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자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그랬다" "모두가 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등등의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곤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친일파 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협력 사실 자체를 반성하지 않고 정당화 · 합리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개적으로 참회한 사람들도 있긴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쪽이 당연한 것인데도, 공개적으로 반성을 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슬픈 현실이겠지요. 이번 글에서는 일본에 굴복하여 협력하였지만, 해방 이후 "나의 사지를 찢어달라"며 대중 앞에서 잘못을 뉘우친 최린(1878-1958)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최린]



1. 민족대표 33인, 천도교의 지도자


 -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고, (당연하게도) 어릴 때는 한학을 배우다가 한양으로 이주한 후에는 개화파 청년들과 어울리며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의 하급 관료로 일했는데, 이 무렵 개화파 망명자들과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일심회'어디선가 들어보셨다면 그것과는 다른 단체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04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본격적인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 제1중학을 거쳐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차별적 행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퇴학당하거나 체포당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최린은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1861-1922)와 교류하였고, 이를 계기로 1909년 귀국 후 천도교에 정식 입교하였습니다.


 - 최린이 귀국한 시기는 대한제국 멸망 직전이었고, 최린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는 등 국권 수호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병합 이후에는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는데, 천도교계 재단이 운영하는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고등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전경. 1917년. 출처]


 - 1910년대 후반부터 주로 해외 교민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이 잇따랐고, 이것이 일본의 통제를 뚫고 국내에 전해지면서 국내에 남아있던 지도자들도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 천도교계의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은 은밀히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였고, 여기에 불교, 기독교(개신교)계가 합세하면서 소위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됩니다.


 - 이들은 독립선언서 작성을 최남선에게 맡기고, 때마침 고종이 사망하자 고종의 장례일(인산일)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인쇄소가 친일경찰 신철(?-1919)에게 발각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신철이 독립선언서를 보고도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최린은 급히 신철을 만나 설득하였고, 신철은 그 설득을 받아들여 입을 다물고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버립니다.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일은 이틀 앞당겨져 3월 1일이 되었고, 그 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들 아시겠지요? 민족대표들은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를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한편 최린의 설득을 받아들인 신철은 3·1운동 발발 이후 이를 은폐하였음이 발각되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기 직전 음독자살하였습니다.



2. 민족대표에서 민족반역자로


 -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된 최린은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얼마 전에 출소하였습니다. 그 무렵 손병희가 (수감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최린은 천도교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수감생활 도중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1920년대 이후 최린은 다분히 개량주의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 한편 손병희 사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게 되었는데, 최린은 천도교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천도교 교단이 봉합과 재분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최린은 1929년 천도교 도령(교령)에 취임하여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이미 개량주의와 자치론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의 그는 조금씩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 한편 최린은 1927~28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외교 활동을 수행하였는데, 이 와중 프랑스 파리에서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일본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김우영(1886-1958)과 결혼한 상태였으니, 빼도박도 못할 불륜이지요. 결국 둘의 행각이 김우영에게 발각되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혼하였고, 불륜의 다른 한 쪽 당사자인 최린은 정작 나혜석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역대급 스캔들의 세 등장인물. 왼쪽부터 나혜석, 김우영, 최린]


 - 이에 나혜석은 '정조 유린죄' 명목으로 최린을 법원에 고소하였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송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혜석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파격적인 성평등론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소송은 결국 나혜석의 패소로 끝났지만, 이미 최린은 멀쩡한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으로 사회의 조롱과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 개인사로 큰 곤욕을 치른 이후, 최린은 본격적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1933년 무렵부터 최린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1934년에는 일본의 회유를 받아들여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됩니다. 같은 해 천도교 신파 지도자들과 함께 '시중회'를 결성하였으나 이는 말만 종교단체이지 실질적으로 친일단체였습니다. 


[최린이 매일신보(1940년 2월 11일자)에 기고한 글. 내선일체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다]


 - 이후 해방 때까지 최린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니 '조선임전보국단'이니 하는 일본 관제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고, 각종 강연회와 언론 기고 활동을 벌이는 등 A급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양심(?)이 남아있었던지 당시 성북동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왕년의 동지 한용운(1879-1944)의 딸에게 생활비를 건네주었지만, 한용운이 이를 알자마자 "더러운 돈은 필요없다"며 내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3. 해방 후의 참회 - "광화문 앞에서 내 사지를 찢어달라"


 - 한반도가 해방을 맞자 최린은 다른 민족반역자들과 함께 거국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그가 천도교 지도자였기 때문에 천도교 내부에서 강한 비판이 일었고, 교단 내부에서는 최린이 민족반역자로서 갖은 죄를 범했으니 책임을 통감하고 은퇴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최린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빡친 교단에서는 최린을 천도교에서 영구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ㅡㅡ;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최린(우측). 좌측은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 그렇게 욕을 먹으며 그냥저냥 살아가던 최린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특위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면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재판 때 다음과 같은 최후변론을 남겼습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내가 반민족 행위에 대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내 사지를 소에 매달아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형을 집행해 달라. 그렇게 하여 민족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 사실 이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는 다른 민족반역자들이 재판에서 보인 뻔뻔스러운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반민특위는 다들 아시다시피 온갖 난리 끝에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최린은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끝에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됩니다. 당연히 처벌은 없었지요.


 - 이후 건강 문제도 있고 하여 최린은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린은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당했고, 북한에서 대남 선전기관에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고, 북한 체제에 협력을 거부하였으니 대충 짐작이...... 1958년 사망한 것만 확인되어 있습니다. 1962년 남한에서 최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 하였으나, 친일행위가 너무 명백하여 ㅡㅡ; 무산된 바 있습니다.



4. 정리 : 결국 반성한 자는 소수였다


 - 나혜석은 최린과의 불륜과 소송전 이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고, 파격적인 여성해방운동을 벌였지만 사회적인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협력도 거부한 나혜석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해방 직후 무연고자 병동에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반면 그의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불륜 상대였던 최린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해방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참 얄궂은 운명입니다.


 - 사실 최린이 해방 후에 진심으로 반민족행위를 반성했다지만, 블로거는 최린의 참회를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반민특위 재판에서 자신의 죄상을 자복하기 전 최린은 천도교계의 비판에 정면으로 반발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바도 있습니다.


 -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최린은 자신의 죄를 입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벌할 것을 '공개적'으로 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어쩔 수 없는 것' 또는 '민족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 "우리를 정죄하는 자들은 다 빨갱이들"이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서기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린의 '소박한' 참회조차도 확실히 눈에 띄기는 합니다.


 - 슬프게도, 이러한 참회를 한 사람조차도 최린을 비롯해 몇몇밖에 없었다는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방법조차도 사라지는 바람에, 왕년의 민족반역자들은 이후 반공투사니 기업인이니 교육자니 하는 미명으로 그대로 사회 기득권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유증은 그들이 대부분 사망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3·1운동 직전에 벌어진 최린과 신철의 일화입니다.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였지만 후년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최린, 친일경찰의 대선배로 한국인 탄압에 앞장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신철. 최린은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 모두 이름을 올렸고, 그곳에 신철의 이름은 없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http://egloos.zum.com/history21/v/971195 (최린과 신철)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21/2015042104138.html (최린과 나혜석) 댓글은 보지 않기를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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