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결과야 모두 예상한 대로 나왔고 말입니다(하긴 그것보다도 민주당이 더 싹쓸이를 하긴 했네요). 뭐 전체적인 결과에 대해서야 너무 뻔한 이야기가 나올테니 관두고, 그냥 블로거 개인적으로 흥미있었던 몇몇 동네만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1. 이번 선거 최대 격전지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간발의 차로 당선자가 결정된 곳은 강원도 평창군수입니다. 득표율 50:50에 표차가 단 24표가 나왔습니다. 2위 후보는 아마 두 달은 잠을 못 이룰 듯. ㅡㅡ; 사실 강원도는 도지사는 몰라도 시장-군수는 대부분 보수계열 정당 후보들이 석권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평창올림픽 성공 개최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왕년의 최대 격전지



 강원도 고성군수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현직 군수를 떨어뜨리고 당선되었습니다. 이 곳은 사실 많은 이들에게 유명한데 과거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바로 이 사건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ㅡㅡ; 두 후보는 이후 지방선거에서 리벤지(?) 매치를 치렀는데 황종국 후보가 한 번 더 승리하였고, 황종국씨가 시장 재직 중 별세한 이후에는 윤승근 후보가 당선되어 현직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하나 넘어서 군수직을 계속 하나 했더니, 또다른 산이 나타나 버렸네요. ㅡㅡ;




3. 이부망천의 최후




 얼마 전 자유한국당 대변인 정태옥씨의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발언으로 폭탄을 맞은 두 지역입니다. 뭐 서울에서 망해서 인근 위성도시로 이사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블로거가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거에 나서는 정당의 중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대놓고 지역비하를 하는 건 그냥 그 지역에서 선거 포기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지요. 당연하겠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수도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격차가 났습니다.




4. 박정희 본진 털리다



 사실 이번 선거의 숨은 주인공은 바로 이곳일지도 모릅니다. 박정희의 고향이자 이전 시장이 "박정희=반인반신" 드립이나 치던, 박정희 숭배의 끝판왕 구미시장 자리가 더불어민주당에 넘어왔습니다. 민주당 계열에서 후보조차 잘 못 내던 경북 지역에 처음으로 민주당 기초단체장이 배출된 것도 그렇고, 그 자리가 하필이면 박정희의 고향 구미라는 게 더 의미심장하네요. 보수 계열 후보가 난립했던 것, 구미시가 전자산업 중심의 도시라 청장년층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것 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5. 어쨌거나 당선!



 이번에는 옆동네 상주시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크게 이슈가 없는 동네에 왜 왔을까요? 바로 1위 득표율 때문입니다. 보시는 대로 1위와 4위의 득표차가 10%도 나지 않습니다. ㅡㅡ; 여기도 무소속 후보가 난립하는 바람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TK에서도 자유한국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예전보다 많이 낮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겠습니다.




6. 서울 유일의 자유한국당 구청장



 서울은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를 해서 제4회 지방선거의 리버스 버전이 되나 싶었지만 유일하게 서초구만 자유한국당이 지켜냈습니다. 딱히 이 지역이 보수라서라기보다 현직 구청장이 인근 강남구에 비해 크게 안 좋은 쪽으로 이슈가 되지도 않았고, 선거 공보물 등 선거운동도 잘 한 측면이 있다고 하네요. 아무튼 덕분에 자유한국당 역시 간신히 고개를 들 껀수가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현실은 TK자민련




7. 녹색당에도 털린 자유한국당



 제주지사 선거는 예상대로 원희룡씨가 당선되었지만, 자유한국당 후보가 녹색당 후보에게도 밀리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ㅡㅡ; 이번 제주도 녹색당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꽤 높은 득표율을 얻었는데 아무래도 제주도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8.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 버렸습니다. 이준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 자유한국당 vs. 안티자유한국당



 경북 김천 재보궐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가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자유한국당이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이 무소속 최대원 후보는 반(反) 자유한국당 연합후보로 민주당 쪽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출마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마터면 민주당 혹은 민주당이 지지하는 후보들에게 재보선 모든 지역구를 다 털릴 뻔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10. 정리


 라고 할 게 있을까요? 이번 선거에서는 아무튼 민주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대부분이 예상했고, 결국 그 정도가 문제일 뿐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으니 말입니다. 이재명씨나 김경수씨가 개인적, 정치적 온갖 논란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무난하게 당선된 것을 보면 여론 일반이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에 어떤 입장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바른미래당은 반짝 떴다가 사라진 수많은 제3정당들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고, 민주평화당은 역시 호남 자유선진당 노릇이나 좀 하다가 말겠지요. 정의당은 정당득표율은 좀 나온 것 같지만 고질적인 인재부족을 어떻게든 해결 못하면 여전히 답이 없을 겁니다. 그냥 앞으로 4년간 이 사람들이 뭔 짓을 하는지나 잘 감시해 봅시다.



 친일파를 생각할 때 한국인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만,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한국인들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본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중에도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특히 그런 사람이 세계적인 종교의 중요 인물 쯤 되는 거물이라면 여기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살펴볼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다진 위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본에 적극 협력한 친일행위자라는 거대한 어두움을 함께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귀스타브 뮈텔 주교]




1. 뮈텔 선교사 조선에 오다


 뮈텔은 1854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조선에 온 것은 1881년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면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정식 수교하기 전까지 양측은 적대 관계였고(병인양요 등 무력충돌도 있었다보니)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도 그 때까지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로 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뮈텔은 1885년 본국의 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조선을 잠시 떠났습니다(30세 무렵에 교수로 임용된 것을 보니 능력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1890년 가톨릭 조선대목구(現 서울대교구) 교구장 장 블랑(1844-1890)이 선종(사망)하자 후임으로 그가 임명되었고,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33년까지 무려 43년간 교구장 자리를 지켰고, 이제 막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를 양성하였고,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또한 그의 재임기에 지은 것입니다. 독일의 성 베네딕토회에 요청하여 한국에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판공성사 제도가 그의 재임기에 정착된 것입니다.


[명동성당]


 그가 재임하는 동안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일대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이 때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바뀝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함경도, 간도)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메리놀 외방전교회 관할)가 신설되는 등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부임할 당시 17,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도 1930년대가 되면 서울대목구에서만 50,000~60,000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여러 대목구와 지목구가 분리된 이후의 통계입니다).


 뮈텔 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날부터 죽기 며칠 전까지 꾸준히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와 편지, 각종 사목문서 등을 통틀어 '뮈텔 문서'라 부르며 초기의 한국 가톨릭과 뮈텔 주교 개인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 가톨릭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와 관련한 사적지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종교지도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겠습니다만......




2. 주교 뮈텔의 그림자 : 민족을 팔아 부흥을 얻다


 한국 가톨릭의 성장 뒤에는 바로 일본 당국과의 지저분한 협력관계가 있었습니다. 뮈텔 주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심지어 이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일본의 인정과 협조를 얻어냈고, 그 바탕 위에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잘 알려진 사례로 뮈텔과 안중근 사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중근은 부자(父子)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데,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 뮈텔은 그와의 모든 우호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심지어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준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1860-1936) 신부가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겠다고 요청하지만, 일본 당국까지 허락한 사안을 뮈텔은 거부하고 빌렘 신부가 안중근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뮈텔의 입장은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성사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동생 안명근이 그를 찾아 고해성사를 집전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다시 거절하면서 "안명근이 아주 무례했다"고 일기에 써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빌렘 신부는 그의 금지령을 씹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는데, 뮈텔은 정치적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빌렘에게 2개월 성사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에 빌렘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교황청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가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고 징계를 직권으로 철회했습니다. ㅡㅡ;


[안중근을 면회하고 있는 빌렘 신부]


 안중근과 그의 악연은 이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추진하던 대학 설립에도 반대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유란 게 무려 한국인이 학문을 익히면 가톨릭 신앙에 소홀해진다는 말 같지도 않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오죽하면 안중근이 충격을 받아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기까지 했다는군요. 물론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교육사업에 힘쓰긴 했지만 이는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는 '교육은 하되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식민 당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명한 일로는 105인 사건의 결정적 단초가 된 고해성사 밀고 사건이 있습니다.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계획을 두고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에서 계획을 털어놓자, 미리 뮈텔로부터 안중근 집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빌렘은 뮈텔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이를 뮈텔이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안명근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신민회가 풍비박산나고 말았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


 이는 종교지도자가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이며,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행동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가톨릭계의 골치를 썩이던 명동성당 진입로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고개(現 충무로) 방향 진입로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침범하여 사실상 길이 막혀 있는 상태였고, 성당 측에서는 1906년부터 계속 소송을 걸었지만 번번이 패소해 왔습니다. 이에 뮈텔은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그 대가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1운동에서도 그는 당연히 신학생들에게 시위 참여 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고 참여한 학생들은 여지없이 퇴학 처분을 내렸습니다(이러한 입장은 뮈텔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미참여를 비판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약(?)상은 그의 일기에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어 후세에 그 전말이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3. 종교적 고찰 : 과연 그는 제대로 된 사제로서 자격이 있는가?


 이런 짓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그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닦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뮈텔 문서 등 그와 관련한 사료들이 많이 발굴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진행된 최근에는 그의 행적이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다수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후술할 고해성사 밀고 논란까지 가면 그가 아예 사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단 그는 한반도 선교에 일생을 바친 주제에 심각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의 법정에 출두하면 한국인의 눈에는 '유럽인이 한국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서 대놓고 한국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 신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만큼 한국인을 아래로 보았습니다. 한국인 사제들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 훗날 부산교구에서 활동하는 사제 김명제(1908-1960)가 그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재임기에 한국인을 위한 많은 사업이 벌어진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우매한 한국인'을 위한 동정적 시각이 강하게 들어있었고 자신들(유럽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보고 벌인 일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안중근과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뮈텔은 오로지 가톨릭 선교에만 몰두해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폭압적 식민지배에 협조함은 물론,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을 우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루된 가장 큰 떡밥으로 단연 '고해성사 밀고'를 들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제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결코 어디에도 발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겼을 경우 즉각 파문당하거나 이에 준하는 중징계를 받습니다. 물론 안명근이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앞으로 저지를 범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고해성사의 형태로 고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큰 논란을 자초한 셈입니다.


[뮈텔 주교의 일기는 현재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는 것을 막은 것 또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제의 기본을 망각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빌렘 신부는 비록 105인 사건 당시에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한 1차 책임자라는 문제는 있지만 뮈텔의 반(反)한국인 성향에 반발하여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결국 1914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방해한 뮈텔의 이러한 행적들은 그 상당수가 교회법조차 무시한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더 큰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짓거리들을 행한 결과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거의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를 상당히 앞서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다만 이는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교황청에서 직접 이를 수용하도록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후로도 한국 가톨릭은 몇몇 신자들의 개별적 활동을 제외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권력에 협조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당장의 교세를 확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결국 한국인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은 하지만 그 정도는 점차 감소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에 밀려 '기독교'라는 명칭 자체를 사실상 개신교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의 행적은 한국 가톨릭을 위해 좋은 것이었을까요?




4. 정리 : 무엇을 위한 종교여야 하는가?


 뮈텔 주교의 행적은 이러저러하게 연구가 되고 있지만,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재임기가 한국 가톨릭의 (사실상)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도 있겠습니다. 뮈텔과는 거의 반대 방향의 사목을 한 김수환 추기경조차도 그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옹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이 이후의 한국 가톨릭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톨릭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동안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였습니다. 19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등 사회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제들이 다수 등장하여 활동하고 나면서부터야 가톨릭의 교세가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한국 가톨릭에 끼친 해악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분명 그가 주장했던 중요한 논리는 '정교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이를 대가로 종교시설 유지에 편의를 얻어내는 모습은 정교분리보다는 차라리 '정교유착'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며 정당한 사회참여마저도 막아세웠던 것입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24인 시복미사. 광화문광장]


 사실 블로거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서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개신교와 이를 막아세웠던 가톨릭의 처지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사회문제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며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개신교는 정교분리 운운하면서 정작 뒤로는 심한 권력지향성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리를 떠나 사회적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종교의 역할이란 사회의 소외당한 자, 탄압받는 자,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탄압받는 한국인의 목소리를 외면한 뮈텔 주교의 행적, 그리고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재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는 과연 제대로 된 종교인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느 쪽을 더 옳다고 하실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가톨릭평화신문, 「[특집]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④ 안중근과 빌렘 신부, 그 운명적 만남

가톨릭프레스, 「명동성당 길과 바꾼 105인 사건

연합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통신문> 국내 최초 공개

중앙일보, 「[분수대]뮈텔 주교와 김추기경

한겨레,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김정환,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교회사연구』 3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김정환,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읽다」,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2015. 10. 18. - 2018. 5. 22.

Woodwind


# Piccolo, 2 Flutes, 2 Oboes, 2 Clarinets, Bass Clarinet, 2 Bassoons




[설명] 방치해 둔 미완성곡 정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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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언'이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무엇일까요? 사실 선언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그냥 말만 한 거니까요. 그것이 무슨 계약이나 판결, 조약처럼 강제력 또는 법적 효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언의 의미를 논하려면 결국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가지고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미독립선언서는 한반도가 결국 해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 발표된 많은 선언문들은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에 그 빛을 남기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판문점 선언 또한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좀 더 멀리 간다면 7·4 남북공동성명부터 시작해서 6·15, 10·4에 이르기까지 통일 문제와 관련한 모든 선언문들은, 결과적으로 남북이 통일되어야 역사적으로 그 의의를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선언에 마음 한 구석 불안함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겠지요. 지금까지는 그러한 선언들이 제대로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 모양이었던 거니까요.




 - 2.


 그러니 앞으로 이 선언의 내용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겠는가를 따져 보아야 할텐데, 아직 확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야 없지만 이전 선언에 비해 훨씬 여건이 좋고 실현 가능성이 크기는 한 것 같습니다(물론 블로거의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이번 회담은 '북미정상회담'과 한 트랙으로 가는 이벤트이고, 또한 한 쪽 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임기를 4년 이상 남겨 두고 있습니다. 북미관계라는 변수, 반북세력으로의 정권교체라는 변수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북한 쪽에서 이전과 다르게 매우 즉각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핵실험장을 확실히 폐쇄할테니 그걸 직접 와서 확인하라는 이야기나, 몇 년 전에 바꾸어 놓은 북한식 표준시를 다시 원래 기준으로 돌려놓겠다는 이야기나 이전의 북한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물론 이것이 '정치'인 만큼 이것이 진심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고, 적어도 북한 쪽에서 "우리 지금 진지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것 또한 이번 선언의 신뢰도를 높여 주는 건 물론이고 말이지요.




 - 3.


 이번 선언문에 비핵화 문제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계속 언급이 되었듯이 비핵화 문제에 있어 남북정상회담은 북미정상회담의 전초전 성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북핵이 '외교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되었건 비핵화 안건은 북미정상회담에서 다루어야 하고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겁니다(이 점에 있어서는 플레잉 카...... 아니 트럼프가 장사꾼 답게 협상 하나는 통 크게 한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므로 판문점 선언에서 언급된 비핵화 이야기는 북미정상회담에서 어떤 기준으로 이야기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정도 주제와 무게를 가진 회담에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의를 하지 않았을 턱이 없으니, 이번 선언의 내용에 미국의 의중이 들어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북미정상회담에서도 기본적으로 핵을 완전히 없앤다는 전제 하에 북한과 미국의 딜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될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군요.




 - 4.


 이번 선언 단독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종전선언' 추진 부분입니다. 다만 이것은 아마 남북한만의 합의로 해결되기는 어렵겠지요. 1953년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이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협정문에 서명한 당사자는 북한, 중국, UN군(사실상 미국) 측으로, 심지어 대한민국은 여기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ㅡㅡ; 다들 아시다시피 이는 당시의 대통령인 저승...... 아니 이승만이 여기에 서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전 이야기는 남북미중 4자회담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지요(뭐 이래 놓고 미국과 중국이 그냥 남북에 일임해버리면 또 모르지만). 무엇보다 종전선언이란 곧 기존 정전협정의 폐기를 의미하고, 이는 평화협정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되면 또 외교적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생각보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한국전쟁의 최종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주변국들 - 특히 전쟁과 휴전협정의 직접 당사자였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은 어떻게 할지, 군축 문제는 어찌 할지, 서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등등등등.


 그래도 전쟁이 완전히 끝난 상황이라는 게 상상할수록 흥미로워지기는 합니다. 우선 (옛 동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양측간에 제한적이나마 왕래가 가능해질 것이고, 그리 되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는 사실상 완전 해결됩니다. 수시로 창구를 열어 놓고,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그간 말로만 나왔던 북한 철로를 통한 대륙간 물류수송, 러시아에서 한반도로 오는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등도 실현될 겁니다. 러시아 싱글벙글 무엇보다도 더 이상 휴전선에 육군 병력을 몰빵할 이유가 사라지고, 휴전선(일단 이름이 바뀌겠군요)의 경비는 일반 국경 수준으로 완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측 군대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기겠지요.




 - 5.


 정치는 결국 '쇼'입니다. 특히 대중매체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정치라면 더욱 그렇지요. 홍XX씨가 이번 회담을 '위장 평화쇼'라고 주장하는 건 충분히 제시 가능한 의견입니다만 그건 애초에 정치라는 게 그렇다는 걸 무시한, 유아적인 논리에 입각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분의 말대로라면 이번 회담은 그 목적을 백배 달성한 겁니다. 이 분 정치 오래 하신 분 맞나요? 그대로 종신대표를 하시기를 기원합니...... 에......




 - 6.


 김정은씨는 갑자기 왜 태도를 돌변했을까요? 이건 블로거가 전문가도 아니고 정확히 알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이 사람 생각에 북한이 언제까지나 은둔 상태로 있을 수도 없고 핵을 더 이상 크게 키울 수도 없는데(이 이상 핵개발을 더 하려면 이제 메가톤 단위의 핵무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걸 실험하려면 만탑산이 아니라 개마고원이 날아갑니다), 미국의 현 황상대통령을 봤을 때 장사꾼 출신이고 통 크게 쇼부(?)를 칠 수 있는 사람이니 적당히 판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핵을 외교카드로 제대로 쓰고 버리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의문인 건 김정은씨가 과연 저렇게까지 나와도 괜찮은가 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이 정도까지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분명 북한 내부의 체제 유지 프로세스에도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전쟁과 반미라는 두 가지 명분이 한꺼번에 날아가니까요. 그런데 북한에도 분명 냉전체제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이 있고(남한에도 있듯이), 이들이 북한 지배계층을 점유하고 있는 만큼 예상되는 반발을 과연 제어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 조금 듭니다. 어쩌면 김정은씨는 그동안 이런 식으로 나올 준비를 하기 위해 위협요소들을 대숙청으로 착실히 제거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김정은씨를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싶어 일단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8 춘계답사 - 2일차

일시 : 2018. 3. 22. ~ 23.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아침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합니다. 오늘도 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첫 번째 답사지는 충주읍성입니다. 물론 성 자체는 일제강점기에 헐려 남아있지 않지만, 그 내부의 관청 건물 중 몇 채가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재작년 쯤 올라온 기사에 따르면 읍성에 쓰인 돌들이 잇따라 발견된 것을 계기로 충주의 몇몇 시민단체에서 읍성 복원을 추진한다고 하는군요. [기사보기]



 이곳은 충주의 동헌(東軒. 관아의 중심 건물)으로 쓰인 '청녕헌'입니다(한자 발음상 '청령헌'이라고도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870년 화재 이후 다시 건축한 것으로, 특이하게도 해방 후까지 계속 쓰여 중원군(現 충주시의 읍면 지역) 군청이 되었다가, 1983년 청사를 이전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관아의 정문입니다. 답사일행이 다른 문으로 출입했기 때문에 확인을 미처 못 하였는데, 이 문은 관아 안쪽으로는 '중원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바깥쪽에는 '충청감영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한때 충청감영(요즘식으로 말하면 충청도청)이 소재하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의 절반 이상은 충청감영이 공주에 있었고 이전에는 청주에도 감영이 있었다니 그 기간은 길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는 충주 일대 행정구역이 강등과 승격을 정신없이 반복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충청도가 이름을 바꾼 역사(충청도, 충공도, 청홍도, 공홍도, 공충도......)를 보면 화려하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ㅡㅡ;



 관아라고는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많지 않아서, 동헌인 청녕헌과 아래에 소개할 제금당, 산고수청각 정도 뿐입니다. 덕분에 충주 관아에는 이렇게 빈 터가 많이 있습니다.



 관아 한켠에는 수령이 500년을 넘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습니다. 나름 보호수라서 그런지 사방에 철로 된 기둥으로 받쳐 놓았습니다. 아마 이곳 충주 관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나무겠지요?



 또 하나 독특한 유적(?)이라면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충주 또한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여럿 있고, 그들이 잡혀 와 심문을 당한 곳이 이곳 관아였기 때문에 이곳에 비석을 세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남아 있는 다른 두 건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곳은 '제금당'으로, 충주에 왕실 손님이 방문했을 때 일종의 영빈관(?)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청녕헌이 중원군청으로 쓰이던 당시에는 중원군수 집무실로 쓰였고, 군청 이전 후 청녕헌과 함께 원상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조금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으니 이곳은 '산고수청각'으로, 제금당에 귀빈이 방문했을 때 일종의 비서실 역할을 수행한 곳입니다. 여담으로 이 두 건물에는 청녕헌과는 달리 단청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교수님에게 이유를 묻자 교수님은 옛 건물을 복원할 때 '멋있어 보여서' 고증을 제대로 않고 무식하게 단청을 칠하는 경우가 자주 있으니 너무 신경쓰지는 말라고 전제를 깔고 ㅡㅡ; 만약 고증이 제대로 된 거라면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 단청을 칠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중원루 곁에 있는 '축성사적비'는 1869년 충주읍성을 개축한 이후 세운 기념비입니다. 이제는 읍성은 없고 사적비만 ㅡㅡ;



 충주 관아는 이쯤 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흔적이 발견된 조동리 선사유적지입니다. 이곳은 1990년 9월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강변의 퇴적층이 깎여나가는 바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이 홍수는 당시 광명시에 살던 블로거의 기억에도 얼핏 남아 있는데, 블로거의 집은 피해가 없었지만 살던 아파트 1층이 흙탕물 바다가 었습니다).



 이곳 유적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면 단연 붉은색 굽잔토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붉은간토기의 일종으로, 모양으로 봤을 때 실용 목적보다는 제사 등의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이 녀석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다가 최근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그래서 박물관 내에는 진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녀석이 조동리 유적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보니



 그걸 본딴답시고 뒤켠에는 이런 무식한 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ㅡㅡ;



 박물관 내에는 조동리에서 출토된 유물 뿐 아니라 충청도 일대에서 나온 다양한 선사시대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복제품들입니다. 진품들은 아마 그 동네에 있든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든지 하겠지요?



 조동리 유적지 현장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집터로 쓰였을 법한 구덩이들이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토기의 형태가 한강-금강 유역 스타일과 남해안 쪽 스타일 모두 존재하는 등 두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충주의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기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바로 탄화된 곡물들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는 농경생활을 한 흔적인데 이 씨앗들은 한국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고 합니다.



 ??? 그 곁에 웬 뜬금없는 전시실이 하나 있는데, 1970년대를 장식한 '통일벼'를 개발한 농학자 허문회(1927-2010)의 기념실입니다. 허문회 박사가 충주 출신이고, 때마침 조동리 유적에서 탄화된 곡물 흔적도 발견되고 했으니 겸사겸사 공간을 만든 모양입니다. 통일벼는 '보리밥보다 맛없다'는 악평도 들었고 병충해에 약하다는 결함도 있었지만, 어쨌든 월등한 생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쌀 자급자족에 큰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후로는 상술할 문제점(특히 병충해) 때문에 일반 농가에서는 더 이상 재배하지 않지요. 요즘이야 그렇게 생산량에 목숨 걸 이유가 없기도 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는 길에 점심을 먹었습니다. 잠시 여유시간이 생겨 바로 앞에 있는 남한강변으로 나와 보았습니다.



 다음 답사지는 청룡사지입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구체적 연도나 창건자는 불명),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사라진 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존재합니다.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협조한 보각국사 혼수(1320-1392)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입적하였고, 태조의 명으로 절이 크게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건재하다가 폐사지가 되었는데, 한 전설에 따르면 조선 말 민씨 일족의 한 유력자가 바로 근처에 묘를 쓴 이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몰래 절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ㅡㅡ; 하지만 이후 그 무덤은 벌초하러 가는 사람마다 목숨을 잃곤 했기 때문에 결국 다른 곳으로 이장해 버렸다고. ㅡㅡ;



 이곳은 골짜기 한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내려 등산(?)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밑에 나올 마지막 답사지보다야



 절의 다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는 보각국사 승탑과 관련 유물들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승탑 본체는 국보로, 앞의 석등과 뒤 비석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승탑은 나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는데도 상당히 크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당시 보각국사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승탑 뒤에는 보각국사탑비가 서 있습니다. 글은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 권근(1352-1409)이 지었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보통 탑 윗부분에 얹어놓는 장식물이 없고, 가장자리를 사선으로 깎아낸 것이 독특한 모습입니다.



 사실 승탑 외에는 볼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ㅡㅡ; 다시 길을 내려오면서 다른 소소한 유물들을 관람하기로 합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보각국사 승탑보다는 조금 밋밋(?)한 승탑이 있는데, 위에 둥글게 생긴 녀석은 어제 충주박물관에서 본 것과 비슷하지만 훠얼씬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석종(鐘)형 승탑은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양식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나친 화려함을 삼가는 분위기 + 불교를 억제하는 사회였던 것과 관련이 있겠지요?



 내려가는 길에는 비석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위전비'로 청룡사 창건과 관리 등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도들이 논밭을 기증한 내역을 기록한 것입니다. 숙종 때 만들어졌고 당시 사찰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자 이제 산을 내려와서 이번에는 강으로 가 봅시다. 조선시대 물류 중심지로 번영했던 목계나루입니다. 이곳 건너편에는 경상도 쪽에서 죽령과 조령을 넘어온 세곡(稅穀)을 임시 저장하던 '가흥창'이 있었고, 가흥창에 저장된 곡식은 목계나루에서 배에 실어 남한강을 따라 서울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간 상선들도 오가고, 큰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기 마련이지요.



 이곳은 '목계별신제'와 관련한 설명을 듣기 위해 들른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마을마다 이런저런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목계나루처럼 큰 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무당패 등등을 초빙하여 여러 날 동안 일종의 지역축제 형태로 개최했다고 합니다. 이는 신앙적인 의미도 물론 있지만 (제사를 열면 사람들이 모이니까) 상권 활성화라는 의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하고 똑같네 사진의 '부흥당'은 제사를 지내는 서낭당의 역할을 한 곳인데, 본래의 부흥당은 인근 부흥산이라는 곳에 있고 이것은 근래에 신축한 것입니다. 옆에는 부흥당의 유래를 기록한 비석도 서 있습니다. 목계별신제는 명맥이 끊겼다가 문화행사로 부활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 그리고 다른 곳을 둘러보는데...... 없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ㅡㅡ; 사실 목계나루는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잘나갔지만 일대에 신작로와 철도(충북선)가 뚫려 치명타를 입었고, 바로 옆에 다리(목계교)가 개통하며 그나마 있던 나룻배도 사라졌으며, 1970년대 마을이 큰 수해를 입은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옛 영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도로 너머 작은 마을만 남아 옛 영광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마을 입구에는 '목계나루터'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는데, 저 '터'라는 글자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경종대왕 태실입니다. 이곳도 가는 길이 꽤 험해서 한참동안 거름 냄새를 만끽하며 시골길을 걸어간 이후



 또다시 등산을 해야 합니다. ㅡㅡ;



 어쨌든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면 요런 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경종의 태(胎)를 안치한 태실입니다. 아기가 출생할 때 함께 나오는 태는 한국에서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서(태아가 태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맞는 말) 아주 중요하게 여겼으며, 왕실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태만큼은 아주 소중히 담아 관리했다고 합니다(심지어 이걸 말렸다가 약으로도 썼다는군요). 특이 왕이 될 사람의 태는 명당 중의 명당을 엄선하여 따로 돌방을 만들어 보관했는데, 태는 사람의 운명과 직결되고 특히 왕의 운명은 국가 전체의 운명과도 결부되니 가능한 한 좋은 대접을 했던 겁니다.



 이곳에는 비석이 두 개 서 있습니다. 하나는 '강희 27년(1688년)'과 '원자아기씨'가 쓰여 있는 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옹정 4년(1726년)'과 '경종대왕'이 적혀 있는 비석입니다. 찾아보건대 첫 번째 비석은 경종 출생 직후 태실을 이곳에 처음 만들 때 세운 것이고, 경종 사후 영조 2년에 태실을 현재의 형태로 정비하였는데 그 때 세운 비석인 듯 합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여러 왕과 왕족들의 태실이 관리 명목으로 대부분 서울 근처 서삼릉 일대로 옮겨진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경종 태실도 강제이전했다가 1976년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경종의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는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는군요.



 태실은 일반적으로 '음택풍수'의 명당인 '돌혈'에 위치합니다. 지형이 상당히 독특한데, 앞으로는 훤히 뚫려있고(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시야가 닿는 곳에 집 한 채 있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옆과 뒤쪽으로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실이 있는 이 언덕은 그 산들과 동떨어져 외따로 우뚝 솟아 있어서 아주 특이한 풍광을 만듭니다. 이제 해가 기우는 걸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산을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옵니다. 고작 이틀 지났는데 한 일주일은 된 것 같습니다. ㅡㅡ;




 이것이 입학 후 세 번째 정기답사인데, 다른 답사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1학년 때 다녀온 공주-부여(이건 글이 없으니 찾지 마세요)와 서울의 경우에는 다들 한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있고, 당연히 기록이나 유적,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역사 또한 이런 곳들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요. 이런 곳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런 유적과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만 사람이 살았던 건 당연히 아닙니다. 충주는 한 나라의 수도가 된 적이 딱히 없었을 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언제나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입니다. 당연히 이들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는 이번 답사로도 확인한 바이지만 그것들 중 상당수는 교과서 등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무학대사는 알아도 보각국사는 잘 모르고, 우륵이 가야금 탄 이야기는 알아도 그와 함께 충주에 왔을 신라와 가야의 이주민들은 잘 모릅니다. 조동리의 굽잔토기는 먼 타지로 나가 관람객을 맞다가 최근에야 돌아왔고, 물류의 중심지였던 목계나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교과서에 나온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흔적을 다루는 게 역사라면 사람이 살았고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이곳에서 블로거가 계속 느꼈던 것은 (탄금대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답사지들이 나름 역사공부에 손가락(?)쯤 담궈 보았다는 블로거에게도 제법 생소한 것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끝)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8 춘계답사 - 1일차

일시 : 2018. 3. 22. ~ 23.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이번 답사 지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일대입니다. 처음에는 충주라고 해서 거기에 뭐 그리 찾아볼 게 많이 있나 싶기도 했는데, 충주는 어느 큰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없었을 뿐 한국사 전체를 두고 상당히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어쩌면 요즘이 충주의 최대 침체기라고 볼 수 있을지도), 생각보다 역사적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출발 전날에 뜬금없이 날이 추워져서 다들 걱정을 하였는데(더구나 충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도시 중 하나), 다행히 출발일에 날이 조금 풀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충주로 출발. 처음 도착한 곳은 충주박물관입니다.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답사 당시에는 1관은 내부공사중이었기 때문에 2관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2관과 야외전시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습니다. 야외전시관에는 다양한 석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블로거의 눈을 끈 것은 아주 작은 크기의 승탑이었습니다. 종 모양으로 아주 단순 간결하게 생긴 이런 형태의 승탑은 조선시대에 유행한 형태라고 합니다.



 충주박물관 2관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큰 박물관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알찬 유물 구성을 보여줍니다.



 충주에서 나온 유물은 아니지만 단양 신라 적성비의 모형도 이 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고, 충주의 역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유물이라 모형이나마 전시를 해 둔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영정(아마 현대에 와서 그려졌을)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충주박물관은 특이하게도 국가에서 설립한 것이 아니라, 충주시민이 기증한 유물들을 중심으로 전시관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박물관으로 승격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곳은 국립박물관이 아닌데, 몇몇 장소에 국립박물관 승격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블로거가 생각하는 박물관의 핵심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바로 근처에 우뚝 솟아 있는 탑평리 7층석탑, 통칭 '중앙탑'입니다.



 중앙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신라 최대 높이의 탑입니다. 당시 충주는 신라 국토의 중앙으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국토의 남북에서 같은 보폭을 가진 사람이 걸어와 마주친 곳에 지었다고 하여 '중앙'탑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탑신 위 꼭대기(상륜부)에는 상륜부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노반'이 있는데, 저렇게 노반이 2층으로 겹쳐 있는 것은 신라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탑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혹은 그런 상징을 가진 곳)이라 탑이 있는 곳에는 절이 함께 있는 게 당연한데, 탑평리 7층석탑에는 특이하게도 근처에 이렇다 할 절터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배경에는 이런저런 설(단순한 기념탑이라거나, 신라 전국토가 하나의 사찰이라는 개념이었다거나)이 있지만 모두 확실치는 않습니다. 일단 탑 근처에서 이런저런 발굴 작업은 계속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답사란 이런 게 좀 아쉬운데, 한 곳당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뭔가 감상할라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찾아갈 곳은 충주 고구려비가 있는 곳인데, 5세기경 고구려가 충주를 점령하고 만든 충주 고구려비는 비석이 발견된 장소에 번듯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하는데 이는 발견 당시 충주시의 영역이 충주시+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비석만 덜렁 있으면 재미없으니 고구려와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 원본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



 이것이 바로 충주 고구려비입니다. 일설에는 마을의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ㅡㅡ; 말도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무근이고, 근래까지 마을의 선돌(수호신 역할을 하는 돌) 노릇을 하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비석에서 글자를 새긴 흔적을 발견하고, 고구려가 세운 비석으로 밝혀진 것은 1979년입니다. 이 비석이 서 있던 곳은 선돌에서 이름을 따서 '입석마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비석의 글자가 전반적으로 마모가 심해서, 정확한 해독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디 한 번 읽어 보아라(2) 그나마 저 정도는 양호한 편이고 사진에 나오지 않은 다른 면의 탁본은 거의 TV 노이즈 화면 수준이라 글자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ㅡㅡ;



 충주 고구려비는 이쯤 보아두고 다음 장소인 누암리 고분군으로 이동합니다. '루암리'라니 두음법칙 무시 보소



 딱히 왕릉같은 건 없을 것 같은 동네에 큰 규모의 무덤이 이렇게 무더기로 있다는 것이 신기한데, 충주는 신라 진흥왕이 점령한 후 소경(小京)을 처음 설치했고 당시 경주의 귀족들과 가야 유민 일부가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고분군은 당시 이주한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언덕을 따라 무덤들을 짓는 건 대체로 신라보다는 가야 스타일에 가깝다는군요.



 무덤들 주변으로 산책로가 있어서 빙 둘러볼 수 있습니다. 거의 공동묘지 수준으로 무덤이 많습니다. ㅡㅡ; 사실 이것이 다가 아닌 것이 누암리 고분군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이곳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는 우륵과 신립의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탄금대입니다. 좀 멀찍이 있는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어가면



 신립 장군 순절비가 있는 작은 누각이 나옵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고니시 유키나가 대장)과 조선군(대장 신립)이 전투를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와 전술 착오 등의 이유로 신립을 비롯한 조선군이 말 그대로 전멸당한 곳으로 유멍합니다. 이곳에서 발표와 설명을 듣고,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 열두대를 관람하기로 합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우륵 기념비가 있습니다. 비석에는 가야 출신으로 가야금과 노래들을 만들고, 신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파한 우륵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쓰여 있습니다. 우륵에 대하여는 비석과 전설 외에는 남아있는 흔적이 많이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군요.



 한참을 낑낑거리며 올라가서, 이번엔 한참을 내려가 마침내 열두대에 도착했습니다. 열두대는 신립 장군이 몸을 던져 자결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열두대'라는 명칭의 유래에는 신립 장군이 열두 번 패배한 끝에 절망하여 투신하였다는 설, 전투 도중 열두 번이나 올라와 전황을 확인했다는 설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합니다. 이곳의 절벽 위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고



 아래는 가파른 절벽 아래 남한강이 흐릅니다. 열두대 위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풍경은 정말 끝내줍니다. 미세먼지가 좀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절망 끝에 몸을 던지는 신립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쨌거나 답사인원들은 이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더랬습니다.



 열두대를 지나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도중에 '탄금대기'라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1954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막 끝났을 때인데 그럼에도 이런 비석을 세웠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소박한 기념비를 지나면 이번에는 쓰잘데 없이 거대한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신립장군과 팔천 영령 충혼비'인가 뭔가하는 거창한 이름인데 팔천 영령들이 저승에서 이걸 보고 한숨이나 쉬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심지어 그 곁에는 다른 비석이 하나 더 있고, 아래에는 인공 반지하(?) 방에 '호국영령위패실'이라는 어마어마한 방이 있습니다. 거대한 철문이 육중하게 닫혀 있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위패실 위에는 또 다른 바벨탑기념탑이 서 있고, 그 뒷면에 무슨 상이용사회니 장병보훈회니 하는 이름이 당당히 새겨져 있는데 그냥 사진은 올리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탄금대를 한 바퀴 돌아왔습니다. 약도에서 보이다시피 탄금대의 보행로는 한 바퀴 빙 둘러서 돌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날의 답사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숙소에 돌아가 저녁식사와 이후 일정을 진행했습니다. (계속)




Sir Michael Kemp Tippett (1905-1998)

Symphony No.3 Part.2




 마이클 티펫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로, 벤자민 브리튼(1913-1976)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서남부의 콘월 출신이고, 할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아버지는 성공하여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결혼 후 런던 근교에 정착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둘째가 바로 마이클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그의 가족은 동부 서포크 주의 웨더덴으로 이사하였는데, 티펫은 이곳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그 때부터 있었는지 어린 나이에도 나름 즉흥연주 같은 것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그는 남부 스와니지에 있는 기숙학교에 진학하고, 1918년에는 에딘버러의 명문학교인 페테스 스쿨에 진학하여 다른 과목들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 등의 음악교육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는데 주변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친구 남학생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부모는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링컨셔의 스탬포드 스쿨로 전학하여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득이 되었는데, 학문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스탬퍼드 스쿨에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금씩 음악인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티펫은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기대하는 부모와 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고, 그 무렵 무신론 옹호 등 반항적인 활동으로 학교와 충돌한 끝에 결국 스탬퍼드 스쿨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티펫은 동네 교회의 음악가들 등을 통하여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자신의 가능성과 의지를 인정한 아버지가 그를 지원하면서 왕립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과 지휘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아마추어 합창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 경력도 착실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1928년 학위 시험을 통과하여 학사 학위를 딴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옥스테드에 정착한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계를 위해 작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때마침 그곳에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프라이(1907-2005)가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훗날 공동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옥스테드 합창단과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지휘하였는데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원전 연주'를 선보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32년에는 인근 림스필드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이 때의 정치적 교류를 바탕으로 그는 좌파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그는 런던 카운티 정부가 후원하여 백수실직한 음악가들을 모아 설립한 사우스 런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위촉됩니다. 당시 그는 런던 근교의 광산을 돌며 노동자를 위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티펫은 1935년 영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받아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그는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공산당과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 또다시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의 혼란상,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관한 정체성 혼란 등(그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분명치 않은데, 한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의 문제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심리 치료를 받았고,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를 배경으로 한 오라토리오 <우리 시대의 어린이>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그가 재직하던 몰리 칼리지가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사회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 후에 3개월 징역을 선고받습니다(이후 2개월간 복역하고 어찌어찌 출소했다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여 작곡가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음악에 대한 많은 경험을 얻었고 그의 음악에 재즈와 블루스 등 미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BBC에서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고, 평화주의자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사회정치적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쌓은 업적을 인정받아 티펫은 1966년 기사 작위를 받고 Sir 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병역거부까지 한 사람에게 선선히 작위를 내리다니 한국적 정서에서는 신기하긴 하지만 이후 1970년대를 지나며 그는 시력이 크게 악화되는 등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는 런던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98년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음악적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티펫은 처음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작곡을 배웠고, 따라서 초기 작품은 비교적 보수적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대담한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교향곡 3번은 1972년 완성되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블루스 요소가 적극적으로 들어가 있으며 특히 2부에는 곳곳에 베토벤 교향곡 <합창>의 부분들이 패러디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 추계답사 - 3일차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둘쨋날 뒷풀이는 한강공원에서 맥주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덕분에 2일차보다는 한결 개운하게 답사를 시작할 수 있겠군요!



 마지막날 3일차의 첫 번째 답사지는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갑니다.



 돈화문으로 들어가서 우선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데, 특이하게도 경복궁과 다르게 돈화문-인정문-인정전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두 번을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평지에 네모 반듯한 구획으로 만들어진 경복궁에 비하여 창덕궁은 비교적 자유로운 건물 배치를 하고 있는데, 일대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만은 못해도 상당한 위엄이 흐르는 웅장한 건물입니다.



 인정전의 내부는 의외로 어느 정도 서양식 분위기도 나고, 특이하게 전등도 달려 있는데 이는 나중에 일부러 단 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순종 때인 1908년에 인테리어를 개조한 것이라고 하네요.



 인정전 옆에는 선정전이 있는데, 이곳은 편전(왕의 평상시 집무실)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종종 왕과 왕비의 장례를 치를 때 신주를 모셔 놓는 공간(혼전魂殿)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복도는 그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덧붙은 것입니다. 다른 특이점으로 선원전 지붕의 기와는 특이하게도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사용한 청기와인데 이는 광해군 시기에 처음 깔았다고 합니다.



 선정전 옆에 있는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으로 쓰인 곳인데, 선정전이 비좁은데다 왕의 장례 용도로 쓰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임시 편전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블로거는 건물 전면의 구조가 독특해서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정전과 희정당 뒤편에는 왕후가 생활한 대조전이 있습니다. 입구인 선평문을 넘어가면



 대조전 건물이 나옵니다.



 대조전 역시 실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으로 꾸며 놓았는데, 가구 등의 디자인을 봤을 때 여기도 대한제국 시기쯤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과 대한제국의 최첨단 CCTV 물론 이건 현대에 관리용으로 달아 놓은 것이겠지요. 덧붙이자면 인정전 같은 큰 전각의 내부에는 로봇청소기도 돌아다닙니다. ㅡㅡ;



 이곳은 대조전의 일부인 청향각인데, 전각 옆에 붙은 굴뚝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곳 뿐만 아니라 서울의 조선 궁궐을 돌아다니면 저렇게 수수하면서도 예쁘게 쌓아올린 굴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조전을 나와 희정당 옆을 지나치면 세자가 거처했던 성정각이 나옵니다. 블로거가 사진을 거의 찍지 않은 관계로 여기는 그냥 안내간판으로 대체하겠습니다. ㅡㅡ;



 그리고 창덕궁의 한 쪽 구석에는 낙선재가 있습니다. 숙종 때부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해 헌종 시기 크게 중건된 이곳은, 다른 무엇보다도 조선 궁궐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사람이 거주한 곳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공간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한 의친왕과 이방자, 덕혜옹주가 모두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바깥에서 본 낙선재의 풍경. 낙선재의 건물들은 단청을 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전각들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아마도 건물의 위상과 역할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추정되긴 한데, 한참 나중에 교수님에게 물었을 때 교수님은 현대에 문화재를 복원 · 수리하면서 단청이 있고 없고 여부를 제대로 고증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그냥 참고만 해두라고 하셨습니다. ㅡㅡ;



 낙선재 곁으로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사진 왼쪽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오른쪽은 창경궁과 연결된 통로인 함양문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종묘와 비슷하게 정해진 시간에 모여 입장하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게 되는데, 정해진 답사 일정에 맞추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바로 창경궁으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함양문을 통과하면 가장 먼저 창경궁 통명전이 일행을 맞이합니다. 통명전은 왕후의 침전으로 쓰였습니다. 주변으로는 이외에도 몇몇 전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곳이 창경궁의 내전 영역이라고 하는군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고 '창경원'이라는 이름의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전락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엽에야 동물원을 이전하고(이 때 창경원의 대타로 설치된 동물원이 바로 서울대공원 동물원) 본래 모습을 복원하고 있지만 아직은 비어 있는 공간이 많습니다.



 그런 연유로 궁궐 내부에서는 이런저런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답사 당시에는 정전인 명정전 앞에서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왕의 집무실인 문정전은 명정전과 바로 옆-뒤를 맞대고 바짝 붙어 있습니다. 창경궁은 본래 궁궐이 아니었던 곳에 이런저런 건물들을 덧붙여 궁궐로 만든 곳이라 역시 내부 구조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합니다.



 아직 한창 복원 중이라 볼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비어 있는 건물터를 노니는 재미도 있겠지만 창경궁은 이 정도만 보고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뒤쪽으로 들어왔으니 정문(홍화문)으로 나가게 되겠지요? 명정전에서 홍화문으로 이어진 길목에 작은 개울(궁궐 내부에 낸 인공하천으로 '금천'이라고 합니다)과 다리가 있는데, 각각 '옥천'과 '옥천교'라고 부릅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에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시간이 조금 남는 김에 이곳을 짧게 관람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뜰에는 서울에 있다가 철거된 이런저런 건축물들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이놈은 박정희 정권 때 지어진 '콘크리트제' 광화문의 부재로, 현재는 철거하고 원래의 재료를 활용하여 다시 지은 것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도 이런저런 전시물들이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 서울을 재현한 모형들도 있고



 다양한 유물들도 있습니다. 짐바브웨 달러의 100년 선배가 여기에 ㅡㅡ;



 아무래도 현대의 서울 또한 기억할 게 많다 보니 현대 유물도 많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포크레인은 뭔가 예술작품으로 만든 것 같은데 인상적이어서 한 컷.



 2층에는 블로거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전시물이 있는데, 서울 전체의 건물들과 지형을 모형화하여 전시한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서울의 웬만한 건물들은 다 있는데 심지어 블로거가 몇 년 전 자취를 하던 다세대주택도 있더군요.



 이렇게 역사박물관을 떠나갑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옛 경희궁 터의 일부에 서 있는데 경희궁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철거된 이후 시가지가 들어서 지금은 복원하기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종로 쪽으로 이동 중. 광화문사거리 앞에는 빌딩숲 가운데 웬 기와건물이 하나 있는데,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는 '기념비각'입니다. 어릴 적 이걸 처음 보고 이게 그 보신각인가 하고 종을 암만 찾아봐도 없어 실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ㅡㅡ;



 광화문~종로 일대에는 이런 것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중심가였다보니 땅을 파면 옛 건물의 흔적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이곳은 종로타워. 예전에 화신백화점이 있던 곳입니다. 화신백화점의 역사와 이곳에 종로타워가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은 이 글을 참조.



 광화문광장 곁으로 공사장 같은 곳이 있는데, 옛 의정부 구역을 발굴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경복궁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박물관에서 본 그 콘크리트 말고, 제대로 된 재료로 복원한 광화문입니다.



 역시 경복궁은 다른 궁궐과도 차원이 다를 만큼 관람객이 많습니다. ㅡㅡ;



 정전인 근정전의 모습입니다. 이쯤이면 뭐 경복궁 구경 반 사람 구경 반이로군요.



 이곳은 수정전입니다. 이러저러한 용도 변화를 겪었는데 초기에는 집현전 건물로 쓰인 적도 있고, 조선 말에는 군국기무처가 이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특이하게 수정전 앞에서는 이런저런 공연을 하는 모양인데 이 날에는 무슨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계실 그 건물 경회루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통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지요.



 경복궁의 각 전각 사이를 넘나드는 문은 아무리 작아도 웬만하면 이름이 꼭 붙어 있습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각각 왕과 왕비의 침실로 쓰였습니다.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안내표지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이라고 묶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흠경각과 함원전은 경복궁에서도 상당히 용도가 독특한 공간입니다. 흠경각에는 장영실이 만든 시계인 '옥루'가 설치되었고, 그 일대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천문 관측기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곁의 함원전은 불교 관련 행사가 열린 곳이라는데 조선이 유교 국가였음을 생각하면 궁궐 내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게 상당히 독특하지요? 물론 태조나 세종, 세조 등 조선의 국왕 중에서도 불교를 존중한 사례는 꽤 있으니 말입니다.



 자경전은 대비의 처소입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대비로 격상되면서 교태전을 새 왕비에게 넘겨주고 이곳으로 옵니다.



 경복궁 역시 어딘가에서는 항상 공사 중입니다. 열심히 복구 중이긴 하지만 경복궁은 그 자체가 워낙 넓다보니 ㅡㅡ;



 함화당, 집경당을 위시한 흥복전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저 두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어느새 경복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왔습니다. 이 집옥재는 딱 보기에도 아주 독특하게 생긴 건물인데, 벽돌을 사용하여 뭔가 중국적인 분위기도 나고, 하여튼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은 지금도 일반인을 위한 특강 같은 것들을 위해 활용이 되고 있으며, 블로거가 갔을 때도 무슨 강연을 한다고 그랬던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막아 놓았습니다.



 이곳은 건청궁인데, 특이하게 궁궐 내에 있음에도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비슷하게 지어졌으며 역시 단청이 없습니다. 고종이 왕실 사비로 건축하여 명성황후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입니다. 이곳을 나가면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읍읍읍



 다시 들어와서, 이번에는 태원전으로 이동합니다. 이곳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어서 찾아오는 관람객이 별로 없습니다. 답사 온 일행 중에서도 이곳까지 구경하러 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더군요.



 태원전은 왕의 장례를 위해 쓰인 공간입니다. 사진에 복도가 보이시지요?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고 일본군과 미군, 국군까지 번갈아가며 주둔하였다가 이들이 모두 철수한 2000년대 이후에야 다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경복궁 끝까지 갔으니 다시 돌아올 일만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풍기대는 저 위에 깃발을 설치하여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는, 일종의 기상관측 기구였습니다.



 이제 입구로 거의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옆으로 빠져서 아까 보지 않았던 동궁(東宮) 구역을 잠시 돌아보기로 합니다. 동궁은 세자가 거처했던 공간으로, 현재는 자선당을 비롯한 몇몇 전각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제 경복궁의 전각들은 거의 둘러본 것 같습니다. 이제 대전으로 돌아올 일만 남았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서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을 잠시 둘러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광화문 옆에 붙어 있고, 과거 국립중앙박물관의 임시 청사로 쓰기도 했습니다. 고궁박물관 답게 왕실 관련 물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협생문을 지나면 이제 모든 답사가 종료됩니다. 


 이번 서울 답사를 두고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은 수백 년 이상, 그리고 현재도 한국의 중심이며 당연히 역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서울의 역사적 흔적은 근대 이후 도시개발의 와중에도 상당 부분 보존되어 있고, 이를 돌아보는 데 2박 3일로도 턱없이 부족함을 절감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서울 답사가 어렵다고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은 정말로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해 꼭 돌아보아야 할 공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한정된 답사 기간만으로 서울의 역사를 보았다고 하기엔 부끄럽겠지만 그 조그만 한 구석이라도 목도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조금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실 아쉬움보다는 빨리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답사 인원들은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각자 다음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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