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체사상'의 형성 : 중소분쟁과 독자노선


 - 시작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당 간부들을 상대로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주제의 연설을 하였는데, 이 연설의 요지는 "우리는 다른 어느 혁명도 아닌 조선의 혁명을 하는 것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일체의 사상 사업을 조선 혁명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1955년이면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이며 사회주의권의 분열이 표면화되기도 전이었으니, 이미 이 때부터 북한(적어도 김일성)은 일반적인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독자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소련과 중국의 내정간섭을 경험한 후 본격적으로 자주노선을 천명하기 시작했고, 주체사상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 주체사상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대전제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인간의 의지가 사회 변혁의 중심이라고 역설한 것. 그렇기 때문에, 주체사상에서는 개개 인간의 의지를 유발하는 것 - '사람 사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됩니다. 1958년부터 본격화된 천리마 운동이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 간부가 노동현장에 파견되어 군중을 지도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사람 사업을 통하여 군중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감상하는 인민의 삿대질]


 - 다만 '인간의 의지'를 중심에 놓았다는 것으로부터,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측면(생산과 노동)에 중심을 두고 사회를 해석했거든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공산주의와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셈입니다. 현재 북한의 체제가 '공산주의지만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중국과 소련의 대립이 1960년대 본격화되면서, 북한의 독자노선은 그야말로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북한은 중국-소련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요. 즉 양쪽 모두를 신경써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말 그대로 '줄타기 외교'를 벌이며, 내부적으로는 자주노선을 강화해 나갑니다. 북한은 본래 소련의 영향 하에 건국되었고 이후에도 소련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지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이 미국에 꼬리 내린 것을 계기로 북한은 친중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사진은 1969년 우수리강 일대에서 발생한 양국간 국경분쟁]


 - 하지만 흐루쇼프 실각 후 소련이 다시 스탈린 시절 노선으로 돌아가자, 북한은 다시 소련과의 친선관계를 강화하며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 때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후 중국이 문화대혁명 때 북한을 '수정주의자'로 강경 비난하는 등 북중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 두 고래의 등 사이에 끼어 있는 새우 한 마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어느 쪽도 섣불리 지지하기 곤란한 처지에서 북한이 선택한 것은 결국 독자노선이었습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자주외교를 표방하며 소련-중국 양측으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아 챙겼고, 내부적으로는 주체사상을 점차 교조화하게 됩니다.




6. 대숙청 파이날 :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


 - 김일성 중심의 만주파가 북한의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만주파도 하나로 묶여있던 건 아니었고, 내부에 '갑산파'라는 일단의 파벌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에 협력한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이었으며(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한 '조국광복회' 일원이라고 선전), 주로 개마고원의 갑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갑산파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금철(가운데)]


 - 갑산파의 리더 박금철(1912-?)은 보천보 전투 이후인 1938년 혜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고, 광복 이후 만주파의 일원으로 북한 건국에 참여하였습니다. 갑산파는 8월 종파사건 때도 김일성에게 협력하였고 이후로도 꾸준히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점차 심해지는 김일성 신격화에는 반대하였고 경제개발 문제에서도 김일성과 결을 달리하였습니다(경공업 우선 개발, 국방비 축소, 당 간섭 축소 등).


 - 김일성파와 갑산파의 대립은 1960년대 중반부터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김일성이 조선로동당에 조직지도부(주체사상의 요지를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아시겠지요?)를 신설하고, 조직지도비서에 동생 김영주를 임명하자 갑산파 쪽에서 크게 반발하였고, 박금철을 김일성의 대항마로 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박금철을 찬양하는 선전영화를 만들 정도였다는군요.


 - 당연히 갑산파의 행동은 김일성에게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유포'했다는 명목으로 박금철 등의 갑산파를 숙청하기에 이릅니다. 박금철은 민족 전통의 혁명사상, 특히 조선 후기 실학에 관심이 많아 당내에 <목민심서> 구독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바로 이것을 구실로 삼았던 것.


 - 김일성을 견제할 마지막 세력이 사라진 북한은, 김일성 신격화에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시작합니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도서정리사업입니다. 갑산파가 숙청된 1967년 조선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통칭 '5.25 교시')는 단순히 반대파의 인적 숙청만이 아니라,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통제를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이 직후부터 전국의 모든 서적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시작되었습니다.


 - 어느 정도였냐면, 북한 내의 모든 책이 말 그대로 페이지 하나, 글자 하나까지 샅샅이 검열 대상이 되어 김일성 신격화에 도움되지 않는 내용을 남김없이 삭제해버리는 수준. 심하게는 과학기술 관련 서적,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작(!!!!)까지도 금서로 지정되어 폐기 혹은 수거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를 포기한다!! 물론 삭제 대상인 여러 지식을 생산하는 인텔리 계층은 '혁명화'의 대상이 되어 개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 사실상 모든 지식이 초고속광역삭제된 자리를 채운 것은 (당연히) 김일성 관련 저작과 주체사상. 1970년대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북한의 유일한 사상체계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응? 나 불렀냐?]


 - 황장엽은 주체사상 이론을 정립한 공로로 1970년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장)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각설하고, 주체사상 이외의 모든 지식이 '금지'된 이후 북한은 <당의 유일 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현재는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으로 개정)을 제정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을 만나기 싫으니 전문 게재는 생략합니다. 간단하게, 북한 전체 사회가 김일성에게 충성하고 김일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을 분기점으로, 북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단적 통제사회로 완전히 변모하였습니다. 물론 이 정도의 극단적 사상 통제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될 턱이 없지요. 이후 1980년대 북한은 인민대학습당(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과 동일)을 건립하면서, 도서관에 비치할 책을 모으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주장으로는 여기에 장서가 3천만 권이나 된다지만 글쎄요(미국 국회도서관의 장서가 3천 2백만여 권)?


 - 여담으로, 주체사상은 웃기게도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예수 아래에서 믿는 자들이 지체가 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든다...... 저기에서 '예수'를 '김일성'으로 바꾸면 그냥 주체사상이거든요. 실제로 김일성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기독교 집안이었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반석'을 번역하면 '베드로')은 열렬한 안식일교회 신자였습니다. 외삼촌 강량욱은 심지어 목사였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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