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is Pasternak (1890-1960)

Piano Sonata in b minor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때 음악가 지망생이었고 심지어 꽤 재능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요. 철학자, 대통령, 왕을 언급하였으니 이번에는 대문호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스테르나크는 189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1862-1945)는 유대계 출신으로 톨스토이와 레닌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을 만큼 러시아에서 꽤 저명한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역시 유대계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1867-1939)였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상당히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는데 그의 부모는 일찍이 톨스토이의 사상운동에 동조하였고, 그의 집에는 톨스토이 뿐 아니라 릴케, 라흐마니노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장 환경 속에서 파스테르나크는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처음 지망했던 길은 문학이 아닌 음악이었는데, 이는 물론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의 이웃에 살았던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영향 역시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재능도 있었던지 그는 1904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약 6년 정도 음악을 전공하였고 이 때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습니다(여담으로 그의 아버지는 스크리아빈의 초상을 그려 준 적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1910년 그는 돌연 모스크바 음악원을 자퇴하였고, 이후 다시는 음악가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갑자기 음악을 그만두었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소심한 그의 성격과 연관이 있었지 않나 추측됩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자작곡을 스승 스크리아빈에게 들려주는 것도 어려워하였으며 스승이 보기에 별 쓰잘 데 없는 부분까지 고민하고 걱정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당시 그는 스크리아빈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점차 그의 자신감을 잃게 만들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음악을 그만둔 파스테르나크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에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유학하여 헤르만 코헨(1842-1918) 등에게서 신칸트주의 철학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유학을 한 것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것마저 포기하고 이듬해 귀국,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그가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숱한 정치적 논란과 압박 속에서 세계적인 대문호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스크리아빈을 사사하였고, 당시 사상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음악을 공부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그의 음악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스크리아빈의 그것과 비슷한 신비주의적 색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1909년 만들어진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6년 반 동안 사용한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고급기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RAM을 추가로 다는 선택을 한 덕분에(당시에 8GB면 작은 건 아니었으니까요) 지금까지 어떻게든 써 오기는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배그도 최저사양으로 간신히 돌아가는 너무나 느려진 컴퓨터에 속앓이를 하다가, 부품을 하나하나 모아서라도 어떻게든 컴퓨터를 바꾸어야겠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만 컴퓨터를 새로 사려니 내년까지는 공부에 매진해야 하니 굳이 많은 돈 들여서 새 컴퓨터를 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몇몇 중요 부품만 구해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결정. 컴알못이라 이리저리 알아보고, D모 가격비교 사이트(?)를 열심히 눈팅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목록이 나왔습니다.

 

 1. CPU : Intel Core i3-3220(아이비브릿지) → Intel Core i7-3770(아이비브릿지)

 CPU는 고유 소켓 규격이 있어서, 이게 맞지 않으면 메인보드까지 통째로 갈아야 한다네요. 거기까지 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같은 소켓 내에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합니다. 뭐 1년 반만 쓸 것이고, 나름 2코어 4스레드 → 4코어 8스레드가 되는 것이니 빨라지기는 할 겁니다. 해당 세대 CPU는 이제 신품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중고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거 중고가격 방어가 너무 잘 된다는 이야기가......

 

 2. 그래픽카드 : NVIDIA GeForce GT 630 → NVIDIA GeForce GT 1030

 6년 전의 보급형에서 현재의 보급형으로? 사실 저거 주문해 놓고 돈 좀 더 쓸까 순간 후회하긴 했는데, 그래픽카드가 쓸데없이 좋으면 공부 안 하고 게임이나 할 테니까 ㅡㅡ; 라는 기적의 논리로 자기위안을 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6년 된 고물보다야 확연히 낫지 않겠어요?

 

 3. RAM : DDR3 4GB×2 → DDR3 8GB×2

 처음에는 8GB짜리 하나만 사서 추가로 끼워 쓸까 했는데, 알고 보니 메인보드에 RAM 슬롯이 2개밖에 없네요 ㅡㅡ; 위 두 개만으로 돈이 은근히 많이 빠져서 일단 이 녀석은 조금 미루기로. DDR3 RAM은 16GB 용량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8GB 2개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정하고 주문을 합니다. 하필이면 연휴 기간과 겹쳐서 며칠 지나서야 택배가 옵니다.

 

 흐음 저 위용 넘치는 자태......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습니다. 컴퓨터 회로는 정전기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별로 조심하지 않긴 했지만 넘어가기로 ㅡㅡ;

이렇게 생겼습니다. 중고 CPU는 은박지에 싸여 배달이 됐는데, 저렇게 하면 정전기가 겉의 은박지에만 흘러서 부품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자 이제 컴퓨터의 전원을 분해하고 배를 쨉니다(?).

 오우 저 먼지 ㅡㅡ; 일단 그래픽카드를 먼저 빼고, 그 다음 CPU로 향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CPU에는 쿨러가 달려 있지요.

 

 조심스럽게 쿨러를 뺍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꼽혀 있는지 몰라서 빼는데 고생을 좀 했습니다. ㅡㅡ; 다행히 부셔먹지는 않고...... 쿨러를 제거하니 저 자리에서 6년 반동안 수고한 CPU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쿨러와 CPU 사이에 발라 놓은 써멀구리스는 아주 말라붙었네요. ㅡㅡ; 저 녀석은 둘 사이에 열 전달을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다시 발라 줘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제거한 쿨러는 다시 써야 하므로, 에어스프레이로 먼지를 제거해 줍니다. 웬만하면 실내에서 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ㅡㅡ;

 

 오른쪽에 고정된 레버를 살짝 빼서 돌리면 CPU를 고정시키는 덮개가 열립니다. 그러고 나서

 

 CPU를 뺍니다. 인텔 CPU는 메인보드 쪽에 핀이 있고 그 위에 CPU가 얹혀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설치할 때는 핀 위에 살짝 얹는다는 느낌으로, 뺄 때는 살짝 들어낸다는 느낌으로 하면 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위험한데 저 핀 하나라도 구부러지면 CPU가 인식이 되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 자리에 위풍당당한 i7-3770을 살짝 얹어 놓고

 

 레버와 덮개를 다시 돌려서 고정시켜 놓습니다. 다행히 핀을 구부러뜨리는 따위의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제 동네 컴퓨터가게에서 바가지(?) 쓰고 구매한 써멀구리스가 나올 차례입니다. 사실 표기법상 '그리스'가 맞지만 저 유럽에 철학과 탈세(?)로 유명한 어떤 나라가 있기 때문에...... 다들 구리스라고 발음들 하시지요. 택배 기다리기 귀찮아서 동네로 갔는데 택배비 or 버스요금 감안해도 이 쪽이 더 비쌌습니다. 그냥 대전 테크노월드 가볼걸......

 

 구리스를 CPU 위에 발라 줍니다. 어차피 쿨러 설치하면 눌려 펴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고 해요~

 

 쿨러를 다시 설치하면 CPU 쪽은 끝납니다. 그래픽카드는 그냥 슬롯에 잘 끼워 넣고 나사못으로 케이스에 고정시키면 되니 훨씬 쉽습니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의 배때지(?)를 다시 봉합합니다. 블로거도 최신 강화유리 케이스 쓰고 싶어요...... 전원과 모니터, 키보드 선을 끼우고 전원을 켭니다.

 

 ?????? 부팅이 되질 않네요. 뭐가 문제지?

 

 인터넷을 뒤져 보니 메인보드 BIOS 업데이트를 먼저 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뭐 이렇게 복잡해...... 일단 이 컴퓨터에서 쓰는 메인보드 모델은 다음과 같습니다. ASUS니 MSI니 하는 브랜드만 알다가 그 폭스콘이 메인보드도 만들었던 건 처음 알았네요. 차피 대만회사

 다시 원래 부품들로 갈아 끼우고 BIOS 업데이트를 진행합니다. 방법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무턱대고 하다 보니 어쩌다 된 것이라, 어떻게 해낸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ㅡㅡ; 아무튼 한참이 지나서야 바이오스 업데이트를 마치고 다시 아까의 순서로 부품을 갈았습니다. 여담으로 원래 CPU를 다시 설치할 때 귀찮아서(어차피 다시 뺄 거니까) 쿨러를 같이 설치하지 않았는데, 잠깐 켜 놓았을 뿐인데 CPU 온도가 95℃를 찍네요. 이래서 쿨러가 필요......

 

 다행히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부팅이 됩니다. 저 위풍당당한 모델명이 보이시나요?

 

 그리고 동봉된 CD를 넣고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설치해 주면 모두 끝납니다. RAM을 아직 바꾸지 않아서 덜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조금 빨라진 게 체감되네요.

 

 지난 6년 반동안 수고한 CPU와 그래픽카드여 이젠 안녕......

0. 서문

 

 최근 블로거는 사진에 취미를 들이고 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사진과 그 도구인 카메라의 역사에도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어떻게 시각을 복제하여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을 디지털 방식으로 바꾸고 지구상 수십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남길 수 있게 한 과정은 무엇일까요? 나의 취미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 왔는지 탐구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카메라와 사진은 근대의 중요한 발명으로 여겨져 왔고 분명 그것이 맞지만, 사진을 만드는 원리 자체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든(실용적으로든, 놀이로든) 이를 활용해 왔습니다. 지금하고 똑같네 사진이라는 도구가 단순히 흥미로운 장난감에서 어떻게 인류 사회의 중요한 도구로 발전하고, 나아가서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한 번 간단하게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저 중 두 개를 팔아치운 건 안자랑)]

 

 

1. 고대와 중세의 '카메라'

 

 필름도 센서도 없던 먼 옛날, 사람들은 암실 벽면에 작은 구멍을 내면 반대편에 바깥의 상(像)이 그림처럼 맺힌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누군가 어두운 방의 벽이나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상이 맺히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그 원리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후 사람들은 상자 등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번쯤 만들어 보았을 바늘구멍 사진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

 이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데 이러한 원리 자체는 아주 오래 전, 고대 시절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유클리드가 버들가지 바구니의 작은 홈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이 비추이는 것을 관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중국의 묵가(墨家)를 창시하였다는 묵자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뒤집어져 보인다"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로 그림을 그리는 원리]

 이러한 원리를 활용할 방안은 없을까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바늘구멍을 통과한 상을 활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였고, 구멍을 통과하여 맺힌 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고안해 내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개념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중세 이슬람 제국의 학자 알하젠(965-1040)이 실질적 도구로서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개발하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또한 자신의 그림 작업에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레이싱? 카메라 옵스큐라가 그림에 활용되면서 17세기 무렵에 그림의 사실적 묘사력이 대폭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과 그 물주전자에 비추인 카메라 옵스큐라의 모습]

 또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몇몇 그림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실제 사례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물주전자를 든 여인>에는 물주전자의 겉면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추정되는 어떤 장치의 모습이 비추어 보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는 등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조선의 화가들도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지 않았겠느냐는 학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필름이나 센서가 없을 뿐 현대의 카메라와 그 원리가 거의 동일합니다. 필름, 센서가 하던 일을 당시에는 화가의 붓과 캔버스가 대신했을 따름입니다.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이 아닌, 상 그 자체를 그림(?)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18세기 감광 원리의 발견 이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 감광물질의 개발

 

 많은 물질은 빛, 특히 햇빛을 받으면 색이 변합니다. 당장 옷장에 처박혀(?) 있는 옷 중에는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나 보관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강한 햇볕에 말리면 색이 바랜다든지, 소재가 변질된다든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햇빛을 지속적으로 쪼인 책이나 건물 역시 서서히 색이 바래게 되지요. 이처럼 빛은 물질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라면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노출시간이 못해도 월 단위는 되어야 하겠지요), 특정한 물질들은 빛에 반응하여 변형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빛에 짧은 시간만 노출시켜도 충분한 변형이 일어나지요. 흔히 우리가 감광물질이라고 하면 이러한 물질들을 가리킵니다. 이들 감광물질을 넓은 판에 칠해 놓고 바늘구멍이나 렌즈를 통과한 상을 맺히게 하면 각 부위에 노출되는 빛의 양 차이에 따라 물질이 변형되는 정도 역시 달라지게 됩니다(초등학교 때 한 번쯤 써보았을 '청사진' 실험을 생각하면 됩니다).

 

[요한 하인리히 슐츠]

 1724년 독일 출신의 과학자 요한 하인리히 슐츠(1687-1744)는 1724년 염화은(AgCl)이 햇빛에 노출되면 검게 변형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화은은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앙금 생성 반응'을 대표하는 백색 물질인데, 이 녀석이 감광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물론 슐츠는 카메라에 큰 관심은 없었던 듯하며 당시는 아직 화가들이 바늘구멍 사진기에 종이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데 만족하는 시절이었으니, 염화은이 카메라에 활용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체로 감광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물질은 할로겐화은(염화은, 요오드화은, 브롬화은 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 필름이나 인화지에도 이들 물질이 다양하게 활용되는데, 이를테면 브롬화은(AgBr)을 이용하여 만든 인화지의 경우 흔히 '브로마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브로마이드라고 부르는 연예인 화보는 처음에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이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도면을 인쇄해 놓은 청사진]

 감광물질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이를테면 도면 등을 복제하기 위해 활용되었던 '청사진' 역시, 특수한 화학물질을 칠해 놓은 종이에 도면을 놓고 빛을 쬐어 가려지지 않은 부위에만 반응을 일으키는 방식의 인쇄 방법이었습니다(청사진은 근래 대형 프린터와 플로터가 발전하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옵스큐라에 화가 대신 감광지를 활용하는 시도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조제프 니세포르 니엡스(1765-1833)의 '헬리오그라피'가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3. 헬리오그라피 : 최초의 필름카메라

 

 니엡스는 프랑스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는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나폴레옹 군대에 투신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건강 문제로 군대에서 퇴역한 이후로는 과학 연구와 발명으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807년에는 형과 함께 내연기관의 일종인 '피레올로포르'를 발명하는 등 나름 이런저런 분야에서 업적이 있는데, 역시 그의 대표적 업적이라면 최초의 필름(?)카메라를 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엡스는 처음에는 당시 기준 신기술이었던 석판 인쇄에 관심이 있었지만 기술이 부족하여 본격적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그림을 그리는 도구였던 카메라 옵스큐라로 관심을 옮겼다고 합니다. 그는 화가가 상을 베껴 그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을 본뜨는 방법을 연구했고, 감광물질을 판에 칠하여 상이 거기에 맺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가 사용한 감광물질은 아스팔트의 일종인 '유대 역청'이었는데, 촬영 후 이를 라벤더 오일로 씻어내면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씻겨 내려가고 빛에 노출된 부분만 남는 원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 몇 시간에 걸쳐 촬영했기 때문에 햇빛을 받은 방향이 제각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1826(혹은 25)년 만들어진 이 최초의 필름(?)은 '태양의 그림'이라는 뜻의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로 불렸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발명이었지만 최초라는 데 의미가 있을 뿐 아직 실용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사진 한 장을 촬영하기 위하여 노출 시간을 최소 몇 시간이나 잡아야 하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광물질로 사용한 유대 역청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당연히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면, 인물사진이나 활동사진으로는 전혀 활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 중 다른 하나. 플랑드르의 조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리오그라피 발명 이후로도 니엡스는 사진 기술의 실용화를 위하여 계속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여기에는 미술가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1787-1851)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다만 니엡스는 형이 내연기관 개발 등에 가산을 탕진하는 등의 이유로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결국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최초로 실용화된 사진기술'의 명예는 상당 부분 다게르와 그의 '다게레오타입'에 돌아가게 되는데, 다게르가 공로를 가로챘다거나 한 건 아니고 니엡스의 아들과 공동연구를 계속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라무네'라는 음료가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의 탄산음료로, 입구가 구슬로 막혀 있는 독특한 형태의 병이 라무네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합니다. 집 앞 편의점을 가 보았다가 음료 코너에 라무네가 몇 개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호기심에 하나 구입해서 마셔 보았습니다.

 

라무네

 

 우선 라무네가 어떤 녀석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라무네라는 이름은 19세기 중반 일본의 개항기에 영국에서 유입된 레모네이드에서 유래하는데, 일본인 특유의 외래어 줄여부르기 신공(?) 때문에 그 이름이 와전되어 '라무네'가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한, 흔히 알려진 형태의 라무네가 개발되었고 1872년 공식적으로 제조 허가를 얻게 됩니다.

 

 이 시기 채택되어 라무네의 상징이 된 독특한 모습의 유리병은 코드넥 보틀(Codd-neck Bottle)이라고 하는데, 영국인 기술자 하이럼 코드(1838-1887)가 1872년 고안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음료수병입니다. 코드넥 보틀은 병 입구 안쪽에 작은 유리구슬이 하나 있어서 음료수 탄산의 압력으로 병 입구를 막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구슬을 힘으로 밀어넣으면 구슬을 밀어올리던 탄산이 빠져나가면서 입구가 열리고 음료수를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이 때 구슬을 밀어넣는 용도로 보통 못 형태로 된 플라스틱 조각이 하나 동봉됩니다.

 

코드넥 보틀의 유리구슬

 

 입구보다 조금 더 큰 이 구슬이 코드넥 보틀의 핵심인데, 구슬이 아예 밑으로 빠지거나 음료수를 마실 때 굴러내려와 입구를 다시 막아버리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병의 상부에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병의 한 부분이 잘록하게 좁아지는데 구슬이 거기 걸쳐져 더 밑으로 빠지지 않고, 그 위쪽에 있는 굴곡은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병을 기울일 때 구슬을 붙잡아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방지합니다.

 

 이전에는 탄산음료의 병 입구를 코르크(!!)로 막는 게 보통이었고, 당연하게도 음료수에 녹아 있던 탄산은 금새 날아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ㅡㅡ;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병은 한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 왕관 모양의 병뚜껑이 개발되는 등 밀봉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들기도 복잡하고 마시기도 상대적으로 불편한 코드넥 보틀은 자연스럽게 도태됩니다. 다만 라무네의 경우 병 자체가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라무네는 백수십 년의 역사를 거치며 일본을 상징하는 음료의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 장병들은 함정 내에 화재진압용으로 설치된 이산화탄소 발생 장치를 이용, 레모네이드에 탄산을 주입하여 라무네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코카콜라 등 다양한 음료수들이 인기를 끌게 되지만 라무네는 다분히 서민적인 음료의 이미지로 남아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고, 1977년에는 일본의 중소기업 관련 법률의 대상이 되어 중소기업에서만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여러 중소기업에서 라무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라무네는 '일본식 음료'의 대표처럼 인식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서민적인 이미지와 나이 든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는 이미지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즐겨 마시는 정도는 아니라고도 합니다. 라무네 특유의 병 여는 방법도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네요. 그래도 요즘에는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로 수출까지 하고 있는데, 덕분에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블로거 역시 일본산 라무네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입한 라무네를 마셔 보겠습니다. 병의 위쪽이 포장되어 있는데, 여기에 구슬을 밀어넣기 위한 플라스틱 못이 있습니다.

 

 뜯는 선을 따라 포장을 잘 뜯으면

 

플라스틱 못과 병의 입구가 드러납니다. 보시다시피 병 입구는 플라스틱으로 덮여 있고, 구슬이 거기를 막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 부분도 그냥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는데, 요즘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놓아 나중에 구슬을 빼거나 병을 재활용할 때 편리하다는군요.

 

 플라스틱 못을 가지고 구슬을 밀어넣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힘이 좀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단단히 막혀 있지 않으면 밀봉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손가락 한두 개로 눌러서는 절대 입구를 열 수가 없을 겁니다. ㅡㅡ; 아예 병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도 손바닥으로 못을 강하게 누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강하게 주면 구슬이 빠지면서 병이 열립니다.

 

 이제 구슬이 다시 입구를 막지 않도록 적당히 주의하면서 음료수를 마시면 됩니다. 라무네의 맛은 사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사이다의 맛과 별 차이가 없고, 그냥 라무네 자체가 일종의 사이다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일본에는 오리지날인 소다맛 뿐 아니라 와사비맛, 카레맛 등 온갖 해괴한 맛의 라무네가 있다는군요. ㅡㅡ;

 

 저 구슬은 마실 때마다 항상 신경쓰입니다. 생각 없이 그냥 마시면 구슬이 입구를 다시 막아 음료수가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병을 너무 기울이지 않고 한쪽에 있는 홈에 구슬이 걸리게 만드는 등 나름의 스킬을 발휘해야 합니다. 코드넥 보틀이 왜 도태되었는지 납득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라무네 한 병이 뚝딱 비워졌습니다.

 

 라무네를 맛으로 먹기에는 바로 곁에서 저렴하게 판매되는 사이다와 별 차이가 없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도 종류가 수두룩하니 딱히 매력이 있는 음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디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의 병과, 일본의 상징 음료라는 역사적(?) 특이성을 생각하면 한 번쯤 구입해 마셔 봐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블로거가 마신 라무네 병에는 "일본에서 시작되어 세계인이 사랑하는 라무네"라고 적혀 있는데, 일본인의 생활사(史)를 접해본다 생각하고 한 병 마셔보는 건 어떨까요?

 


 답사장소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일자

 2019. 2. 12.


 역사를 전공하는 이에게 신채호(1880-1936)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흔히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끌어 간 인물 중 하나이며, 또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세수를 할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강직함을 상징하는 몇몇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역시 흔히 그렇듯 이 이상의 인간 신채호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람들의 관심도 적은 듯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신채호는 단순히 저런 몇 줄로 정리될 만큼 단순한 삶을 살아간 인물은 아닙니다. 계몽운동가, 언론인, 사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아나키즘 혁명가에 이르는 그의 일생은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거대한 불의(不義)와, 때로는 자기 자신과 평생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살았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신채호는 충청도 회덕현, 현재의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생가 터는 현재 신채호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하여 오늘은 신채호 생가를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이곳은 대전광역시에서도 가장 외진 지역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만약 버스를 이용하고 싶다면 대전서남부터미널이나 산성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32번 버스(서남부터미널 ↔ 백암리)를 타고 도리뫼 정류장에서 내리면 됩니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서, 버스가 들어온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표지판이 나옵니다.



 사실 표지판 이전에 버스정류장 근처에서부터 웬 기와집 하나가 보여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신채호 홍보관이고 실제 복원한 생가는 안내판을 참고하여 조금 더 걸어들어가야 나옵니다.



 사실 이곳에 무언가 '볼거리'가 많다고 보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신채호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생가라고 해봐야 그냥 평범한 초가삼간이고, 그 외에는 신채호 동상과 작은 홍보관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신채호의 '숨결'을 느끼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생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신채호 생전의 건물은 아니고, 세월의 바람에 사라진 것을 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기록에는 1992년 발굴조사를 시행한 후 지역 주민들의 고증 등을 참고하여 현재의 초가집을 재건했다고 하는군요. 신채호가 건국훈장을 수훈한 독립운동가였던지라 국가보훈처에서도 나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표지판도 박아 놓았습니다. 표지판에 붙은 스티커가 떨어져 덜렁거리던데 관리 좀


 신채호가 이곳에서 거주한 것은 대략 8세 무렵까지로, 본래는 할아버지의 처가(안동 권씨)가 있던 마을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사헌부 장령을 역임한 고위관료였지만 낙향하여 지금의 청주 귀래리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며 가세도 기울어 이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것입니다. 신채호는 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였고, 이후에는 집안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이주하여 학문을 닦았습니다.



 복원한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 신채호의 일생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가집의 안채에는 '단재정사(丹齋精舍)'라는 소박(?)한 현판을 붙여 놓았습니다. 방 안에 전시된 인형은 아마도 신채호의 어머니가 길쌈하는 모습을 모티브로 한 듯합니다.



 안채의 다른 방에는 어린 시절의 신채호를 재현해 놓은 인형이 있고, 그 앞으로는 어린 신채호의 몇몇 일화와 그가 어릴 적 지었다는 한시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고, 20대 중반에 성균관 박사(요즘식으로는 교수)를 역임했을 정도로 학식도 출중했으며, 한 번은 집에 불이 나 책이 소실되자 그 책의 내용을 토씨까지 통째로 암기하여(!!!) 그대로 복원해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천재였습니다.



 복원한 생가는 아담하지만 나름 고즈넉하니 편안한 분위기를 줍니다. 안채 옆켠에는 곳간도 복원되어 있습니다.



 생가를 나오면 그 옆켠에 서 있는 신채호 동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본래 거창한 '모뉴멘트'를 아주 싫어합니다만, 이곳에 있는 동상은 쓸데없이 거창하지는 않으면서 나름 방문자들에게 신채호를 마주할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라 싫지많은 않군요. 왼쪽 건립기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넘어가기로 잠시 모자를 벗어 신채호의 위대한 일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처음 들어올 때 보였던 기와건물인 단재 홍보관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역시 홍보관이라고 뭐 거창한 볼거리가 있지는 않습니다. 딱히 신채호 관련 유물들이 있다기보다는 신채호의 삶의 과정을 설명한 글과 미니어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신채호라는 인물을 알고 싶다면 홍보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글을 음미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단체예약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도 함께 들을 수 있다고 하네요.



 신채호의 일생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말년에 아나키즘(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고 아나키즘 혁명가로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그에게 아나키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아나키즘이 억압적인 지배권력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아나키즘이 그때까지의 독립운동과 단절된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아마 이회영(1867-1932)과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블로거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그의 문구라면 역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조선상고사』 첫머리의 일갈입니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나와 상대(나 아닌 놈)가 싸우는 것' 쯤으로 이해해 버리면 심히 곤란합니다. ㅡㅡ; 신채호는 주관적 존재(아. '나'는 주관적이므로)와 그렇지 않은 존재(비아)를 전제하고(이는 상대적인 개념. 비아 역시 스스로는 '나'일 것이므로) 각각의 '나'가 외부(비아)의 자극에 반응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사회를 변혁해 온 그 거대한 흐름이 바로 역사의 본질이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홍보관 입구에는 간단한 운영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홍보관은 월요일을 제외한 주6일 개관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홍보관을 제외한 생가 자체는 이외 시간에도 둘러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홍보관을 나오면서 처음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 명의 작은 역사학도에게 있어 신채호란 어떤 의미일까요? 분명 신채호 역시 인간이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는 이런저런 비판이 따라붙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가 주장한 여러 학설들은 시대가 지나며 여러 후학들에 의하여 대부분 논파되었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은 분명 위대한 것이었지만 한켠에서 그는 (관점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도 맹렬한 비판으로 임시정부 활동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말년의 아나키스트 활동은 아예 무시되거나 단편적으로만 언급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그 비판적 시각들은 일정 부분 타당하지만, 그것으로 인간 신채호의 위대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그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가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특히 독립군과 의열운동 등의 무장투쟁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족'의 각성이 필요했던 시대에 역사를 통하여 '한민족'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 그의 업적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요?


 슬프게도 그의 역사학적 업적이 많은 후손들에게 오해 또는 곡해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채호는 실증주의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기에 만주벌판을 헤집으며 고구려의 흔적을 찾고 과거 사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시도했던, 어떤 의미로는 철두철미한 '실증주의자'였습니다(단지 참고할 사료가 아직 너무 부족했고 그가 민족의식 고취의 방편으로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렇게 치열하게 쌓아올린 그의 역사관이 역사를 빙자한 소설이나 쓰는 유사역사가들이나 역사를 이용수단으로 삼는 정치꾼의 말장난에 오용되고 있는 현실, 저승의 신채호가 바라보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참고자료

 - 한글 위키백과 "신채호"

 - 나무위키 "신채호"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위키문헌)

 - 신채호, 『신채호 수필선집』, CommunicationBooks, 2017. (구글 도서)

 - 신복룡,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7(1),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Friedrich II von Hohenzollern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Flute Concerto No.4 in D




 이전에 철학자와 대통령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왕입니다. 그것도 독일과 유럽의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8세기 계몽군주의 대표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고 자기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군주' 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하노버 왕가 출신. 1687-1757)는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 프랑스 귀족 출신의 가정교사를 채용,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가 좋게(?) 말하면 군국주의적이고, 대놓고 말하면 반(反)지성주의자에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에 꽃 대신 전쟁용 북을 선택하여 치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결코 유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눈에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예술이나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지, 프랑스인 교사를 해임하고 음악을 즐기는 아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등 거의 가학적인 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교육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군요.


 이런 식이니 부자지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혼담이 오갔던 것을 기회로 영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장기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당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사방에서 뜯어말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몇 년 후에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그가 즉위 후 교양과 예술에 탐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러한 막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매우 다행히도 그는 그 때까지의 고난에도 미쳐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인간성, 교양을 지켜냈으며 이후 왕으로서 이룩한 일들은 굳이 여기서는 나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소개할 것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진 그의 음악 사랑과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그는 재위 초기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1747년 프리드리히는 (당시에는 건반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정으로 초청하였는데, 바흐는 왕이 직접 만든 주제 선율을 가지고 3성 푸가를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즉석에서 훌륭하게 해냅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바흐에게 6성 푸가를 만들어 볼 것을 주문하였고, 바흐는 그 자리에서는 아니고 나중에 따로 완성하여 왕에게 헌정하니 그 유명한 <음악적 헌정>입니다(그런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군요).


 사실 바흐와의 인연은 그의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가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궁정악단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는 정단원으로 승진하였고, 왕을 위한 작품들도 여럿 작곡하는 등 여러모로 프리드리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에는 음악적 관점에서 차이를 좀 보였다는데 그 때문인지 1768년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함부르크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04-1759)을 이탈리아로 보내 음악가들을 채용하는 등 궁정음악의 수준을 높이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하임 크반츠(1697-1773) 등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개인의 플루트 교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단순히 음악의 후원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그의 궁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왕이 직접 협연한 플루트 협주곡에 대하여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음악사학자인 찰스 버니(1726-1814)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느 애호가들이나 전문 플루트 연주자들에게서 들은 것보다 월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립서비스 아닌가


 이를 보면 그가 음악가로서 적어도 아마추어의 평균보다는 훨씬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음악적 성향으로,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젊은 시절의 음악 취향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말년에는 궁정에서 철 지난 음악만 줄창 연주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C. P. E. 바흐처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음악가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높은 음악적 소양으로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남긴 극히 드문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작곡들 또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준은 괜찮지만 철저히 구시대적'인 범작으로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요. 그냥 국왕의 신분으로 후대인이 들어줄 만한 음악을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 12(2), 한국서양음악회, 2009.

 한국어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흐(J. S. Bach) 음악의 헌정(A Musical Offering) BWV.1079", 곽근수의 음악이야기(http://sound.or.kr/)

 



Gregorio Allegri (1582-1652)

<Miserere mei, Deus>



[알레그리]


 알레그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전환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력을 로마에서 활동하며 주로 가톨릭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동생 도메니코 알레그리(1585-1629) 역시 음악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9살 때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 경력을 시작하였고, 1600년부터 1607년까지는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나니노(1560-1623)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페르모의 성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부터 작곡가로 다수의 모테트와 성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로마 밖에서 음악 경력을 쌓던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주목을 받아, 1630년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의 콘트랄토로 부임하여 평생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미제레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그의 음악은 르네상스 - 바로크 사이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데, 대체로 교회음악은 이전 시대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기악음악 쪽에서는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진보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의 구절에서 유래한 성가로, 각각 5성부, 4성부로 된 두 합창단이 함께 부르는(그러니까 총 9성부) 노래입니다. 1638년경 부활주간의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후 시스티나 성당의 '테네브레(부활주간에 시행하는 일종의 촛불 예배)'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음이 하이 C음까지 올라가는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이면서 신비로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에서는 이 작품을 교황청 내에서만 전수하며, 다른 곳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악보를 반출하는 등의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저작권 지키는 방법이 무지막지하기도 하지 그래서 이 작품은 그 작품성에 비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는데, 1770년 로마를 방문한 모차르트가 예배에서 이 곡을 단 두 번 듣고 모두 암기하여 악보로 재현해 냈다는 것으로 후세의 우리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됩니다. 다만 이전에도 다른 필사본 자체는 바깥으로 나돌아다녔다고 하며, 나중에는 교황청의 금지령도 해제되어 정식 출판도 되었다는군요.




참고 : 

영문 위키백과,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나무위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한겨레)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소름' 돋는 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경향신문)



 답사장소

 화성 당성

 일자

 2018. 9. 23.




 새로 이사한 본가 인근에 유적지가 있어, 추석 연휴를 이용하여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사적 제217호이며 역사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당성(당항성)입니다.



 당성, 즉 당항성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유서 깊은 곳이며,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지만 한강 유역의 주인이 바뀌면서 이곳의 주인도 차례대로 바뀌어 왔습니다. 특히 신라는 한강 유역을 뒤통수를 쳐서 차지한 이후 이곳을 통하여 중국과 교류하였고 이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통상의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는 통일신라 후기 당성진이 설치되었으며 서남해안의 청해진과 함께 중요한 해군 기지였습니다.


 당성은 고려시대에도 그 역할을 다하였고, 조선 초기에도 성을 쌓고 보수한 흔적이 발견되어 이 무렵까지는 계속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대의 행정구역은 본래 당성군이었으며, 고려 말~조선 초기에 남양군의 일부가 된 이후 일제강점기 수원군(現 화성시)에 통폐합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당성은 산성이기는 하지만 산 자체가 그리 높지는 않기 때문에 접근성은 크게 나쁘지 않습니다. 입구에는 작은 주차장도 설치되어 있고, 행정당국에서 조금이나마 신경은 쓰고 있는지 올라가는 길도 그럭저럭 꾸며져 있습니다.



 표지판을 따라 콘크리트 포장된 시골길을 조금 올라오면 당성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나옵니다. 입구에는 나름 거창(?)하게 세워 놓은 당성 사적비와



 당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약도를 보면 당성은 1차성과 2차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나름 관리소도 있기는 한데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순찰 중이라는 표지판만 붙어 있었습니다. 평소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군요. ㅡㅡ;



 낮은 산이라고는 해도 나름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거라 등산을 조금은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실제로 당성을 돌면서 등산객을 몇 명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당성은 전형적인 포곡식(골짜기를 둘러싸 성을 쌓은 형태) 산성이라 이렇게 한 쪽 성벽이 골짜기 아래까지 낮게 내려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올라가는 길은 2차성 동문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오른쪽 계단을 따라 성벽을 쭉 돌게 될 겁니다(물론 반대로 돌아도 무방). 중간중간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기는 한데, 성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는 곳에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라 그런 곳만 피하여 돌면 됩니다.



 사실 여기서 산꼭대기까지 바로 올라가는 형태라 이 부분에서는 조금 힘이 듭니다. 그래도 일대에 높은 산이 별로 없어서 경치 구경하는 재미는 있군요.



 그렇게 산꼭대기 근처까지 올라가면 꽤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성벽 바깥으로 멀찍이 서해 바다가 거의 3면에 가깝게 펼쳐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 들어 많은 곳을 간척했기 때문에 바다가 꽤 멀리 보이긴 하지만, 아마 조선시대 이전에는 정말로 3면이 바다였을 것 같습니다. 왜 이곳에 산성을 지었는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성은 바다에 접하지 않은 한쪽(동쪽)으로만 평지와 맞닿은 구조이기 때문에, 바다 쪽으로 오는 적을 막기에도 용이했을 것입니다.



 산꼭대기 근처에서는 1차성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안내판의 설명을 보며 생각하자면 본래 삼국시대에는 1차성이 있었고, 이곳이 무역도시로 커지면서 성이 너무 비좁으니 권역을 크게 확장하여 2차성을 쌓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차성은 테뫼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능선을 돌다 보면 저렇게 성벽이 번듯하게 서 있는 부분도 볼 수 있는데, 현대에 문화재 보수 차원에서 다시 쌓은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정상 부근에는 망해루라는 이름의 건물 터가 있습니다. 처음 지은 것은 삼국시대지만 고려 말기에 다시 건축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당성 망해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되며 고려 말 성리학자인 이색(1328-1396)은 <망해루기>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누각을 지어 사신 등의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로 썼다고 합니다. 귀빈을 이런 높은 곳까지 올라오게 하다니



 당성은 근대 들어서 버려졌다가 1990년대 이후 발굴작업이 진행되었고, 이를 통하여 삼국시대의 그 '당항성'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발굴 작업은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을 따라 계속 걸어갑니다.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데 사진 왼쪽으로는 저 멀리 시화호가 펼쳐져 있습니다. 저쪽 평지도 간척으로 만들어진 땅이니, 본래는 대부분 바다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이곳은 북문 터입니다. 저기 쑥 들어간 곳이 보이시나요? 물론 지금은 문짝도 없고 길도 문을 통과하는 방향으로는 나 있지 않기 때문에, 유적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이쯤부터는 골짜기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는 길입니다.



 골짜기 쪽으로 내려와 위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골짜기 아래, 그러니까 본래 당성 내부 중심지였던 곳에는 성에서 사용할 물을 담아 놓는 집수시설의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뭐 이런 비탈에 다 살았겠나 싶긴 하지만, 당성의 전성기에는 성 안에 대장간도 있고 귀빈 접대시설도 있는 등 나름 큰 도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하네요.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당성 입구에는 당성 발굴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과 사진들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 설명을 보면 이곳이 신라까지 이어진 비단길의 주 경로였다고 언급되는데, 실제로 요즘에는 비단길이 중국을 넘어 신라 경주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경우가 많으니 충분히 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당성을 그냥 가볍게 관광지로 생각하기에는 좀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름 정비는 해 놓았다지만 여기저기 접근금지 표지판이 난잡하게 서 있고, 성벽을 도는 길 외에는 자연 상태의 수풀이 그대로 있거나 대충 잘라서 쌓아 놓은 폐허 투성이입니다. ㅡㅡ; 하지만 역사, 특히 삼국시대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꼭 와볼 만한 곳입니다. 삼국시대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당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최근까지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조금 더 깔끔하게 정비된 당성 유적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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