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장소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일자

 2019. 2. 12.


 역사를 전공하는 이에게 신채호(1880-1936)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흔히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끌어 간 인물 중 하나이며, 또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세수를 할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강직함을 상징하는 몇몇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역시 흔히 그렇듯 이 이상의 인간 신채호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람들의 관심도 적은 듯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신채호는 단순히 저런 몇 줄로 정리될 만큼 단순한 삶을 살아간 인물은 아닙니다. 계몽운동가, 언론인, 사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아나키즘 혁명가에 이르는 그의 일생은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거대한 불의(不義)와, 때로는 자기 자신과 평생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살았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신채호는 충청도 회덕현, 현재의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생가 터는 현재 신채호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하여 오늘은 신채호 생가를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이곳은 대전광역시에서도 가장 외진 지역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만약 버스를 이용하고 싶다면 대전서남부터미널이나 산성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32번 버스(서남부터미널 ↔ 백암리)를 타고 도리뫼 정류장에서 내리면 됩니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서, 버스가 들어온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표지판이 나옵니다.



 사실 표지판 이전에 버스정류장 근처에서부터 웬 기와집 하나가 보여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신채호 홍보관이고 실제 복원한 생가는 안내판을 참고하여 조금 더 걸어들어가야 나옵니다.



 사실 이곳에 무언가 '볼거리'가 많다고 보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신채호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생가라고 해봐야 그냥 평범한 초가삼간이고, 그 외에는 신채호 동상과 작은 홍보관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신채호의 '숨결'을 느끼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생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신채호 생전의 건물은 아니고, 세월의 바람에 사라진 것을 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기록에는 1992년 발굴조사를 시행한 후 지역 주민들의 고증 등을 참고하여 현재의 초가집을 재건했다고 하는군요. 신채호가 건국훈장을 수훈한 독립운동가였던지라 국가보훈처에서도 나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표지판도 박아 놓았습니다. 표지판에 붙은 스티커가 떨어져 덜렁거리던데 관리 좀


 신채호가 이곳에서 거주한 것은 대략 8세 무렵까지로, 본래는 할아버지의 처가(안동 권씨)가 있던 마을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사헌부 장령을 역임한 고위관료였지만 낙향하여 지금의 청주 귀래리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며 가세도 기울어 이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것입니다. 신채호는 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였고, 이후에는 집안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이주하여 학문을 닦았습니다.



 복원한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 신채호의 일생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가집의 안채에는 '단재정사(丹齋精舍)'라는 소박(?)한 현판을 붙여 놓았습니다. 방 안에 전시된 인형은 아마도 신채호의 어머니가 길쌈하는 모습을 모티브로 한 듯합니다.



 안채의 다른 방에는 어린 시절의 신채호를 재현해 놓은 인형이 있고, 그 앞으로는 어린 신채호의 몇몇 일화와 그가 어릴 적 지었다는 한시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고, 20대 중반에 성균관 박사(요즘식으로는 교수)를 역임했을 정도로 학식도 출중했으며, 한 번은 집에 불이 나 책이 소실되자 그 책의 내용을 토씨까지 통째로 암기하여(!!!) 그대로 복원해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천재였습니다.



 복원한 생가는 아담하지만 나름 고즈넉하니 편안한 분위기를 줍니다. 안채 옆켠에는 곳간도 복원되어 있습니다.



 생가를 나오면 그 옆켠에 서 있는 신채호 동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본래 거창한 '모뉴멘트'를 아주 싫어합니다만, 이곳에 있는 동상은 쓸데없이 거창하지는 않으면서 나름 방문자들에게 신채호를 마주할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라 싫지많은 않군요. 왼쪽 건립기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넘어가기로 잠시 모자를 벗어 신채호의 위대한 일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처음 들어올 때 보였던 기와건물인 단재 홍보관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역시 홍보관이라고 뭐 거창한 볼거리가 있지는 않습니다. 딱히 신채호 관련 유물들이 있다기보다는 신채호의 삶의 과정을 설명한 글과 미니어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신채호라는 인물을 알고 싶다면 홍보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글을 음미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단체예약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도 함께 들을 수 있다고 하네요.



 신채호의 일생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말년에 아나키즘(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고 아나키즘 혁명가로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그에게 아나키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아나키즘이 억압적인 지배권력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아나키즘이 그때까지의 독립운동과 단절된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아마 이회영(1867-1932)과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블로거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그의 문구라면 역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조선상고사』 첫머리의 일갈입니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나와 상대(나 아닌 놈)가 싸우는 것' 쯤으로 이해해 버리면 심히 곤란합니다. ㅡㅡ; 신채호는 주관적 존재(아. '나'는 주관적이므로)와 그렇지 않은 존재(비아)를 전제하고(이는 상대적인 개념. 비아 역시 스스로는 '나'일 것이므로) 각각의 '나'가 외부(비아)의 자극에 반응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사회를 변혁해 온 그 거대한 흐름이 바로 역사의 본질이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홍보관 입구에는 간단한 운영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홍보관은 월요일을 제외한 주6일 개관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홍보관을 제외한 생가 자체는 이외 시간에도 둘러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홍보관을 나오면서 처음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 명의 작은 역사학도에게 있어 신채호란 어떤 의미일까요? 분명 신채호 역시 인간이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는 이런저런 비판이 따라붙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가 주장한 여러 학설들은 시대가 지나며 여러 후학들에 의하여 대부분 논파되었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은 분명 위대한 것이었지만 한켠에서 그는 (관점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도 맹렬한 비판으로 임시정부 활동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말년의 아나키스트 활동은 아예 무시되거나 단편적으로만 언급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그 비판적 시각들은 일정 부분 타당하지만, 그것으로 인간 신채호의 위대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그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가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특히 독립군과 의열운동 등의 무장투쟁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족'의 각성이 필요했던 시대에 역사를 통하여 '한민족'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 그의 업적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요?


 슬프게도 그의 역사학적 업적이 많은 후손들에게 오해 또는 곡해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채호는 실증주의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기에 만주벌판을 헤집으며 고구려의 흔적을 찾고 과거 사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시도했던, 어떤 의미로는 철두철미한 '실증주의자'였습니다(단지 참고할 사료가 아직 너무 부족했고 그가 민족의식 고취의 방편으로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렇게 치열하게 쌓아올린 그의 역사관이 역사를 빙자한 소설이나 쓰는 유사역사가들이나 역사를 이용수단으로 삼는 정치꾼의 말장난에 오용되고 있는 현실, 저승의 신채호가 바라보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참고자료

 - 한글 위키백과 "신채호"

 - 나무위키 "신채호"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위키문헌)

 - 신채호, 『신채호 수필선집』, CommunicationBooks, 2017. (구글 도서)

 - 신복룡,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7(1),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 최근 영화 <밀정>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영화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통칭 '황옥 경부 폭탄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일본 경찰에서 경부로 일하던 황옥(1887-?, <밀정> 이정출의 모티프)이 있었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정말 친일파가 맞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의 정체는 소위 '위장 친일파'의 존재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데, 그의 일생을 논하며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지요.


[간신히 찾아낸 황옥의 사진.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호외]



1. 의열단에 뛰어든 일본 경찰


 - 황옥의 이명(異名)은 황만동(黃晩東)이며, 1887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에 특채로 임용, 일본 경찰의 일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대단히 높은 계급인 경부(현재의 경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황옥은 고등계에서 근무하였으며, 고등계가 주로 독립운동가 등의 정치범을 다루는 부서였음을 생각하면 그가 일본 권력의 개로 활약하여 출세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그런 그가 독립운동과 연을 맺게 된 것은 1920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김시현(1883-1966)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황옥은 김시현의 설득을 받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황옥은 계속 일본 경찰로 근무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주로 의열단 단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김시현]


 - 그는 의열단 단원이며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웠던 김상옥(1890-1923)이 경찰의 수사망에 포위당할 처지가 되자, 이를 김상옥에게 몰래 알려 상하이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의열단 단원인 김지섭(1884-1928)이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되자 몸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김시현이 1921년 극동인민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황옥은 50원(현재 환율로 수백만 원)을 여비로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 그리고 운명의 1923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온 한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자 황옥은 김상옥의 배후 세력을 색출할 임무를 받아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1923년 2월 중국 톈진에 도착한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의열단 단장 김원봉(1898-1958?)을 만나고,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동할 것을 서약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국내 주요 시설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국내로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2. 황옥 경부 폭탄사건


 - 황옥은 김시현 등의 의열단 단원들과 함께 다른 짐으로 위장한 폭탄들을 들고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함께 임무를 맡은 단원 중 김재진이 일본에 매수되어 계획을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황옥과 김시현을 포함한 9명이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직접 관련자 중 김원봉과 김지섭 정도만 체포되지 않았는데, 황옥은 이들의 피신을 도운 후 자신은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 현직 일본 경찰이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온 세상이 뒤집어졌고, 이들에 대한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판이 해를 넘겨 진행되는 와중에 피고석에 선 황옥은 충격적인 진술을 하게 됩니다.


 - "나의 처지를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일망타진한다면 상관들도 나의 역량을 인정하고 경시(현재의 경정)로 승진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본래는 폭탄을 경성까지 오도록 한 이후 체포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일찍 발각되는 바람에 나까지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황옥 재판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1923년 8월 9일]


 - 당연히 여론은 난리가 났고, 뒤통수의 대가 황옥은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은 김시현과 함께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이후 1925년 황옥은 건강 문제(장결핵, 폐렴 등)로 형집행정지 석방되었으며, 1928년 다시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 출옥하였습니다. 그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하 폭탄사건)'으로 불렀습니다.



3.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요?


 - 출옥 이후 해방 때까지 황옥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김시현을 비롯하여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봤을 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법정에서의 진술과는 관계없이 황옥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계속 인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4년에는 동료 김지섭이 도쿄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폭탄을 옮길 수 있었던 것도 체포 전 황옥이 도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하지만 그를 말 그대로 '밀정'으로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데, 일단 자신의 진술이 그러했고 그의 상관이었던 시로가미 유키치(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역시 "나의 재가를 받고 작전의 일환으로 벌인 일"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황옥의 정체성이 일본 밀정 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지섭의 사진과 거사 관련 기사. 1924년 4월 25일 동아일보]


 -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태도를 보면 그게 맞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체포된 김지섭은, 변호를 맡은 후세 다쓰지(1880-1953)와 대화하던 중 "황옥은 결코 밀정이 아니다"라며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옥을 직접 만난 김원봉 역시 그를 "경기도 소속 경찰이었으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불행하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이는 사실인지 불명).


 - 황옥은 해방 이후 <조선독립운동사>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반민특위 활동에서는 증인으로 출석, 동료 친일경찰의 범행을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과거사 정리 관련 활동을 하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당했고, 얼마 뒤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선전방송에 출연한 이후의 삶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4. 정리 : '위장 친일파' 논란이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


 - 대체로 학계에서는 친일파로 행세하면서 뒤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소위 '위장 친일파'들이 다수 실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정체를 절대 밝혀서는 안 되는 특성상 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고, 후세에 알려진 것은 그들이 친일파의 이름으로 가졌던 공식적인 지위, 그리고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주변인의 증언 정도 뿐입니다.


 - 황옥 또한 비슷해서, 그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폭탄사건에 관한 재판기록이나 그 주변인의 단편적인 증언(의열단원들, 동료 경찰 등) 말고는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해서, 황옥의 실체를 소상히 밝히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지요. 그나마 황옥 자신이라도 계속 있었다면 언젠가는 진실을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한국전쟁 때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ㅡㅡ;


 - 실상 이는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의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커 보입니다. 해방 직후 친일분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밝혀내고 심판했다면, 친일파인 척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행적 또한 필연적으로 소상히 밝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해방 직후였으니, 이를 검증할 자료 또한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그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 버리는 바람에 이들의 실체를 밝히기 너무나도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아예, 명백한 친일파였던 이들을 '알고보니 위장 친일파였네'라며 호도하는 데 악용되기까지 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ㅡㅡ; 요즘에는 이 때문에 위장 친일파에 대한 논의가 더 어려워진 측면도 있습니다. 이게 어떤 쪽으로 악용될 지 모르니까요.


 - 처음으로 돌아가서, 황옥은 정말 친일 밀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위장 독립운동가였을까요? 현재는 여기에 아무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합니다. 글쎄요, 하늘에 있을 당사자들에게 물어보면 혹시나 알 수 있을런지. 이들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사를 제때 정리하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한 노릇입니다.


 - 여담으로 그와 함께한 독립운동가들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합니다. 김지섭은 도쿄 황궁 폭탄투척사건으로 복역 중 옥사, 김원봉은 해방 후 왕년의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후 빡쳐서 월북했다가 숙청, 김시현은 대한민국에서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이승만의 횡포에 역시 빡쳐서 암살 기도를 했다가 실패, 다시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0977125

http://news.mt.co.kr/newsPrint.html?no=2015081314472814366&type=1&gubn=undefined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24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media.daum.net/m/channel/view/media/20150815060507538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4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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