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여론조사 결과 모음. 차이잉원(녹색) / 주리룬(청색) / 쑹추위(황색)]



1. 차이잉원(민주진보당) - 천젠런(무소속)


[차이잉원(左), 천젠런(右)]


"Light up Taiwan"


 - 차이잉원(1956-)은 現 민주진보당 주석(대표)로, 2012년에 이어 이번이 2번째 총통선거 출마입니다. 조상은 타이완 출신이나 조부와 부친은 대륙(정확히는 '만주국')에 건너가 활동하였고, 일본 패망 후 타이완으로 돌아온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습니다(이러한 경우를 반산(半山)이라 함). 종족적으로는 하카(객가) 계열이라고 합니다.


 - 자동차 수리업을 경영한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고, 대만대학 법학과를 졸업 후 코넬대학교 법학 석사, 런던정치경제대학 법학 박사를 취득하고 27세부터 타이완 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엘리트. 이후 리덩후이(1923-) 당시 총통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 리덩후이-천수이볜 정권에 걸쳐 대륙위원회 주임(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이 시기 중화민국군과의 관계가 상당히 좋아서 국방장관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동아시아에서 여성이 국방장관에 취임한 사례는 한 번도 없음). 리덩후이와 비슷하게 중국국민당 내 타이완 독립론자였기 때문에 2004년 탈당, 민주진보당으로 적을 옮겼고 이후 범록연맹의 유력 정치인으로 대권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합니다.


 - 2008년 선거에서 참패한 민주진보당의 새로운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당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였습니다. 이후 ECFA 체결 논란에서 반대파의 구심점이 되어 입지를 더욱 높였는데,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신베이 시장 후보로 출마했다가 선거 막판 큰 변수가 생기며 중국국민당 주리룬 후보에게 패배하여 기세가 꺾였습니다. 중국국민당 중앙위원 롄성원(前 부총통 롄잔의 아들)에 대한 총격 테러가 발생하며 여론이 중국국민당 쪽으로 쏠렸던 것.


 - 2012년 민주진보당 후보로 총통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마잉주 총통에게 패하여 낙선, 책임을 지고 주석직을 사임하였습니다. 다만 이후 마잉주 정부가 거듭되는 실정으로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면서 그 대항마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2014년에는 당 주석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얼마 뒤 지방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이 '기록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입지가 급상승, 차기 총통후보로 떠오르게 됩니다.


 - 마잉주 정부와 중국국민당이 여러 악재로 국민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라, 현재의 선거전은 차이잉원의 독주 체제로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범람계열의 두 후보가 단일화해도 차이잉원이 의미있을 정도의 차이로 앞서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범람연맹 쪽에서는 단일화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실정. 한때 민주진보당 계열의 스밍더가 출마를 시도하여 차이잉원을 긴장시켰으나, 서명 확보에 실패하여 나가리되면서 차이잉원의 위치는 강고하게 굳어졌습니다.


 - 차이잉원은 선거에 대해 매우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양안관계를 비롯하여 여러 쟁점에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아, 비판하는 쪽에서 '공심채(空心菜, 속이 빈 채소)'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지속되는 독주체제 또한 내부적으로는 경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반대파(범람연맹) 지지자의 결집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일단 ECFA는 반대, TPP는 찬성하고 있으며, 양안관계에서는 중도적인(혹은 애매한) 입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 후보 개인에 대한 논란이라면 친일파 논란과 동성애자 논란이 있는데, 전자는 만주국에서 활동했던 부친이 친일파라는 주장이며(제법 오래 된 논란이며 차이잉원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한 바 있음), 후자는 현재까지 독신인 차이잉원 후보에게 성적 지향성을 분명히 밝히라는 스밍더 쪽의 망발비난에서 촉발되었습니다. 여기에 차이잉원은 "애인과 사별 후 정치활동에 바빴다"라고 해명하였고, 이후 오히려 성소수자와 진보적 유권자의 지지도가 더 올라갔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 러닝메이트로 처음에는 천쥐(1950-) 가오슝 시장을 지명하려 했다가 성비(남-녀)를 맞춰야 한다는 당내 압력 때문에 나가리되었고, 이후 11월 16일 첸젠런(1951-) 중앙연구원 부원장을 지명하였습니다. 첸젠런은 국가과학위 주임위원(과학기술부 장관)과 위생서장(보건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2003년 SARS 대란 때 상당히 훌륭한 대처를 보여 신망을 얻은 기술관료입니다.


 - 여담으로 선거자금 모금에 '돼지저금통'을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200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의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입니다. 2012년 선거에서도 동일한 전략을 활용한 바 있습니다.


# 한국에 번역 출간된 저서 : <보통사람의 특별한 인생> 라이프맵



2. 주리룬(중국국민당) - 왕루쉬안(무소속)


[주리룬(左), 왕루쉬안(右)]


"One Taiwan"


 - 본래 중국국민당의 총통 후보는 입법원 부원장 훙슈주(1948-)였다가, 여론조사에서 3위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당하자 후보 등록 직전에 후보를 당 주석 주리룬(1961-)으로 전격 교체하였습니다. 사실 처음 총통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 주리룬이었으나 불출마 선언을 했던 바 있는지라, 결국 돌고 돌아 갈 사람에게로 화살이 도착한 셈.


 - 주리룬은 외성인-본성인 혼혈(?)이며, 국립대만대학-뉴욕시립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입법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한 이후 2001년에는 타오위안 현장(縣長)에 당선 후 재선, 2010년에는 신베이 시장으로 적을 옮겨 출마하였는데 하필 그 차이잉원 후보를 꺾고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때 상술했던 총격 테러사건의 덕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후 2014년 재선에 성공하였는데, 중국국민당 후보가 모든 직할시에서 낙선할 때 유일하게 당선된 사례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국민당의 마지막 희망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 지방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마잉주 총통이 주석직을 사퇴하자 2015년 1월 새로운 당 주석으로 추대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회담 등 정치적 행보를 착실히 밟아나가며 차이잉원 독주의 유일한 대항마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이번 선거는 무리라고 판단하였는지, 총통 선거를 불출마하고, 주석직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선언하며 중국국민당을 멘붕에 빠뜨렸습니다. ㅡㅡ;


 - 중국국민당의 후보는 훙슈주로 결정되었으며, 주리룬은 훙슈주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친민당 쑹추위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자 단일화를 제안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훙슈주의 지지율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고, 결국 쑹추위에게도 밀려 3위로 추락하자 당내에서 후보 교체론이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 당 주석인 주리룬은 이러한 당내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고, 중국국민당은 2015년 10월 훙슈주에 대한 후보 지명을 철회하고 주리룬을 총통 후보로 다시 지명했습니다. 일단 시진핑을 만난 이전의 행보나 그 때의 발언 등으로 보았을 때, 궁극적으로는 양안 통일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훙슈주가 후보시절 지나치게 급진적인 통일론을 주장하여 중국-미국 양측의 어그로를 끌었던지라, 주리룬은 일단 이에 대해 수위조절을 하고 있습니다.


 - 11월 13일부터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고, 워싱턴타임즈(통일교 소유의 미국 언론)를 통하여 "타이완이 중국에서 분리를 선언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ECFA와 TPP를 동시에 찬성하는 등, 중국국민당의 기존 노선을 충실히 반영하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후보 지명 이후 쑹추위의 지지율 하락과 함께 일단 2위를 탈환하긴 했지만, 어차피 2+3위로도 1위 차이잉원에게 밀리는 실정.


 - 11월 18일 왕루쉬안(1961-) 前 노동위원회 주임위원(노동부 장관)을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루쉬안의 장관 시절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개인적 부정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주리룬에게는 오히려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관 시절 '22000 정책'으로 불리는, 노동자 초임을 22000위안으로 억제하는 기업에 지원책을 제시하는 천하의 개쌍놈 정책을 시행하는 등 타이완 노동자의 소득 감소에 큰 공헌(?)을 했다는 비판에, 군인아파트에 대한 부동산 투기로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의혹이 그것.


 - 일단 왕루쉬안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불법행위는 아니었으나 부동산 투기를 통하여 취한 이득(1380만 위안)은 사회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런다고 여론의 시선이 크게 누그러지지는 않고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주리룬과 중국국민당의 상황에 또 하나의 짐이 되고 있는 실정.



3. 쑹추위(친민당) - 쉬신잉(민국당)


[쑹추위(左), 쉬신잉(右)]

"한 걸음을 내딛은, 함께 이 길을 찾아(跨出這一步, 一起找出路). 변화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改變,從自己開始)."


 - 쑹추위(1942-)는 세 번째로 총통선거에 3수 출마하였습니다. 객가 계열이며 후난 성 출신의 외성인으로, 아버지는 중화민국 군인 출신입니다. 국립정치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정치철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모교인 국립정치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행정원 신문국(국정홍보처)으로 적을 옮겨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 이후 1979-1984년에 걸쳐 신문국장(국정홍보처장 혹은 정부 대변인)으로 재임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비판이 많은데, 그가 신문국장으로 재임하던 1980년대 초반은 아직 중국국민당 독재가 유지되고 있었으며(당시는 장징궈 집권기), 이 시기 자행된 반체제 성향 언론에 대한 탄압, 하카어(객가어)와 원주민 언어 사용금지 등 언론탄압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이는 그의 출신과 더불어 본성인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고, 본성인 출신 총통인 리덩후이와의 갈등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 1988년 중국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이 되고, 1994년에는 첫 타이완 성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8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1998년 타이완 성의 행정 기능이 공식적으로 정지되었기 때문에, 쑹추위는 타이완 역사상 유일한 '민선(民選) 타이완 성장'이라는 특이한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중국국민당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게 됩니다.


 - 2000년 총통 선거에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하였으나, 당시 총통이었던 리덩후이는 부총통 롄잔(1936-)을 밀고 있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심한 반목을 낳았습니다. 쑹추위가 더 경쟁력 있는 후보로 꼽혔음에도 중국국민당 총통 후보는 결국 롄잔으로 결정되었고, 쑹추위는 이에 불복하고 탈당한 후 독자 출마를 선언해 버렸습니다(당시 리덩후이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에 대하여는,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가 역시 본성인 출신인 천수이볜의 당선을 바라며 X맨 짓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많습니다).


 - 결국 보수-외성인 표가 갈라지는 바람에 총통 자리는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후보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상처뿐인 총통선거 후 무소속이었던 쑹추위는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친민당)을 창당하였고, 후보 분열이 지난 총통선거의 패인이라는 게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2004년 총통선거에서는 롄잔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 부총통 후보로 출마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천수이볜이 의문의 테러를 당하는 바람에(자작극 의혹이 있음) 여론이 요동쳤고, 결과는 0.2% 차 패배.


 - 이후의 행보는 상당히 지리멸렬했는데, 2005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는 타이베이에 친민당 조직이 없어서 법적으로 무소속 출마가 되어버리는 촌극을 벌이며 ㅡㅡ; 4% 득표로 낙선, 2012년 총통선거에도 출마하였지만 이번에는 3% 득표를 하며 낙선. 타이완의 양당체제가 고착화되며 친민당 등의 군소정당은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었고, 친민당의 추락과 함께 쑹추위도 자연스레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 그런데 쑹추위는 2012년 다시 대권에 도전하였고, 중국국민당과 훙슈주 후보가 그야말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지지율을 자랑하는 상황에서 보수세력의 대안으로 주목받으며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출마 선언 때 공개한 TV 광고에서는 흑색선전을 이겨내겠다는 의미로 진흙 범벅이 되는 것을 감수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쑹추위 후보 TV 광고]


 - 출마 선언 이후 중국국민당 추락의 반사이익을 가져가며 지지율 2위로 부상하였고, 출마 선언 직후에는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에게 10여 % 차이까지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멘붕에 빠진 중국국민당 측에서는 단일화를 제안하였으나, 단일화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두 보수 후보의 지지율은 사이좋게 떨어져 어느새 둘의 지지율을 합쳐도 차이잉원에게 밀리는 상황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중국국민당에서는 후보를 주리룬으로 교체하였고, 쑹추위는 "단일화 X까"를 선언했습니다.


 - 쑹추위 측에서는 부총통 후보로 쉬신잉(1972-) 민국당 대표를 지명하였습니다. 쉬신잉은 신주현 출신으로, 국립자오퉁대학 토목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신주현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시의회(2005년)와 입법의원(2008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습니다. 2009년 중국국민당에 입당, 2012년에는 입법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중국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지만 2015년 양당체제 고착을 비판하며 돌연 탈당을 선언하였습니다. 탈당 후에는 민국당을 창당, 주석으로 재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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