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황족들은 나라의 멸망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개중에는 적극적인 친일분자가 되어 자신들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참여한 이들도 있고, 소극적이나마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대체로 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멸망에 적어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친일분자로 활약한 대한제국의 황족, 영선군 이준용입니다.


[그림으로만 봐도 위엄돋는 그의 풍채]




1. 영선군, 왕의 조카가 된 남자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 이재면(1845-1912)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서 고종(이재황)의 친형입니다. 즉 이준용은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셈으로,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장손이기도 합니다. 친동생 이문용(1882-1901)이 19세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이재면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출생 후 영선군(永宣君)이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자 측근인 허욱(1827-1883)을 가정교사로 삼아 글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명석하고 뛰어난 자질을 보여 흥선대원군이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재면이 그리 강단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데 비해, 이준용은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재면보다도 장손 이준용을 더욱 총애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용은 냉혹한 현실정치의 생리에 일찍부터 눈뜰 수 있었는데, 이 시기 고종과 민씨 세력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흥선대원군은 싹수가 보이는 이준용을 고종의 대안으로 점찍게 됩니다. 그러한 주변 환경 속에서 자란 이준용은 1880년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으로 성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1880년대 초 음서를 통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4년 말에는 세자익위사(세자의 호위를 담당) 세마(洗馬, 정9품)에 올랐는데 이는 갑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급진개화파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장손인 이준용을 적극 기용하였던 것입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이준용 역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정변의 직접 참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음서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하급 관직을 전전하던 그는, 1886년 과거시험에 정식으로 급제한 이후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문관 정자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이준용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듬해(1887년)에는 이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반(反) 고종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고종 및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데서 비롯합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 등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친(親) 고종 세력과 적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왕을 갈아치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영선군 이준용이었습니다. 확실히 자기 편이기도 하고, 인물이 영특하여 아내의 조종을 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고종의 장남이자 궁인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1868-1880)을 밀어주려고 하였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대타로 이준용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그 세력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이준용의 삶은 1880년대 중반부터 격랑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습니다.



2. 나도 왕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1886년,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1859-1916)의 조종으로 첫 번째 쿠데타 시도가 벌어집니다. 위안스카이는 친러정책을 강화하던 고종과 명성황후에 맞서, 고종을 쫓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앉힌 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 자신들이 조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만만찮은 야심가라 쿠데타 계획에 호응하려 했지만, 정작 청 본국에서 이를 반대하여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를 알아낸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하여, 오히려 이준용 본인의 처지가 난처해지는 역효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1887년부터 이준용은 3년간 모친상을 치르면서 다양한 세력의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준용을 경계하고 항상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친 이후 그는 성균관, 규장각, 승정원 등의 요직을 거쳐 1892년에는 이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면서 점차 그를 지지하는 친위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운현궁]


 이렇게 되자 이준용은 본격적으로 고종-명성황후의 주된 정적이 되었습니다. 1892년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 이재면-이준용 부자의 집에도 폭탄이 설치되었지만 사전에 발견되어 피해는 없었습니다(이 사건에 대하여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준용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한번은 길에서 자객을 만났지만 간신히 따돌려 목숨을 구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준용 쪽에서도 가만 있을 수 없지요. 갑오개혁 당시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출을 몰래 추진하였지만 일본 측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일본 주도의 개혁에 반발하는 유학자들이나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여 고종을 몰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계획이 탄로나면서 실패합니다. 이 시기 이준용은 대원군파와 척을 진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는 이들을 포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길준 등을 대원군파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하여 이준용은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895년 초 이준용은 개화파 인사 김학우(1862-1894)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 개화파 세력은 (차마 흥선대원군을 족칠 수는 없으니)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지만,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자행되는 등의 사실이 알려지며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준용은 유배형에 처해지며 목숨만은 건지게 됩니다.


 얼마 뒤 이준용은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투옥당했지만 때마침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본 측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났습니다. 석방과 동시에 그는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일본 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대체로 이 무렵부터 그가 친일 성향을 띠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좌절된 야망과 말년


 그런데 다음해 아관파천으로 조선 내 친일파가 몰락하면서, 이준용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길로 망명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897년 그는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1899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본국에서는 안경수(1853-1900) 등이 다시 그를 옹립하려는 쿠데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준용의 귀국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조용히 망명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등 지속적으로 조선(대한제국) 정치에 관여하려 하였습니다. 당연히 더욱 열받은 고종은 일본에까지 자객을 보내어 이준용을 제거하려 시도하지만, 의외로 이준용 자신의 무력(武力)이 출중했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ㅡㅡ;


[영친왕과 엄귀비. 고종은 정적인 이준용과 의친왕을 배제하기 위해, 엄귀비 소생인 영친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고종은 그의 강제송환을 요구했고, 이토는 그 대신에 주요 망명 인사들을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준용은 이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던 모양이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준용은 여전히 고종을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며 그의 꿈은 사실상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그는 조약 체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왕 한 번 해보려는 이준용의 야망은 자신이 협력하던 일본에 의해 좌절당한 것입니다(그는 이후로도 1909년 무렵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였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이준용은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1909년부터 그는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로 재직했는데, 이곳은 단군신화를 일본 아마테라스 신화에 종속시키는 역사왜곡을 추진한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준용은 왕족+친일파로서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고, 아버지(83만 엔 수령)와는 별도로 거액(16만 8천 엔)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병합 때 이희 공(公)으로 봉해진 이재면이 1912년 사망하자 이준용은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빈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다른 종친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준용은 자신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이준용의 나이는 고작 40대였지만 젊어서부터 갖은 고난과 비만을 겪은지라 그의 건강은 상당히 나빴고, 이후로는 신장병과 심장질환 등에 시달리며 병석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만년에 낳은 딸 이진완(1916-1997) 외에 아들이 없었던 이준용은 1917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차남 이우(1912-1945)를 양자로 들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습니다. 양자 이우는 왕족으로서 일본군 고위 장교가 되었으며, 나름 반일 성향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휘말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의 아들 중 이청(1936-)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4. 정리 : 대한제국 황족의 운명


 한일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족은 '멸망한 나라의 왕족'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자체를 아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격하하고, 일본 황실에 다음가는 지위인 '왕공족'으로 대우하였습니다. 물론 더 이상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대접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구(舊) 황족들은 복잡한(하지만 대체로 행복하지 못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고종과 순종은 궁궐에서 반쯤 갇혀 살다 죽었고(고종은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지요), 이재면-이준용 부자처럼 일본에 적극 협력한 부류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병합 이후에는 거액의 은사금과 작위 외에 일본에게서 딱히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고종의 자식들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나 덕혜옹주(1912-1989)의 경우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덕혜옹주]


  분명한 사실은 이들 황족 중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과 그의 아들(그리고 이준용의 양자)인 이우 등 몇몇이 반일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의친왕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사실상 독립운동과 멀어졌고, 이우는 사실상 볼모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하다가 히로시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이 일본 당국의 감시 하에 있는 처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더라도 대한제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황족들이 나라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후 딱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고종과 순종 복위(복벽운동)을 추진하는 항일세력이 있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사실상 모든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으로 대동단결하게 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나마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주던 일본의 실드마저 사라지자, 이들은 더 이상 왕족으로서 살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해방된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은 수십 대를 거슬러올라가야 핏줄이 이어지는 전주 이씨 이승만이었고, 미국 체류시절 자신을 '프린스 리'로 소개할 만큼 자기 핏줄을 의식했던 이승만은 구 황족에 대한 예우를 대부분 박탈하고 영친왕의 귀국을 가로막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거든


[황족 X까! 이젠 내가 짱이라고!]


 당연하게도 이때까지 살아남은 황족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거주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고,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에야 병든 몸으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 강제로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 간 이래 지속적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이혼까지 겪는 등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역시 한참 뒤에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한국에 남아 있었던 의친왕은 노년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 시기 영양실조와 홧병에 시달리다 사망하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대한제국 멸망과 한일병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일단 이들이 세계사의 격변기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던 점, 외세의 침략에 기껏해야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며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이준용의 경우처럼 아예 대놓고 친일행위를 일삼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황족에 대한 이후 한국인들은 준엄한 평가를 내렸고,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영영 되찾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2018. 9. 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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