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자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그랬다" "모두가 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등등의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곤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친일파 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협력 사실 자체를 반성하지 않고 정당화 · 합리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개적으로 참회한 사람들도 있긴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쪽이 당연한 것인데도, 공개적으로 반성을 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슬픈 현실이겠지요. 이번 글에서는 일본에 굴복하여 협력하였지만, 해방 이후 "나의 사지를 찢어달라"며 대중 앞에서 잘못을 뉘우친 최린(1878-1958)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최린]



1. 민족대표 33인, 천도교의 지도자


 -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고, (당연하게도) 어릴 때는 한학을 배우다가 한양으로 이주한 후에는 개화파 청년들과 어울리며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의 하급 관료로 일했는데, 이 무렵 개화파 망명자들과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일심회'어디선가 들어보셨다면 그것과는 다른 단체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04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본격적인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 제1중학을 거쳐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차별적 행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퇴학당하거나 체포당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최린은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1861-1922)와 교류하였고, 이를 계기로 1909년 귀국 후 천도교에 정식 입교하였습니다.


 - 최린이 귀국한 시기는 대한제국 멸망 직전이었고, 최린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는 등 국권 수호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병합 이후에는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는데, 천도교계 재단이 운영하는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고등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전경. 1917년. 출처]


 - 1910년대 후반부터 주로 해외 교민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이 잇따랐고, 이것이 일본의 통제를 뚫고 국내에 전해지면서 국내에 남아있던 지도자들도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 천도교계의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은 은밀히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였고, 여기에 불교, 기독교(개신교)계가 합세하면서 소위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됩니다.


 - 이들은 독립선언서 작성을 최남선에게 맡기고, 때마침 고종이 사망하자 고종의 장례일(인산일)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인쇄소가 친일경찰 신철(?-1919)에게 발각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신철이 독립선언서를 보고도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최린은 급히 신철을 만나 설득하였고, 신철은 그 설득을 받아들여 입을 다물고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버립니다.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일은 이틀 앞당겨져 3월 1일이 되었고, 그 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들 아시겠지요? 민족대표들은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를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한편 최린의 설득을 받아들인 신철은 3·1운동 발발 이후 이를 은폐하였음이 발각되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기 직전 음독자살하였습니다.



2. 민족대표에서 민족반역자로


 -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된 최린은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얼마 전에 출소하였습니다. 그 무렵 손병희가 (수감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최린은 천도교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수감생활 도중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1920년대 이후 최린은 다분히 개량주의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 한편 손병희 사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게 되었는데, 최린은 천도교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천도교 교단이 봉합과 재분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최린은 1929년 천도교 도령(교령)에 취임하여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이미 개량주의와 자치론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의 그는 조금씩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 한편 최린은 1927~28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외교 활동을 수행하였는데, 이 와중 프랑스 파리에서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일본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김우영(1886-1958)과 결혼한 상태였으니, 빼도박도 못할 불륜이지요. 결국 둘의 행각이 김우영에게 발각되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혼하였고, 불륜의 다른 한 쪽 당사자인 최린은 정작 나혜석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역대급 스캔들의 세 등장인물. 왼쪽부터 나혜석, 김우영, 최린]


 - 이에 나혜석은 '정조 유린죄' 명목으로 최린을 법원에 고소하였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송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혜석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파격적인 성평등론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소송은 결국 나혜석의 패소로 끝났지만, 이미 최린은 멀쩡한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으로 사회의 조롱과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 개인사로 큰 곤욕을 치른 이후, 최린은 본격적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1933년 무렵부터 최린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1934년에는 일본의 회유를 받아들여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됩니다. 같은 해 천도교 신파 지도자들과 함께 '시중회'를 결성하였으나 이는 말만 종교단체이지 실질적으로 친일단체였습니다. 


[최린이 매일신보(1940년 2월 11일자)에 기고한 글. 내선일체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다]


 - 이후 해방 때까지 최린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니 '조선임전보국단'이니 하는 일본 관제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고, 각종 강연회와 언론 기고 활동을 벌이는 등 A급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양심(?)이 남아있었던지 당시 성북동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왕년의 동지 한용운(1879-1944)의 딸에게 생활비를 건네주었지만, 한용운이 이를 알자마자 "더러운 돈은 필요없다"며 내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3. 해방 후의 참회 - "광화문 앞에서 내 사지를 찢어달라"


 - 한반도가 해방을 맞자 최린은 다른 민족반역자들과 함께 거국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그가 천도교 지도자였기 때문에 천도교 내부에서 강한 비판이 일었고, 교단 내부에서는 최린이 민족반역자로서 갖은 죄를 범했으니 책임을 통감하고 은퇴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최린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빡친 교단에서는 최린을 천도교에서 영구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ㅡㅡ;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최린(우측). 좌측은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 그렇게 욕을 먹으며 그냥저냥 살아가던 최린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특위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면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재판 때 다음과 같은 최후변론을 남겼습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내가 반민족 행위에 대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내 사지를 소에 매달아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형을 집행해 달라. 그렇게 하여 민족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 사실 이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는 다른 민족반역자들이 재판에서 보인 뻔뻔스러운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반민특위는 다들 아시다시피 온갖 난리 끝에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최린은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끝에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됩니다. 당연히 처벌은 없었지요.


 - 이후 건강 문제도 있고 하여 최린은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린은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당했고, 북한에서 대남 선전기관에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고, 북한 체제에 협력을 거부하였으니 대충 짐작이...... 1958년 사망한 것만 확인되어 있습니다. 1962년 남한에서 최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 하였으나, 친일행위가 너무 명백하여 ㅡㅡ; 무산된 바 있습니다.



4. 정리 : 결국 반성한 자는 소수였다


 - 나혜석은 최린과의 불륜과 소송전 이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고, 파격적인 여성해방운동을 벌였지만 사회적인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협력도 거부한 나혜석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해방 직후 무연고자 병동에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반면 그의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불륜 상대였던 최린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해방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참 얄궂은 운명입니다.


 - 사실 최린이 해방 후에 진심으로 반민족행위를 반성했다지만, 블로거는 최린의 참회를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반민특위 재판에서 자신의 죄상을 자복하기 전 최린은 천도교계의 비판에 정면으로 반발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바도 있습니다.


 -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최린은 자신의 죄를 입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벌할 것을 '공개적'으로 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어쩔 수 없는 것' 또는 '민족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 "우리를 정죄하는 자들은 다 빨갱이들"이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서기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린의 '소박한' 참회조차도 확실히 눈에 띄기는 합니다.


 - 슬프게도, 이러한 참회를 한 사람조차도 최린을 비롯해 몇몇밖에 없었다는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방법조차도 사라지는 바람에, 왕년의 민족반역자들은 이후 반공투사니 기업인이니 교육자니 하는 미명으로 그대로 사회 기득권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유증은 그들이 대부분 사망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3·1운동 직전에 벌어진 최린과 신철의 일화입니다.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였지만 후년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최린, 친일경찰의 대선배로 한국인 탄압에 앞장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신철. 최린은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 모두 이름을 올렸고, 그곳에 신철의 이름은 없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http://egloos.zum.com/history21/v/971195 (최린과 신철)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21/2015042104138.html (최린과 나혜석) 댓글은 보지 않기를 권함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의 밑에는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식민지배를 도운 다수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주인인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한국인들을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에 대한 단죄가 해방 후에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부역한 자들은 대부분 해방 후에도 자신들의 노하우를 팔아먹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 중 '고문귀'로 악명을 떨친 친일경찰 하판락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말년의 하판락]




1. 왕년의 항일학생, 친일경찰로 변신하다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주군 명석면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주제일보통학교(現 진주초등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시절에는 반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진주고보 졸업 직전인 1930년 초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서 발생한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처분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판락의 이름이 수록된 진주 학생항일운동 관련 기사]


 1930년 진주고보를 졸업한 하판락은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순사 시험에 응시하여 1934년 합격하였습니다. 사천경찰서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37년에는 부산으로 옮겨 순사로 계속 근무하다가 1939년에는 경상남도 고등경찰과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경부 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부장, 경부보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해방을 맞게 됩니다.


 당시 그가 조선인으로 상당히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맡은 주업무가 '항일운동가 색출'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가 재직한 '고등과(고등경찰)'는 반체제인사 탄압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제국주의 일본의 경찰조직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반체제인사란 바로 항일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하판락은 항일운동가 탄압에 고등경찰의 일원으로서 앞장서고, 그 공(?)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판락이 단순히 항일운동가를 탄압한 사실만으로 악명을 얻은 건 아닙니다. 그가 악명을 하늘높이 떨치게 된 것은 그가 항일운동가를 탄압하는 방식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된 항일분자에 대해 비인간적 고문을 자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평생 고치지 못할 장애를 얻었습니다. 이 악행을 바탕으로 하판락은 '고문귀'라는 으시시한 별명을 얻기에 이릅니다.




2. '고문귀'의 활약상


 그가 악명을 떨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말 수십 명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탄압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진주 배돈의원 원장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김준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극히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자신도 조선인인 주제에) 피고문자에게 '조센징' 운운하며 욕설을 일삼아 '내가 동족에게 이런 짓까지 당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명한 개신교 목사를 밀정으로 포섭한 후, 그를 통하여 항일적인 신자들을 색출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항일운동가 탄압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그가 '고문귀'라는 악명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3년 이른바 '친우회 전단사건' 수사였습니다. 하판락은 당시 친우회 활동가로 검거된 여경수, 이미경, 이광우 등 8명을 수사하면서 극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고문의 결과 3명이 순국하고, 생존한 5명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후 수 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평생 장애를 안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고문 방식 중 하나. 상자 안에 수많은 못이 박혀 피고문자를 찌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고문을 당했고 남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간 이광우(1925-2007)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동지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화로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몸을 지지는 고문,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갖은 고문이 피고문자에게 가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판락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 바로 '착혈 고문'입니다.


 역시 이광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그와 함께 체포된 이미경을 고문하면서 원하는 자백이 나오지 않을 경우 그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고 한가득 피를 뽑은 다음, 그의 신체에 그 피를 뿌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주사기로 피를 뽑아서...... 고문귀가 아니라 흡혈귀였네 이러한 고문의 결과 이미경은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명의 항일운동가를 살해하거나 폐인으로 만든 대가로 하판락은 해방되는 순간까지 출세를 거듭하였습니다. 창씨개명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바꾸었는데 이게 조선인 티가 나는 이름이라(한자를 보면 '하판락'을 그냥 일본식으로 살짝 바꾼 것) 다시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바꾸었습니다(당시 창씨개명을 두 차례나 한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이후로도 해방 한 달 전에는 자기 친구의 형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등, 철저히 일본의 개로서 살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3. 해방 후 : 잘 먹고 잘 살며, 최후까지 살아남다


  해방이 되었으니 그간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겠으나,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 미군의 행정편의주의로 인하여 하판락을 포함한 친일경찰들은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판락은 미군정 하에서 경남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근무하였고, 일본인의 재산(적산) 처리에 관여하며 상당량을 인마이포켓ㅡㅡ;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던 하판락은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된 1949년 초 그에게 고문사당한 여경수의 모친이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하면서 긴급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악행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졌던 터라, 부산에서 체포된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많은 부산시민이 "저 자는 우리가 여기서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압송을 반대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당연히 자신의 고문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하판락(왼쪽)]


 하지만 결국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기소되었던 반민족분자들도 모두 무혐의 혹은 무죄판결로 풀려났습니다. 당연히 하판락도 석방되었는데, 이후 고향인 진주 명석면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부산 쪽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1956년, 지방의원 선거에 진양군(現 진주시) 제2선거구 후보로 출마하여 자기 가문의 전폭적 지원까지 등에 업고 유세를 펼쳤지만 당연히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한 하판락은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사업가로 변신, 신용금고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며 남은 평생을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사무소 신축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노인 복지 사업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사회사업가 행세를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을 가지고 부산광역시에서는 하판락에게 어버이날 표창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ㅡㅡ;


 그렇게 잊혀가던 그의 악행은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이광우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훈장을 받으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광우의 훈장 서훈을 전후하여 그를 고문한 자의 이야기도 당연히 함께 언급되었고, 그를 고문한 하판락은 그 죄상이 세간에 다시금 알려지며 여론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이에 그는 2000년 대한매일(現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찰 간부 활동을 후회하며,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과한다"라고 같잖은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판락 사망 당시 MBC 뉴스데스크]


 하판락은 2002년 국회 민족정기의원모임에서 친일파 708명을 선정했을 때 유일하게 생존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그 이듬해 천수를 모두 누리고 91세로 뒈졌습니다죽었습니다. 같은 해 말 그의 고향 명석면에서 <명석면사(史)>를 발간할 때 저자 김경현씨가 하판락의 악행을 수록하려 했지만 하씨 문중의 큰 반발을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경현씨는 결국 직접 수록은 포기하고 편집후기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하여는 면사편찬위 결의로 삭제함"이라는 멘트를 넣어 간접적으로 하판락의 악행을 명시하였다고 하는군요.




4. 정리 : 하수인들을 앞세우는 지배자의 전략


 흔히 친일경찰의 상징으로 노덕술이 유명하며 그 외에 하판락 정도가 알려진 수준이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일본 치하의 경찰로 근무한 조선인은 제법 많은 수가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항일운동 탄압에 앞장서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의 활약상은 때로는 일본인 경찰보다도 훨씬 악랄한 것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민족반역자로서 모두에게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웃기는 사실은 그 친일경찰들 자신도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센징'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돕는 '도구'로써 친일부역자들을 이용했지만, 저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일부를 자신들의 수족으로 포섭하여 방패막이로 쓰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행태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이점이 있을까요? 일단, 지배자를 향할 피지배자의 분노가 당장 자기 눈앞에 있는 앞잡이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잡이로 선택된 자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출세를 앞세우는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들의 주인에게 철저히 충성하여 자리를 보전하고 출세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언제 주인에게 내쳐질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슨 짓이건 서슴지 않게 됩니다.


[역시 일본의 하수인으로 활약한, 어떤 인물에 관한 당시 신문기사]


 그러니까 피지배자의 일부를 앞잡이로 활용하는 전략은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효율성 최고의 전략인 셈입니다. 물론 그 앞잡이가 된 자들을 옹호하거나 동정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저들은 자발적으로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었고, 자신들의 의지로 괴물이 된 거니까요.


 이렇게 일본의 하수인으로 일한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한 일이다"라며 스스로를 변호하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시에 굶주려가면서까지 일본에 저항하거나 적어도 협력을 거부한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고, 심지어 하판락같은 경우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족을 탄압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해방 후 이런 자들이 단죄받지 않고 평생을 잘 살다 죽은 것이야말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민족반역자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배부르며 정의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대대로 고생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엄두를 낼 수 있을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19950&cid=55772&categoryId=55836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9476 (오마이뉴스 기사)

http://www.bjynews.com/default/all_news_body.php?idx=4519&... (바른지역언론연대)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159. 민족반역자 하판락 특집

http://m.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60 (<명석면사> 관련 기사)




[2018. 9. 25. 수정]



 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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