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 추계답사 - 3일차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둘쨋날 뒷풀이는 한강공원에서 맥주로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덕분에 2일차보다는 한결 개운하게 답사를 시작할 수 있겠군요!



 마지막날 3일차의 첫 번째 답사지는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갑니다.



 돈화문으로 들어가서 우선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데, 특이하게도 경복궁과 다르게 돈화문-인정문-인정전은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두 번을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평지에 네모 반듯한 구획으로 만들어진 경복궁에 비하여 창덕궁은 비교적 자유로운 건물 배치를 하고 있는데, 일대의 지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만은 못해도 상당한 위엄이 흐르는 웅장한 건물입니다.



 인정전의 내부는 의외로 어느 정도 서양식 분위기도 나고, 특이하게 전등도 달려 있는데 이는 나중에 일부러 단 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순종 때인 1908년에 인테리어를 개조한 것이라고 하네요.



 인정전 옆에는 선정전이 있는데, 이곳은 편전(왕의 평상시 집무실)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종종 왕과 왕비의 장례를 치를 때 신주를 모셔 놓는 공간(혼전魂殿)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복도는 그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덧붙은 것입니다. 다른 특이점으로 선원전 지붕의 기와는 특이하게도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사용한 청기와인데 이는 광해군 시기에 처음 깔았다고 합니다.



 선정전 옆에 있는 희정당은 왕의 생활공간으로 쓰인 곳인데, 선정전이 비좁은데다 왕의 장례 용도로 쓰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임시 편전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블로거는 건물 전면의 구조가 독특해서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정전과 희정당 뒤편에는 왕후가 생활한 대조전이 있습니다. 입구인 선평문을 넘어가면



 대조전 건물이 나옵니다.



 대조전 역시 실제 사용되던 당시의 모습으로 꾸며 놓았는데, 가구 등의 디자인을 봤을 때 여기도 대한제국 시기쯤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과 대한제국의 최첨단 CCTV 물론 이건 현대에 관리용으로 달아 놓은 것이겠지요. 덧붙이자면 인정전 같은 큰 전각의 내부에는 로봇청소기도 돌아다닙니다. ㅡㅡ;



 이곳은 대조전의 일부인 청향각인데, 전각 옆에 붙은 굴뚝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곳 뿐만 아니라 서울의 조선 궁궐을 돌아다니면 저렇게 수수하면서도 예쁘게 쌓아올린 굴뚝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조전을 나와 희정당 옆을 지나치면 세자가 거처했던 성정각이 나옵니다. 블로거가 사진을 거의 찍지 않은 관계로 여기는 그냥 안내간판으로 대체하겠습니다. ㅡㅡ;



 그리고 창덕궁의 한 쪽 구석에는 낙선재가 있습니다. 숙종 때부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해 헌종 시기 크게 중건된 이곳은, 다른 무엇보다도 조선 궁궐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사람이 거주한 곳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공간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한 의친왕과 이방자, 덕혜옹주가 모두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바깥에서 본 낙선재의 풍경. 낙선재의 건물들은 단청을 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전각들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아마도 건물의 위상과 역할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추정되긴 한데, 한참 나중에 교수님에게 물었을 때 교수님은 현대에 문화재를 복원 · 수리하면서 단청이 있고 없고 여부를 제대로 고증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그냥 참고만 해두라고 하셨습니다. ㅡㅡ;



 낙선재 곁으로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사진 왼쪽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오른쪽은 창경궁과 연결된 통로인 함양문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종묘와 비슷하게 정해진 시간에 모여 입장하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게 되는데, 정해진 답사 일정에 맞추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바로 창경궁으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함양문을 통과하면 가장 먼저 창경궁 통명전이 일행을 맞이합니다. 통명전은 왕후의 침전으로 쓰였습니다. 주변으로는 이외에도 몇몇 전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곳이 창경궁의 내전 영역이라고 하는군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고 '창경원'이라는 이름의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전락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엽에야 동물원을 이전하고(이 때 창경원의 대타로 설치된 동물원이 바로 서울대공원 동물원) 본래 모습을 복원하고 있지만 아직은 비어 있는 공간이 많습니다.



 그런 연유로 궁궐 내부에서는 이런저런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답사 당시에는 정전인 명정전 앞에서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왕의 집무실인 문정전은 명정전과 바로 옆-뒤를 맞대고 바짝 붙어 있습니다. 창경궁은 본래 궁궐이 아니었던 곳에 이런저런 건물들을 덧붙여 궁궐로 만든 곳이라 역시 내부 구조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합니다.



 아직 한창 복원 중이라 볼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비어 있는 건물터를 노니는 재미도 있겠지만 창경궁은 이 정도만 보고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뒤쪽으로 들어왔으니 정문(홍화문)으로 나가게 되겠지요? 명정전에서 홍화문으로 이어진 길목에 작은 개울(궁궐 내부에 낸 인공하천으로 '금천'이라고 합니다)과 다리가 있는데, 각각 '옥천'과 '옥천교'라고 부릅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에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시간이 조금 남는 김에 이곳을 짧게 관람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뜰에는 서울에 있다가 철거된 이런저런 건축물들의 잔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이놈은 박정희 정권 때 지어진 '콘크리트제' 광화문의 부재로, 현재는 철거하고 원래의 재료를 활용하여 다시 지은 것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도 이런저런 전시물들이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 서울을 재현한 모형들도 있고



 다양한 유물들도 있습니다. 짐바브웨 달러의 100년 선배가 여기에 ㅡㅡ;



 아무래도 현대의 서울 또한 기억할 게 많다 보니 현대 유물도 많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포크레인은 뭔가 예술작품으로 만든 것 같은데 인상적이어서 한 컷.



 2층에는 블로거가 여기서 가장 좋아하는 전시물이 있는데, 서울 전체의 건물들과 지형을 모형화하여 전시한 것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서울의 웬만한 건물들은 다 있는데 심지어 블로거가 몇 년 전 자취를 하던 다세대주택도 있더군요.



 이렇게 역사박물관을 떠나갑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옛 경희궁 터의 일부에 서 있는데 경희궁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철거된 이후 시가지가 들어서 지금은 복원하기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종로 쪽으로 이동 중. 광화문사거리 앞에는 빌딩숲 가운데 웬 기와건물이 하나 있는데,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는 '기념비각'입니다. 어릴 적 이걸 처음 보고 이게 그 보신각인가 하고 종을 암만 찾아봐도 없어 실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ㅡㅡ;



 광화문~종로 일대에는 이런 것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서울의 중심가였다보니 땅을 파면 옛 건물의 흔적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이곳은 종로타워. 예전에 화신백화점이 있던 곳입니다. 화신백화점의 역사와 이곳에 종로타워가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은 이 글을 참조.



 광화문광장 곁으로 공사장 같은 곳이 있는데, 옛 의정부 구역을 발굴조사하는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경복궁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박물관에서 본 그 콘크리트 말고, 제대로 된 재료로 복원한 광화문입니다.



 역시 경복궁은 다른 궁궐과도 차원이 다를 만큼 관람객이 많습니다. ㅡㅡ;



 정전인 근정전의 모습입니다. 이쯤이면 뭐 경복궁 구경 반 사람 구경 반이로군요.



 이곳은 수정전입니다. 이러저러한 용도 변화를 겪었는데 초기에는 집현전 건물로 쓰인 적도 있고, 조선 말에는 군국기무처가 이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특이하게 수정전 앞에서는 이런저런 공연을 하는 모양인데 이 날에는 무슨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계실 그 건물 경회루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통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지요.



 경복궁의 각 전각 사이를 넘나드는 문은 아무리 작아도 웬만하면 이름이 꼭 붙어 있습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각각 왕과 왕비의 침실로 쓰였습니다.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안내표지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이라고 묶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흠경각과 함원전은 경복궁에서도 상당히 용도가 독특한 공간입니다. 흠경각에는 장영실이 만든 시계인 '옥루'가 설치되었고, 그 일대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천문 관측기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곁의 함원전은 불교 관련 행사가 열린 곳이라는데 조선이 유교 국가였음을 생각하면 궁궐 내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게 상당히 독특하지요? 물론 태조나 세종, 세조 등 조선의 국왕 중에서도 불교를 존중한 사례는 꽤 있으니 말입니다.



 자경전은 대비의 처소입니다. 왕이 죽으면 왕비는 대비로 격상되면서 교태전을 새 왕비에게 넘겨주고 이곳으로 옵니다.



 경복궁 역시 어딘가에서는 항상 공사 중입니다. 열심히 복구 중이긴 하지만 경복궁은 그 자체가 워낙 넓다보니 ㅡㅡ;



 함화당, 집경당을 위시한 흥복전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저 두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어느새 경복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왔습니다. 이 집옥재는 딱 보기에도 아주 독특하게 생긴 건물인데, 벽돌을 사용하여 뭔가 중국적인 분위기도 나고, 하여튼 묘한 느낌을 줍니다. 이곳은 지금도 일반인을 위한 특강 같은 것들을 위해 활용이 되고 있으며, 블로거가 갔을 때도 무슨 강연을 한다고 그랬던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게 막아 놓았습니다.



 이곳은 건청궁인데, 특이하게 궁궐 내에 있음에도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비슷하게 지어졌으며 역시 단청이 없습니다. 고종이 왕실 사비로 건축하여 명성황후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입니다. 이곳을 나가면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읍읍읍



 다시 들어와서, 이번에는 태원전으로 이동합니다. 이곳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어서 찾아오는 관람객이 별로 없습니다. 답사 온 일행 중에서도 이곳까지 구경하러 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더군요.



 태원전은 왕의 장례를 위해 쓰인 공간입니다. 사진에 복도가 보이시지요?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고 일본군과 미군, 국군까지 번갈아가며 주둔하였다가 이들이 모두 철수한 2000년대 이후에야 다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경복궁 끝까지 갔으니 다시 돌아올 일만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풍기대는 저 위에 깃발을 설치하여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는, 일종의 기상관측 기구였습니다.



 이제 입구로 거의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옆으로 빠져서 아까 보지 않았던 동궁(東宮) 구역을 잠시 돌아보기로 합니다. 동궁은 세자가 거처했던 공간으로, 현재는 자선당을 비롯한 몇몇 전각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제 경복궁의 전각들은 거의 둘러본 것 같습니다. 이제 대전으로 돌아올 일만 남았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서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을 잠시 둘러보고 오기로 하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광화문 옆에 붙어 있고, 과거 국립중앙박물관의 임시 청사로 쓰기도 했습니다. 고궁박물관 답게 왕실 관련 물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협생문을 지나면 이제 모든 답사가 종료됩니다. 


 이번 서울 답사를 두고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은 수백 년 이상, 그리고 현재도 한국의 중심이며 당연히 역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서울의 역사적 흔적은 근대 이후 도시개발의 와중에도 상당 부분 보존되어 있고, 이를 돌아보는 데 2박 3일로도 턱없이 부족함을 절감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서울 답사가 어렵다고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은 정말로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해 꼭 돌아보아야 할 공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한정된 답사 기간만으로 서울의 역사를 보았다고 하기엔 부끄럽겠지만 그 조그만 한 구석이라도 목도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조금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실 아쉬움보다는 빨리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답사 인원들은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각자 다음을 기약하며......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년 추계답사 - 2일차 (2)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갈 길이 바쁩니다. 도중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도 잠시 들러서 관람을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근처에는 과거 서울에서 운행한 전차가 하나 전시되어 있습니다.



 길을 건너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웬 흰색 탑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곳입니다.



 아마 저 사진을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보신 분들도 있겠네요. 당연히 저 탑 하나만 달랑 있었던 건 아니고, 원래 이곳에는 꽤 큰 건물이 있었고 탑은 그 한켠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때 나머지는 다 박살나고 저 탑만 달랑 남아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러시아 공사관은 아관파천의 주무대입니다.



 여기서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정동거리인데, 이곳에는 옛 이화학당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그 옆으로는 이화여고 건물이 있는데 거기까지 갈 일은 없지요).



 이곳은 작은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나름 이화학당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만큼 들러서 관람할 만은 한 곳입니다. 참고로 여기는 처음 왔을 때는 입구가 반대편에 있어서 어디인지 헷갈립니다. ㅡㅡ;



 그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중명전. 이곳은 본래 덕수궁의 일부였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덕수궁 권역이 난도질당하고 쪼그라들면서 ㅡㅡ; 현재는 덕수궁 권역 밖으로 밀려난 건물입니다. 본래는 황제의 개인 도서관이었고,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로는 한동안 고종의 편전(집무실)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명전의 모습. 현재는 덕수궁과 떨어져 외롭게 놓여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에 있던 여러 서양식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곳이 한동안 황제의 집무공간으로 쓰였다 보니 본의아니게 역사적 대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 아래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명전의 전시는 대부분 을사늑약을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내부에는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인쇄해놓은 종이들과 거기에 대한제국 어새(御璽)를 찍어볼 수 있는 체험코너가 있습니다. 물론 이 친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실제 고종 황제의 어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쯤에서 나와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역시 정동거리는 볼 게 많은데, 중간에 있는 정동제일교회 역시 역사적으로 볼 거리가 됩니다만 무슨 공사를 하는지 밖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조금 더 걸으면 시청광장이 나옵니다. 생각하면 블로거는 1년 전만 해도 이곳으로 출퇴근과 통학을 매일같이 했는데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있는 그 많은 역사들을 그냥 지나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이제 시청광장 반대편으로 가면 요런 곳이 있는데,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현재 환구단으로 가는 출입구는 저기 있는 저 문이 아니라 그 오른쪽에 있는 샛길입니다. 어째 블로거의 기억에는 저 문 앞에서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매일같이 시위를 하던 게 기억나네요. 저기가 재능교육 본사 바로 앞이다보니......



 샛길로 들어가면 환구단 가는 길이 친절......한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약도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약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환구단의 '황궁우'가 나옵니다. 환구단은 원구단이라고도 하며 본래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 여러 건축물이 있었지만(본래 환구단의 본단은 황궁우 앞에 따로 있었음), 대한제국 멸망 이후 황궁우와 석고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철거되고 그곳에 호텔(現 조선호텔)이 지어집니다.



 황궁우 곁에 있는 석고단의 모습.



 이제 조별관람을 해야 하는 장소들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명동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중간에 봐야 할 게 또 있지요. 현재 신세계백화점 건물로 쓰이는 옛 미쓰코시백화점 건물과 그 옆에 있는 옛 조선저축은행(現 SC제일은행) 건물, 그리고 사진 이편에 있어 나오지 않은 옛 조선은행(한국은행) 건물입니다. 이곳은 밖에서 건물만 둘러보고 지나가기로 합니다.



 명동에서 점심식사. 다들 하루종일 걷느라 배가 고픈 김에 돈 좀 들여서 한식부페에 갔습니다.



 이제는 걷지 말고 전철을 통하여 이동합니다. 명동에서 4호선 전철을 타면 국립중앙박물관(이촌역)으로 바로 갈 수 있지요.



 이곳은 다시 단체관람(이래봐야 박물관 내에서는 또 자유관람이지만). 블로거는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데, 뭐 이거야 개인 취향의 문제인가 싶어 그러려니 합니다.



 역시 시작은 구석기시대부터 -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는 돌덩이 양쪽을 깨뜨려 만든 것으로, 당시 세계 구석기시대 연구에 큰 영향을 준 대발견이었습니다. 당시 전곡리에 애인과 함께 휴가를 나온 주한미군이 강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죠. 역시 연애는 좋은 것이다



 예전에 배로 쓰였을 나무조각도 있는데, 블로거의 짧은 식견에는 저걸 보고 어떻게 배의 흔적임을 알았을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빗살무늬토기야 뭐 모르시는 분 없으실 테고



 그리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농경무늬 청동기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저 크지 않은 공간에 농사짓는 사람의 모습 등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치



 호우명 그릇은 신라 경주에서 발굴된 주제(?)에 광개토대왕의 호칭이 새겨져 있어 주목을 끌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게 발견된 신라 무덤 '호우총'은 1946년 발굴되어 한국인이 직접 발굴한 최초의 유적입니다.



 신라 금관이야 당연히 빼놓을 수 없지요. 신라의 금관은 나뭇가지를 둘러 꽂아놓은 듯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북아시아(시베리아) 샤머니즘 문화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의 샤먼들이 나뭇가지를 꽂은 모자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의식을 거행하거든요.



 가운데의 로비에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우뚝하니 서 있습니다. 경천사는 본래 개성에 있었던 절인데,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 궁내대신이 한국을 방문했다가 이걸 보고 해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했고 ㅡㅡ; 이게 알려져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다시 한국으로 반환하여 경복궁 내에 재건해 놓은 것을 여기로 옮겼다는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려 이전의 유물 중에는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발해의 건축물에 쓰인 기와 중 하나. 크고 아름답습니다.



 아주 도발적인 자세와 큰머리 때문에 블로거의 눈길을 끌었던 불상.



 어느새 조선시대로 넘어왔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관람객을 반깁니다. 조선시대의 어진은 남아있는 게 몇 없는데,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 보관 중이던 어진을 포함한 많은 문화재들이 큰 화재로 대거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ㅡㅡ; 전북 전주에 있는 경기전에서도 조선시대 어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음악 취미 있는 사람이 이걸 빼먹을 수 없지요. 편경은 당시에 국악기의 음을 조율하는 기준악기였는데, 세종대왕은 편경의 소리를 듣고 아주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절대음감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못하는 게 뭐냐 당신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초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로, 자세히 보면 당시까지 한국인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세계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한중일 외에는 아주 조그맣게 압축되어 '이런 게 있다' 수준이긴 하지만 ㅡㅡ;



 코끼리 모양 도자기......라고는 한데 아무래도 코끼리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충 이야기만 듣고 상상으로 만든 녀석 같습니다. 뭐 한반도에는 예나 지금이나 코끼리가 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요~~~~~!!



 이제는 웬만큼 알려져 있지만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 목판을 불태우고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다는 말은 명백한 개소리입니다. 무엇보다도 대동여지도 목판이 다수 남아 있기 때문에 ㅡㅡ;



 백자는 참 간결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척화비와 당시의 조선 대포. 자주적인 모습이었긴 하지만 당시 저 대포로는 서양의 철갑선에 제대로 흠집 하나 내기 어려웠다는 근본적 한계도 있었습니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불교유물을 집중적으로 모아 놓은 전시관도 있습니다. 불상도 있고



 벽면에는 거대한 불화(佛畵)도 걸려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외국의 유물도 일부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약탈을 해 온 건 아닐테니 문제될 건 없겠지요. 인도와 동남아시아 쪽 유물도



 중국의 유물도



 일본의 유물도 있습니다.



 드넓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구름이 은은하게 낀 하늘이 예뻐 보이네요. 이것으로 2일차 일정도 모두 끝났고 블로거의 전화기에 있는 만보계는 이 날 하루 24,000걸음을 찍었습니다. ㅡㅡ;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년 추계답사 - 2일차 (1)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첫날 뒷풀이에서 뭐에 홀렸는지 술을 들이붓고 ㅡㅡ; 다음날 아침에 간신히 깨어 답사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서울의 아침 하늘을 오랜만에 보려니 기분이 묘하네요. 첫 번째 행선지는 덕수궁 단체관람입니다.



 덕수궁의 본래 명칭은 '경운궁'으로,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거처하면서 왕궁이 되었습니다. 광해군 때 이후로는 궁궐이란 이름만 붙었지 별 볼 일 없는 곳이었고,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온 고종이 이곳으로 돌아와 거처하면서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왜 하필 이곳이었냐고요? 덕수궁은 바로 근처에 외국 공사관들이 많이 있어서, 유사시에 몸을 피하거나 외국 외교관들과 교류하는 데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입니다. 본래 이 건물은 경복궁 근정전처럼 2층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1904년 덕수궁을 홀라당 태워먹은 큰 화재 이후 재건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대한제국의 사정이 좋지도 않았는데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다시 짓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중화전은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용상 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 구조나 장식들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중화전에 관한 간략한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마 덕수궁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물일 석조전으로 가 보겠습니다.



 석조전은 1910년 완공되었고, 말년의 고종이 생활하다가 고종의 승하 이후로는 박물관과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내부가 상당히 변형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2009년부터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했고, 2014년 완료되어 현재는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석조전 정면의 지붕 쪽에는 가운데 꽃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오얏꽃 문양입니다. 왜 오얏꽃이냐면 李(오얏 리)씨니까......



 석조전 앞으로는 연못과 실물인지 모형인지 모를 앙부일구가 놓여 있습니다.



 석조전 1층은 예약 관람을 해야 하고, 인원 수도 제한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지하층에 역사관이 마련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데, 이쪽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쪽으로 돌아가면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공간이 크지는 않지만 나름 볼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대한제국 군악대에 관한 영상을 한쪽에서 틀어주는데, 나름 군악대 출신인 블로거가 지나칠 수 없지요.



 대한제국 여권에 관한 설명인데 이 옆에는 당시의 방식으로 여권을 인쇄하고 도장까지 찍을 수 있는 체험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석조전의 역사와 복원 과정을 설명해 놓은 공간도 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중화전 앞쪽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저 때 블로거를 포함하여 답사 인원들이 집단으로 뭐가 씌었는지 정관헌 쪽을 보고 온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나중에 말을 좀 들었습니다. ㅡㅡ;



 중화전이 정전이니만큼 그 앞에는 문무 관료들이 품계별로 도열하는 공간도 있습니다.



 덕수궁 관람은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조별로 흩어져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관람을 해야 하는데 블로거의 조는 서대문형무소에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입구에 도착.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처음 건설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와 독재권력을 거치며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며 확장에 확장을 거듭, 거대한 규모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서울구치소는 경기도로 이전하였고, 이후 일종의 기념관+박물관으로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입구는 이렇게 한켠에 조그맣게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면 눈앞에 전시관 건물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이곳은 형무소 시절에는 본청으로 쓰였던 건물입니다.



 한창 때의 형무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현재의 역사관은 예전 형무소 건물 중 일부만 남겨 놓은 것).



 이곳을 관람하면서 상기하게 되는 것은, 서대문형무소는 단순히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독재시대에도 동일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구한말 항일의병장에 대한 판결문. 일본어로 쓰여 있는 게 보이시나요?



 이것은 수감자의 허리에 묶은 족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시관 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 벽에 있는 사진 하나하나는 이곳에 수감된 사람들을 기록한 관리카드로, 수감자의 이름과 신상정보, 수감일자, 사진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벽으로 다가가 저걸 하나하나 살펴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집니다.



 계속 관람을 진행하지요. 전시관에는 사형장 지하에 마련된 시신수습실 모형이 있는데, 실제 사형장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취조실은 사람 모형을 가져다 놓아 실감나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건 당시 일본군 헌병들이 들고 다닌 태(몽둥이)인 것 같습니다. 1910년대 한반도의 치안은 일본군 헌병이 담당했고, 그들은 즉결처분권태형 집행권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인을 말 그대로 두들겨패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하지요.



 취조 중 저질러진 고문에 관한 것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계속 자행된 일입니다.



 여기까지 관람하고 '중앙사'로 이동합니다. 중앙사는 옥사와 연결되어 수감자들을 감시 관리한 곳입니다.



 간부들이 차고 다녔다는 칼입니다. 권위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다니 역시 일본답네요.



 중앙사는 말 그대로 '파놉티콘'을 현실화해 놓은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가운데 한 명만 있으면 모든 옥사를 한꺼번에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옥사 내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볼 수도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상호간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필요할 때는 별별 기발한 방법을 다 활용했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벽을 두드려 (아마도 모스부호처럼?) 의사소통을 하는 '타벽통보법'이라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용변 배출구'라고 합니다. ㅡㅡ;



 옥사의 다른 방에는 이곳에 수감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 시기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고초를 겪은 재일교포들의 사례도 있고



 이곳에 수감된 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에 대한 소개도 되어 있습니다.



 옥사 관람은 여기까지 하고 '공작사'로 이동합니다. 이곳은 수감자들이 노역을 하는 곳이었는데, 물론 노역 자체는 현재 징역을 사는 사람들도 하는 것이지만 이게 조금만 삐딱해지면 그야말로 노동착취가 되지요. 북한 : ????



 이쯤에서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습니다(서대문형무소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도 그만큼 볼 게 많습니다). 이곳은 빨래터로 활용된 사각연못인데, 초기에는 옆의 공작사처럼 수감자들이 노역을 하는 공장이 있었다는군요. 왼쪽 위로 올라가면 한센병 환자들이 수감된 '한센병사'가 있는데 여기는 시간이 없어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형무소 건물에 걸린 대형 태극기는 어딘가에서 많이들 보셨을 장면 같네요.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사형장을 지나칠 수는 없지요. 한국은 현재 실질적 사형 폐지국가이지만 형무소가 운영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사형장 내부의 모습. 가운데의 공간에서 사형수가 교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 앞의 의자와 테이블은 아마 사형 집행 전에 유언을 남긴다든지 하는 절차가 이루어진 공간이겠지요? 이곳은 안에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관람을 해야 합니다.



 사형장에서 나와 이동하는 길. 이곳도 본래는 옥사였다는데 지금은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이렇게 길 주변으로 벽돌만 남아 있습니다. 벽돌에 '京(서울 경)'자 마크가 찍혀 있는데 이곳(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만들어진 벽돌에 찍힌 낙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독특한 공간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요?



 이곳의 명칭은 '격벽장'으로, 수감자들이 정기적으로 운동(Sports)을 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도 수감자들이 서로 얼굴 마주치지 못하도록 각 공간을 벽으로 막아 놓고, 공간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가운데에서 간수가 모두를 동시에 감시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역시 파놉티콘의 위엄이란......ㅡㅡ;



 이제 나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 외에도 더 관람할 곳이 남아 있습니다만 일정상 장소를 이동해야 하는 게 단체 답사의 한계라면 한계인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나가는 길에 해체되어 밖에 놓여 있는 형무소 건축물 부재들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동합니다. (계속)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7년 추계답사 - 1일차

일시 : 2017. 9. 25. ~ 27.

답사지역 : 서울특별시



 2017년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의 추계답사 지역은 서울특별시입니다. 서울이 오랜 기간 수도로 기능하였고 답사할 역사적 요소 또한 풍부하긴 하지만, 역사교육과 역사상 과 출범 초기에 한 번 다녀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사례가 없었을 만큼 서울 답사는 준비에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숙소 잡는 문제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운 좋게도 괜찮은 숙소를 서울 시내에 잡게 되어 성사될 수 있었다는 후문입니다.



 그렇게 2박 3일간의 서울 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전 오랜 기간 서울을 터전으로 살다가 이제는 '답사'하러 방문하는 입장이 되니, 기분이 묘하네요.



 숙소에 짐을 놓아 두고 본격적으로 답사 일정을 진행합니다. 첫 순서는 사직단으로,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이곳은 북신문으로, 현재는 사직단 구역 내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대문은 이게 아니고 다른 쪽에 있습니다(본래의 대문은 현재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직단 내부 구역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실제 사직단의 핵심 구역은 저 앞에 있는 작은 담장과 홍살문 안쪽인데, 이곳은 현재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관람객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담장 너머로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중심에는 단이 두 개 있는데, 각각 사(社, 토지의 신)와 직(稷, 곡식의 신)에게 바치는 제단입니다(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 사직단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되었다가(사직을 끊는다는 의미였다고 하네요) 1980년대 말 복원사업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직단에서 조금 일찍 빠져나와 다음 장소로 향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답사는 조금 특이하게, 조별로 나누어 정해진 시간 내에 대상 장소들을 자유롭게 찾아다니며 관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물론 시간 맞추어 단체관람하는 곳도 있고요).



 다음 장소는 종묘입니다. 표지판에 세계유산이라는 문구가 자랑스럽(?)게 박혀 있네요. 종묘는 매주 토요일을 제외한 날에는 자유관람을 할 수는 없고, 정해진 시각(대략 1시간마다)에 함께 입장하여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단체관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한 시간 뒤에 관람할 것으로 시간이 짜여 있었는데 조금 빨리 움직인 덕에 아슬아슬하게 앞 조와 함께 관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입구로 들어가면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종묘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해설사께서 신신당부하는 사항으로, 입구에서 뻗어 있는 저 돌길의 가운데 부분은 신로(神路)이며 임금조차도 함부로 밟으면 안 되는 부분이니, 관람 시 절대 밟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끔 저기를 밟고 다니는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이를 설명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는군요. ㅡㅡ; 관람 시 주의합시다.



 종묘의 구조는 대략 저렇게 생겼습니다. 가운데 정전의 미친 존재감(?)이 눈에 띄는데, 실제로 정전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길이가 긴 목조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합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해설사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십니다. 여긴 어디에 대한 설명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곳은 재궁(齋宮)으로, 왕과 세자가 제사를 준비하고 목욕재계를 하는 곳입니다. 사진에는 건물 하나만 나와 있는데 실제로는 총 세 채의 건물이 있습니다. 각각 왕이 있는 곳, 세자가 있는 곳, 그리고 목욕을 하는 곳이라는군요.


 그리고 대망의 정전으로 이동합니다. 어찌나 큰지 한 컷에 다 찍기도 어렵습니다. ㅡㅡ; 본래 정전은 저렇게 큰 건물이 아니었지만, 조선왕조가 오래 이어지면서 왕이 죽을 때마다 건물을 증축하여 신위를 새로 모시는 통에 저렇게 긴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가 신라만큼 오래 갔으면 종묘 담장을 뚫고 나갔을 듯 다만 조선왕조의 모든 왕이 여기 모셔진 것은 아닌데



 정전에 모실 만큼의 포스(?)가 없는 왕들을 이웃한 영녕전에 모셔 놓았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재위기간이 짧은 왕(정종, 문종, 단종 등), 생전에는 왕이 아니었다가 사후 추존된 왕(덕종, 장조 등)이 여기 해당됩니다. 영친왕(의민황태자) 부부의 신위도 이 곳에 모셔져 있다는군요. 물론 아예 왕 지위를 박탈당하고 복권되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기에도 없습니다.



 블로거는 크고 아름다운 정전보다는 영녕전이 더 좋게 느껴집니다. 뭔가 훨씬 인간미 나고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영녕전까지 관람을 마쳤으면 이제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전체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종묘는 넓은 부지에 비해 건물은 많지 않아서, 곳곳에서 이런 녹지를 볼 수 있습니다.



 종묘를 나오니 점심시간이 되어, 조원들과 함께 근처 칼국수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까지 시간에 여유가 좀 있어서, 가는 길에 있는 인사동 쌈지길 구경을 하기로 합니다.



 생각해 보니 블로거는 서울에 살던 시절에도 쌈지길에 와 본 적은 없습니다(인사동에는 몇 번 왔지만). 정작 서울을 떠난 이후에 처음으로 와 보게 되네요. 블로거는 여기서 자잘한 물건들을 넣고 다니기 위해 작은 가방을 하나 샀습니다. 가격이 어땠냐고는 묻지 맙시다



 가는 길에 운현궁도 있어서 (답사 일정에는 없지만)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기휴일. ㅡㅡ;



 첫날의 마지막 순서는 국립민속박물관입니다. 쌈지길에서 어떤 가게에 답사자료집을 두고 오는 바람에 중간에 택시를 타고 다시 갔다 오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ㅡㅡ;



 블로거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하단부는 쓸데없이 위압적으로 지어 놓은데다 위쪽은 목탑 양식(저게 법주사 팔상전을 본따 지었다던가요 아마)을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들어 그렇습니다. 실제로 건축가들이 뽑은 <해방 이후 최악의 건축물> 목록에도 순위권에 들었을 만큼 논란이 많은 건물입니다.



 심지어 입구 로비에는 저 요상한 조형물을 설치해 놓아 그 위화감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ㅡㅡ; 연꽃 모양인 주제에 색은 시꺼멓고, 심지어 저게 주기적으로 쭈뼛 섰다가 늘어졌다를 반복해서 일종의 공포감까지 줍니다.



 그래도 내부 전시물들은 괜찮습니다. 농경무늬 청동기라든지



 별자리 지도도 있고



 그림이 그려진 병풍도 있으며



 풍물 악기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관람을 마치고 나면 입구 쪽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아까의 그 괴물같은 조형물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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