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한국인치고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완용은 한국인에게 '매국노'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완용의 일생 전반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조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참고가 되자면, 이완용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일생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합니다.


[일단 침 한 번 뱉고 시작할까요?]




1. 입양 로또를 맞은 신동


 이완용은 1858년 6월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現 성남시 분당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역사학자 이병도는 전북 익산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더라' 수준이라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본관은 우봉 이씨로, 고려시대 이래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완용의 직계는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잔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준(초명 이호석) 역시 간신히 선비 행세나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변에 이름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10세 때 우봉 이씨 가문의 유력자인 이호준(1821-1901)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호준에게는 서자(이윤용)만 있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이호준 집안의 적자(嫡子)로서 입적된 것입니다(요즘 시각으로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랬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이호준과 이석준은 본관만 같지 촌수가 32촌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라 하필 그가 양자로 선택된 것은 의외인데, 아마도 이완용의 재능이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당시 이호준은 판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으며, 자신의 딸은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 조성하(1845-1881)와,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각각 혼인시키는 등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몰락 양반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완용이, 최고 귀족 가문의 (호적상) 적장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완용의 삶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역시 본래 다른 집안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양아버지가 조선 정계의 거물이었던지라 이완용은 한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소위 '경화거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된 처지에 이복형제도 있었던지라 이완용은 처음에는 말수가 매우 적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이호준이 양아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3세 때 집안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고,이후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들에게 유교 경서를 배웠습니다.


 1882년 이완용은 증광시(增廣試)에 전체 28위로 급제하였고, 처음 임명된 관직은 주서(정7품)였습니다. 사실 과거시험에서 28위라면 급제 순위 중 병과(丙科-3등급)였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후순위였는데, 양아버지 이호준이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ㅡㅡ; 시작부터 낙하산이라니 




2. '기계같은 자'의 출세 : 능력은 있으나, 양심은 없다


 과거 급제 이후 이완용은 엘리트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습니다. 그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외직(지방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군과 관련된 직위)로 발령됐는데, '해방영' 자체가 민씨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편제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민씨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아버지 이호준이 민씨 세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1880년대 초반 조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애초에 그가 급제한 증광시 자체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ㅡㅡ; 급진개화파니 온건개화파니 수구파니 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중앙 관료가 된 그는 젊은 엘리트면서도 근대니 개화니 하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화파 관료들과도 딱히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고, 때마침 외직에 나가 있었기도 하여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의 영어수업 장면]


 1886년 이완용은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하였고, 동시에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와 과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완용이 서양 문물을 제대로 접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왕년의 신동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887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 세자의 교육 책임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 손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광혜원 설립자, 주한미국공사 역임)이 이완용을 두고 '기계같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기계처럼 철저하게 업무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양심과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완용은 젊어서부터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며, 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그가 정치적 격변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든지, 이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정치적 변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보신(保身)과 출세에 치중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옛 주미 조선공사관 건물]


 1887년 이완용은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듬해 초 박정양이 공사에서 해임될 때 함께 해임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약속한 외교적 관례를 박정양이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후 이완용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1888년 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얼마 뒤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


 영어교육을 통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다보니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미국은 '조선을 침략할 위험이 적고, 부강한 국가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조선 정부는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에 대단한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에 파견된 이완용은, 미국 현지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대사성, 전환국총판, 외무협판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자신도 살해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음식도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통조림만 먹었을 만큼 고종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친미파 · 친러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입니다.

[춘생문으로 추정되는 곳. 이후 문은 철거되었고 現 청와대 춘추관 부지 내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역시 춘생문 사건에 직접 관여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완용 등의 관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하였습니다(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탔고, 아관파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만큼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로 구성된 친러파 내각에서 중심 인물이 됩니다.


 새 내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이완용은 정부 관료의 대표격으로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위하여 출범한 단체였는데, 실제로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우자 이완용은 독립문의 한자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건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한자 현판.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 명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고종이 환궁한 이후 터졌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독립협회는 점차 반(反)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띠었고, 친러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친러파 관료이면서 독립협회 중심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양쪽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결국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폭발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된 직후 이마저도 파직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동시에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때 독립협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후 벌어진 독립협회 대탄압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보신甲! 그래도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며 인생 최대의 위기ㅡㅡ;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1901년 양부 이호준이 급사한 이후 고종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복권시키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당시 임명된 관직은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한직(閑職)이었습니다.




4. 마지막 변신 :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다


 이완용은 1904년 양부의 3년상을 끝낸 이후 190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취임하여 예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이 전쟁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우세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대한제국은 왕년의 친미파 이완용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잡아먹는 것을 용인한 상태였고, 당연히 이완용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침략자에게 들러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였습니다. 지금껏 출세와 보신에 힘쓰며 친미파와 친러파로 철새마냥 떠돌았던 이완용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친일파로 갈아타게 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 양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는데, 정작 이에 대한 결정권은 대신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 대신들을 회유 및 협박하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학부대신 이완용도 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평]


 이미 일본의 침략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완용은 처음부터 이토에게 협조적으로 나섰고, 이토는 이완용을 전면에 내세워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이토는 조약 체결과 관련한 어전회의를 강제로 열었는데, 처음에는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다수가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습니다(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만 찬성파).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는 가운데 이완용은 자신을 만고의 매국노로 만드는 발언을 하여 대신들을 설득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언제까지나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외교권 양도 문제는 훗날 대한제국의 역량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레 반환될 것이며, 조약의 내용에 황실의 안전과 존엄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을 추가하면 충분하다."


 결국 이토의 협박과 이완용의 설득에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토는 8명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5명의 동의를 얻어내자 "이것으로 안건은 가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5명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입니다(반대자 중에서 이하영은 얼마 뒤 조약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일단 을사오적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을사오적의 쌍판때기 얼굴.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같은 날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궁궐 내에서 고종을 협박하는 가운데 '외교권 양도'와 '통감부 설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약(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정작 을사오적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기대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어떻게든 다른 강대국의 호의를 얻어 독립을 지켜보고자 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노력들을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5. 나라판 값으로 얻은 부귀영화


 조약 체결의 일등공신이 이완용이었던만큼 이후 이완용의 출세길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의정대신,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일본에 의하여 구성된 내각의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좀 보였는지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 취임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이토 통감의 권유를 받고 결국 취임을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였고, 얼마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에서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정미칠적).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일본과 사법권 양도 협약을 체결하였고(기유각서), 다음해(1910년)에는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한일 병합조약(경술국치)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직접 서명하였습니다(경술국적). 그랜드슬램 달성!!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은 조약 내용에 아예 '공로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작위와 은금(恩金) 수여'를 조항으로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백작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15만 엔(원)이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도 받았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억~150억원 정도). 다만 그보다 많은 은사금을 받은 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대한제국 황족들이었습니다(의친왕과 이재면(고종의 형)의 경우 83만 엔을 수령하였습니다).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나라가 망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으니 당연히 전국민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그가 의병장 허위(1855-1908)의 사형을 주장하자 옛 황국협회 관계자들(허위가 황국협회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과 분노한 주민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이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수습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주도하자 이번에는 항일단체(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완전 잿더미가 되어 이완용은 이복동생 이윤용의 집에 한동안 피신해 있어야 했다고.


[이후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친일 관료들을 목표로 한 모든 암살단의 제1호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당시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은 성당 앞에서 인력거에 탑승하던 중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이재명(1887-1910)의 습격을 받고 왼쪽 폐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죽지 않은 것은 인력거꾼 박원문(1865-1909)이 이재명을 제지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외과의사들의 손에 맡겨져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통당한 폐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완용은 이후 남은 평생을 후유증인 천식과 폐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쌤통 체포된 이재명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습니다.


[말년의 이완용]


 일제강점기 이완용은 친일 귀족의 대표 노릇을 하며, 건강 문제를 빼면 순탄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으로 알려져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은사금을 잘 굴려먹었는지 그는 말년에는 137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부(巨富)가 되었고, 차남 이항구(1881-1945) 역시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6. 죽음과 그 이후


 이재명 의사의 습격 이후 악화된 이완용의 폐병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1926년 총독부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이후 2월 11일 69세를 일기로 뒈졌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2월 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유명한 비판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하였지만 다행히 현재까지도 그 원문이 남아 있습니다.


[검열삭제 이전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습니다.


[파헤쳐진 이완용 무덤]


 그의 후손들의 삶은 별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그것도 매국노의 수괴)인 마당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얼굴 들고 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완용의 장남(이승구, 1880-1909)은 요절하였는데,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즉 이완용에게는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부끄러움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완용의 작위를 물려받은 차남 이항구는 해방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중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 이병주는 일본에 귀화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가졌던 재산(특히 토지)가 워낙 방대했다보니, 해방 후 흩어진 그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후손들의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돌아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1998년에는 서울 북아현동 일대 토지의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윤형은 돌려받은 땅을 곧바로 처분하여 수십억 원을 벌었고, 이 돈을 그대로 들고 도로 캐나다로 튀어버렸다는군요. ㅡㅡ;


 그의 악명 덕에 오래도록 애먼 피해자들도 속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이완용과 같은 우봉 이씨 출신이라 이완용의 친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제로는 촌수로 따져 30촌을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병도 본인이 친일부역자였고, 이완용의 관짝을 구하여 불태웠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행들이 겹쳐 있기도 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은 이완용의 아들 중 한 명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도 간간이 욕을 먹는데, 여긴 아예 본관부터가 다릅니다(경주 이씨).


 반대로 이완용의 덕(?)을 본 경우도 있으니, 붕당 대립에 휘말려 역적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남인, 북인, 소론 등)이 1908년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순종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개중에는 진짜 역적이나 간신들도 있고 고종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인물도 있다보니 크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 일종의 소소한 과거사 정리를 한 것 정도로 보입니다.




7. 정리 : '똑똑한 기회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일생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이완용, 그의 변신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히 '강자'에게 빌붙는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그는 대부분 고종이 협력하려는 열강 국가에 붙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종이 미국에 협조적일 때는 친미파,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을 때는 친러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황제)과 노선을 함께하는 이러한 처세가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종이 기댈 곳이 없어져버린 시점에, 이완용은 고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침략자 일본에 앞장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는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고종의 뒤통수를 친 대가로 얻어낸 것은 '황실의 존재만은 남겨준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였으며,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식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보다 철저히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서만 활용했고, 이러한 처세 속에서 그의 능력은 대한제국이라는 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커녕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개인의 능력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이 결여된 자에게 지나치게 큰 능력과 권한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부 고위층의 거대한 스캔들로 국가 전체가 뒤집어진 근래의 사태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완용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당 지도부와 정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책무를 일개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넙죽 바쳐버린 참상을 보면, 저들의 재능은 도대체 사회와 역사, 심지어 그들 개인을 위해서라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역사는 '양심 없는 능력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블로거는 이분들을 감히 '이완용의 후예들'이라 칭하겠습니다]




참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2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books.google.co.kr/books?id=PmMzC...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발췌)

http://www.hansung.ac.kr/web/hhistory/44?... (<춘생문 사건의 발생 배경과 영향에 대한 재고>, 김성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9/2009082900337.html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2018. 7. 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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