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시카고 컵스 우승 기념 사진]



1. 대한제국이 멸망하였다가(1910) 해방되고(1945)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1948)


2. 박정희(1917-1979), 김일성(1912-1994), 김정일(1941-2011)이 태어나고 죽음


3. 제1차(1914-1918), 제2차(1937/1939-1945) 세계대전 발발


4. 소련이 건국하였다가 해체(1917-1991)


5. 유고슬라비아가 건국하였다가 해체(1918-2006)


6.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핀란드, 아일랜드가 독립


7. 아프리카의 독립국 2개 → 54개


8. 중국 대륙의 국가가 청 → 중화민국(1912) → 중화인민공화국(1949)으로 교체


9. 미국 대통령 19명(시어도어 루스벨트 ~ 버락 오바마)


10. 일본 총리대신 58명(가쓰라 다로 ~ 아베 신조)


11.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군주제가 폐지


12. 스페인의 군주제가 폐지되었다가 부활


13.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타이 국왕이 태어나고 죽음


14. 오스만 제국 멸망(1922)


15.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채굴 시작(1938)


16. 베이브 루스가 데뷔하고 은퇴(1914-1935)


17. 뉴욕 양키스가 27회 월드시리즈 우승


18.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재입성(재키 로빈슨, 1947)


19. 미국, 여성에 투표권 부여(1920)


20. 명왕성이 발견되고(1930) 행성 목록에서 제외(2006)


21. 핼리 혜성이 2번 찾아옴(1910, 1986)


22.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발명(콜로서스, 1943)


23. 인류가 우주에 인공물을 쏘아보내고(스푸트니크 1호, 1957) 인간을 달까지 보냄(아폴로 11호, 1969)



[그리고 2016년, 그들은 108년만에 다시 우승하였습니다]



 -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이하 김성근)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쪽으로. 한화가 김성근을 선임할 때만 해도 2015년 한화의 변화할 모습에 대한 기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의외라고 할만하죠. 야알못이라 깊은 분석은 어렵고,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생각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김성근은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야구지도자 중 하나입니다. 김응룡 전 감독 정도만이 비교대상이죠. 그런 그가 2010년대 압도적 최하위팀 한화를 맡을 때, 블로거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해 한화가 어떻게든 분명 발전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첫 해에 5강에 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따져보는 수준이었죠. 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분명 전체적으로 보면 한화는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습니다(이는 그동안의 한화가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김성근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아 버렸습니다. 블로거가 보기에도 현재의 김성근은 분명 한화를 망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글은 그러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1. 김성근, 전형적인 '한국형' 리더


 - 일단 김성근이라는 캐릭터가 왜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표상으로 대접받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김성근의 스타일은 리더가 목표와 실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아랫사람'들은 거기에 절대적으로 따르면 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리더십이죠('독재자'라는 단어가 입맛이 쓰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쓴 것이지 부정적 의미로 쓴 건 아닙니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발전신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명한 지도자(독재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강제적인 통제와 더불어)지시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충실히 따르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현재도 잘 먹힌다는 건 현재의 대통령이 당선된 과정을 보면 명백하고, 그런 사회에서 김성근의 리더십은 가장 이상적인 것임에 분명합니다.

 - 그런데 여기엔 분명한 후과가 따르죠. 독재자형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리더를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탄압, 그리고 리더가 옳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의 후유증을 낳습니다. 김성근이 대단히 인간적이고 아랫사람을 잘 챙기는 지도자인 것은 유명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스타일의 아랫사람에게는 끝없이 매몰차고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한대화 전 감독의 경우, OB에서 뛰던 시절 질병(A형간염)의 여파로 강훈련을 소화할 몸상태가 아니었음에도 '훈련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김성근의 눈 밖에 나고, 쫓겨나다시피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며 나중에 쌍방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한대화는 김성근의 반대로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한 바 있습니다.

 - 김성근 스타일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양으로 질을 커버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2010년대쯤 되어서는 김성근식 훈련의 강도와 분량이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런 게 일반적이었던 20세기에도 김성근은 선수를 대단히 많이 '굴리는' 감독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선수들에게 다양한 방식의(나쁘게 말하면 별별 희한한 방식의) 훈련을 시키죠. 빠른 성적향상을 위해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시키고,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훈련법은 감독이 직접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방식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건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 그에게 '한국적'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링크를 참고.


2. 김성근은 리빌딩형 감독이 아니다


  - 2015년의 한화는 철저한 리빌딩이 필요한 팀입니다. 주전급 선수의 뎁스가 처참할 정도로 얇기 때문에(차라리 선수들 다 팔아치우던 시절의 히어로즈가 더 나아 보입니다. 블로거는 넥센 팬), 일단 선수층의 두께를 키우는 일부터가 필요하고 이건 1~2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넥센이 아직도 이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다면). 이런 팀에는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지도자를 앉혀놓고 한 3~5년쯤은 성적에 연연할 필요가 없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리빌딩이 가능하죠.


 - 김성근은 어떨까요? 분명 김성근은 그동안 이러한 팀들을 맡아 성공적인 육성 능력을 보여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팀들을 맡아 첫 해부터 좋은 성적을 거두었죠. 여기서 '첫 해부터'라는 게 중요. 즉 김성근은 선수를 장기적으로 키우기보다, 단기간에 가능한 한 빨리 선수를 키워낸 다음 그 선수들을 200% 활용하여 최대한의 성적을 거두는 스타일의 감독인 셈입니다. 단기간에 선수를 키워내려면, 결국 훈련의 강도를 최대로 높이는 것밖에 답이 없죠. 김성근 특유의 미친 듯한 훈련량은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는 선수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오버페이스'가 됩니다. 6개월 이상 계속되는 페넌트레이스 일정에 강훈련, (투수의 경우) 혹사까지 겹치게 되면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체력 및 근력소모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선수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주게 될까요? 김성근을 변명할 여지가 있다면 적어도 그는 선수의 상태에 대한 세심한 관리를 한다는 점인데, 김성근식 관리는 선수를 최대한 혹사한 후 나가떨어질 때쯤 일정한 휴식을 부여하는 방식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신체가 점점 소모되는 것을 온전히 막지는 못합니다(재료과학에서는 '피로파괴'라고 합니다).


 - 위에서 분석해봤듯이 김성근은 '빨리 만들어서 빨리 써먹는' 타입의 감독입니다. 적어도 먼 미래를 우선시하는 감독은 아니죠. 그가 몸담았던 팀이 그가 나간 이후로 하나같이 성적이 추락하는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팀이 아예 망해버린 쌍방울을 빼고)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프론트나 후임 감독의 삽질이라고만 해석하기엔 곤란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5년 이상 장기간 재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김성근이 끝까지 책임을 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후임자를 대단히 난감하게 만드는 감독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3. 선수의 특성을 무시하는 방향제시


 - 김성근식 리더십의 다른 문제는 '선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의 밑에 있는 선수는 일률적으로 '적당히 날씬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김성근의 강훈련을 거쳐가게 되면 누구라도 살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ㅡㅡ; 최근 프로야구 선수들이 체중을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되면서, 살을 지나치게 찌워 문제가 되는 선수들도 제법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수들을 제외한, 현재 상태로도 별 문제가 없는 선수들까지 강제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는 것.


 - 이번 시즌 양훈의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경찰청에서 제대하여 올시즌 한화로 복귀한 양훈은 김성근의 지시로 살을 뺐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우수한 피지컬이 무기인 양훈은 살을 뺀 이후 젓가락이 되어 ㅡㅡ; 구위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시즌 초 버려지다시피 넥센으로 트레이드됐죠. 그런 양훈을 받은 넥센은 김성근과 정확히 '반대로' 가게 됩니다. 짧은 기간 동안 무서울 정도의 벌크업을 통하여,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 이후 양훈은 넥센의 새로운 필승조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많은 걸 시사하죠.


 - 혹자는 선수들 개개인에 맞는 다양한 훈련법을 적용하는 감독이지 않냐고 반론을 제기하실텐데, 그건 그것대로 맞습니다.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건 큰 틀에서, '최대한 많은 훈련과 이를 통하여 강인하고 가벼운 몸 만들기'라는 기본 전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감독에게, 위에서 말한 한대화 같은 선수가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당뇨병 환자였던 심성보 정도일텐데, 김성근이 직접 훈련 스케줄을 따로 짜 줄 정도로 신경을 썼다지만 (본인의 태만 때문이건 어쨌건) 좋은 결과는 내지 못했으니 야만없이라 하겠습니다.


4. 투수혹사 문제에 대한 단상


  - 투수의 수명에 대한 김성근의 생각은 전형적인 일본식 마인드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야구에서는 '투수의 팔은 던지면 던질수록 단련된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니까 매년 고시엔 대회에서 연일 완투를 거듭하는 고교선수가 나와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고, 선발 투수가 많은 공을 던져 완투하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는 거죠. 반면 미국은 정 반대로 생각하는데, '투수가 평생 던질 수 있는 공의 개수는 정해져 있다'고 보고 학교야구에서 투수들의 투구수를 철저히 제한합니다. 놀란 라이언이 예찬하는 '롱토스 훈련법'의 경우도 찬반 양론이 거세고, 이를 즐겨 하는 선수들 중 다수가 나중에 구속 저하 증세를 보인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인 쪽으로 여론이 가고 있죠.

 - 이것에 대해 블로거는 뭐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견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일본인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 활약하다가 하나같이 드러눕는 게 과연 우연일까 싶기는 합니다.

 - 한국야구로 돌아와 보죠. 20세기의 야구 감독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김성근 또한 팀의 마운드를 우수한 몇몇 투수들에게 최대한 집중시키는 투수 운용을 합니다. 가깝게는 SK 감독 시절 정우람, 전병두, 박희수 등 몇몇 불펜투수가 수많은 혹사 관련 기록들을 만들어냈던 바 있죠. 여기에 대하여는 항상 '김성근은 철저한 관리 하의 혹사를 한다'라는 변명이 따라붙는데, 글쎄요 저 SK 불펜 3인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5년째 재활, 재활과 복귀를 반복, 마침내 퍼져버린 것으로 의심됨)를 생각하면 그 관리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한화의 '살려조'에 대한 우려가 많은 건 결코 과한 게 아닙니다.


5. 결론 - 김성근은, 20세기는 끝났다


  - 지금 시점에서 어떤 욕을 먹더라도, 김성근이 20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은 없습니다. 라이벌 김응룡이 커리어 막판에 웃음후보(?)가 되었음에도 10회 우승 감독이라는 금자탑을 아무도 폄하하지 않는 것과 같죠.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앞으로도 통할 것인가에 대한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 블로거는 김성근에 대하여 '분명 저런 방식이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를텐데 그것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정도의 생각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2015년 이후 한화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여기에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일단 (안타깝게도) 김성근은 커리어 막판에 김응룡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오히려 시즌 중반 이후 그의 모습은, 그동안 그의 뻣뻣한 이미지를 보완하던 '최소한의 유연성'마저 집어던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성근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성공신화, 발전의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몇몇 투수들의 팔을 제물로 삼아서.



[원문 작성일 : 2013. 5. 2. 예전 티스토리 블로그]

 

 - 한 차례의 침체기와 관중 세대교체를 거치며 많이 바뀌었다지만 초창기 프로야구의 응원문화는 때로는 유럽축구의 훌리건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살벌했던 바 있습니다. 경기장에 이물투척은 예사요, 술 취한 관중의 그라운드 난입은 심심하면 벌어졌고, 마산구장에서 있었다는 '투수 새총 저격사건'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곤 하죠. 30년간의 기술력 상승으로 새총이 레이저로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응원팀의 패배에 분노한 홈팀 팬들이 원정팀 버스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입니다.

 

(사진 1 :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 

 

 - 1990년 8월 26일, 막바지 여름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날 잠실구장에서는 관중난동의 T.O.P라 불릴만한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 이 날 잠실구장에서는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 해까지 4연속 우승을 하였지만 시즌 초반의 부진으로 간신히 4강권에 턱걸이하고 있던 해태, LG그룹의 팀 인수 후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를 달리고 있던 LG의 경기는 당연히 큰 관심을 끌었고, 전통(?)의 강호와 신흥 강호라는 라이벌 구도가 새로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이거즈의 수도권 원정경기에는 홈 팬에 필적할만한 원정 팬이 몰리고, 이 날 역시 경기장을 가득 채운 양 팀 팬들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한껏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 초반 양 팀 선발투수인 김용수(LG)와 신동수(해태)의 호투로 경기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긴장 속에 이어졌습니다.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7회. 6회에 3점을 내 먼저 앞서간 LG의 공격에서 해태의 투수진은 주자의 도루저지에 실패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 7회에만 무려 7실점을 허용하고 맙니다. 세븐 갤러리가 털립니다 지고는 있었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던 해태 팬들은 투수진의 멘붕 앞에 덩달아 멘붕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투수진을 아끼기 위해 경기를 사실상 포기하고 2진급 투수들을 기용한 코끼리김응룡 감독의 용병은 해태 팬들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맙니다. 

 

 - 7회 말 LG의 공격이 끝나자 어느 술 취한 해태팬이 그라운드로 난입했고,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곤봉 등으로 구타, 이를 지켜보는 해태팬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8회 초 해태의 공격이 시작된 9시 12분, 원정측 관중석에서 500여 명의 관중이 그라운드로 우르르 밀려들어옵니다. 삽시간에 그라운드를 점거해버린 이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대놓고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베이스와 광고들을 떼어내고 거기에 불까지 지릅니다. 이 혼란 속에서 홈 팀 관중 한 명이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던 관중의 머리를 철제의자로 가격, 체어샷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맙니다. 물론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 이를 시작으로 잠실구장은 거대한 콜로세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라운드를 점거한 해태팬과 주로 스탠드를 지키던 LG팬 사이에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 혈투가 벌어집니다. 음료수캔이나 소주병은 말할 것도 없고, 관중석의 의자를 뜯어내는 등등 경기장 내의 모든 기물들이 던져지고 휘둘러지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관중들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각목이나 철제의자들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사태를 도무지 수습할 수 없었던 구단측에서는 분위기를 좀 가라앉히려 전광판에 태극기를 띄우고 스피커로 애국가를 틀어대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

 

(사진 2 : 애국심 X까.jpg) 

사진 출처 :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30118152706823

 

 - 결국 혼란은 무장경찰 3개 중대가 긴급투입, 그라운드의 관중들을 몰아내며 가까스로 수습됩니다. 앞서 과잉진압 논란을 낳았던 경찰은 이번에는 난동이 벌어진 후 30분이 넘게 지나서 투입, 늑장대응 논란도 함께 낳게 됩니다. 간신히 혼란을 진압하고 그라운드를 대충 정리한 후  경기는 1시간 7분이 지난 10시 19분에 속개, 별다른 이변 없이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진 3 : 청룡언월도?)

 

(사진 4 : 체어샷!) 

 

 - 후폭풍은 거셌습니다. 난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관중들이 대거 연행, 이 중 19명이 구속되고 11명은 집행유예까지 선고받았습니다. 외국 언론에도 오르내리며 대통령이 직접 사태의 해결을 지시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고, 야구팬의 폭력적인 응원문화 또한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죠. KBO에서는 반복되는 관중 난동을 방지하기 위해 지정좌석제 도입을 검토하는 등 묘안을 찾고자 골몰하지만, 90년대 말까지 이러한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 이러한 경기장 내 폭력을 없애지 못했던 것은 한국프로야구의 형성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신군부 독재정권이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자 프로스포츠를 적극 도입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프로야구의 도입은 본질적으로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지역연고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각 지역 대표구단들 사이의 경기는 지역감정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던질 돌을 경기장 내에서 던져대게 만들었으니 독재정권으로서는 꽤 성공한 전략이었을지도? 실제로 이러한 과격성은 당시 어느 팀 팬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5 :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흥분한 빙그레 팬들이 빙그레 선수단 버스를 박살내기도 했다) 

 

 - 이러한 관중 난동은,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대 말 IMF 등의 요인으로 프로야구 관중이 크게 줄어들며 점차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1999년 플레이오프 7 차전에서의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호세 고간 명중사건 등 몇몇 사건들을 마지막으로 대규모의 관중 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2010년대 들어 프로야구의 인기는 예전을 능가할 만큼 높아졌지만 그와 함께 관중의 세대교체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며 응원문화 자체가 전체적으로 예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물론 2011년의 문학구장 소요사태를 보자면, 폭력성 자체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도 싶지만...

 

(사진 6 : 대한민국의_흔한_캠프파이어.jpg) 

 

 - 독재정권과 지역감정에 기대어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이제 그러한 요소들과는 별 관계없는 관중들로 경기장을 꽉꽉 채울 수 있을만큼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합니다. 물론 당시의 극성맞은 응원문화를 그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폭력과 지역감정이 난무하던 시절보다는 응원하는 재미는 좀 덜해도 순수하게 야구를 즐기기에는 더 좋아진 지금이 그나마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게 글쓴이의 생각입니다. 물론 지금도 선수에 대한 욕설이나 관중난입 정도는 존재한다지만, 그라운드가 물병과 맥주캔으로 뒤덮일 일이 별로 없게 됐다는 게 어딥니까. 

 

참고 1 :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30118152706823

참고 2 :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E%A0%EC%8B%A4%EA%B5%AC%EC%9E%A5%20%ED%8C%A8%EC%8B%B8%EC%9B%80%20%EC%82%AC%EA%B1%B4 (엔하위키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