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송유근은 왜 이렇게 되었나 : 육성전략의 대실패


 우선 송유근씨가 어릴 적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에 대하여 고민해 봅시다. 송씨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6세 때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면서부터입니다.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은 정보기술 분야의 가장 기초적인 자격증 중 하나로, 2017년경 시험 난이도가 상승하여 요즘엔 조금 다르지만 그 이전에는 합격하기 정말 쉬운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관련 전공자는 공부가 거의 필요 없을 수준에, 비전공자라도 짧으면 며칠 준비해서 붙을 수도 있는 시험이라고 하는군요.


 특히 문항이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고, 2016년 이전에는 실기시험도 객관식(!)으로 출제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난이도를 짐작할 만 합니다. 이러다 보니 군인들이 포상휴가를 노리고 상당히 많이 준비하는 자격증이기도 하고(준비에 드는 노력이 적기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도전하여 합격하는 사례도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당장 송씨가 합격한 그 해에 7세 아동이 이 시험에 합격한 다른 사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사]


[정보처리기사 자격증 필기시험 문제 예시]


 난이도보다 주목할 지점은 그 공부 방식인데, 블로거가 찾아본 바 이 시험은 기출문제를 열심히 풀어보는 데서 상당 부분 성패가 갈립니다. 즉 기출문제를 최대한 많이 암기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송씨가 가진 '재능'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송유근씨는 뛰어난 '암기력'을 어릴 적부터 소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훗날 사람들에 의하여 분석된 그의 어릴 적 모습을 보면 실제로 그렇습니다. 송씨가 방송에 나와서 어려운 미적분이나 물리학 법칙을 술술 풀어내는 모습은 얼핏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그 수식이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암기'해서 칠판에 베껴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발군의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과학적 사고에 필요한 이해력이나 창의력 등에 있어서는 다른 어린이들보다 딱히 나을 것도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물론 또래 평균보다는 높았을 가능성이 높지만요).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실 뛰어난 암기능력은 오히려 한국의 제도권 교육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마 송씨가 초등학교에 제대로 입학하여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모두 밟았다면 시험점수가 매우 우수한 '우등생'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트 영재들이 밟는 과정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순탄한 코스를 밟아 소위 명문대 진학은 무난하게 했을 겁니다. 물론 그래서야 지금처럼 유명인사가 될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서야 차라리 이런 평범한 삶이 낫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 '발명품'은 한 기업의 제품을 그냥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송씨는 저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는 하고 있었을지]


 송씨에게 닥친 비극은 바로 주변 사람들(특히 그의 부모)이 송씨의 '재능'을 잘못 분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수식을 잘 외우고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위대한 과학자의 덕목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송씨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상적인 경로를 거부하고, 자꾸만 송씨에게 부재한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길로 그를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 길에 그런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몰랐던 건 물론이고 말입니다.


 그 결과 송씨는 정상적 교육과정을 통하여 일반적 능력을 기를 기회를 싸그리 날려먹었고, 그렇다고 진정한 창의적 사고력을 기를 기회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8년 '성인'이 된 송씨는 사회인이 가져야 할 사고능력과 덕목을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채, 그저 온갖 지식의 파편들만 녹음기마냥 읊어대는 깡통으로 자라났던 것입니다.




5. 송유근을 둘러싼 여론과 언론의 뒤틀린 시선


 여기서 단순히 '영재가 될 수도 있었던 한 어린이를 잘못 육성'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송유근이라는 개인의 문제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를 대하는 사회의 자세가 심하게 뒤틀려 있(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블로거가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이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짚고 싶은 문제는 그를 일종의 '연예인'으로 만든 언론의 작태입니다. 송씨가 처음 정보 관련 자격증을 획득하고 그 부모가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설치던 때는 2004년 무렵이지만 이 시기에는 그냥 '그런 아이가 있다' 정도로만 가볍게 언급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송씨가 갑자기 전국민의 관심을 받고 천재소년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2005년 <인간극장> 출연이었습니다. 당시 방송 제작진은 실제로는 별 것 없던 송씨를 무지막지하게 '포장'하여 '천재소년'이라는 하나의 '상품'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방송에서 송씨를 어떻게 포장했는지 잘 보여 주는 사진 하나. 사진에서 등장하는 수식은 이차방정식 x^2-12x+36=0 인데, 생판 틀린 풀이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이후 송씨는 이곳저곳 방송에 불려다니며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방송국과 언론사는 그에게 쏠린 대중의 시선을 통하여 쏠쏠하게 돈을 벌었겠지요? 사실 언론의 입장에서는 송씨가 진짜 천재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의 이미지와 실제 삶이 어떻게 다른지 상관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송씨는 철저하게 '천재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부모는 이를 인지하고 이용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정말 자기 아들이 천재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둘 모두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럼 이를 접하는 대중은 왜 그에게 열광하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을까요? 사실 송씨가 방송에 나온 것과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은 학계나 교육계에서는 꽤 많이 언급되어왔고, 그가 통상적 교육과정을 계속 건너뛰는 것에 대하여도 많은 우려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우려가 대중에게 전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를 접해봐야 대중은 "제도권 교육이 천재를 죽이려 든다"라며 기존 교육계에 비난을 퍼붓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의 교육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뿌리깊은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의 교육과정을 성인이 되기까지 밟아왔지만 정작 그 교육과정과 체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분석하려면 글이 하나 더 필요하겠지만 -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한국의 교육체제가 마치 절대악인 것마냥 취급하는 사고가 알게 모르게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송씨에 대한 기존 교육계의 우려가 '꼰대들의 꼰대질' 이상으로 인식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는 이러한 인식을 지금껏 해소하지 못한 교육계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와 별개로 교육계의 지적이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송씨 문제에 있어서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송씨가 군입대를 하게 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송씨를 천재소년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황우석씨는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을 교묘히 활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대중의 무지와 비뚤어진 애국심입니다. 대중은 송씨에 대한 언론의 '허술한' 포장조차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니 상대성 이론이니 하는, '뭔 소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어려워 보이는' 소리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무 말이나 떠드니 똑똑한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상술했듯이 사람들이 그의 허상을 파악할 수 있는 식자(識者)들을 무턱대고 배척한 것에는, 어려운 이야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송씨를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비뚤어진 애국심(?)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에는 그가 세상을 호령하는 천재가 되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위인전 감성'이 숨어 있습니다. 차라리 종교에 가까운 이 심리 때문에, 여론은 송씨를 비판하거나 걱정하는 목소리를 마치 반사회적 망동인 것처럼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뜨던' 시기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황우석 사태와도 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글쎄, 10년 넘게 지난 지금은 뭔가 좀 다를까요?




6. 정리 : 다시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송유근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송유근씨 본인입니다. 사회에 도움이 될 유능한 인재가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주변 사람들과 대중의 비뚤어진 의도와 욕심 때문에 자라나지 못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인식하며 성장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는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미지 메이킹은 그가 어렸을 때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지적 능력이 필요한 대학원 단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고, 결국 뭐든지 빨랐던 그는 남들보다도 더 시간을 소모하고도 박사학위 하나 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우리 사회 전체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이 사태에는 자극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려는 언론의 돈벌이 전략과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낚이는 대중들,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과학에 대한 무지, 지성에 대한 반감, 그리고 비뚤어진 애국심까지 온갖 다양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송유근씨의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전세계적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유럽에서는 극단주의 정당이 세를 불리고 있으며, 도날드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잘 이용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어떤지는 차치하고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송유근씨와 같은 '만들어진 천재'들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의 반성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천재를 '만들고' '소비하는' 행태는 사회 전반에 반(反)지성주의를 뿌리깊게 만들고, 이는 한 사회의 과학적 역량을 고갈시킬 뿐 아니라 인문학적 사고 또한 부진하게 만듭니다. 이미 문제는 현실화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공계 대학원이 텅텅 비어가고 인문학적 사유 또한 하지 않는 사회, 어쩌면 지금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한때 '천재소년'으로 세간에 잘 알려졌던 송유근(20)씨가 결국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사] 송유근씨는 2018년 6월 소속 학교인 UST에서 박사학위 최종심사를 받았으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의 사유로 불합격하고, 졸업연한을 초과하여 결국 학위를 따지 못한 채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고, 3년 전 논문 표절 사건으로 크게 시끄럽기도 했던 터라 언론 기사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송유근씨는 논문 표절 사건으로 사실상 학자로서의 커리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매우 의심스럽기에 크게 신경쓸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여전히 이 사람을 천재로 떠받드는 사회 일반의 여론이 적지 않은 것 같아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송유근씨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고' 어떻게 망가졌을까요? 한때 천재라 불리던 소년의 인생을 말아먹은 모든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송유근]




1. 이것부터 고민해 보자 : 도대체 천재란 게 뭔데?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천재라는 말은 상당히 남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어릴 적 천재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분 계신가요? ㅡㅡ; 물론 그 용례 중 대부분은 그리 진지하지 않은 의미로 하는 말이겠지만, 자기 자식을 천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과도한 기대로 자녀를 짓누르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 단어가 어느 정도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어떤 사람이 '천재'일까요? 임마누엘 칸트는 "예술에 규칙을 부여하는 능력"이 곧 천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에 관한 말이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말은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일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블로거가 철학에 조예가 없으므로 더 이상은 깊이 들어가지 않겠지만 ㅡㅡ; 분명한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고, 이를 정리하여 규칙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천재'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따지고 보면 이 사람도 천재]


 칸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천재로 불리기 위해 요구되는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될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내고, 이를 완성된 형태로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다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주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풀어내고, 남들이 1문제를 풀 시간에 서너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중에서도 칸트의 정의에 부합하는 천재는 당연히 있겠지만, 단순히 '언젠가 할 것을 조금 일찍 하는' 것을 칸트가 정의하는 '천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적인 천재들을 생각해 봅시다. 아리스토텔레스, 뉴턴, 가우스, 모차르트,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등 자기 분야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천재로 평가되는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사조나 법칙을 창조하고 이를 후대에까지 관철시킨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들 중 많은 수가 남들보다 빨리 성장했고 우리의 고정관념 속 '천재'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천재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산을 했다는 폰노이만 쯤 되면야 인정해 드리지요. 물론 그 역시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니 칸트의 정의에 따른 천재인 것 맞습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천재 소리를 듣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묻혀버리곤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할 경지에 아주 이른 나이에 도달했지만, 결국 그 경지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들도 다 그만큼(혹은 그보다 더 높은)의 경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기껏해야 남들만큼 잘하는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천재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릴 적부터 천재로 불리던 송유근씨는 어떨까요? 과연 그는 천재가 맞았는지,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어쩌다 급전직하하고 말았는지 짧게나마 살펴봅시다.




2. 송유근 인생 초기 : 그는 과연 '천재'였는가?


 이젠 이것도 과거형으로 불러야 하겠지요. 어린 시절의 송유근씨는 과연 우리가 말했던 그 말대로 '천재'였을까요? 그가 천재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정보처리기사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다거나, 고등학생~대학생이나 손댈 법한 어려운 수학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이야기가 TV 등 언론을 타면서(블로거가 검색하기로는 <인생극장>이라고 합니다. 분명 블로거가 봤던 것 같은데 오래되어 기억이 잘) 그는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천재소년'이 되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하고 쓴 걸까요?]


 실제로 그는 초등학교를 초고속으로 졸업하고(6세 때 행정소송까지 하며 6학년으로 입학, 졸업)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몇 달만에 광속 패스, 2005년에는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인하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합니다. 1학년 1학기 때 평점 3.8/4.5를 받는 등 블로거가 딱 한 번 받아본 점수를 대학교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얼마 뒤 "획일적이고 주입식인 대학교육에 흥미를 잃었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독자연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이후 2008년 3월 서울시립대학교 양자컴퓨팅 분야 연구조교로 선임되고, 12월에는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잠깐, 그러면 학사 학위는? 2009년 초에 학점은행제로 땄다고 하네요. 아무튼 11세 때 학사 학위를 따고 대학원까지 들어갔으니 정말 '천재적'인 소년으로 보일 법 합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천재였던 걸까요?


[형들은_이런_거_있어?.jpgee 그래 있다. 그것도 두 개나]


 우선 한 가지 생각해 볼 지점은 송유근씨가 과학영재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교육과정을 거의 하나도 밟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송씨는 영재올림피아드를 비롯하여 이 땅의 영재들이 경쟁하는 다양한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일반적인 교육기관은 커녕 과학고 등 과학영재를 위한 전문적 교육기관조차 거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역시 조금 다니다가 자퇴하였으며 앞에 언급한 학점조차 다른 학생들과 별개로 평가를 한 결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송유근씨와 그의 부모가 계속 주장한 대로 한국의 제도권 교육은 과학적 창의력을 길러주는 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국의 교육과정을 충실히 거치고 다양한 학문적 업적들을 남긴 수많은 영재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출신의 인물 중 과학분야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벤자민 휘소 리(이휘소, 1935-1977)는 당시 제도권 교육의 정점인 경기중학교(현재의 중고등학교 통합)와 서울대 공대(물리학과 전과가 불가능하여 중퇴)를 나왔습니다. 심지어 제도권에 영재교육 개념 자체가 없던 1950년대에!


[이휘소]


 또한 송씨가 주목받던 어린 시절에도 그의 천재성(?)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들은 있었으니, 그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 자신의 발명품이라고 소개한 물건이 사실 부모가 빌려 온 한 중소기업의 장비였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사]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 보자면 "그렇다면 지금껏 보여 온 천재의 이미지도 부모가 만들어 온 허상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신기하게도 이 사건은 별 반향 없이 묻혔고 송씨는 계속 천재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계에서는 송씨에 대해 우려의 시선들이 있었지만 '국민 천재소년'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에 대하여 대놓고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언론과 부모가 계속 '천재성을 죽이는 제도권 교육' 프레임을 쌓아가는 마당에 제도권 학계에서 그에 대한 비판은 곧 제도권의 천재 죽이기로 비추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학계 사람들은 대체로 그냥 입을 닫고 "논문 나올 때 두고보자"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 천재의 몰락 : 알고보니 껍데기였을 뿐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2015년 송씨가 Astrophysical Journal(ApJ)에 투고한 논문이 표절 판정을 받고 게재 취소 처분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다 쓰려면 글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블로거가 상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으니 [링크]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이라면 과거 황우석 연구조작 사건과 진행과정이 조금 비슷한데 디시인사이드 과학 관련 갤러리에서 논란이 불거진 점(물론 이 사건은 일베저장소에서 처음 말이 나왔다고는 합니다만),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한 방에 사태가 반전되었다는 점 등등.


 아무튼 이 사건으로 송씨는 천재소년으로 불리던 그간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었고, 이 논문을 바탕으로 취득하려던 박사 학위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때와 달리 이 사건은 논란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신속하게 사태가 종료되어 황우석 사건처럼 사회가 분열되어 개싸움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렇다 보니 역으로 이 사건의 경과나 그 의미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도 그를 천재소년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ㅡㅡ;


[응 학위 못 준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2016년 arXiv(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출판 전 논문 등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사이트)에 송씨가 올린 논문이 또다시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것입니다. [기사] [최초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송씨와 관련된 연구보고서에 뜬금없이 그의 부모가 연구원으로 등재되어 있다거나, 보고서들이 온통 Ctrl+CV로 점철되어 있다거나[참조] 하는 등 이후로도 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아마 송씨는 물갤을 철천지원수로 여길 듯하다


 기껏 게재한 논문이 잇따라 표절로 드러나고 그 여파로 모든 지도교수가 날아가는 등등, 연구자로서 그는 그야말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나마 SCI급이나 그에 준하는 학술지에 어찌어찌 논문을 내긴 했던 모양이지만, UST에서 받은 논문 심사에서 심사관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 하는 등 기본조차 안 된 모습을 보이며 결국 박사학위를 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대학교와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 결국 기한초과로 학위 취득에 실패하다니, 어딘가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졸업한다고는_하지_않았다.fact]


 박사 학위는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부여됩니다. 그러니 (다른 논문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베낀다는 건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겁니다. 물론 한국의 대학원에서는 그 상상도 못할 일이 꽤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이긴 합니다만 문도리코라든지 문도리코라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국민의 주목을 받아온 학생이 철저한 검증의 대상이 될 논문을 그렇게 복붙 수준으로 베껴서 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이쯤 되고 나서는 그가 어린 시절에 TV에서 보여준 문제풀이나 공식 유도같은 자료들도 죄다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로 '저건 식 자체를 외워서 외운 그대로 쓴 것이지 문제를 이해하고 푼 것이 전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송씨는 어린 시절에도 뭔가를 기억하는 암기력만 뛰어났지, 그게 뭔 소리인지 이해하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모르는 블로거가 보기에도 저건 그냥 여러 변수들을 무의미하게 이리저리 돌려가며 장난친 것으로 보입니다. 블로거가 예전에 저러다가 문제 많이 틀렸는데]


 결국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TV같은 데 나와서 어려운 수학 문제 몇 개쯤 베껴쓰는 푸는 것, 그리고 지도교수 논문을 그대로 오려붙여서 논문이랍시고 내는 것 외에는 무언가 결과를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 와서 보면 송씨가 과연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완료할 역량과 의지가 있기는 한가 싶기까지 합니다. 학자 인생에 평생 따라다닐 학위논문조차 지도교수의 것을 복붙하는 지경이래서야, 어디 그가 자기 머리로 논문은 커녕 번듯한 레포트 한 장이라도 제대로 쓸 능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요?


(계속)



 답사장소

 대전계족산성

 일자

 2018. 7. 25.




 계절학기도 끝났고, 집에만 있기 그래서 이전부터 생각해 왔던 대전 주변지역 답사를 틈틈이 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로 선정된 장소는 대전 북동부에 있는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입니다.



 일단 사전 정보부터 알아보도록 하지요. 계족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졌으며, 백제가 신라의 공격에서 웅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일대에 쌓은 몇몇 산성 중 하나라고 합니다.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백제의 토기가 다량 출토되었기 때문인데 동시에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도 나온 바 있어 이곳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도 그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은 불과 100년 전 동학농민군이 근거지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계족산성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테뫼식(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둘러 쌓은 형태)이지만 동시에 포곡식(내부에 골짜기를 끼고 있는 형태) 산성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전 일대에 있는 산성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지만, 현재는 성벽의 많은 부분이 무너지고 유실되어 이를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 중이라는군요. 자, 그러면 계족산성으로 출발해 볼까요?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몇 가지 있는데, 블로거는 장동 쪽에서 올라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일단 회덕동에서 장동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를 탑니다(배차간격이 기니까 시간을 잘 맞춰서 움직이세요).



 버스 시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장동산림욕장' 정류장에서 내립니다. 그러니까 장동산림욕장 길을 따라 계족산성으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장동산림욕장으로 들어갑니다. 안팎으로 대전 일대 유명 주류회사의 회장이 등산을 하다가 어쩌고저쩌고 하여 이 산림욕장을 정비했다는 식의 홍보물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데, 실제로 산림욕장 길 한켠에는 황토흙길을 만들어 놓아 맨발로 등산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요. 사실 산림욕장 길을 따라가는 것은 상당히 돌아서 가는 길인데, 길이 상당히 잘 조성되어 있고 경사도 (상대적으로) 가파르지 않은 편이라 이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걷는 내내 날벌레들이 엄청나게 꼬여서 나중에는 왼손에 손수건을 쥐고 쉴새없이 휘두르며 가야 했습니다. ㅡㅡ;



 중간에 있는 야외무대 한켠에 계족산성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블로거가 길을 못 찾은 것인지 조금 올라가니 거의 야생의 수풀길이 나타나서 ㅡㅡ; 다시 내려와 산림욕장 길을 따라가기로 합니다.



 자 여기서부터는 산림욕장을 벗어나 본격 등산로로 가야 합니다. 여기까지 2km 넘는 길을 와서, 이제 400m 남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어마어마한 계단들과 반야생의 수풀길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왜 블로거는 여기가 등산로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까요? ㅡㅡ; 그나마 조금씩 해가 넘어가는 저녁 가까운 시간이라 망정이지, 대낮이었으면 정말 탈진해도 할 말 없었을 겁니다. 저질체력



 땀을 뻘뻘 흘리며 다 올라왔지만 아직 조금 더 가야 합니다. 원래는 저 정면 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모양인데 보수공사 때문에 폐쇄하고,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습니다. 이곳은 산성의 서문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설치된 계단을 후덜거리며 올라 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서문에는 본래 현수교 형태의 문이 있었고, 필요할 때만 문을 내려 통로로 썼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름 국가 지정 사적지라 내부 안내표지판은 잘 되어 있습니다. 산성은 대략 이렇게 생겼고, 블로거가 들어온 곳은 빨간 점이 있는 곳입니다.



 내부에서 바라본 서문 터 모습.




 산성 내부 곳곳에 작은 평지들이 있는데, 이런 곳들에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아직 보수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곳 근처의 성벽에는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쪽을 보수하느라 길을 막아놓았던 것 아닌가 싶군요.



 가장 높은 곳에서 성벽을 바라봅니다. 이 성벽을 보면 농담이 아니라 기갑부대가 몰려와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런 급경사 위에 성벽까지 쌓여 있으면 도대체 누가 기어올라와서 성을 점령할 수 있을까요? ㅡㅡ;



 이쯤 되니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기로 합니다. 나름 산 위에 올라왔다보니(다만 이곳이 계족산 정상은 아닙니다. 정상은 다른 곳에 위치) 경치가 정말 좋네요. 미세먼지가 좀 많았는지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대전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산들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흘렀던 땀을 식혀 줍니다.



 저 아래쪽으로도 찾아볼 유적들이 있지만 힘들어서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ㅡㅡ;



 이곳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는 곳답게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있네요.



 이곳은 남문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쪽으로도 통로가 나 있고, 지도를 살펴봤을 때 이쪽으로 나가서 능선을 따라가면 계족산 정상으로 갈 수 있고 다른 쪽으로는 비래동 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완전 등산로인 것 같아 그냥 왔던 길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ㅡㅡ;



 계족산성의 높이는 해발 423m인데 맞은편에 있는 계족산 정상과 거의 높이가 비슷합니다.



 이제 조금씩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합니다. 성 내부에 있는 오솔길 주변으로 꽃들이 꽤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대전시내 뿐만 아니라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면 드넓은 대청호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등산을 별로 즐기지 않는데, 여기 올라와서 바람을 쐬며 경치를 둘러보자니 사람들이 왜 등산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내려가야겠지요? 다시 서문 쪽에 설치된 계단을 통하여 내려갑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정말 방어력 하나는 최고일 것 같은 지형입니다.



 올라왔던 길로 벌레에 시달리며 내려오니, 입구에 도착할 쯤 해가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달이 밝게 떠서 한 컷.





Anton Stepanovich Arensky (1861-1906)

Piano Trio No. 1 in d Op. 32



[아렌스키. 1895년]


 아렌스키는 러시아 노브고르드에서 출생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입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는데 아버지는 의사 겸 첼리스트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 아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그는 9살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18세 때인 187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하였습니다.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82년 아렌스키는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 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교수님은 22살! 이곳에서 그는 차이콥스키를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무렵부터 그는 잦은 폭음을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건강과 수명을 갉아먹게 됩니다. 그는 1895년까지 교수로 재임하며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등 많은 음악가를 가르쳤는데 스크랴빈과는 훗날 음악적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1895년 교수직을 사임한 아렌스키는 밀리 발라키레프의 뒤를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예배당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여 1901년 사임하고, 이후로는 작곡가로서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콜중독과 무절제한 생활의 결과 결핵에 걸려 있었고, 결국 이 때문에 1906년 핀란드 페르크예르비(現 러시아 카렐리야 지방의 키릴로프스코예)에 있는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름 러시아 음악사에서는 이름 있는 작곡가이기 때문인지 1987년 소련은 남극의 한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아렌스키 빙하"). 알렉산더 섬의 베토벤 반도의 보케리니 inlet에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차이콥스키와 쇼팽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차이콥스키의 영향이 커서 <차이콥스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3개의 오페라와 2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수가 있지만 대체로 피아노곡을 비롯한 실내악곡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피아노 삼중주 1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1894년 완성되었습니다.




참고 : 

영문 위키백과, 러시아어 위키백과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1] [2]

http://classictong.com/artist/950




Kodály Zoltán (1882-1967)

<Háry János> Suite



[코다이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이며, 음악학자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합니다. 바르토크와 함께 헝가리의 '진짜' 민속음악을 발굴하여 세계에 알렸으며, '코다이 교수법(Kodály method)'이라는 음악교육이론을 제창하여 음악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는 1882년 헝가리 중부의 케치케메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철도노동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음악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 모두 취미로 악기와 성악을 즐기는 음악애호가여서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코다이 역시 어릴 적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익혔습니다. 그는 중등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했는데, 16세 때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서곡이 처음 세간에 알려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18세 때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 입학하여 독일어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음악 또한 포기하지 않고 리스트 음악원에 동시 입학하여 한스 쾨슬러(1853-1926)를 사사하였습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음에도 자신의 아들이 음악 전공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작곡가는 남자가 할 만한 직업이 아니다"라고 ㅡㅡ; 코다이를 말렸고, 그는 일단 자신의 진로를 교사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1905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때마침 헝가리의 다른 대작곡가인 바르토크를 처음 만났는데, 바르토크는 이미 헝가리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를 거치며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등 집시 음악이 헝가리 음악으로 세계에 알려져 진짜 헝가리 민속음악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과 서민들의 음악들을 채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1906년 첫 결실인 <헝가리 민요집>을 출판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코다이는 「헝가리 민요의 운율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수십 년간 코다이와 바르토크는 헝가리의 수백 개 마을에서 수천 곡의 민요를 수집하여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후원하던 샹도르 엠마(1863-1958)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코다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헝가리가 잠시 공산화되자 코다이는 이에 협력하였지만, 이 정권이 얼마 뒤 무너지자 잠시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음악 관련 활동은 지속하여 1923년 <헝가리 시편가>를, 1926년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를 완성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대표작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헝가리 민속음악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고, 음악교육 관련 활동도 지속하였습니다.


 1940년대 들어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나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바르토크와 달리 코다이는 끝까지 헝가리에 남아 음악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전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음악교육 등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 음악계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장, 음악가협회장, 과학기술원 명예회원을 역임하고, 헝가리 정부로부터 많은 훈장과 포상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58년 첫 아내 엠마가 사망하자 다음 해 58세 연하인 셔롤터 피첼리(1940-)와 재혼하였습니다. ㅡㅡ;


 말년에는 작곡가, 음악학자, 음악교육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제창한 특유의 리듬 및 선율학습, 모국어처럼 어린이에게 친숙한 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한 음악교육 등 '코다이 교수법'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음악교육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권위와 명성의 정점에 오른 그는 1967년 사망하였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은 현재까지 생존하여 코다이의 음악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리 야노슈> 모음곡은 동명의 오페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리 야노슈'란 헝가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떨곤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곡은 관현악의 '재채기'로 시작하는데 헝가리의 속설에 따르면 이야기를 하다가 듣는 사람이 크게 재채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는군요.




참고 :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3&no=872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vegalaxy1&logNo=60039228809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5071&logNo=120190904187

http://ihsnews.com/11125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최근 네이버 블로그에서 대규모 개편을 예고한 것을 계기로 한동안 잘 묻어두었던 고민 - 블로그 플랫폼을 옮겨볼까 하는 생각이 또 튀어나왔습니다. 이런저런 장점에 이끌려 티스토리에 정착하고, 이후 몇 년간 글을 쌓아올려 이제는 그나마 하루에 몇십 명은 안정적으로 방문하는 블로그가 되었습니다(소위 파워블로그 수준이야 아니지만 어차피 그게 목적은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지요). 하지만 잊을 만하면 다른 쪽으로 이전해볼까 여러 번 고민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네이버니 워드프레스니 하는 곳들로 이전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항상 결론은 티스토리 복귀였습니다(이번에도 그럴 것 같고요).


 블로거의 이런 고민이 더 심해진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카카오가 본격적으로 다음의 옛 서비스들을 숙청(?)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대로 잘 나가던 다음 TV팟 같은 서비스들도 날아가는 마당에, 벌써 하향세를 탄 지 오래인 블로그 서비스가 무사할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다음-카카오 병합 이후 카카오의 블로그 혹은 그와 유사한 서비스는 다음 블로그, 티스토리,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신규 런칭한 브런치까지 4개나 되니 카카오 입장에서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거기에 티스토리 운영상의 몇몇 논란 또한 블로거를 비롯한 티스토리 이용자들의 우려를 키우는 데 일조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16년 말 전격 단행된 백업서비스 종료입니다. [당시 블로거의 글] 티스토리가 가진 최대 장점 중 하나로 꼽히는 기능이 사라지는 것이라 논란과 반발이 상당했지요. 이미 당시부터 이 조치가 티스토리 서비스 종료의 시발점이냐, 타 플랫폼으로 이전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티스토리 블로그를 백업해서 워드프레스 쪽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냐, 공지된 것처럼 단순히 의미 없어진 기능을 폐지한 것이냐 등등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후로는 사실상 티스토리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것이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의식해서였는지 2017년에 티스토리 측에서는 관리페이지를 일부 개편하고 플래시 제거 등 대규모 개편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였지만, 이후 1년간 딱히 추가로 바뀐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주요 경쟁상대라기엔 체급 차이가인 네이버 블로그가 대규모 개편을 예고하면서 티스토리를 검색에서 밀어내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등, 티스토리 이용자들의 불만과 걱정만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사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랬다고 이런 상황이 싫으면 그냥 블로그를 옮기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블로거 역시 이런저런 플랫폼을 찾아보고 실제로 옮기려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도로 티스토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왜였을까요? 아마 가장 큰 건 지금껏 블로그에 쓴 글들을 옮길 자신이 없어서였을 겁니다. 글 수가 많지 않던 과거에도 글을 일일이 옮기는 건 그야말로 다이나믹 노동이고(네이버 블로그의 경우), 백업 기능이 있던 시절에도 워드프레스 쪽으로 글들을 옮기려면 이런저런 귀찮은 작업들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워드프레스는 만드는 것 자체가 일이고 이젠 백업 기능도 어차피 사라졌기 때문에 ㅡㅡ;


 둘째로는 그동안 쌓아온 방문자 수와 구글 애드센스 수입을 포기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하루 50~100명이라는 수치가 물론 파워블로거들에 비하면 하꼬방(?) 수준이지만 내 생각을 소소하게 표현할 창구로서는 충분하지요. 그리고 애드센스 수익이야 별 것이 없지만, 3년 이상 광고를 달아두니 그래도 이제 60$ 이상의 수익이 모였습니다. 이대로 한 2년쯤 더 지나면 누적 수익이 100$를 돌파하여 드디어 돈을 인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ㅡㅡ; 블로그를 옮기면 당연히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요. 특히 워드프레스 쪽으로 간다면 말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플랫폼을 선택하지 못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블로거가 항상 고민하는 네이버 블로그는 다른 건 몰라도 방문자를 유치하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블로거는 처음 네이버로 가려고 했을 때 글 몇 개를 올리니 갑자기 방문자가 하루 500명 이상 몰려오는 경험도 해 봤습니다. 물론 블로그를 만들고 바로 밀어버리기를 반복하니 지금은 글을 써도 그렇게 아니 되지만). 구글 애드센스를 쓸 수는 없지만 어차피 수익을 목표로 운영하는 게 아니니 아쉽지만 상관 없고요.


 그런데 블로거가 느끼는 네이버 블로그의 문제라면 역시 HTML로 블로그를 꾸밀 수 없고(물론 블로거같은 허접 유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불편한 지점은 있더군요), 위에 언급한 글 옮기기의 불편함은 기본에, 무엇보다 서비스의 미래에 대하여 티스토리와 유사한 우려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네이버는 그나마 최근 개편 예고를 하면서 우려를 불식시키고는 있는데, 그 이전만 해도 네이버 포스트를 밀어주고 블로그는 버린다느니 둘을 합병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그러고 보니 네이버 포스트와 브런치의 포지션이 좀 비슷하기도 하군요. 서비스의 성격은 좀 다르겠지만).


 워드프레스 쪽은 이제는 거의 포기. 직접 원하는 블로그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큰 매력이지만 그 만드는 과정이 (블로거같은 허접들에게는) 복잡하고 한국 스타일에 익숙한 형태의 스킨을 찾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방문자를 끌어모으는 게 너무 어려워서 결국 gg 쳤습니다. 거기에 웹호스팅 서비스를 따로 찾아봐야 하는 것도 문제였고 말입니다. 이글루스는? 글쎄, 딱히 티스토리와 견주어서 뚜렷한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텍스트큐브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쪽은 앞으로 개발이 이어질지 어떨지도 불투명하니 ㅡㅡ;


 자아 결국 이리하여 블로거는 티스토리를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쭉 이어질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 오랫동안 방치플레이(?)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티스토리는 나름대로 매력적인 플랫폼이라는 게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처음에 만들기를 상당히 잘 만든 것도 있고, 초대장 시스템으로 진입문턱을 적당히 둔 것도 돌아보면 괜찮은 운영방식이었고 말입니다(네이버 블로그처럼 홍보에 미친 돈벌이용 블로그로 헬게이트가 열리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불만이나 걱정이 생기면 블로그를 옮겨 볼까 하다가도, 결국 포기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티스토리를 포기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티스토리가 사라진다든지), 아직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카카오가 여러 개 난립한 자사의 블로그 서비스를 정리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분들이 단체로 정신나가지 않는 이상 트래픽 총량 한국 10위권에 십수 년간 방대한 콘텐츠를 쌓아올린 티스토리를 어떤 식으로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고요. 블로거의 입장에서는 그냥 이제 제발 걱정이나 않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Carl Philipp Stamitz (1745-1801)

Clarinet Concerto No. 3 in Bb



[카를 슈타미츠]


 카를 슈타미츠는 체코-독일계 작곡가로 고전파 초기에 활동한 소위 '만하임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하나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타미츠(1717-1757)는 만하임 악파의 형성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며, 동생 안톤 슈타미츠(1750-1809?) 또한 작곡가 겸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만하임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 바이올린을 익혔습니다.


 아버지 사후에도 음악 수업을 이어간 슈타미츠는 1762년부터 만하임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1770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동생 안톤 또한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임) 유럽 전반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노아유 공작의 궁정 작곡가로 근무하였고 동시에 헤이그, 상트페테르부르크,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벌였습니다.


 1794~95년경 슈타미츠는 독일 중부의 도시인 예나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카펠마이스터와 대학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경제적 곤란을 겪은 듯하고 자녀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 말년을 보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그의 서재에서 연금술에 관한 다수의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는군요. ㅡㅡ;


 슈타미츠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50편을 넘는 교향곡, 38편 이상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60여 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실내악곡도 다수 있습니다. 그의 협주곡은 바이올린, 비올라, 비올라 다 모레, 첼로,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플루트, 바순 등 많은 악기를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클라리넷의 경우 명연주자인 요제프 비어(1744-1812)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하이든-모차르트 스타일의 고전적 양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Giuseppe Domenico Scarlatti (1685-1757)

Keyboard Sonata K.96 <La Chasse>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738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겸 건반 연주자로, 바흐, 헨델 등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수놓은 작곡가입니다.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 역시 당대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하나로 주로 오페라와 칸타타 등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바 있습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음악을 매우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초기의 음악 수업 또한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661-1727) 등의 음악가들이 그를 가르쳤습니다.


 스카를라티는 1701년 나폴리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페라 작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네치아로 보냈는데 이후 1709년 무렵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해에 그는 로마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폴란드 여왕 마리 카시미르(1641-1716)의 전속 음악가가 되어 3년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의 소극장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만든 몇 편의 오페라 등 작품들이 알려지며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1715년에는 교황청 줄리아 성가대의 악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719년 그는 로마를 떠나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오페라 <나르시스>를 상연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포르투갈로 거처를 옮겨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는데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1711-1758)의 하프시코드 교사 일도 병행하였습니다. 계속 포르투갈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727~28년 사이에는 잠시 로마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1729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자(후에 왕이 되는) 페르난도 6세(1713-1759)와 혼인하면서 바르바라를 따라 사은품 1+1 스페인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스카를라티는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바르바라를 위하여 수많은(수백 곡이나 되는!) 건반 소나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멀찍이 런던에서 출판되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페르난도 6세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에 즉위하자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국왕 부부의 지원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6세 부부는 때마침 전설적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1705-1782)의 후원자이기도 해서 그는 파리넬리와도 교류하며 그를 위한 성악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건반(특히 하프시코드) 연주자로도 당대를 수놓은 거장이었는데, 한번은 동년배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건반 연주 대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대결에서 하프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 연주는 헨델이 승리하였고 두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친한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헨델은 자신의 작품에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의 주제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사례, 헨델 합주 협주곡 Op.6 No.1의 마지막 악장 -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K.2).


 스카를라티의 작품은 오페라 등 다른 장르도 많이 있지만, 역시 그를 대표할만한 것은 수백 곡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들입니다. 명연주자의 작품답게 화려한 기교를 세련되게 담고 있으며, 고향 이탈리아 뿐 아니라 말년을 보낸 스페인의 음악 스타일이 녹아있는 등 대단히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근대 이전의 음악가답게(?) 그의 작품은 양이 방대하고 소실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은 등 목록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데, 현재는 건반 소나타에 한하여 대체로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음악학자인 랄프 커크패트릭(1911-1984)가 총 555개의 목록으로 정리한 번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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