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zio Clementi (1752-1832)
Piano Concerto in C major WoO12

 

무치오 클레멘티. 1794년

 무치오 클레멘티는 우리에게는 피아노 학원에서 배우는 <소나티네 앨범>에 많은 곡이 수록된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고 높은 실력을 요구하는 다수의 작품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동시대에 활약한 모차르트와 함께 피아노 연주자로 전 유럽에 명성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와 연주 대결을 펼친 적도 있지요. 특히 피아노 연주법 뿐 아니라 악기 개량에도 직접 관여하는 등, 당대 피아노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클레멘티는 이탈리아(당시 교황령)의 로마에서 출생하였고, 은 세공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카펠마이스터(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친척 안토니오 바로니(1738-1792)에게 음악 수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 9세 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3세 때는 오라토리오와 미사곡을 작곡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14세가 되는 1766년 클레멘티는 다마소의 산 로렌초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영국인 귀족 피터 벡포드(1740-1811)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클레멘티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국에 있는 자신의 장원에서 연주를 하는 대가로 숙식과 교육비를 후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클레멘티는 약 7년간 벡포드의 장원에 거주하며 음악 수업에 힘썼고, 1770년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첫 대중 연주회를 개최하여 음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벡포드의 후원 계약이 종료된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하프시코드 연주자와 극장 지휘자 등으로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간 그는 1780년 무렵이 되면 영국을 넘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정상급 음악가가 됩니다.

 클레멘티는 1780년부터 3년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연주 활동을 벌였는데, 빈에 체류하던 1781년 말 그 유명한 연주 배틀(?)이 벌어집니다. 음악가들을 적극 후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는 빈에서 건반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던 모차르트와 클레멘티를 초청하여, 각각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즉흥 연주를 펼치도록 공개 경연을 개최하였습니다(연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황제는 현명하게도(?) 무승부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경연 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를 호평하였는데, 모차르트는 클레멘티를 "실력은 뛰어나지만 너무 기계적"이라며 깠다고 하네요. ㅡㅡ; 아마도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중시하던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기교적이며 정형화된 연주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차르트가 클레멘티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오페라 <마술 피리> 서곡에 클레멘티의 피아노 협주곡의 모티브를 차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편 베토벤은 클레멘티를 매우 존경했고 그의 작품도 자주 연주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일입니다.

 연주 여행을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간 클레멘티는 음악가로서 활동과 함께 음악교육에도 힘썼으며, 존 밥티스트 크라머(1771-1858), 존 필드(1782-1837) 등 유명 음악가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1798년에는 악보 출판회사를 인수하였고 이후 피아노 제조업에도 진출하여 사업가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출판사는 베토벤 작품의 영국 내 독점계약을 체결하여 다수 작품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베토벤 작품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데 업적을 세웠지만 그의 악보를 일부 수정하는 등 손을 대어 뒷말이 좀 있기도 합니다.

 음악사(史)에서 클레멘티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근대적인 피아노 연주법을 확립한 것으로, 이에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직접 만들었기도 하고 그는 모차르트 등과 함께 당시 최신 악기였던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Gradus Ad Parnassum』이라는 피아노 연습곡의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베토벤, 체르니, 쇼팽 등 19세기를 풍미한 수많은 피아노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과 연주기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C장조는 1796년 작곡되었으며, 2년 전 출판한 피아노 소나타 Op.33 No.3을 협주곡으로 개작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영문 위키피디아 "Muzio Clemeti", "List of compositions by Muzio Clementi"
나무위키 "무치오 클레멘티"
https://blog.naver.com/chaos719kr/60048559988
"[클래식&차한잔] 무치오 클레멘티 소나티네", 조세금융신문(https://www.tfmedia.co.kr/), 2021. 10. 8.

 

Boris Pasternak (1890-1960)

Piano Sonata in b minor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때 음악가 지망생이었고 심지어 꽤 재능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요. 철학자, 대통령, 왕을 언급하였으니 이번에는 대문호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1862-1945)는 유대계 출신으로 톨스토이와 레닌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을 만큼 러시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역시 유대계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1867-1939)였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상당히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일찍이 톨스토이의 사상운동에 동조하였고, 그의 집에는 톨스토이 뿐 아니라 릴케, 라흐마니노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장 환경 속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처음 지망했던 길은 문학이 아닌 음악이었는데, 이는 물론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의 이웃에 살았던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영향 역시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재능도 있었던지 그는 1904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약 6년 정도 음악을 전공하였고 이 때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습니다(여담으로 그의 아버지는 스크리아빈의 초상을 그려 준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1910년 그는 돌연 모스크바 음악원을 자퇴하였고, 이후 다시는 음악가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갑자기 음악을 그만두었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소심한 그의 성격과 연관이 있었지 않나 추측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자작곡을 스승 스크리아빈에게 들려주는 것도 어려워하였으며 스승이 보기에 별 쓰잘 데 없는 부분까지 고민하고 걱정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당시 그는 스크리아빈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점차 그의 자신감을 잃게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음악을 그만둔 파스테르나크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에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유학하여 헤르만 코헨(1842-1918) 등에게서 신칸트주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유학을 한 것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것마저 포기하고 이듬해 귀국,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숱한 정치적 논란과 압박 속에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고, 당시 사상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음악을 공부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그의 음악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스크리아빈의 그것과 비슷한 신비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1909년 만들어진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Giuseppe Domenico Scarlatti (1685-1757)

Keyboard Sonata K.96 <La Chasse>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738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겸 건반 연주자로, 바흐, 헨델 등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수놓은 작곡가입니다.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 역시 당대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하나로 주로 오페라와 칸타타 등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바 있습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음악을 매우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초기의 음악 수업 또한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661-1727) 등의 음악가들이 그를 가르쳤습니다.


 스카를라티는 1701년 나폴리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페라 작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네치아로 보냈는데 이후 1709년 무렵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해에 그는 로마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폴란드 여왕 마리 카시미르(1641-1716)의 전속 음악가가 되어 3년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의 소극장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만든 몇 편의 오페라 등 작품들이 알려지며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1715년에는 교황청 줄리아 성가대의 악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719년 그는 로마를 떠나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오페라 <나르시스>를 상연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포르투갈로 거처를 옮겨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는데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1711-1758)의 하프시코드 교사 일도 병행하였습니다. 계속 포르투갈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727~28년 사이에는 잠시 로마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1729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자(후에 왕이 되는) 페르난도 6세(1713-1759)와 혼인하면서 바르바라를 따라 사은품 1+1 스페인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스카를라티는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바르바라를 위하여 수많은(수백 곡이나 되는!) 건반 소나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멀찍이 런던에서 출판되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페르난도 6세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에 즉위하자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국왕 부부의 지원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6세 부부는 때마침 전설적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1705-1782)의 후원자이기도 해서 그는 파리넬리와도 교류하며 그를 위한 성악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건반(특히 하프시코드) 연주자로도 당대를 수놓은 거장이었는데, 한번은 동년배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건반 연주 대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대결에서 하프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 연주는 헨델이 승리하였고 두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친한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헨델은 자신의 작품에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의 주제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사례, 헨델 합주 협주곡 Op.6 No.1의 마지막 악장 -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K.2).


 스카를라티의 작품은 오페라 등 다른 장르도 많이 있지만, 역시 그를 대표할만한 것은 수백 곡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들입니다. 명연주자의 작품답게 화려한 기교를 세련되게 담고 있으며, 고향 이탈리아 뿐 아니라 말년을 보낸 스페인의 음악 스타일이 녹아있는 등 대단히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근대 이전의 음악가답게(?) 그의 작품은 양이 방대하고 소실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은 등 목록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데, 현재는 건반 소나타에 한하여 대체로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음악학자인 랄프 커크패트릭(1911-1984)가 총 555개의 목록으로 정리한 번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Fanny Mendelssohn-Bartholdy / Fanny Hensel (1805-1847)

Notturno in g



[파니 멘델스존. 1842년]


 파니 멘델스존(결혼 후에는 파니 헨셀)은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인 또한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음악적 활동도 꽤 활발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다만 보수적인 그의 아버지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음악가로 정식 데뷔를 하지 못하고, 평생을 아마추어로 만족해야 했던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멘델스존은 1805년 태어났고,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동생과 함께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생 펠릭스의 재능도 물론 대단했지만, 파니 역시 12세 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마스터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은 동생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동생처럼 그 또한 어린 나이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고, 많은 피아노 관련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초 유럽에서 살아간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는 게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펠릭스가 음악가로 활동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파니의 경우에는 연주활동은 물론 자작곡을 출판하는 것조차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파니에게는 그저 장식용일 뿐이다" 라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ㅡㅡ;


 결국 멘델스존은 이러한 부조리에 저항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타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음악가로 정식 데뷔하는 것을 포기했고, 음악을 아예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추어 음악가로 활동하며 동생의 음악 활동을 돕는 역할에 그쳤습니다. 1829년에는 화가로 활동하던 빌헬름 헨셀(1794-1861)과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동생과 남편만큼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비공식적으로나마 그가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습니다. 특히 동생 펠릭스와는 음악적, 인간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펠릭스는 "나보다 누나의 음악적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도 언급하였습니다. 펠릭스는 파니의 몇몇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도용이라거나 작품을 훔쳤다거나 한 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빌려 누이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것).


 정식 데뷔를 하지 못했을 뿐 그는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460편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이름으로 조금씩 정식 데뷔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1838년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생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것이 알려져 있고, 1846년에는 몇몇 자작곡을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Op. 1이 됩니다.


 이제 정말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세상에 선보일 찰나, 1847년 그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펠릭스는 며칠 뒤에야 누이의 부고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장례식이 끝난 이후였고, 충격에 과로가 겹쳐 몇 달 뒤 동일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한 비슷한 이유로 사망한 것을 볼 때 가족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헨셀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초기 낭만파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동생처럼 다수의 <무언가(無言歌)>도 작곡하였습니다(애초에 무언가 자체가 파니와 펠릭스의 음악적 교감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특히 피아노 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 부분에서는 동생 펠릭스보다도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녹턴은 1838년 작곡되었습니다.



 

Louis Moreau Gottschalk (1829-1869)

<Souvenir de Porto Rico>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


 - 고트샬크는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미국 출신으로는 거의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올리언스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영국 출신의 유대인 기업가였고, 어머니는 이 지역 출신 크리올(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자란 스페인계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뉴올리언스는 다양한 음악적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고, 고트샬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0년 11세 때 뉴올리언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고트샬크는 2년 후 유럽으로 유학하여 파리음악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그의 국적을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요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미국은 문화적으로는 유럽에게 개무시를 당했다고). 그래도 여기서 그는 베를리오즈에게 음악을 배우고 쇼팽, 리스트, 알캉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 실제로 그는 위의 거장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례로 쇼팽은 그의 재능을 두고 "피아노의 왕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는군요.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는 1853년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신대륙을 대표하는 피아노 연주자로 전 대륙을 떠돌며 활동하였습니다.


 - 그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내내 떠돌이로 점철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865년에는 오클랜드 여성신학교의 학생과 스캔들을 내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리는 등 사생활도 썩 깔끔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을 떠난 고트샬크는 주로 중남미 쪽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 중남미 특유의 음악 경향을 받아들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 그렇게 떠돌이 인생을 살던 고트샬크는 1869년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도중 황열병에 감염되고, 얼마 뒤 사망하였는데 키니네(퀴닌) 과다 복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추억>은 1857년 작곡되었으며, 그가 카리브 해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시기에 들은 음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Carl Czerny (1791-1857)

<30 Etudes> Op.849


 - 체르니 교본 2단계. 다만 체르니가 모든 연습곡을 의식적으로 순서대로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작곡 순서는 30번이 가장 마지막입니다. 체르니 100번까지를 첫 번째 단계(물론 100번 역시 최후반부로 가면 결코 연주하기 쉽지는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30번은 두 번째 단계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 때쯤 하농 교본의 중반부, 바흐 인벤션이나 모차르트의 쉬운 소나타들을 같이 들어가게 됩니다. 블로거는 어렸을 적 진도를 야매로 빼느라 30번 끝날 때가지 소나티네를 못 끝냈지만


 - 체르니 30번을 전후해서 피아노 교습의 첫 번째 고비가 찾아오는데, 본격적으로 난이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피아노에 흥미와 소질이 없는 학생은 여기서 대부분 피아노를 포기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피아노를 시작하면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은 이상 30번 끝날 때쯤엔 5~6학년이 되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하면서(공부를 시켜야 하니까) 피아노를 그만두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Johann Fridrich Franz Burgmuller (1806-1874)

<25 Études faciles et progressives> Op.100


 - 프리드리히 부르크뮐러는 독일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입니다. 집안 전체가 음악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와 지휘자로 활동했고 동생 또한 음악가였습니다. 레겐스부르크에서 출생한 이후 카셀로 이주하여 루트비히 슈포어(1784-1859)와 모리츠 하우프트만(1792-1868)에게 음악을 배웠고, 1830년 첫 번째 연주회를 열고 피아노 연주자로 본격 데뷔하였습니다.


 - 이후 1832년 파리로 이주, 남은 평생을 거주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부르크뮐러는 (다른 많은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살롱'이라 부르는 상류층의 사교 모임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였고, 그의 많은 작품이 살롱을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의 실내악입니다. 이들 외에 오페라, 발레 음악도 작곡했지만 그를 대표할만한 작품이라면 25번(Op.100), 18번(Op.109)을 위시한 일련의 피아노 연습곡입니다.


 - 부르크뮐러 25번은 대체로 체르니 100번을 배울 시기에 병행하여 가르치는데,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아무래도 다른 연습곡보다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부르크뮐러는 낭만파 시대 음악가이고 당시의 추세를 따라 각각의 연습곡에도 이러저러한 표제를 붙여놓는 등 음악성을 겸비해 놓았기 때문에, 순전히 기계적 훈련이 강조되는 체르니나 하농에 비해 조금 더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 각 곡의 표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르크뮐러는 독일 출신이지만 모든 표제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그가 대부분의 음악 활동을 파리에서 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입니다. (출처 : 위키백과 "프리드리히 부르크뮐러")


1. "순진한 마음" - La Candeur
2. "아라베스크" - L' Arabesque
3. "목가" - La pastoral
4. "작은 모임" - La petite Reunion
5. "천진난만" - Innocence
6. "앞으로 앞으로" - Progres
7. "맑은 시냇물" - Le Courant limpide
8. "아름다움" - La Gracieuse
9. "사냥" - La hasse
10 ."귀여운 꽃" - Tendre Fleur
11. "할미새" - La Bergeronnette
12. "이별" - L' adieu
13. "위로" - Consolation
14. "스티리아의 춤" - La Styrienne
15. "발라드" - Ballade
16. "작은 슬픔" - Douce Plainte
17. "수다쟁이" - La Babilarde
18. "걱정" - Inquietude
19. "아베마리아" - Ave Maria
20. "타란텔라" - La tarentelle
21. "천사의 음악" - L' lfarmonie des Anges
22. "뱃노래" - Barcarolle
23. "돌아오는 길" - Le Retour
24. "제비" - L' Hirondelle
25. "승마" - La Chevaleresque





Carl Czerny (1791-1857)

<100 Progressive Studies> Op.139


 -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 중 하나로, 수많은 작품(1000곡 이상)을 쓴 다작 작곡가이나 후대에 주로 기억되는 것은 피아노를 위한 일련의 교본들입니다. 실제로 체르니는 연주자, 작곡가만큼이나 피아노 교육자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그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도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후 대대로 이어져 19~20세기 내내 수많은 명 피아니스트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 체르니의 피아노 교본은 각각 표제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교본에 포함된 곡의 개수로 명명되는데, 쉬운 것부터 순서대로 100번(Op.139) → 30번(Op.849) →40번(Op.299) →50번(Op.740)으로 이어집니다. 이 연습곡들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피아노 교본으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19세기 중반 이후 발전된 피아노 테크닉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최근에는 50번과 같은 어려운 연습곡을 생략하고 바로 낭만파 연습곡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 체르니 100번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간추린' 체르니 100번>과 같은 형태로 출간됩니다. 100개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순서상으로는 바이엘을 마스터한 이후 하농과 함께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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