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대기업은 많습니다. 1990년대 재계 1위까지 다투었지만 엄청난 분식회계로 몰락한 대우그룹이나, 자기 한 몸 쓰러져 IMF를 앞당긴 한보와 기아, 분가(分家)들은 여전히 번창하지만 본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대그룹, 조금 앞으로 가면 부산의 상징이었지만 전두환의 장난질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도 있지요. 그밖에도 재계에서 한가닥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 지면과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기업들 가운데 '율산그룹'이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창업하여 불과 3~4년만에 재계 10위권을 넘보는 대기업으로 폭풍 성장하였지만,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지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무튼 잠시나마 대한민국 경제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간신히 기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뜬금없이 사라진, 율산그룹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선호 율산그룹 창업자 (출처 에브리뉴스)

 

1. 창업과 폭풍성장 : 겁 없는 20대 청년들의 반란

 창업주 신선호(1947-)씨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는 서울(경기고등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 신형식(1901-2003)은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과 전남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며 농지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녀가 9명(7남2녀)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대부분 학자와 기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6남인 신선호씨 역시 경기고등학교(평준화 이전)와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엘리트 집안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신형식의 교육방침에 따라 9남매는 모두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선호씨는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고, 처음에는 오퍼상(수출-수입업자를 연결하고 커미션을 받는 일)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본금 100만 원을 마련한 그는 1975년 6월 자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 몇 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하였습니다. '율산'이라는 이름은 자기 아버지의 호에서 따 왔는데, 이는 동시에 고향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군요.

율산그룹 경영 당시 신선호 (출처 머니그라운드)

 율산실업의 초기 성장을 이끈 것은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무역업이었습니다. 율산은 사업성이 낮아 다른 기업들이 꺼려하는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수출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운영하는 식으로 채산성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납기일을 지켰고, 현지 바이어의 신임을 얻은 율산실업은 무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창업 첫 해, 고작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율산실업은 340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1975년 대한민국 수출액 총계는 50억 8천만 달러), 같은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수출실적은 해마다 퀀텀(?) 점프를 하여 이듬해(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율산을 제외하면 현대, 삼성, 대우 등 12개뿐이었으니, 율산은 창업 3년만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이 된 것입니다.

 작은 무역회사로 출발한 율산그룹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 첫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해운업(금룡해운 인수)과 건설업(동원건설 인수)에도 진출하였고,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중공업, 패션업, 전자, 관광호텔 등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습니다. 1979년 당시 율산그룹은 14개의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의 합작법인을 운영하였으며 직원은 8,000여 명, 자본금은 100억 원에 달했습니다.

 

2. 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우선 전제할 것은 신선호씨, 그리고 그와 학연으로 이어진 경영진이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율산그룹은 창업 직후부터 다른 기업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성공함으로써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은 초기부터 계속된 성공의 경험이 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무역업'을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출 중심, 아니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제개발을 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출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수출라인 하나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율산그룹

 당시 수출기업이 누리는 금융 차원의 특혜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들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 은행으로 가면 이를 담보로 즉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율은 6% 정도였습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요? 당시 은행 대출금리가 25% 정도였습니다. ㅡㅡ; 심지어 이 대출금은 거의 눈먼 돈에 가까워서 기업들이 실제로 이 돈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든 부동산 투기를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특혜지요.

 율산그룹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율산은 1977년 금룡해운을 인수하여 율산해운으로 개편하였는데, 당시 인수자금 10억 원은 서울신탁은행에서 연 9% 이자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공식 금리는 25% 이렇게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율산그룹은 단기간에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 방법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중동지역에 시멘트 수출하기'라는 대박 아이템을 잡은 것도 그렇고, 인수한 계열사들을 단기간에 각 분야별로 최상위권 기업으로 성장시킨 업적도 부정하기 어렵지요. 이제 갓 서른이 될까 말까한 율산의 젊은 경영진은 대한민국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율산그룹은 1977년 말 서울종합터미널(現 센트럴시티) 부지를 사들이고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도 맡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 율산그룹 공중분해, 왜?

 1978년 여름 발생한 한 사건이 모든 파국의 시작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해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법률상 외국 기업이 할 수 없는 유통업에 관여했다가 적발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율산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입니다.

 중동,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율산그룹에는 매우 중요한 해외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율산그룹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산그룹이 이에 해명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기금융회사(단자사)들이 대출자금을 대거 회수하여 그룹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기업 자체가 은행 빚을 쌓아올려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융권의 신뢰가 꺾이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거기에 1978년 8월 발표된 부동산 투기 억제조치(8·8조치)가 그룹을 한 번 더 직격하였습니다. 그룹의 주요 돈줄이던 율산건설이 새로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이 조치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9월쯤 되면 율산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져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나빠졌고, 이에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모여 총 70억 원의 구제금융을 퍼주었지만 이 돈은 대부분 단자사 빚을 갚는 데 소진해 버렸습니다.

 해가 바뀌고 1979년 1월에는 실로 괴이한 사건이 터지는데,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을 방문하던 신선호씨가 정부기관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신선호 납치기도사건). 워낙 해괴한 일이라 그 전말을 두고 권력 개입설, 자작극설 ㅡㅡ; 등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후 정부와 금융권의 태도가 율산그룹에 비우호적으로 돌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태도 변화에 납치기도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혹자는 "신선호씨가 언론에 경위를 설명하면서 괴한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비서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 추측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1938-1983)이 재계 인사들에게 "율산은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율산그룹 붕괴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판장의 신선호.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럴드포토)

 당시 정부와 금융계는 율산그룹에 대해 추가 금융지원(총 90억 원)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납치기도사건 이후 모두 무산되었고, 동앗줄이 끊어진 율산그룹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9년 4월 3일 신선호씨가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율산 사건) 3일 후 율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당시 율산실업의 부채비율은 2600%, 율산건설은 670%, 율산알미늄은 470%나 되었다니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게 기업 자체가 이미 빚 위에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4. 후일담

 율산그룹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선호씨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자 언론인, 관료, 친일부역자였던 부완혁(1919-1984)이었는데, 그는 <사상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등 야당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선호씨의 출신(전남 고흥)이 겹치면서 김대중과의 커넥션 의혹, 호남계 기업에 대한 경계 아니냐는 등 이와 관련한 온갖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 이후 율산그룹의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인수되었는데, 이게 그룹 차원의 자금난 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계열사들은 나름 알짜기업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해당 기업들은 인수된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다가 IMF 전후로 새로운 모기업이 무너지며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모기업의 사업 재편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흡수합병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건설 중인 서울대공원 조감도

 기업 자체는 이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율산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벌인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공원은 1970년대 말 율산그룹에서 설계 의뢰를 받고 미국 용역회사 PRC와 협력한 계열사를 만들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공원 부지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장막성전'은 해체된 후 2020년 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모 사이비 종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산그룹이 구입한 고속터미널 부지는 그룹 해체 이후로도 오랫동안 신선호씨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면서, '터미널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제3자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채권단이 처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ㅡㅡ; 율산그룹이 계획한 20층짜리 복합터미널 계획이 날아가고, 신선호씨 및 그와 함께 남은 직원들은 가건물 상태이던 임시 터미널을 20여 년이나 지킵니다. 우주방어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센트럴시티가 완공되고 신선호씨는 수천억 자산가로 화려하게 재기하였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경영권을 넘기기는 하지만요.

센트럴시티는 이후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현재는 신세계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센트럴시티 홈페이지)

 

# 참고자료 #
 "102세 율산 신형식 옹 타계", 서울신문(https://www.seoul.co.kr/)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율산그룹 신선호, 첫 공판", 해럴드포토(http://photo.heraldcorp.com/)
 "고흥 출신 신선호 前 율산그룹 회장 재기 성공", 아시아뉴스통신(https://www.anewsa.com/)
 "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머니그라운드(http://mground.kr/)
 "[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
 "신선호씨 집안 스토리", 일요신문(https://ilyo.co.kr/)
 "[실록! 한국경제]⑨ “무너진 신화”… 율산(栗山)", 블록미디어(https://www.blockmedia.co.kr/)
 "율산그룹의 드라마틱한 기업 흥망사", KOSME 기업나라(http://nara.kosmes.or.kr/)
 "‘율산 신화’ 신선호 20여년 만의 인터뷰", 일요신문(https://ilyo.co.kr/)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 고교시절 100만원으로 기업 성장", 에브리뉴스(http://www.everynews.co.kr/)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https://tfm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부완혁"
 신세계센트럴시티 홈페이지(http://www.shinsegaecentralcity.com/)
 한국어 위키백과 "율산그룹"
 나무위키 "센트럴시티", "율산그룹"

 

 윤리적 기업가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덕분에 유한양행은 지금도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흑역사랄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이 기업을 운영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였습니다. 하필이면 형 유일한이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때 이 사람은 기업 차원에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것이지요. 말할 필요도 없는 형 유일한,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긴 동생 유특한(1918-1999)과 비교됩니다. 이번에는 형만 못한 아우, 아우만 못한 형이었던 유명한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1. 사전 지식 : 유일한과 유한양행

 

 우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버드나무 모양의 CI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한양행 CI

 

 유일한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당시 한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한양행이 주력으로 삼은 분야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자체적인 생산체제도 갖추었는데, 유한양행이 자체 생산한 의약품 1호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었다고 하지요. 거의 약장수 수준의 홍보가 판치던 당시 제약업계에서, 유한양행은 제품의 구체적 효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 등을 광고에 실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만주, 베트남 등 해외로도 진출하였습니다.

 

 유일한은 철저한 윤리경영을 추구하여 당시에는 판매가 합법이었던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등 마약성 제품의 판매를 철저히 막고,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종업원 주주제를 실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한반도와 미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으로 비밀리에 입대하여 50이나 된 나이에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그의 사후 20년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집니다).

 

말년의 유일한

 

 미국에서 유일한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당국에도 알려졌는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한의 귀국을 불허하였습니다. 사장이 미국에 발이 묶이자 회사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12월 15일 긴급 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당시 부사장으로 일하던 동생 유명한이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형이 부재중일 때 회사 운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2. 유명한의 '덜 유명한' 친일행적

 

 그런데 형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의 행적은 사장을 맡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1941년 8월 그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에 1만 원의 자금을 헌금하는 등, 형의 신념과 정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는 그가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형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며, 유일한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은 정식으로 사장직에 오르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펼쳐나갔습니다. 그가 사장에 선임되고 며칠 뒤, 유한양행은 본사+사장(유명한)+계열사+직원 명의로 총독부에 소위 '애국기'를 헌납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한양행이 헌납한 금액은 총 5만 3천 원으로, 조선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헌납한 3만 원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습니다.

 

유한양행의 애국기 헌납을 다룬 기사.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

 

 유명한의 친일 행적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는 유한양행과 계열사들이 <매일신보>에 신년기념 합동 광고를 실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도 소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다든지 신년 맞이 전승(戰勝)을 기원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찬양 광고였습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유원박)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유명한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요? 블로거가 추정해 보자면 유일한의 당시 행보 때문에 회사가 일본 당국에 탄압을 받았고,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굳이 변호하자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나 군사정권기에 권력과의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이런저런 탄압과 견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유한양행 명의 친일광고.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3. 말년 : 형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와 회사의 친일행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설립자 유일한과 막내동생 유특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하였고, 유명한 역시 유한제약 이사장과 한국제약협회 2대 회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반민특위에 끌려가지도 않는 등 잘 살았지요.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적산을 불하받아 '고려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기업은 해방 직후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준 회사였다고 합니다.

 

 이와 별개로 형과 동생은 민족반역자가 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회사 경영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던 형 유일한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알아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일본인은 모른다"라며 사실상 큰동생과 연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막내동생 유특한이 일본 유학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이것조차 나중에 형에게 깊이 사죄했을 정도라고 하니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나머지 형제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특한은 나중에 일부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하여 '유유그룹'을 창업하고,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기업인으로 잘 나갔을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인간적으로 버림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모두 무시당합니다. 그래도 당시 생존해 있던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가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산 다대포에 정착한 유명한은 배를 타고 부산 중심가에 출퇴근하던 중 침몰사고가 발생하여 허무하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형 유일한은 말년에 막내동생 유특한에게 "친일파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라는 내용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합니다. 동생 자신뿐 아니라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전체의 역사에도 큰 흠집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랬던지, 형 유일한이 동생의 부고에 깊이 안타까워했다는 뒷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 정리 : 흑역사도 역사다

 

 형 유일한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그런지, 동생들은 나름 사회적인 활동이 많았음에도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블로거의 능력과 노력 부족을 탓하시오 그래서 유명한의 행적은 이름과 달리 그리 유명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언론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생은 형 유일한과 비교하여 그 그늘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의 행적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거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친일분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을 만났고, 이들이 위의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 또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회사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작원 훈련까지 받아가며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이야말로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한양행 연혁. (유한양행 홈페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유한양행에서 유명한과 그 시대의 행적을 철저히 감추고 언급조차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부터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성장한 것이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유명한의 주도로 애국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요. 블로거는 유한양행이 양심적 경영과 사회공헌을 전통으로 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비록 일부나마 명백한 흑역사를 감추는 데는 약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과거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 기업이라는 전통에 더 어울리고, 설립자 유일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참고 : 

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www.yuhan.co.kr/Founder/founder_main.html)

뉴스워커, "[광복절 기획] ‘민족기업’ 유한양행이 친일 행위를?…90년 역사 ‘옥에 티’" (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3)

오마이뉴스, "[한국 기업인 열전 7]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4800)

일요신문, "[8·15 특집 기업과 친일] 유한양행 ‘유명한 악몽’" (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461)

CNB뉴스, "[임정 100년 - 겨레 기업 (2)]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7516)

정운현,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 (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

한국어 위키백과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나무위키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유한양행"

 


 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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