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 일본군의 허난성 침입


 - 중일전쟁의 시작점인 베이핑(베이징)-톈진 방어선은 1937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허난성 최북단 안양을 점령하며 허난성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북 방면 총사령관은 군벌 출신 펑위샹(1882-1948)이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군벌들의 집합체인 오합지졸에 가까웠기 때문에 3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주력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허난성의 위치]


 - 한푸쥐(1890-1938), 쑹저위안(1885-1940) 등 휘하 군벌들이 잇따라 도망치는 등 졸전 끝에 산둥성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장제스는 펑위샹을 해임하고 한푸쥐 등 적전도주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군벌들을 싸그리 체포하여 처형하는 강수를 두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황하 북쪽을 대부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선을 단절하기 위해, 간선철도의 교차지점인 정저우(허난성)와 쉬저우(장쑤성)를 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 일본군은 먼저 쉬저우로 진격하였지만, 쉬저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타이얼좡(산둥성 최남단)에서 1938년 3~4월에 걸쳐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고 후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타이얼좡 전투). 흐름을 꺾인 일본군은 이 쪽을 담당한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1887-1990)로 교체하였고, 그의 지휘하에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장제스는 쉬저우 일대의 병력에 체계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고, 후퇴하는 중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 일본군의 작전은 지휘관들이 공적을 놓고 갈등하느라 협조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중국군이 철수한 쉬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1938년 5월 19일).


 - 한편 정저우 방면으로 진격한 일본군 제14사단은 정저우의 길목이자 과거 북송의 수도이기도 한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중국군에 포위당했고, 인근 제16사단의 지원을 받고서야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14, 제16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카이펑을 다시 공격, 6월 6일 카이펑을 함락시켰습니다. 카이펑을 넘어 정저우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장제스는 인근의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수공(水攻)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2. 대재앙으로 번진 수공


 - 국민혁명군 제53군 1단은 정저우 인근 화위안커우(花園口)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는 작업을 벌여, 6월 9일 제방 일부를 터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황하는 천정천(주변 땅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천)이기 때문에, 뚫린 제방을 넘어선 강물은 걷잡을 수 없이 주변 평야지대로 쏟아집니다. 황하의 물살은 정저우에서 카이펑에 이르는 지역을 침수시켰고, 이 곳에 있던 일본군 제14, 제16사단은 차오르는 홍수에 그대로 휩쓸렸습니다.


[홍수에 휩쓸린 일본군 전차부대]


 - 장제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6월 10일 황하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불어난 물 때문에 제방 붕괴가 확대되면서,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양의 강물이 평야지대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허난성 동부는 물론이고 동남쪽의 안후이성, 장쑤성으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수천 km에 달하는 평야지대에서 넘치는 물을 막을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 중국은 애초에 작전지역인 화위안커우 인근 지역에만 홍수경보를 내리고, 나머지 지역에는 아무 경보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수많은 주민들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물벼락에 그대로 휩쓸려 죽어갔습니다. 이 홍수로 사망자만 최소 9만, 최대 89만 명이 발생하였으며 이재민은 12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은 남쪽으로 바뀌어, 회하와 양쯔강 하구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1947년 제방 복구와 함께 원상복귀).


 -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허난성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피해복구는 꿈도 꾸지 못했고, 이는 4년 후 벌어지는 훨씬 더 큰 재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3. 대기근, 지옥도가 열리다


 - 전쟁과 홍수 피해가 누적되어 허난성 일대의 경지면적은 이전의 1/3 가까이로 줄어든 상태였지만, 전쟁과 부정부패, 행정력 미비라는 복합적인 문제가 피해복구를 계속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42년 봄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정도의 가뭄이 시작되고, 가뜩이나 피폐할대로 피폐한 이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 농민들은 봄과 여름 내내 하늘만 쳐다보았지만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빗방울 대신 가을 하늘을 채운 것은 다름아닌 메뚜기떼.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을 메뚜기떼가 죄다 쓸어가면서 허난성은 생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산나물과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산나물이 사라지자 나무껍질을 벗겨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가족]


 - 사람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찾기 시작했고, 기러기 똥이 절찬리에 식용으로 쓰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소화가 덜 된 곡식 종자가 있어 그나마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혹은 땅을 파서 관음토(일종의 백색토)를 파먹기도 했는데, 당장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당연히 열량도 없고 소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흙을 계속 먹는 사람들은 소화기에 장애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이런 참상 속에서 도대체 중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나름 20세기 중반인데, 중국 정부가 이 지역을 구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허난성 주민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았습니다. 허난성 정부의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기 바빴고, 상부의 추궁을 피하고자 피해상황을 무시하거나 축소 보고하였습니다.


 - 쉬창(허창) 지역의 경우 5만여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고 성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이조차 축소 의혹이 있었음에도 성에서는 "왜 이렇게 많이 보고하였는가"를 이유로 보고서를 반려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당에 제대로 된 구휼체계가 돌아갔을 턱이 없습니다. 당시 허난성 일대를 취재한 후 장제스를 만난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화이트(1915-1986)가 허난성의 참상을 전했을 때, 장제스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그나마 지원되는 부족한 식량마저도, 태반은 부패한 관료들이나 군벌의 손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인육(人肉)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길거리에 널린 시체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죽여서 그 고기를 뜯어먹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극도의 굶주림에 피폐해진 위장은 갑자기 들어오는 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인육을 뜯어먹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급성 소화질환으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가뭄은 1943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사이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최대 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4. 결말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트라우마


 - 장제스와 중국 정부는 기근의 실태를 파악하고서도, 중일전쟁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한 보도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선전 기사 사이에 허난성 재해의 실태를 짧게 보도한 충칭의 지역 신문 <대공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그리고 화이트는 이 기사를 목격한 후 허난성 취재를 시작했다고).


 - 자신들의 죽음을 외면한 정부와 군부에 대한 허난성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44년 중탸오산 전투에서는 허난성의 농민들이 후퇴하는 중국군 5만 명을 습격하여 무장해제시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군사령관 탕언보(1900-1954)는 이들을 일제 앞잡이 혹은 반역자로 규정했지만, 그렇게까지 된 사연을 돌이켜보면......


 - 이러한 일련의 실정(失政)으로 장제스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비록 중일전쟁 발발 이후 힘을 합쳤다지만(제2차 국공합작) 실질적인 연계는 거의 되지 않았고,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동시에 농민들의 민심을 얻는 대민전략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수탈에 절망한 농민들은 앞다투어 공산당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민심을 완전히 잃은 국민당은 신식 무기를 들고도 공산당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제스는 민중을 외면한 대가를 '중국 대륙의 상실'로 뼈저리게 치렀던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이후 강력한 부정부패 처벌과 경제개발그리고 극악의 1인독재을 통하여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고자 하였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대륙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엎질러진 물.


 - 예전 수천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허난성 일대는,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일전쟁기 덧씌워진 반역자의 이미지,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하는 허난 출신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겹쳐 중국 내에서는 허난 출신자들에 대한 심한 지역차별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대 중국의 큰 사회문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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