은 중의원(하원) 임기가 만료되면 다음 선거에서 조선인 몫으로 23명을 선출하도록 할 생각이었다는군요. 소원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4. 해방 이후 : 나는 떳떳하다. 너희들이 노답일 뿐


 -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후 박중양은 윤치호 등과 함께 감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는데, 그 직후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일본도 머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 직전인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피고용인들을 약간의 퇴직금과 함께 내보내고, 해방 직후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습니다. 그는 이 재산을 경성 근처의 양로원과 보육원에 무기명 기부한 후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 당연히 그는 친일 반민족분자의 수괴로 지목되어 가는 곳마다 욕설과 드잡이, 심하면 투석(投石)까지 당하곤 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민족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에 더하여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가 훨씬 살기 좋았으며, 일본은 한국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가 여기에 또한 독립은 미국의 은총으로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운동가라고 어깨에 힘 주는 사람들은 전부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1945년 말 박중양은 미군정 간부들과 이승만 등을 만나,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데 친일행위자를 왜 처벌하려 드는가? 난 어차피 위선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 처단하려거든 나를 처단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한국인이 과연 독립할 자격이나 있는 놈들인지 모르겠다고 조롱한 적도 있다는군요. ㅡㅡ;


[반민특위에 출두하는 박중양]


 - 당연히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수감되었는데 당시 그를 조사한 수사관은 "다른 기회주의 친일파와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만 한국인이지 생각과 행동은 그냥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재판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조롱을 굽히지 않았고, 애국지사연하며 부정하게 산 놈들보다 자신은 훨씬 떳떳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평생 관료로 살면서도 부정축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된 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부모의 묘소를 대구 오봉산(現 침산공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도 그곳에 은거하며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1957년 신년에는 이승만더러 "미군 없으면 도망이나 칠 놈"이라며 조롱하는 등 개X끼 vs. X발놈 당시의 정부통령을 싸잡아 욕하다가 명예훼손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고, 정부는 주둥이를 멈추지 않는 박중양을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그는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정신병원 수감을 거부하였습니다. ㅡㅡ;



5. 정리 : '국개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 실로 뭐라 판단하기 어려운 박중양의 일생을 훑어보았습니다. 박중양은 자기 민족이 쓰레기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앞서 살펴본 기회주의자들과는 다른 '확신범'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 영민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친일과는 엄연히 다르면서도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얼핏 보면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윤치호와 비교해도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윤치호의 사상이 '한국인은 현상태로는 답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라도 근대로 발전해보자'였다면, 박중양의 그것은 '한국인은 뭘 해도 답이 없으니 그냥 일본인이 되어버리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윤치호와 다르게, 박중양의 행적은 (심지어 그게 한국인에게 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철저히 '일본인으로서의 한국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 여기까지 보고 나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살짝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국 사회의 침체와 혼란이 장기화되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은 더 이상 답이 없다" "한국인은 썩어빠진 놈들" "한남충을 재기하자" "노무현 운X하盧?" 등등 극단적인 담론이 창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거,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0년 전 박중양이 내린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박중양이 결국 어떤 인생을 살았나 생각하면,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라면, 박중양도 윤치호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건설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의 의지를 꺾은 것은 자신의 이상과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망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피와 땀을 흘리며,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절망은 '너무 성급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박중양과 윤치호가 뭐라 생각했든, 한국이 강대국에 의해 독립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한국인은 노답"이라며 욕설과 한탄을 멈추지 않는 분들께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이 말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두 해 노력한다고 역사는 전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든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역사는 결국 전진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1014289 ('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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