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의 4대 PC통신망


 - 케텔-하이텔의 성공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PC통신망이 여럿 등장하여 시대를 풍미하였는데, 이 중 가장 큰 규모의 4개 통신망을 일반적으로 '4대 통신망(유니텔을 빼고 3대 통신망으로 부르기도 함)'으로 묶어 부릅니다. 당시 한국의 PC통신 세계를 주도한 게 이 네 곳이었기 때문에, PC통신에 대해 논할 때는 이들만 언급해도 되겠지요.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이텔 자료광장]


 - '최초 그리고 최대' 하이텔 : 앞서 서술했듯 케텔을 전신으로 하는 하이텔은 시장을 선점한데다 한국통신이라는 거대한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시종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이텔에서는 미니텔과 비슷하게 하이텔 접속만 가능한 단말기(2400bps 모뎀을 사용)를 무상 대여하는 정책으로 이용자를 적극 유치하였는데, 이걸 또 제대로 회수하지 않아서 아직 단말기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군요. ㅡㅡ;(블로거도 국딩(초딩) 시절 친구 집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 규모가 가장 큰 만큼 이용자의 커뮤니티(채팅, 게시판, 동호회)도 가장 활발하게 돌아갔고, 사회적인 영향력도 가장 컸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만개한 여러 문화컨텐츠가 PC통신, 그 중에서도 하이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의 시대를 열어젖힌 곳도 하이텔이었고(이우혁, 이영도 등), 게임동호회 개오동('개털 오락 동호회'의 약자)은 초창기 프로게이머의 산실 역할을 했습니다. 안철수씨도 하이텔 유저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 최초의 통신망이라는 점 때문에 하이텔의 헤비 유저 중에는 PC통신 경력이 오래된, 비교적 나이 많은 유저가 많은 편이었습니다(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30대 중반 이상은 별로 없었다고 보아야). 이렇다 보니 하이텔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동시기 다른 통신망과 비교해도 비교적 차분하고 중후한 편이었다고 하는군요.


서비스 시작 : 1988년(케텔)

전용 전화번호 : 01410, 01411, 01412, 01432



[천리안 접속화면. <응답하라 1988>에서 살짝 보신 적이 있다면 바로 그 화면입니다]


 - '부르주아 통신망' 천리안 : 한국 최초로 비디오텍스 서비스를 운영한 데이콤(한국데이타통신)은 1985년 자사의 서비스에 '천리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후 데이콤은 여러 시험적인 통신 서비스에 이 이름을 붙여가며 본격적인 서비스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부터 시작된 단말기 보급 사업 이후, 1990년에는 전국으로 서비스를 확대하여 본격적인 PC통신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 그런데 천리안은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한국통신의 전화망을 이용할 수 없었던데다 독과점의 횡포 단말기 및 서비스 이용료가 워낙 비싸서 사용자들이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접근성 문제는 하이텔과 데이콤이 전화망 사용 관련 협약을 맺고, 데이콤 또한 자체적으로 고속 통신망(아 물론 현재의 초고속인터넷을 생각하시면 곤란)을 적극 확충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습니다.


 -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천리안은 1990년대 중반쯤에는 하이텔 못지 않은 규모를 가진 대형 통신망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다만 천리안의 비싼 요금제는 여전했고(오랫동안 종량제(물론 전화요금 별도)로 과금하다가 막판에야 정액제 도입),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의 통신망'이란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관리가 허술한 편이었고(동호회 설립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소규모 동호회가 난립한다든지), 그래서 커뮤니티가 상당히 지저분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서비스 시작 : 1990년(전국 서비스 시작)

전용 전화번호 : 01420, 01421



[프로게이머의 산실이기도 했던 나우누리 나모모(나우누리 모뎀플레이 모임)]


 - 'Young World' 나우누리 : 나우콤(現 아프리카TV)의 통신망으로, 대표 문용식(1959-)씨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으로 유명합니다. 나우누리는 초기에는 하이텔 전용번호(01410, 01411)나 일반 전화번호와 동일한 자체 접속번호를 써야 하고, 속도 또한 지나칠 정도로 느려 이용자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말에 가서야 01443이라는 전용 번호가 부여되어 어느 정도 문제가 해소됩니다.


 - 그래도 PC통신이 폭발적 성장을 하던 시대에 적절히 등장한지라, 나우누리 또한 크게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하이텔과 천리안에 비해 비교적 이용자의 연령대가 적은 편이었고, (모기업 대표의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한총련 등의 운동 단체의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그래서 한총련 사태 때 나우콤 본사가 압수수색을 당한 적도 있다고).


 - 나우누리는 특이하게 다른 통신망이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상당 기간 강고한 커뮤니티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인터넷 커뮤니티에 대항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위 '나우폐인'으로 불린 이들은 '햏자'로 대표되는 초창기 디시인사이드와 함께 한국의 온라인 세계를 양분하였습니다. 비교적 후발주자임에도,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하이텔 다음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 시작 : 1994년

전용 전화번호 : 01443(1990년대 말 개통)



[유니윈 공개자료실]


 - '무서운 후발주자' 유니텔 : 1990년대 초 PC통신이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자, 삼성SDS에서 뒤늦게 뛰어들어 개설한 통신망입니다. 역시 삼성의 자본과 기술력이 들어가니, 4대 통신망 중 가장 후발주자였음에도 상당히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 <접속>에서 유니텔 채팅 서비스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고, 만13세 이하 초등학생에게 이용료를 받지 않는(물론 전화요금 별도 ㅡㅡ;) 파격적인 정책이 겹치며 이용자가 단기간에 급증하였습니다.


 - 특이점으로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 등의 텍스트 기반 프로그램이 아닌, GUI 기반의 전용 프로그램 '유니윈'으로 접속하도록 (사실상) 강제했다는 게 있습니다(물론 이야기 등으로도 접속은 가능한데, 꽤 많은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음). 이는 다른 통신망과의 확실한 차별점이 되어 오랫동안 유니텔의 정체성으로 기능했습니다(다른 통신망도 전용 프로그램이 없었던 건 아닌데, 유니텔에 비해서는 확실히 기능이 떨어졌고 일반화되지도 못했음).


 - 무엇보다 역시 유니텔은 블로거가 이용한 통신망이었기 떄문에......ㅡㅡ; 그래서 블로거는 앞 글에 나온, 텍스트 기반 접속프로그램을 사용해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유니텔은 유니윈만 쓰면 됐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때문에 유니텔은 다른 통신망이 하지 못한 많은 서비스를 할 수 있었는데, 아바타 기반으로 돌아가는 '유니챗'이라든지 일종의 미니홈피와 유사한 서비스도 있었습니다.


서비스 시작 : 1996년

전용 전화번호 : 01433



 - 이외에도 넷츠고, 신비로, 에듀넷(그나마 이쪽은 무료라는 점 때문에 4대 통신망 못지 않게 이용자가 많았음) 등 중소규모 통신망도 여럿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1990년대 후반 PC통신은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4대 통신망은 제각기 수백만 단위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PC통신의 시대는 영원할 줄 알았는데......(계속)



 - 늦은 나이에 대학엘 다시 다니다 보니 나이 어린 동기나 선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대차이를 절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최근에 한 동기와 대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모뎀'이라는 것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놀란 경험이 있었는데요, 블로거는 PC통신의 시대를 지나온 거의 마지막 세대였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갖고 생각을 하다 보면 소싯적 PC통신 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 글은 PC통신이 세상을 풍미했던, 짧다면 짧은 시대를 추억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추억의 PC통신 접속화면. 블로거는 사실 이 화면에 대한 추억은 그닥 없는데, 그 이유는 후술]



1. PC통신 출현의 배경 : 모뎀과 전화선


 - 'PC통신'이라는 말을 넓게 해석하면 개인용 컴퓨터로 하는 모든 통신 행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터넷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이러면 이야기가 전개가 안 되니 여기서는(그리고 일반적으로도) PC통신의 정의를 '전화선 혹은 전용선을 이용하는, 국내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BBS(게시판) 등의 독자적 서비스' 정도로 한정하기로 합니다.


 - PC통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이 필수적이었습니다. 1958년 미국 항공관제시스템 SAGE(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를 개발하던 IT 기술자들은 미국 전역에 있는 컴퓨터간 연락 기술을 개발할 필요성을 가지고 최초의 모뎀(MODEM, MOdulator-DEModulator)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는 컴퓨터의 디지털 데이터와 전화선의 아날로그 신호를 서로 변조하여, 전화선으로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


[벨 103]


 - 이후 1962년 AT&T에서 개발하여 내놓은 보급형(물론 PC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니 대중에게 널리 보급했다는 의미는 아님) 모뎀인 '벨 103A'가 출시되었는데, 당시의 데이터 전송속도는 무려 300bps(초당 전송 가능한 byte)였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1초당 0.3KB입니다. ㅡㅡ; 물론 당시는 지금처럼 데이터량이 많은 시대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로도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의 시대를 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 당연히 초창기의 컴퓨터는 모두 메인프레임이었기 때문에, 컴퓨터 통신을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계층도 이를 사용하는 일부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일반 기업과 대학으로 컴퓨터가 확산되면서 일반인들 또한 조금씩 컴퓨터 통신을 접할 수 있게 되고, 1970년대 후반부터 PC의 시대가 열리면서 컴퓨터 통신은 일반인에게 활짝 열리게 됩니다.



2. 태동기 : BBS와 비디오텍스


 - 그럼 이렇게 컴퓨터 통신 기능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단순히 상대 컴퓨터에 접속하여 텍스트로 된 문서를 받아오거나, 혹은 상대에게 보내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후 이러한 문서 전송을 좀 더 쉽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BBS(Bulletin-Board System)입니다. 일종의 '게시판' 서비스입니다.


[세계 최대의 BBS 서비스 중 하나인 Exec-PC BBS]


 - BBS는 호스트(서비스 제공자)가 있어 게시판 공간을 제공하고, 이 호스트의 컴퓨터에 이용자가 자유롭게 접속하여 그 게시판을 사용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오늘날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게시판 기능만 뚝 떼어놓았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당연히 당시에는 전화선과 모뎀을 사용했고, 컴퓨터로 통신을 한다는 것은 상대 컴퓨터가 연결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연결하는 개념이었습니다.


 - 전화는 하나의 전화선에 하나의 통화만 가능하죠. 그런데 BBS에는 전화번호만 알고 있으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접속하여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화선 하나만 가지고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서비스를 돌리는 호스트는 여러 개의 전화선을 확보하여 동시에 다수의 접속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BBS 서비스는 PC의 보급과 함께 그 영역을 폭발적으로 넓혀갔고, 1990년대 초 미국에서는 대략 6만 개의 사설 BBS 서비스가 성업중이었다고 합니다.


 - 다른 한 쪽에서는 '비디오텍스'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각각의 단말기가 멀리 떨어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텍스트나 그래픽으로 된 데이터를 전송받아 이용하는 형태의 서비스입니다. 1960년대 말 처음 등장한 비디오텍스는 양방향 통신이 가능했기 때문에 시설 예약이나 쇼핑, 금융업무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컴퓨터 통신은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발전하였고, 모뎀 성능의 발전(규격화와 기술 발달로 통신 속도는 1200, 2400, 4800, 9600bps 등 계속 빨라지고 있었음)과 함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통신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PC의 대중화와 맞물려 다양한 서비스가 종합된 대규모의 컴퓨터 통신 업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의 'PC통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3. PC통신의 시대가 열리다


 - 비디오텍스 기반의 대형 PC통신 서비스는 1980년대 초를 전후하여 여러 국가에서 등장하였습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서비스는 1982년 서비스를 시작한 프랑스의 '텔레텔'(이하 '미니텔'. 보통 텔레텔 단말기의 이름을 따서 미니텔이라 호칭)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개발이 진행되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허덕이던 미니텔은, PC통신을 활용해 전화번호부 서비스를 하려는(종이책으로 인쇄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프랑스텔레콤의 지원으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전역에 무차별 보급된 미니텔 단말기]


 - 이는 영국 자본과의 합작도 있었기 때문에 서비스는 양국에서 함께 시작했는데(영국에서는 '프레스텔'이라 부름), 그리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미니텔은 단말기 무료 보급이라는 실로 파격적인 정책과(이는 나중에 한국의 하이텔에서도 비슷하게 따라합니다) 프랑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80년대 말에는 500만 대 이상의 단말기를 보급하는, 말 그대로 폭발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 역시 1980년대 초부터 PC 보급이 시작되면서 사설 BBS 중심으로 조금씩 컴퓨터 통신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1984년 한국데이터통신(데이콤의 전신)에서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기업 차원의 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생활정보DB 등의 서비스가 잇따라 출범했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88년 9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케텔(Ketel)을 서비스하면서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PC통신 시대가 개막하게 됩니다.


[케텔 접속화면. 출처]


 - 케텔은 처음에는 한국데이터통신의 통신망에 얹어 가는 형태였다가 이후 자체 통신망을 갖추고, 서비스도 (모기업이 모기업이니) 뉴스 중심에서 점차 다양한 생활서비스와 게시판 등을 확충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전체 서비스가 무료였다보니 저녁시간대에는 이용자가 폭주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수익구조가 전무하다는 것이었고, 한국경제신문사는 돈 먹는 하마가 되어가던 케텔을 1991년 한국통신(現 KT) 중심 합작사에 매각해 버립니다.


 - 케텔을 인수한 한국통신은 케텔의 명칭을 코텔(KORTEL) → 하이텔로 바꾸고, 이듬해 서비스 유료화를 단행하였습니다. 당시 하이텔의 과금제(가입비 + 월정액료, 전화요금은 당연히 별도)는 당시 서비스되는 유료 PC통신의 일반적인 과금 형태였습니다.케텔을 이용하던 사용자들은 내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촛불시위(!!!)까지 벌여가며 반발했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유료화를 수용했다고 하는군요.


 - 이후 데이콤의 천리안, 나우콤의 나우누리, 삼성SDS의 유니텔 등이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한국에도 PC통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PC통신의 '짧지만 강한' 전성기는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 전후까지 10여 년간 지속됩니다. (계속)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영문 위키피디아

http://www.linxus.co.kr/main/view_post.asp?post_seq_no=7027 (모뎀의 개발과 발전)

구글 도서검색

http://www.mofat.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hbdlegationread.jsp?typeID=15&boardid=11316&seqno=945605&c=TITLE&t=&pagenum=1&tableName=TYPE_LEGATION&pc=&dc=&wc=&lu=&vu=&iu=&du= (프랑스의 미니텔 보급)

http://www.venturesquare.net/531865 (BBS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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