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gorio Allegri (1582-1652)

<Miserere mei, Deus>



[알레그리]


 알레그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전환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력을 로마에서 활동하며 주로 가톨릭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동생 도메니코 알레그리(1585-1629) 역시 음악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9살 때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 경력을 시작하였고, 1600년부터 1607년까지는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나니노(1560-1623)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페르모의 성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부터 작곡가로 다수의 모테트와 성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로마 밖에서 음악 경력을 쌓던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주목을 받아, 1630년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의 콘트랄토로 부임하여 평생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미제레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그의 음악은 르네상스 - 바로크 사이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데, 대체로 교회음악은 이전 시대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기악음악 쪽에서는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진보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의 구절에서 유래한 성가로, 각각 5성부, 4성부로 된 두 합창단이 함께 부르는(그러니까 총 9성부) 노래입니다. 1638년경 부활주간의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후 시스티나 성당의 '테네브레(부활주간에 시행하는 일종의 촛불 예배)'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음이 하이 C음까지 올라가는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이면서 신비로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에서는 이 작품을 교황청 내에서만 전수하며, 다른 곳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악보를 반출하는 등의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저작권 지키는 방법이 무지막지하기도 하지 그래서 이 작품은 그 작품성에 비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는데, 1770년 로마를 방문한 모차르트가 예배에서 이 곡을 단 두 번 듣고 모두 암기하여 악보로 재현해 냈다는 것으로 후세의 우리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됩니다. 다만 이전에도 다른 필사본 자체는 바깥으로 나돌아다녔다고 하며, 나중에는 교황청의 금지령도 해제되어 정식 출판도 되었다는군요.




참고 : 

영문 위키백과,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나무위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한겨레)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소름' 돋는 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경향신문)




김순남 (1917-1983?)

<산유화>



 - 이번에는 한국인 작곡가를 다루어 보겠습니다(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인 작곡가들을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순남은 다수의 가곡과 한국 최초의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를 쓴 대작곡가이지만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 북한을 선택하고, 북한에서도 정치적 숙청과 복권을 거듭하며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린 비운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 김순남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낙원상가?? 어릴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며, 1932년 경성사범학교(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 연주나 취주악단 지휘 등 음악적 활동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졸업 후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음 해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부에 입학하였습니다.


 - 도쿄에서 김순남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하라 타로(1904-1988)가 있는데,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음악가로 김순남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재학 중 그는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의 창작 발표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품하였는데, 당시 출품작인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작법을 사용하여 보수적인 일본 음악계에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 1942년 귀국 후 김순남은 '조선음악협회'에 음악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관제 단체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좌익 성향의 비밀 조직인 '성연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니, 그가 딱히 친일부역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방 전까지 그는 버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첨단을 달리는 작곡가들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꽤 전위적인 곡을 썼습니다.


 -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작품도 사회 참여적인 색채를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소위 '해방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인기를 끌었고, '조선음악건설본부'에 가입하였지만 이 단체가 좌익-우익 및 친일-민족 대립으로 쪼개진 후에는 좌익계와 민족계가 합세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 이 시기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1번, 합창 교향곡 <태양 없는 땅> 등 본격적인 관현악곡 또한 작곡하였는데, 각각 한국 최초의 작품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보는 전하지 않습니다. 김순남은 좌익 인사였음에도 그의 재능은 미군정 쪽에서 주목할 정도였고, 문화 담당 장교인 엘리 하이모비츠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고도 했지만 본인과 미군정 양쪽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되자, 김순남은 아내와 외동딸을 놔둔 채 다른 인사들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작곡 활동도 계속 이어갔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오페라 <인민유격대>는 한반도에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김순남은 소련으로 유학하여,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을 사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전 직후인 1953년 그는 돌연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주변인들은 여러 유학생 중 그 혼자만 소환되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본인은 별 생각 없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옥죄는 고난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 그가 소환된 것은 실제로 그가 남로당 쪽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음),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그를 엮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강한 사상 비판을 당하고, 1958년에는 창작에 관한 권한을 모두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의 주물공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64년이 되어서야 다시 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창작 권리를 회복한 김순남은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뒤 폐결핵이 발병하면서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그는 북한 사회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결국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1983년 경 신포에서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는 남한에서는 소위 빨갱이였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커녕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1980년대 말 좌익 음악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남한에 남은 외동딸 김세원(1945-, 성우로 활동)씨가 자료를 수집하여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김희조(1920-2001), 백남준 등의 거장들도 김순남에게서 음악을 배우거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 하지만 교향곡과 협주곡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면이 있어서 김순남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나마 현재 알려진 것들은 주로 가곡과 해방가요들이며, 그 중에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산유화>의 경우 조수미 등의 유명 성악가들이 녹음한 바 있어 일반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유명합니다.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Stabat Mater>



 -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바이올린 및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바로크-고전파 전환기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명곡들을 남겼지만, 아주 젊은 나이(26세!)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드라기'인데, 조상의 출신지인 페르골라에서 따와서 '페르골레시'로 불린 게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 페르골레시는 중부 이탈리아의 제시(안코나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가난했고 한쪽 다리를 저는 등 건강도 좋지 않았다는데,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지역 영주의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25년 그는 나폴리로 유학하여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치스코 페오(1691-1761)를 사사하였습니다.


 - 1731년 음악원을 졸업한 페르골레시는 작곡가로 활동하여 일찍부터 많은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나폴리 귀족 악단에 들어가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은 1733년 발표한 단막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였는데, 본래 다른 오페라의 일부였던 이 작품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기틀을 잡은 명작으로 평가됩니다.


 - 오페라의 성공을 바탕으로 1734년에는 나폴리 예배당에 악장 대리로 취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폐결핵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고, 이듬해부터 병이 크게 악화되어 의사의 권유에 따라 1736년 2월 타지로 요양을 떠났지만 차도가 없이 한 달 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해에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 <스타바트 마테르>(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애가(哀歌))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웅장함보다는 섬세함, 그리고 풍부한 멜로디와 화성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는 죽은 지도 20여 년이나 지난 후 난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으니, 대표작 <마님이 된 하녀>가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을 때 장 자크 루소(1712-1778)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 - 이탈리아 오페라를 놓고 벌어진 소위 '부퐁 논쟁'이 그것입니다.




Hanns Eisler (1898-1962)

<Deutsche Sinfonie> Op.50



 - 한스 아이슬러는 독일의 작곡가로, 독일민주공화국(동독) 국가인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아이슬러는 1898년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 루돌프 아이슬러(1873-1926)는 칸트 철학을 전공한 명망 있는 지식인이었지만 가족의 생계는 그닥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찍이 급진적 사회운동에 뛰어든 형과 누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도 자연스럽게 급진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종전 직후인 1919년 아이슬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는데, 아이슬러는 이 때에야 비로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4년여간 쇤베르크에게 작곡을 사사한 아이슬러는 피아노 소나타 1번으로 비엔나 예술상을 수상, 전문 작곡가의 길을 화려하게 시작하였습니다.


 - 다만 쇤베르크는 음악에 정치색을 넣는 것을 극도로 배척했기 때문에, 급진주의자이며 매우 '정치적'이었던 아이슬러는 스승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1925년 아이슬러는 베를린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어 독일로 떠났고, 그 무렵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크게 반목하게 되었고 사제관계도 사실상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 독일에서 작곡과 정치 활동을 이어가던 아이슬러는 1930년부터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과의 오랜 관계를 시작하였습니다. 본래 쿠르트 바일(1900-1950)과 함께 작업하며 <서푼짜리 오페라> 등을 작업한 브레히트는, 예술관의 차이로 바일과 결별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술적, 정치적 지향점이 비슷한 아이슬러는 최고의 파트너였고 두 사람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부를 수 있는 합창곡과 민중가요를 다수 작업하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 아이슬러는 나치의 집권 이후로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로 무장한 나치 독일에게, 공산당원인데다 유대계 혈통이기까지 한 아이슬러는 최우선 척결 대상이었던 것. 1933년 1월 안톤 베베른의 초청으로 비엔나를 방문 중이던 아이슬러는, 자신의 집이 게슈타포에게 수색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유럽 각지를 떠돌며 활동하던 그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착하였습니다.


 - 이 무렵 쇤베르크(이 양반도 유대계)는 이미 미국으로 망명해 있었는데, 같은 망명자 신세였던 사제(師弟)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에서 아이슬러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두 작품 정도가 오스카상 후보작으로 오르기도 했다는군요(수상은 하지 못했다고). 물론 사회주의자인 그에게 자본주의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미국 생활은 우울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의 작품세계도 다분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이 우울한 망명생활조차도 끝장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이 표면화하면서, 미국 내의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그 유명한 '매카시즘'). 1947년에는 '반미 행위 조사위원회' 청문회에 피고발인으로 불려나가기도 했는데, 황당하게도 고발자는 그의 친누나인 루트 피셔(1895-1961)였습니다(루트 피셔는 독일 공산당에서 정치적 논쟁 끝에 제명당했고, 이후 우파로 전향하였습니다).


 - 스트라빈스키,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이 양반은 자기부터가 매카시즘에 휘말렸는데) 등의 구명운동에도 아이슬러는 1948년 미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비엔나로 옮겨 활동하던 아이슬러는, 영혼의 단짝 브레히트의 권유를 받아들여 얼마 후 동독에 정착하였습니다. 이후 아이슬러는 동독 국가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작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 하지만 동독 정권이 스탈린주의 관료들로 들어차면서 아이슬러의 비판정신은 또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의 작품이 상연 금지되는 일도 벌어집니다. 정치적 압박이 계속되는 와중에 1956년 브레히트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은 아이슬러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결국 이를 회복하지 못하고 1962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독일 교향곡>은 망명 시기인 1935~39년에 걸쳐 작곡되었습니다. 1936년 첫 두 악장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초연하려 했지만 나치 독일의 항의로 무산되고(지휘자는 가사를 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작곡가 자신이 거부), 그가 동독에서 활동하던 1959년에야 초연될 수 있었습니다.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전반적으로 반(反) 파시즘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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