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 식민지 베트남과 독립운동

 - 베트남은 1857년부터 정확히 30년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후 기존 왕조(응우옌(阮) 왕조)는 '존속'은 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가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한 방에 날아간 이후, 사실상 관리 불능 상태가 된 인도차이나 반도를 낼름 집어먹은 건 다름아닌 일본 제국.

[사이공에 입성하는 일본군]


 - 일본은 처음에는 군대 주둔과 관련 시설 이용권 확보에서 시작하여 1945년 3월에는 프랑스 총독부를 완전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명목상' 황제인 응우옌푹티엔(바오다이保大, 1913-1997)을 역시 '명목상' 황제로 앉혀 베트남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 동남아시아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대규모 식량 수탈을 자행했고, 여기에 연합군 공격으로 인한 교통난까지 겹쳐 1945년 초에는 200만여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까지 발생했습니다.

 - 당연히 프랑스 식민 시기에도, 일본 식민 시기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식민제국 프랑스가 일본에게 굴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사기탱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호찌민(1890-1969) 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월맹))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본과 프랑스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확장한 베트은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무섭게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 하지만 해방도 잠시, 중국(중화민국)군과 프랑스군(프랑스군 진주 이전에는 영국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베트남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베트민, 중국, 프랑스는 1946년 초 베트남 독립 문제에 관해 합의를 보았으나, 여기에 대한 의견차이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재개되면서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됩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당연하게도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프랑스가 압도적이었는데, 여기에 대항하여 베트민은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며 농촌과 지방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민에 의해 쫓겨나 외국으로 도망친 바오다이를 다시 불러와, 남부 최대도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를 만들었습니다. 

 - 그런데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공세력의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도 사회주의 세력의 손에 떨어진 마당에, 사회주의 성향의 베트민이 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이에 사회주의권의 소련-중국은 베트민을 지원하여, 전쟁은 점차 국제전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프랑스군은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1953년 들어 베트민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진격할 태세였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거점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베트민군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디엔비엔푸는 험준한 산악지대 가운데 분지 지형이었기 때문에, 베트민군이 들어올 길이 제한되었습니다(라고 프랑스군은 생각했습니다).

[디엔비엔푸의 대략적 위치]


 - 이는 육상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데다 산악지대를 베트민군이 확보하면 프랑스군이 그대로 포위되는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주변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대포 등의 중화기를 부품 단위로 분해, 인력과 자전거 등을 이용하여 산 위까지 실어날라 다시 조립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성을 선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 산 위에서의 포격에 물자수송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하필 그 산은 정글이 우거진 곳이기까지 해서 공습으로 베트민군을 쫓아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비행장까지 점령당하자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1만 6천 명 중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습니다. 베트민군은 포로를 상당히 가혹하게 대우해서, 최종적으로 풀려난 프랑스군 포로는 3천여 명에 불과했다는군요(다만 베트민에서는 프랑스군의 베트남인 학살을 들먹이며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디엔비엔푸에 입성하는 보응우옌잡]


 - 결국 북부는 완전히 베트민의 손에 들어왔고, 프랑스군은 GG를 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954년 제네바 합의(한국전쟁 정전 문제가 논의된 그 회의)에서 프랑스군 완전 철수, 2년간 한시적 정전선 설정 이후 1956년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 등의 내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사라진 무대에,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3. 남북분단과 베트남 공화국 건립

 - 일단 2년 후 총선거가 실시되면 베트민이 정권을 잡을 것은 거의 확실했고, 이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정전선으로 결정된 북위 17도 이남에는 일단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미국의 후원 하에) 다시 들어섰고, 베트남국과 미국은 합의 내용 중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오딘지엠]


 - 다만 바오다이는 사실상 바지황제(?)였고, 미국이 밀어준 실세는 총리에 임명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1901-1963)이었습니다. 응오딘지엠은 이전에도 바오다이 정부의 각료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항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본 패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미국 등지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총리 응오딘지엠은 1년 후인 1955년, 국민투표를 주도하여 바오다이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 자세히 보면 뭔가 냄새가 나지요? 실제로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적극 밀어주었고, 그의 '선거 쿠데타'와 대통령 취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바오다이 정부가 자신들의 목적(동남아시아 공산화 저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우익 성향 인사이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커리어를 많이 쌓은(항일운동 등) 응오딘지엠에게 권좌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응오딘지엠]


 - 여기까지는 미국의 의도대로, 나름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공화국 또한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였고(아무리 그래도 총선거를 하면 남쪽이 이기기 어려우므로), 베트남의 남북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남베트남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였고 다른 하나는 응오딘지엠의 '종교'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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