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한국인치고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완용은 한국인에게 '매국노'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완용의 일생 전반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조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참고가 되자면, 이완용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일생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합니다.


[일단 침 한 번 뱉고 시작할까요?]




1. 입양 로또를 맞은 신동


 이완용은 1858년 6월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現 성남시 분당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역사학자 이병도는 전북 익산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더라' 수준이라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본관은 우봉 이씨로, 고려시대 이래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완용의 직계는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잔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준(초명 이호석) 역시 간신히 선비 행세나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변에 이름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10세 때 우봉 이씨 가문의 유력자인 이호준(1821-1901)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호준에게는 서자(이윤용)만 있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이호준 집안의 적자(嫡子)로서 입적된 것입니다(요즘 시각으로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랬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이호준과 이석준은 본관만 같지 촌수가 32촌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라 하필 그가 양자로 선택된 것은 의외인데, 아마도 이완용의 재능이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당시 이호준은 판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으며, 자신의 딸은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 조성하(1845-1881)와,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각각 혼인시키는 등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몰락 양반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완용이, 최고 귀족 가문의 (호적상) 적장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완용의 삶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역시 본래 다른 집안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양아버지가 조선 정계의 거물이었던지라 이완용은 한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소위 '경화거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된 처지에 이복형제도 있었던지라 이완용은 처음에는 말수가 매우 적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이호준이 양아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3세 때 집안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고,이후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들에게 유교 경서를 배웠습니다.


 1882년 이완용은 증광시(增廣試)에 전체 28위로 급제하였고, 처음 임명된 관직은 주서(정7품)였습니다. 사실 과거시험에서 28위라면 급제 순위 중 병과(丙科-3등급)였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후순위였는데, 양아버지 이호준이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ㅡㅡ; 시작부터 낙하산이라니 




2. '기계같은 자'의 출세 : 능력은 있으나, 양심은 없다


 과거 급제 이후 이완용은 엘리트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습니다. 그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외직(지방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군과 관련된 직위)로 발령됐는데, '해방영' 자체가 민씨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편제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민씨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아버지 이호준이 민씨 세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1880년대 초반 조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애초에 그가 급제한 증광시 자체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ㅡㅡ; 급진개화파니 온건개화파니 수구파니 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중앙 관료가 된 그는 젊은 엘리트면서도 근대니 개화니 하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화파 관료들과도 딱히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고, 때마침 외직에 나가 있었기도 하여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의 영어수업 장면]


 1886년 이완용은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하였고, 동시에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와 과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완용이 서양 문물을 제대로 접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왕년의 신동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887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 세자의 교육 책임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 손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광혜원 설립자, 주한미국공사 역임)이 이완용을 두고 '기계같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기계처럼 철저하게 업무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양심과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완용은 젊어서부터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며, 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그가 정치적 격변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든지, 이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정치적 변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보신(保身)과 출세에 치중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옛 주미 조선공사관 건물]


 1887년 이완용은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듬해 초 박정양이 공사에서 해임될 때 함께 해임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약속한 외교적 관례를 박정양이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후 이완용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1888년 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얼마 뒤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


 영어교육을 통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다보니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미국은 '조선을 침략할 위험이 적고, 부강한 국가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조선 정부는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에 대단한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에 파견된 이완용은, 미국 현지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대사성, 전환국총판, 외무협판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자신도 살해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음식도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통조림만 먹었을 만큼 고종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친미파 · 친러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입니다.

[춘생문으로 추정되는 곳. 이후 문은 철거되었고 現 청와대 춘추관 부지 내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역시 춘생문 사건에 직접 관여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완용 등의 관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하였습니다(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탔고, 아관파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만큼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로 구성된 친러파 내각에서 중심 인물이 됩니다.


 새 내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이완용은 정부 관료의 대표격으로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위하여 출범한 단체였는데, 실제로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우자 이완용은 독립문의 한자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건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한자 현판.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 명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고종이 환궁한 이후 터졌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독립협회는 점차 반(反)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띠었고, 친러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친러파 관료이면서 독립협회 중심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양쪽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결국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폭발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된 직후 이마저도 파직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동시에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때 독립협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후 벌어진 독립협회 대탄압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보신甲! 그래도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며 인생 최대의 위기ㅡㅡ;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1901년 양부 이호준이 급사한 이후 고종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복권시키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당시 임명된 관직은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한직(閑職)이었습니다.




4. 마지막 변신 :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다


 이완용은 1904년 양부의 3년상을 끝낸 이후 190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취임하여 예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이 전쟁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우세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대한제국은 왕년의 친미파 이완용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잡아먹는 것을 용인한 상태였고, 당연히 이완용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침략자에게 들러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였습니다. 지금껏 출세와 보신에 힘쓰며 친미파와 친러파로 철새마냥 떠돌았던 이완용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친일파로 갈아타게 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 양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는데, 정작 이에 대한 결정권은 대신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 대신들을 회유 및 협박하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학부대신 이완용도 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평]


 이미 일본의 침략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완용은 처음부터 이토에게 협조적으로 나섰고, 이토는 이완용을 전면에 내세워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이토는 조약 체결과 관련한 어전회의를 강제로 열었는데, 처음에는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다수가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습니다(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만 찬성파).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는 가운데 이완용은 자신을 만고의 매국노로 만드는 발언을 하여 대신들을 설득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언제까지나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외교권 양도 문제는 훗날 대한제국의 역량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레 반환될 것이며, 조약의 내용에 황실의 안전과 존엄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을 추가하면 충분하다."


 결국 이토의 협박과 이완용의 설득에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토는 8명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5명의 동의를 얻어내자 "이것으로 안건은 가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5명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입니다(반대자 중에서 이하영은 얼마 뒤 조약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일단 을사오적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을사오적의 쌍판때기 얼굴.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같은 날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궁궐 내에서 고종을 협박하는 가운데 '외교권 양도'와 '통감부 설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약(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정작 을사오적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기대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어떻게든 다른 강대국의 호의를 얻어 독립을 지켜보고자 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노력들을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5. 나라판 값으로 얻은 부귀영화


 조약 체결의 일등공신이 이완용이었던만큼 이후 이완용의 출세길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의정대신,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일본에 의하여 구성된 내각의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좀 보였는지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 취임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이토 통감의 권유를 받고 결국 취임을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였고, 얼마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에서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정미칠적).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일본과 사법권 양도 협약을 체결하였고(기유각서), 다음해(1910년)에는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한일 병합조약(경술국치)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직접 서명하였습니다(경술국적). 그랜드슬램 달성!!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은 조약 내용에 아예 '공로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작위와 은금(恩金) 수여'를 조항으로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백작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15만 엔(원)이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도 받았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억~150억원 정도). 다만 그보다 많은 은사금을 받은 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대한제국 황족들이었습니다(의친왕과 이재면(고종의 형)의 경우 83만 엔을 수령하였습니다).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나라가 망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으니 당연히 전국민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그가 의병장 허위(1855-1908)의 사형을 주장하자 옛 황국협회 관계자들(허위가 황국협회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과 분노한 주민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이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수습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주도하자 이번에는 항일단체(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완전 잿더미가 되어 이완용은 이복동생 이윤용의 집에 한동안 피신해 있어야 했다고.


[이후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친일 관료들을 목표로 한 모든 암살단의 제1호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당시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은 성당 앞에서 인력거에 탑승하던 중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이재명(1887-1910)의 습격을 받고 왼쪽 폐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죽지 않은 것은 인력거꾼 박원문(1865-1909)이 이재명을 제지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외과의사들의 손에 맡겨져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통당한 폐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완용은 이후 남은 평생을 후유증인 천식과 폐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쌤통 체포된 이재명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습니다.


[말년의 이완용]


 일제강점기 이완용은 친일 귀족의 대표 노릇을 하며, 건강 문제를 빼면 순탄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으로 알려져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은사금을 잘 굴려먹었는지 그는 말년에는 137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부(巨富)가 되었고, 차남 이항구(1881-1945) 역시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6. 죽음과 그 이후


 이재명 의사의 습격 이후 악화된 이완용의 폐병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1926년 총독부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이후 2월 11일 69세를 일기로 뒈졌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2월 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유명한 비판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하였지만 다행히 현재까지도 그 원문이 남아 있습니다.


[검열삭제 이전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습니다.


[파헤쳐진 이완용 무덤]


 그의 후손들의 삶은 별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그것도 매국노의 수괴)인 마당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얼굴 들고 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완용의 장남(이승구, 1880-1909)은 요절하였는데,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즉 이완용에게는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부끄러움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완용의 작위를 물려받은 차남 이항구는 해방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중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 이병주는 일본에 귀화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가졌던 재산(특히 토지)가 워낙 방대했다보니, 해방 후 흩어진 그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후손들의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돌아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1998년에는 서울 북아현동 일대 토지의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윤형은 돌려받은 땅을 곧바로 처분하여 수십억 원을 벌었고, 이 돈을 그대로 들고 도로 캐나다로 튀어버렸다는군요. ㅡㅡ;


 그의 악명 덕에 오래도록 애먼 피해자들도 속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이완용과 같은 우봉 이씨 출신이라 이완용의 친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제로는 촌수로 따져 30촌을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병도 본인이 친일부역자였고, 이완용의 관짝을 구하여 불태웠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행들이 겹쳐 있기도 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은 이완용의 아들 중 한 명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도 간간이 욕을 먹는데, 여긴 아예 본관부터가 다릅니다(경주 이씨).


 반대로 이완용의 덕(?)을 본 경우도 있으니, 붕당 대립에 휘말려 역적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남인, 북인, 소론 등)이 1908년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순종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개중에는 진짜 역적이나 간신들도 있고 고종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인물도 있다보니 크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 일종의 소소한 과거사 정리를 한 것 정도로 보입니다.




7. 정리 : '똑똑한 기회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일생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이완용, 그의 변신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히 '강자'에게 빌붙는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그는 대부분 고종이 협력하려는 열강 국가에 붙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종이 미국에 협조적일 때는 친미파,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을 때는 친러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황제)과 노선을 함께하는 이러한 처세가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종이 기댈 곳이 없어져버린 시점에, 이완용은 고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침략자 일본에 앞장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는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고종의 뒤통수를 친 대가로 얻어낸 것은 '황실의 존재만은 남겨준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였으며,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식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보다 철저히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서만 활용했고, 이러한 처세 속에서 그의 능력은 대한제국이라는 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커녕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개인의 능력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이 결여된 자에게 지나치게 큰 능력과 권한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부 고위층의 거대한 스캔들로 국가 전체가 뒤집어진 근래의 사태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완용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당 지도부와 정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책무를 일개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넙죽 바쳐버린 참상을 보면, 저들의 재능은 도대체 사회와 역사, 심지어 그들 개인을 위해서라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역사는 '양심 없는 능력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블로거는 이분들을 감히 '이완용의 후예들'이라 칭하겠습니다]




참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2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books.google.co.kr/books?id=PmMzC...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발췌)

http://www.hansung.ac.kr/web/hhistory/44?... (<춘생문 사건의 발생 배경과 영향에 대한 재고>, 김성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9/20090829003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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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13. 수정]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한 자들을 '친일파'라는 한 단어로 묶어버리지만, 실제로 친일파의 범주에 들어가는 수많은 인물들은 '일본에 부역하였다'는 공통점을 빼면 친일행위의 배경이나 사고방식, 전후의 행동과 결과에 제각기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친일행위를 그 자체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되, 친일파들 개개인의 삶을 분석하는 것 또한 병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많은 친일행위자 중 몇 명을 선정,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간단히 짚어보며 친일행위의 배경을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윤치호(1864-1945)입니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고 그 누구보다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 또한 가졌지만, 현실의 벽 앞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로 전락하고 만 윤치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양면적 삶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윤치호]




1. 희대의 어학천재 윤치호


[ㅎㄷㄷ한 해평 윤씨 가계도]


 윤치호의 출신인 해평 윤씨('해평'은 경북 구미시의 지명) 가문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급성장한 신흥 명문가였습니다. 임진왜란기 인물인 윤두수(1533-1601)의 자손 중, 조선 말기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만 따져도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윤치왕, 윤치소, 윤치성, 윤치영, 윤일선, 윤보선, 순정효황후 윤씨 등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지요.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의 처가도 이쪽이며(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 아나운서 윤인구씨도 이 가문 출신입니다(윤치영의 손자).


 불과 3대 남짓만에 격동기 역사적 인물들이 거의 두 자릿수 단위로 쏟아져나왔다는 건 결코 범상한 일은 아닙니다. 해평 윤씨 가문의 이 수많은 인재들은 정치, 군사, 학술, 의료, 경제계 등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흥미롭게도 친일파와 항일운동가, 소극적 부역거부자가 뒤얽혀 있습니다(이를테면, 윤치소는 거부(巨富)이자 친일파였지만 그의 장남 윤보선은 항일운동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1840-1911)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유홍기(1831-?)에게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 인물로, 별기군 책임자를 맡는 등 주로 무관(군인) 쪽에서 활동한 관료입니다. 김옥균 등의 동료였으나 갑신정변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아 정치적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대한제국 막판에 친일파로 돌아서 일본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윤웅렬은 뒷배경이 없는 것 치고는 거의 기적적인 출세를 한 인물이지만, 서얼 출신에 무관이라 일평생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장남 윤치호의 재능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고(윤치호는 서자였는데, 윤웅렬은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만들어주기 위해 나중에 그의 생모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하였음), 온건개화파 정치인 어윤중(1848-1896) 밑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어윤중이 정치적 거물이었으니, 인맥을 만들어주려 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1907년경 촬영한 윤웅렬 가족사진. 앞의 꼬꼬마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으로, 윤웅렬이 뒤늦게 재혼하여 낳은 자녀들]


 윤치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본래 서자였던 그는 기술교육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아버지 윤웅렬이 백방으로 손을 써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인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882년에는 아버지가 임오군란을 피해 잠시 일본에 망명하여(그가 별기군 책임자였기 때문) 윤치호와 함께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근대 교육을 받으면서, 윤치호는 기존 조선의 전통이나 성리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근대사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과 이를 받아들여 근대화된 일본을 비교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국까의 기질이 여기서부터 한편 유학기간 중 윤치호는 김옥균의 조언으로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가 어학천재임이 이 때 드러났는데, 영어를 고작 4개월간 배우고는 대단한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부럽다


 윤치호는 1883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1826-1913)의 통역관으로 일하였고, 4개월 배웠다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영어 능력을 더욱 갈고닦아 진정한 영어마스터의 반열에 오릅니다. 고급 라틴어 계열 어휘라든지, 다른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ㅡㅡ;




2. 정치적 도피유학에 오르다


 잘나가던 시절도 잠시,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은 그의 가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윤웅렬과 윤치호는 모두 급진개화파 인사들과 친한 사이였지만, 정작 정변 참여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일단 둘 모두 갑신정변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정변 계획을 알고서도 입을 닫는 등 어느 쪽이라고 보기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게 됩니다. ㅡㅡ; 어쨌든 양쪽에서 줄타기를 절묘하게 한 덕에, 윤웅렬 부자는 개화파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윤치호가 급진개화파와 친한 사이라는(실제로도 내심으로는 정변 성공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게 걸릴 수밖에 없었고, 윤치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가 고종의 허락을 받아 도피유학길에 올랐습니다(실제로 고종은 윤치호의 신변에 몇 차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를 상당히 아꼈던 듯). 윤치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중국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 대만 둥우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습니다.


[상하이 중서서원 건물의 현재 모습. 학교 자체는 둥우대학(東吳大學)으로 개명한 후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하이가 조선과 가깝다 보니 윤치호는 유학지에서도 보수파 자객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유학이고 뭐고 정상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떨어지자 울분에 잠겨 술과 성(性)을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됩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를 죽이러 간 암살자들은 윤치호가 반 폐인이 된 것을 보고 별로 위협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암살을 포기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ㅡㅡ;


 방황하던 윤치호는 종교에 귀의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의 설득에 감화된 그는 곧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활을 조금씩 고쳐가며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비참한 상태(특히 청인들의 불결한 위생관념)에 진절머리를 내고, 청과 다를 바 없던 조선을 하루빨리 근대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에모리 대학 유학시절의 윤치호. 우측은 <윤치호 일기> 자필본]


 중서서원에서 학업에 매진하던 윤치호는 1887년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후 다음 해 미국 유학에 올랐습니다(중간에 일본을 경유하면서 김옥균, 박영효와 만났는데, 윤치호는 김옥균이 사실상 정치적 폐인이 되어 여자관계에만 열중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잠깐만 당신은 상하이에서 어땠는데?).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와 신학 등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다시 조지아 주의 옥스퍼드 대학교와 에모리 대학교로 옮겨 공부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다지는 동시에,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체험(하나는 미국의 발전한 정치와 사회, 다른 하나는 극심한 인종차별)을 하게 됩니다. 윤치호는 합리성과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를 조선이 가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아시아인을 학대하는 미국인(나아가서는 백인)을 증오하며 아시아 중심의 인종주의에 경도되어갔습니다. 자신을 돕는 선교사들까지 은연중 자신을 차별하는 것을 보며, 그는 많은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윤치호와 마애방, 그들의 자녀들. 1902년 촬영]


 모멸감을 견디며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이후, 윤치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중서서원의 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로 건너온 김옥균을 다시 만났는데, 김옥균을 돕는다는 홍종우에 대하여 "스파이일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김옥균이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ㅡㅡ;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윤치호는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첫 번째 부인과는 1885년 이혼).




3. 독립협회에서 경술국치까지


 1895년 초 윤치호는 조선으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집안 전체에 기독교를 전도하고 가문 소속 노비를 전부 해방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정부 관료로 일하며 미국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그 해 10월에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12월에 춘생문 사건(일본의 위협을 피해 고종을 궁 밖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에 간접 연루되어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아버지 윤웅렬이 가담했기 때문인데, 윤웅렬은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윤치호는 막 미국에서 돌아온 필립 제이슨(서재필)을 만나 조선의 정세를 전하고, 그가 추진한 신문(독립신문) 발간 사업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다만 윤치호는 왕년의 개화파 동지 서재필이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변모하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에는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립 제이슨과 함께 일하던 윤치호는 고종의 명을 받고 민영환의 외교 순방(러시아 황제 즉위식 참석 등)에 수행원으로 동행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 앞줄 두 번째가 윤치호, 세 번째가 민영환]


 윤치호는 러시아와 유럽 각국, 베트남 등을 거쳐 1897년 귀국하였고, 직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습니다. 필립 제이슨, 개화사상가, 정부 관료들이 함께 모여 창립한 독립협회는 이 해 내부 의견충돌로 정부 관료층이 대부분 탈퇴(이들은 대체로 친러파였는데, 독립협회가 반러 성향을 보였기 때문)했고, 이후 잠시간 필립 제이슨이 회장직을 맡았다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운영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때 독립협회는 절정기에 올라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 등을 잇따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여기서 결의한 내용은 정부 정책에도 상당부분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에서 결의한 상소에 따라 '중추원'이 초기적인 의회 형태로 개편되고, 윤치호는 몇몇 정부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원에 선임되었습니다.


[경운궁 대안문(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수파 관료들과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고,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던 고종은 민권운동을 이끌던 독립협회를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결국 '황국협회'를 사주한 보수파의 폭력, 그리고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강제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나름 '민권운동'을 하는 자신들을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따라) 역적으로 매도하며 비난하는 다수 민중의 모습을 보며, 민중을 계몽하여 조선(대한제국)을 합리적인 근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은 민중을 계몽보다는 '개조'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 강제로라도 근대화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윤치호는 정부 관료로 평범하게 활동하였는데 주로 지방 행정직을 전전하였습니다. 강대국의 압박이 계속 심해지는 시국에 윤치호는 미국의 역할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미국 역시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방관하기만 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하자 윤치호는 거리로 뛰쳐나가 체결에 서명한 관료들을 성토하였으나 당연히 소용 없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아내 마애방이 출산 중 사망하는 개인적 불행까지 겹치며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는 관료 활동과 병행하여 민족 계몽운동 쪽에서만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대한자강회라든지, 신민회라든지 하는 단체들에서 활동했고(그나마 신민회의 경우 실질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이름만 걸어놓은 것에 가깝다고도 합니다), 이와 동시에 몇몇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신돌석 등의 의병장이 한국인의 밀고로 죽거나 체포된 것을 알고 나서는 이 민족은 답이 없다로 일관하게 됩니다. ㅡㅡ;




4. 일제강점기 초기의 행적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윤치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낙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귀족 작위를 받은 아버지 윤웅렬이 1911년 사망하자, 아버지의 작위는 또 별 말 없이 물려받았습니다. ㅡㅡ; 하지만 얼마 뒤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이름만 빌려줬든 어쨌든) 신민회 주요 인사 중 하나였던 윤치호는 도리없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함께 징역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귀족 작위는 박탈됩니다.


[105인 사건 때, 압송되는 관련 인사들]


 처음에는 일본의 전향 요구를 강경하게 거부하던 그였지만, 1915년 결국 친일 전향을 선언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윤치호의 이러한 심경 변화에 대하여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는데, 난생 처음 겪는 옥살이를 견디지 못했다는 설, 애초에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던 만큼 계속 일본에 저항하기는 심정적으로 어려웠으리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출옥 후 윤치호는 적극적 친일행위를 하진 않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사실상 손을 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여 피지배민족의 독립을 지지하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흥분에 휩싸인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윤치호는 윌슨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저건 승전국의 식민지를 위한 발언이 아니다"라며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3·1운동 역시 그는 참여나 협력을 거부하고, 오히려 "청년들을 앞세워 사지로 밀어넣었다"며 민족대표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래도 3·1운동 때 수많은 사람들(특히 청년들)이 참여한 데 나름대로 큰 인상을 받기는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도 그는 여기에 참여는 거부하지만, 그가 입수한 정보를 일본에 발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언론에 "조선이 자치와 독립을 얻고 싶으면 일본에게 잘 보여서 호의를 사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등, 도대체 뭐가 뭔지 알기 어려운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3·1운동 당시 사진]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체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희망(의 잔재), 당시의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적 현실주의, 한때 자신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일본에 대한 동경, 그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과 압도적인 힘에 대한 굴종 등, 상반되는 여러 생각들이 애매하게 뒤엉켜 있던 윤치호의 포지션은 독립운동가로도, 적극적 친일파로도 보기 어려운 애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가 천착한 것은 실력양성과 그에 이어지는 '자치론'이었습니다. 윤치호는 교육과 사회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가망없는 짓'으로 간주하고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1920~30년대 걸쳐 아버지와 가문을 통해 받은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운동과 교육활동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꾸준히 일본 당국의 회유를 받기도 했으나, 윤치호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을지언정 일본과의 적극적인 협력 역시 거부합니다. 여담으로 윤치호는 본래 여성 교육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셋째 아내(백매려, 1890-1943)와 딸들이 자신에게 비판적 언사를 일삼자 여성교육에 대한 회의론자로 돌아섰다고. ㅡㅡ;




5. 마침내 정신줄을 놓은 말년의 윤치호


 1938년 윤치호가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공갈 협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감시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아니 그렇게 똑똑한 양반이 그런 거 하나 눈치를 못 챘나? 한편 수양동우회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게 되자, 윤치호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당국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사실 사촌 윤치영(1898-1996)까지 잡혀간데다 자신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판국이었으니, 자신과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윤치호는 이후 일본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적극 친일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들었습니다. ㅡㅡ; 1940년 창씨개명 때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결국 문중회의를 열고 대다수 의견에 따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정합니다(이 때 윤보선 혼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결성되었고, 안창호와 이광수 등이 운영을 주도하였습니다. 1937~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해체당한 이후,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다수 회원이 친일 쪽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윤치호는 완전히 친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윤치호는 처음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일본의 세계정복, 혹은 미국의 승리)를 놓고 갈등하였고, 미국이 승리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그렇게 잘 맞던 그의 촉이 마지막 한 순간에 어긋났으니, 윤치호는 미국의 승리보다 일본의 승리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최종적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ㅡㅡ;


 이 때 윤치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신줄을 놓은 데 대하여, 혹자는 그가 유학시절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따돌림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상술했듯 유학 시절의 상처 때문에 윤치호는 서양 세계를 '경외'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이런 시각 때문에 그 서양과 일본의 싸움을 냉정한 시각으로 볼 수 없었으리라는 것. 아무튼 윤치호가 적극적 친일파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1943년 11월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윤치호의 학도병 참가 독려 기고문]


 이후 윤치호는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고, 중추원(이 때의 중추원은 총독부의 자문기관 겸 명예직으로, 고위 친일파에게 주어지는 자리) 참의직과 일본 제국의회 의원직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1945년 4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확대와 처우개선(?)을 감사하는 사절단의 대표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이미 그 시점에서 일본이 쫄딱 망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생각했든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일제강점기 막판 수괴급 친일파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전민족의 A급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윤치호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맞서 자신을 변명하였고, 속속 귀국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너희들 때문에 해방이 된 줄 아느냐?"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별다른 탄압을 받진 않았는데, 미군정의 태도(한국을 '점령지'로 간주한 것)에는 또 비판적 입장이었습니다.


[말년의 윤치호]


 물론 그가 아무리 "친일파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떠든다 한들, 30년 넘게 쌓인 사람들의 분노를 무마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친일파의 상징이 되었고, 개성의 자택이 괴한에게 공격당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의 압박과 해방 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1945년 11월 말 윤치호는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며칠 후 뇌일혈이 겹쳐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81세). 일각에서는 자살설도 있긴 한데 신빙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의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였다고 합니다. ㅡㅡ;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셀프디스? 아니면 고도의 자기변명?




6. 정리 : 그의 복잡한 삶을 도대체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 윤치호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천재이자 지식인 중 하나입니다. 그는 4개월만에 영어를 마스터한 어학천재였으며, 대다수 독립운동 세력의 낭만적 현실 인식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교육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민족 계몽에 투신한 활동가이기도 했고, 자신의 명망과 지위, 재산을 바탕으로 안창호, 이상재 등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성과 활동력이 결국 '자포자기'로 흘러버리곤 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본질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지만,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손을 놓아버리곤 했던 것입니다.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을 통틀어 윤치호는 그것들의 실체를 명확히 통찰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제대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상처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 또한 보였습니다. 윤치호가 미국 유학 시절 당한 온갖 차별과 폭력은 평생동안 상처가 되어 그의 사상에 그림자를 남겼고, 그는 자신이 겪은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인생 막판에 '반대 방향의 인종주의'를 선택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윤치호의 삶은 그와 동시대를 지낸 개화기 지식인 일반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끝까지 일본에 저항한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일본에 들러붙은 사람도 있으며, 항일에서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사람, 친일파에서 항일로 돌아선 사람 등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사상과 삶의 여정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화는 해야 할텐데, 정작 내부에서 그럴 동력은 없고, 관료들은 국가의 미래에 별 비전이 없고, 왕실은 교통정리를 할 능력과 의지가 없고, 시간은 없는데 외부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지고, 민중은 근대화 자체에 비협조적이었던 게 당시 한반도의 정세였습니다. 먼저 근대화된 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결국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파가 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소수는 아예 바다 저 멀리 떠나버리기도 했지요. 분명한 건, 그들은 분명 이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가능성을 사회를 위해 제대로 활용한 경우는 결코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윤치호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어학천재였지만 정작 그 재능을 한국의 언어를 위해서 거의 쓰지 않았고(당시 한국어 어휘가 시원찮다고, 국문으로 쓰던 일기를 영문으로 바꿔버렸을 정도), 세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으면서도 이를 단지 자신의 정신승리와 남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 넣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지식이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한국사료총서(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 中 <국역 윤치호 일기>




[2018. 5. 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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