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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