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숙청 라이즈 : 8월 종파사건


 - 6.25는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휴전'이라는 어중간한 형태로 종결됩니다. 패전 책임을 정적들에게 떠넘기며 위기를 탈출한 김일성은 점차 자기 파벌에게로 권력을 집중시켜 나갑니다. 김일성의 정치적 롤모델은 스탈린이었으며 김일성이 목표하는 정치체제 또한 스탈린과 비슷한 '1인 중심 철권통치'였는데, 문제는 당시 소련에서 스탈린 비판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1인 중심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정세 변화를 등에 업고, 김일성의 만주파와 연안파-소련파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됩니다. 먼저 경제개발 방향에 대한 의견충돌(만주파=중공업 중심, 연안/소련파=경공업 중심)이 있었고, 김일성 1인독재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전쟁 이후 북한 정치의 주도권은 김일성파가 확실하게 잡은 상태였지만, 연안파와 소련파는 각각 중국-소련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 1956년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는, 김일성에게는 자신의 권력 장악을 대외에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대회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국내파) 계열에 대한 숙청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고, '반종파투쟁'이라는 명목으로 김일성에게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1957년)부터 시작될 5개년 경제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중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 당연히 이는 반대파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으며,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에 대한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에 나선 사이 이들은 반(反)김일성 운동을 전개하고자 소련의 암묵적 지원 하에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김일성파에 의하여 일찍 포착당했고, 김일성은 소련 대사에게 이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등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합니다.


 - 1956년 8월 30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마침내 대립이 표면화됩니다. 먼저 발언권을 얻은 김일성파는 상업성과 직업총동맹 등 연안파가 장악한 기관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상업상 윤공흠(연안파)이 발언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입을 열자마자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경제정책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윤공흠의 발언이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김일성파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지자, 참다 못한 김일성파 사람들은 윤공흠에게 달려들어 그를 억지로 단상에서 끌어내려 버렸습니다.


 -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 이미 중앙위원회 위원 과반수는 김일성파였고,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로 상황이 불리해졌음을 깨달은 윤공흠과 서휘(직업총동맹 위원장)는 그 길로 회의장을 나가 중국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후 속개된 회의에서 부주석 최창익(연안파)과 부총리 박창옥(소련파) 등이 발언을 이어갔지만, 이미 장내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김일성파 쪽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 결국 회의는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역관광ㅡㅡ;으로 마무리되어,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등 연안-소련파 주요 인사들에 대한 출당과 당직 박탈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김일성도 해외 순방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하여, 권력투쟁은 김일성파의 완승으로 쉽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펑더화이와 김일성 세상에서_제일_어색한_사진]


 - 그런데 이 결과에 소련과 중국이 노발대발하여, 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과 펑더화이(1898-1974)를 단장으로 하는 연합 대표단을 파견해버립니다. 소련 부총리 미코얀과 중국 부총리 펑더화이(심지어 이 사람은 김일성과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가 함께 강림하자, 어떻게든 자신들의 행동을 해명하려던 김일성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최창익에 대한 출당 조치를 철회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파는 최창익의 복권은 차일피일 미루면서, 반대파의 주요 인물들(김두봉, 오기섭 등)을 '종파주의자' 명목으로 체포하거나 공직에서 해임하였습니다. 그렇게 2년여가 지나자, 김일성에게 하늘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스탈린 사후 심화된 소련과 중국의 대립이 1958년경부터 본격화되면서, 두 나라는 북한의 내정에 관여할 여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 두 나라가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포섭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양국 모두에 줄을 대며 줄타기를 시전하였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무마시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국으로부터는 내정간섭에 대한 사과까지 받아낼 정도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죠.


 - 결국 연안파와 소련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은 남김없이 숙청당했고, 소련과 중국은 각각 자기 쪽 파벌의 인사들을 자기 나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김일성의 무쌍난무를 방관하였습니다. 피의 숙청은 1960년경까지 계속되었고, 소련이나 중국으로 망명한 일부 인사 외에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김일성의 반대파와 그 일족을 숙청하고 사회와 격리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 김일성은 이렇게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8월 종파사건'의 전말입니다. 여담으로 이 때 강대국의 내정간섭을 겪은 경험 때문에 김일성은 '주체적 통치'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주체사상의 뿌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4. 전후복구와 천리마운동 : 북한의 짧은 리즈시절


 

[폭격으로 초토화를 넘어 '평탄화'된 원산과 흥남]


 - 6.25 전쟁의 결과, 남북한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특히 북한은 3년간에 걸친 폭격으로 멀쩡한 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공군력은 전쟁 내내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사망자도 더 많았으며, 월남 인구가 수백만에 달했기 때문에 북한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반면 전후 복구는 오히려 남한에 비해 빨랐는데, 이는 소련이나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주로 식량 등 소비재 중심으로 원조를 받은 남한과 달리, 북한은 사회주의권 지원 아래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함흥의 경우 거의 통째로 소련과 동독의 지원 아래 재건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독 대통령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주의 형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북한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물론 이 과정에서 북한 인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북한은 전쟁 피해의 책임을 교묘하게 미국과 남한에게로 돌려 인민의 재건 의욕을 고취시켰고, 외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재건사업에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불과 전후 3년여만에 전쟁 피해의 완전복구를 선언하고, 농업의 협동농장화도 단기간에 완료하기에 이릅니다.


 - 위의 1956년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는 전후복구의 완료를 보고하고, 본격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 '중공업 중심+경공업, 농업 동시발전'이라는, 북한 경제의 기본 방향이 확정되었습니다. 주민 동원체제로 큰 재미를 본 북한은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위하여 전 인민의 총동원체계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천리마 운동입니다.


[천리마 운동 선전 포스터. 너 강제노동]


 - 천리마 운동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당(조선로동당)에서 지도 일꾼을 파견하고, 이들이 군중과 고락을 함께하며 사상 등을 교육하여 군중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유도해내는 것. 즉 경제개발에 있어서 상하간 유기적 협조, '사람 중심의 사업'을 통하여 대중을 경제개발에 동원하고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1960년 2월 평남 강서군 청산리로 직접 현지지도를 떠나,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하며 이러한 원칙을 공식화합니다('청산리 방법'으로 명명).


[청산리에서 현지지도 중인 김일성]


 - 천리마 운동은 실제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북한의 경제 5개년계획은 사실상 천리마 운동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1961년까지 본래의 계획보다 훨씬 큰 실적을 올리게 됩니다. 이 결과 1960년대 초의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압도하였고, 사상교육의 결과 사회 규범이 잘 확립되어 동네에 도둑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만 해도 김일성 신격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 당 기관지 <로동신문>에 독자투고란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 이렇게 북한은 전쟁의 피해를 극복한 것을 넘어,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먼저 한 발 앞서나갔습니다. 당시의 북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60년대를 북한 최고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장밋빛처럼 보인 북한의 발전 뒤에는, 훗날 북한의 몰락을 불러오는 암세포들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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