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건국해놓고 보니 개판


 - 응오딘지엠이 성공적으로 권좌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남베트남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계속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정권이 바뀌었다보니, 내부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파벌(작게는 학연, 지연으로부터 크게는 왕당파도 있는 등등)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응오딘지엠은 이러한 혼란상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족과 측근세력을 정부 요직에 대거 앉혔습니다.


 - 그런데 이래놓고 보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응오딘지엠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고, 새로 등용한 친척이나 측근들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겁니다(당시 베트남의 기득권인 지주 계층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았음). 이건 그냥 봐도 문제인데, 하필 베트남이 불교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게 문제를 더 키워버렸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전국민의 90%를 넘었습니다.


[호치민(사이공) 노트르담 성당]


 - 이렇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독재와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민중이 원하던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 속에 흐지부지되었고, 이승만이 이거 하나는 정말 잘 한 겁니다...... 나름 미국의 지원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것이 대다수의 민중에게 제대로 분배될 턱이 없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남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막대한 토지와 이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도강 중인 베트콩 부대]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 내의 베트민 지지세력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을 형성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은 착취와 부정부패에 지칠 대로 지친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베트남 정부를 끊임 없이 괴롭혔습니다. 이런 썩은 국가의 군대도 제정신이 박혀있을 리 없어서, 남베트남군은 무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반정부 게릴라 하나 제대로 상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5. 틱광둑의 소신공양과 쩐레수언의 패드립


 - 이런 지옥도가 몇 년 이상 흐르면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국내 각계 각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 성향 정부 하에서 불교기(旗) 게양조차 금지당할 정도의 탄압과 차별을 당해온 불교계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정부는 수십 명의 사망자까지 내며 강경진압을 일삼았습니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장면(칼라를 첨가한 흑백사진). 잔인한 장면일 수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의 저명한 고승 틱광둑(1897-1963)이 소신공양(분신)을 감행하며 남베트남의 참상이 전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63년 6월 11일, 승려들의 침묵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틱광둑은 다른 승려들의 협조로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하였습니다. 이는 사진과 영상을 통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인은 '반공의 선봉장'이 아니라 '독재와 부패의 지옥'을 목도하였습니다.


[쩐레수언]


 - 물론 응오딘지엠 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며, 특히 응오딘지엠의 제수(동생 응오딘뉴의 아내. 통칭 '마담 뉴')이며 부정부패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쩐레수언(1924-2011)이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도 과격한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쩐레수언은,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에 남을 패드립을 시전하였습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불교 지도자들이 한 게 대체 뭐가 있나요? 그들이 한 거라곤 승려 한 명을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실제로 한 말





 - 이 발언은 남베트남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분노를 당연히 샀고, 어떻게든 응오딘지엠을 밀어주려 했던 미국은 마지막 인내심마저 접고 응오딘지엠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6. 대 쿠데타 시대가 열리다


 - 몇 달 지나지 않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군의 즈엉반민(1916-2001) 장군은 미국의 묵인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미국으로 망명시킬 계획이었지만, 정작 응오딘지엠 본인은 망명을 거부하고 대통령궁에서 동생 응오딘뉴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정작 패드립의 주인공 쩐레수언은 유유히 미국으로 도망).


 - 이것으로 남베트남의 혼란이 종식......될 리가 있나. 이때부터 남베트남은 허구헌날 벌어지는 쿠데타로 더욱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의 주역 즈엉반민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동료 응우옌칸(1927-2013)의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가,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가 그나마 좀 오래 집권했다가, 베트남 전쟁 막판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나고...... 웃기게도 이 혼란상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첫 쿠데타를 일으킨 즈엉반민이었습니다. ㅡㅡ;


[그나마 오랫동안 권력을 지킨 응우옌반티에우]


 - 이렇게 쿠데타가 빈발하던 시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는 게 이 상황의 막장성을 더합니다. 미국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시작하였고, 남베트남군에도 많은 지원을 퍼주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라고 준 거였는데, 남베트남군은 전쟁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쿠데타를 일으키기 바빴으니 제대로 전쟁 수행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ㅡㅡ;


 - 그나마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대부분 응우옌반티에우 집권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역시 별로 유능한 인물은 되지 못했고, 지속되는 부정부패와 남베트남군의 거듭된 삽질을 어떻게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전쟁 막판에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글쎄요 그들이 딱히 누굴 욕할 처지가...... (계속)



 - '마다가스카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평소 세계지리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 한 번 들어봤기 힘들 그런 나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동남부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로, 마다가스카르 섬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며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합니다. 근대 이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당했으며 1960년 독립하였습니다.

 -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매우 특이하게도, 바로 옆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라 거의 지구 반대편인 동남아시아-태평양 쪽에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언어인 '말라가시어'는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등을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 어족'(대만 원주민 언어를 기원으로 하며, 동남아시아 남부와 태평양 일대에서 사용된다)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인도양의 끝에서 끝까지 횡단했을지는 미스테리인데, 이 어족이 반대편으로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나 이스터 섬까지 퍼져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항해술로 충분히 가능은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 라치라카 : 독재와 경제난

 - 아무튼 마다가스카르는 독립 이후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사회주의 성향의 일당 독재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역시 아프리카 상당수 나라들이 그랬듯이) 잦은 군사 쿠데타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199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다당제 민주 공화국이 됩니다. 1976년부터 장기 집권 중이던 디디에 라치라카(1936~)는 헌법 개정 이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해먹다가, 1993년 알베르 자피(1927~)와의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게 됩니다.

 (사진 1 : 디디에 라치라카)


 - 하지만 자피 정권은 라치라카를 압도(?)할 만큼 무능하였고, 사회가 갈수록 난맥상에 빠지는 속에 자피는 탄핵당하고 정치적 혼란 끝에 라치라카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재집권한 라치라카는 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지만, 얼마 뒤 동아시아 경제 위기(우리의 기억엔 그 이름도 찬란한 IMF...)를 계기로 외국 자본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마다가스카르 경제는 완전히 붕괴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마크 라발로마나나(1949~)였습니다.



 (사진 2 : 마크 라발로마나나)


 - 라발로마나나는 젊은 시절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 생산에서 시작하여, 마다가스카르 굴지의 대기업을 설립한 기업가였습니다. 그는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999년 안타나나리보(마다가스카르의 수도) 시장에 선출되었고, 이 시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1년 대선에 출마하여 라치라카와 경쟁하게 됩니다(대한민국의 어떤 전직 대통령이 생각나지만 넘어가기로). 투표 결과는 라발로마나나 46%, 라치라카 40%로 규정상 결선투표를 시행해야 했으나, 라발로마나나와 그가 소속된 TIM 당은 선거가 공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자신이 과반 득표를 했다고 주장, 결선투표를 거부하고 자신이 당선되었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 졸지에 마다가스카르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한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여론은 라발로마나나 쪽으로 쏠려 있었고, 헌법재판소 역시 라발로마나나의 손을 들어주고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쯤 되자 궁지에 몰린 라치라카는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시도하나,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하는 쿠데타는 그야말로 처참히 실패하고, 라치라카 본인은 외국으로 도망치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 라발로마나나 : 신자유주의 드라이브


 - 라발로마나나는 대통령 취임 이후 강력한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라는 게 신자유주의 성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 외국 자본에 대한 전면적 개방, 친 기업적 조세 정책, 대규모 토목 사업, 민영화 등......의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이는 빈부 격차의 심화 등의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IMF의 경제 지원이나 외국 자본의 투자를 실제로 얻어내는 등 어쨌거나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이 가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다음 대선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 하지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2007년 대통령의 권한을 지나치게 강화한 헌법 개정을 관철시키는 등, 점차 독재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기에 그의 임기 동안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극심해졌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다가스카르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엄한 소리를 해서(어 이거 진짜 누구하고 똑같다;;) 위헌 논란에 휩싸이는 등,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마다가스카르 인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안드리 라조엘리나(1974~)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안타나나리보에서 DJ로 활동하던 그는, 당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통해 시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오죽하면 거침없다고 해서 별명이 TGV). DJ로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2007년 안타나나리보 시장 선거에 출마한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쪽에서 깜짝 놀라 대항마로 출마시킨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눌러버리고 시장에 당선됩니다.



 (사진 3 : 안드리 라조엘리나)


# 라조엘리나 vs 라발로마나나, 그리고 대우로지스틱스


 - 거칠 것이 없어진 라조엘리나는 자신의 별명을 따 TGV 당을 창당하고, 정부의 언론 통제에 맞서 '비바TV'라는 독립언론을 설립하여 대놓고 라발로마나나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라발로마나나 정부는 안타나나리보에 들어가는 모든 정부 지원을 끊어버리는 무리수를 두었고, 누가 봐도 대놓고 라조엘리나를 억압하는 형세가 되자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민심이 더욱 라조엘리나 쪽으로 쏠리는 결과만 낳게 됩니다.


 - 이 와중에 마다가스카르 전체를 뒤흔들 초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정부가 한국의 대우로지스틱스(이하 대우)에게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농장 경영을 위해 99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대우가 임대 경영에 대한 대가조차 사실상 거의 지불하지 않는 조건이었고(선금 정도는 있었는데 줄 생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대우가 임대한 토지는 총 130만㏊에 달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마다가스카르 전체 농경지의 절반을 넘는 규모라고 합니다.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정부에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 이 문제가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를 제외하면 언론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오히려 외국 쪽에서 더 큰 사건으로 조명을 받았는데, 신식민주의적 경제 침략이라는 비판과, 엄청난 규모의 농장 개발을 통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것입니다. 가치 판단은 독자들께 맡기겠지만, 적어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된 사건이며 한국의 농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문제에 대해 언론이 지나칠 정도로 침묵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 정부는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고, 라조엘리나는 대립의 수위를 더욱 높여갔습니다. 더 나아가 라조엘리나의 비바TV는 아예 정부에 대놓고 BJR(배째라)을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 전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그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으로 내보낸 것입니다. 라치라카는 라발로마나나에 대항해 쿠데타까지 일으켰던 인물이니, 정부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 방아쇠가 당겨지다


 - 결국 참다못한 정부는 보안군을 투입하여 방송국을 급습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프랑스 대사관저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한 라조엘리나는 본격적으로 안타나나리보 시민들에게 정부에 대항할 것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동시다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는 슈퍼마켓과 친정부 언론사를 습격한 후 대통령궁을 향하여 행진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통령궁을 지키던 군부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에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즉시 사임을 요구하였고, 정부는 라조엘리나를 국가반역죄로 법정에 고발하는 등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 곳곳에서 군부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늘어가는 와중에 극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국방장관이 시민에 대한 발포에 항의하여 장관직을 사퇴하고, 군부는 더 이상의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오히려 시위대 쪽으로 돌아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총구를 돌린 군대는 곧바로 대통령궁을 장악했고,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권한을 군부에 이양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군부는 이 권한을 다시 라조엘리나에게 이양,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가 사라진 마다가스카르의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하고, 곧바로 사태의 도화선이었던 대우와의 계약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사진 4 :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궁으로 향하는 라조엘리나)


@@동영상 링크 - BBC


 - 여기까진 순조로워 보이지만 라조엘리나의 대통령 취임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마다가스카르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연령 제한이 40세였기 때문에, 34세에 불과한 라조엘리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지만 법정의 판결과 헌법 개정을 통하여 대통령 자리를 인정받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발로마나나 지지파는 극력 반발하였고, 이들의 보이콧 운동으로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50% 투표를 간신히 넘기며 가까스로 통과됩니다. 이 외에도, 어쨌거나 쿠데타라는 과정을 통한 집권이었다보니 세계 여론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질 않았습니다. 단적으로 아프리카 연합은 그의 집권 과정을 문제삼아 마다가스카르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고, 서방세계의 경제지원도 잇따라 끊어지게 됩니다.


# 세 사람의 이전투구泥田鬪狗, 그리고 (아직은) 현재진행형


 - 라조엘리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제이콥 주마의 중재를 받아들여 망명 중인 라발로마나나와 회담을 가졌고, 둘 모두 차기 대선에 불출마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난데없이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던 라치라카가 돌아와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고, 이에 라조엘리나는 합의를 뒤집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고 말을 바꿔 버립니다. 당연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아내인 랄라오 라발로마나나(1953~)를 내세워 대선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 사태가 점점 개싸움으로 흘러가자, 국제적 여론 또한 최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특히 마다가스카르를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프랑스는 세 명 모두의 불출마를 강력히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대선 자체를 인정치 않겠다고까지 말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당국은 세 명의 후보 등록을 모두 불허하였고, 예정보다 미루어진 2013년 12월 마침내 대선이 치루어지게 됩니다. 결선투표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라조엘리나 정부에서 재정장관을 역임한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1958~)가 라발로마나나 계열의 장 루이 로빈슨(1952~)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사진 5 :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나나 현 대통령)


 - 국제사회는 이 선거 결과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내렸는데,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대통령이 라조엘리나 전 대통령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달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해피엔딩......이라 말하고는 싶은데, 아직까진 섣불리 마무리짓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망명 중이던 라발로마나나는 2014년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었는데, 2009년의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라발로마나나 측은 정치보복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중. 한편 라조엘리나 역시 차기 대선에 재출마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하니, 모든 상황의 종결까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ps. :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 현 대통령의 풀네임은 'Hery Martial Rakotoarimanana Rajaonarimampianina'로, 현재 세계 국가수반 중 가장 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한국어판 -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마다가스카르 정치위기 사태"

위키백과 영어판 - "Andry Rajoelina" "Marc Ravalomanana" "Hery Rajaonarimampianina" "Didier Ratsiraka"

엔하위키 미러 - "마다가스카르 혁명"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1/03/0505000000AKR20140103197300099.HTML

http://www.voakorea.com/content/article/1732196.html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kia&articleno=15852543&categoryId=599183&regdt=2009031800404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