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ハイサイおじさん(하이사이 오지상)>은 오키나와 출신 싱어송라이터 키나 쇼키치(喜納昌吉)의 데뷔작으로, 1977년 발표 이후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며 '우치나(오키나와) 팝'의 선두주자로 인정받게 된 노래입니다. 오키나와 전통음악 특유의 '류큐 5음계(도-미-파-솔-시)'를 사용하고 있으며, 표제의 의미는 '안녕하세요('하이사이'는 오키나와 어 인사말) 아저씨' 정도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 전체적으로 흥겨운 곡조를 띤 이 노래는 어느 소년과 아저씨가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내용의 가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자는 이 노래에 얽힌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오키나와 출신인 작자의 집 옆에는 오키나와 전투 때 충격을 받고 정신 이상이 된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신 착란을 일으켜 자신의 어린 딸을 목졸라 죽이고 그 시신을 냄비에 넣어 요리를 하고 있었더랍니다.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면서 마을 전체가 뒤집어졌고, 그 아주머니는 어딘가로 끌려갔으며(아마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아주머니의 남편이 이 광경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이 되어버렸다고 하지요.

 - 이후 그 남편은 옆집에 계속 살면서 작자의 집에 술을 얻어먹으러 오곤 했는데, 딱한 사연을 알고 있던 작자의 집안에서 그 남편을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가사는 이 때 소년이었던 작자 자신과 술을 얻어먹으러 온 그 옆집 아저씨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그저 흥겹고 신나기만 한 이 노래에는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잊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던 지금까지의 역사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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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夜(ゆうび)ぬ三合ビン小(ぐゎ) 残(ぬく)とんな
残(ぬく)とら我(わ)んに 分(わ)きらんな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三合ビンぬあたいし 我(わ)んにんかい
残(ぬく)とんで言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三合ビンし不足(ふずく)やみせぇーら
一升(いっす)ビン我(わ)んに 呉(くぃ)みせー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夕べの三合ビンは残っとるかぁ~?
残っとったらワレに分けてくれんか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三合ビンの量をワシに
残っとるか聞いとんのかい。えィ小僧

小僧:
あのなぁ、おじさん。三合ビンで不足ちゅうなら
一升ビンをワレくれるとでも言うんなぁ~ 

2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とぅしぐる)なたくと 妻(とぅむ)小(ぐゎ)ふさぬ
うんじゅが汝(いやー)ん子(ぐわ)や  呉(くぃ)みそうらに
ありー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童(わらばー)ぬ くさぶっくいて
妻(とぅむ)小(ぐゎ)とめゆんな  いぇー童(わらばー)
あんせおじさん 二十や余て三十過ぎて
白髪(しらぎ)かみてから 妻(とぅむ)とめゆみ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年頃だで女房が欲しいんだけど
おじさんの娘をくれないかい?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小僧の癖しやがって
女房を娶ろうってか、えィ小僧

小僧:
それならおじさん。二十三十過ぎて
白髪になって女房を娶れってか。

3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カンパチ まぎさよい
みーみじカンパチ 台湾はぎ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頭(ちぶる)んはぎとし 出来やーど
我(わ)ったー元祖(ぐゎんすん)ん むる出来やー
あんせおじさん 我(わ)んにん整形しみやーい
あまくまカンパチ 植(い)い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ハゲはデッカイねぇ
ミミズハゲだど 台湾ハゲ~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禿とるもんは出来がええのよ。
うちの先祖もものすごう出来が良い。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ワレも整形してみるわ
あっちこっち、ハゲをこさえてやろうかよ

4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ヒジ小(ぐゎ)ぬ をかさよい
天井(てぃんじょ)ぬいぇんちゅぬ ヒジどやる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汝(いやー)やヒジヒジ笑ゆしが
ヒジ小(ぐゎ)ぬあしがる むてゆんど
あんせんおじさん 我(わ)んにん負きらん明日(あちゃー)から
いぇんちゅぬヒジ小(ぐゎ) 立てゆがや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おじさんの髭っておかしいわ。
天井ネズミの髭みたいやなぁ~。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前は髭を笑うけど、
髭があるからモテるんよ。

小僧:
あのなおじさん。ワレも負けとれん明日からは
ネズミ髭でも生やしょうわい。

5절 :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昨日ぬ女郎(じゅり)小(ぐゎ)ぬ 香(か)ばさよい
うんじゅん一度 めんそーれー
ありあり童(わらばー) いぇー童(わらばー)
辻、中島、渡地とぅ
おじさんやあまぬ 株主ど
あんせんおじさん毎日(めーなち)あまにくまとして
(※)
我(わ)んねー貧乏(ひんすー)や たきちきゆみ 

※我んねちゅらーさよーがりゆさ(わたしゃはきれいに痩せるわね)
 汝やちゅらーくよーがりゆさ  (おまえさんきれーに痩せられるさ)

小僧:
ハイサイおじさん  ハイサイおじさん
ゆんべのお女郎はかぐわしかぁ~。
あんたも一度はやっかいになったら?。

叔父さん:
おいおい小僧、えィ小僧
おじさんは辻、中島、渡地(遊郭地)の大旦那よ。

小僧:
そんならおじさん。毎日遊郭にいりびたり
ワレも貧乏なってみようか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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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궁금하신 분께서는 이곳의 댓글을 참고하세요.##

 - 이 노래는 오키나와 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상징하는 노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시엔 야구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역 학교의 응원단이 줄곧 이 노래를 응원가로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키나와 지역은 1972년 다시 일본 영토로 바뀌어 현재에 이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현재, 오키나와는 순조롭게 일본의 일부로 녹아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 2010년대에 와서도 오키나와 현이 일본의 많은 도도부현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도 가장 높은 지역으로 남아 있으며, 주일미군 문제에 있어서 오키나와 섬이 계속 독박을 쓰고 있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딱히 나아진 것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 오키나와 인의 자기 정체성은 상당히 미묘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본인임을 인정하지만(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오키나와인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상당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들은 방송에서 기미가요(일본의 국가(國歌))를 부르지 않으며 간혹 부르는 사람은 오키나와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現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비록 당세는 크지 않지만) '류큐 독립당'이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주민이 오키나와 독립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일본 반환 이후 오키나와 지역의 핵심 과제는 미군기지의 이전 문제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현 전체 면적의 19%를 차지하는 미군기지를 현 밖으로 이전할 것을 꾸준히 요구해 왔고, 일본 정부는 이를 묵살하다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간신히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정권은 다시 자민당에게 넘어갔고, 모든 것은 다시 원위치로......


 - 결국 자민당 소속인 현지사(한국으로 치면 도지사)가 일본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지를 현 내부로 이전할 것을 추진하자, 오키나와 주민들은 2014년의 지사 선거에서 반대파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후보를 상당히 큰 표차로 선출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이 문제는 현지사에게 그리 큰 권한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


 - 미군 기지가 현내로 이전할 경우 후보지는 오키나와 섬 중부의 헤노코 해변인데, 이 곳에서는 기지 이전 반대시위가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위측에서는 아예 반대시위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서, '헤노코 시위현장 방문 코스'라든지 '반대구호 부착을 조건으로 한 무료 카누 체험'이라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헤노코의 투쟁은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도 참고가 되고 있다는 뒷이야기 또한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정치적 여론이나 지형에 있어서 오키나와 현 내에서도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 지역간의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앞에서 말한 '인두세' 등의 역사적 문제, 그리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본섬 외에는 대량학살이 발생한 곳이 없었다는 사정이 더해져 두 지역간의 정치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섬을 제외한 곳에서는 현재도 자민당이 강세이며, 오키나와 전투에 대하여도 일본 본토에 상당히 우호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새역모>의 극우 성향 교과서를 채택한 곳이 있을 정도.


 - 이것만 해도 오키나와의 사정은 상당히 복잡한데, 최근에는 조어도(센카쿠 열도) 문제와 관련하여 난데없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의 주장은 오키나와 주민들조차도 철저히 무시할 정도로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중국이 내세우는 이유라는 게 류큐 왕국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번속국(藩屬國)이었다는 것이니 오키나와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오히려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이 논리가 발전하면 과거 중국과 조공무역을 하던 주변의 모든 국가에 대한 정치적 압력 행사로 이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곳에 사람이 사는 이상 계속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역사에 주민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라는 두 글자가 새겨질 날은 과연 언제쯤에나 찾아올까요.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 현재의 착취자가 사라지면 그래도 무언가 나아질 거라며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누가 그들을 착취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임은 머지 않아 드러납니다. 일단 본섬 외의 주민들에게 징수하던 인두세는 류큐 처분 이후에도 190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됩니다. 새로운 착취자인 일본 정부는, 수백 년간 유지된 주요 수입원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 한편 본섬과 주변 지역을 막론하고 실시된 것이 바로 가혹할 정도의 동화정책, 아니 '문화 말살' 정책입니다. 전통적인 류큐 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그 자리에 표준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이루어졌고,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한 류큐 왕국의 흔적은 방치되고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식 성씨로의 '창씨개명'을 강요당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지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에게는 식민 지배의 연습장이었던 셈입니다.


 - 명목상 일본 내 행정구역, 실질적 식민지,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은 어김없이 불어닥칩니다.


 - 미국에게 강력한 선빵(진주만 공습)을 한 방 날린 일본군은 잠시간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전쟁모드로 돌입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태평양 절반을 차지한 판도를 급속도로 잃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시피하던 일본 군부는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 이후로 일본의 지상과제는 '어떠한 피해도 감수하고 천황(과 지배계급)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는 상관없이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최대한 꺾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 이를 위하여 일본군은 본토와 주변의 주요 점령지를 온통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갔고, 몇 년간 일본군을 '사냥'해오던 연합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피해가 커질지언정 승패에는 변동이 없었고,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 본섬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은 이미 일본군과 주민의 강제동원으로 섬 전체(특히 인구가 밀집한 남부지역)가 요새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일본군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안 방어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지라, 매우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이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느니 자결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들을 일회용 자살병기로 써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임산부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연합군에게 자살돌격하도록 한다거나......


 - 일본의 철저한 세뇌교육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연합군에 항복했다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한다'는 인식을 심어놓았고,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항복할래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섬 곳곳에서 학살 뿐만 아니라 집단 자살도 예사로 벌어집니다. 주민들은 연합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명예롭게 죽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습니다.


 - 연합군은 곳곳에 산재한 참호와 동굴을 점령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독한 연막탄까지 동원해야 했고, 결국 일본군의 모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거의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1만2천명, 일본군 사망자는 6만5천명(미국측 추산),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는 12만명(일본측 추산)에 달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3~40만명 정도였습니다.


 - 다수의 일본군과 자신들의 식민지를 희생하는 대가로 일본은 그들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질려 다음 계획이었던 본토 침공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는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대체됩니다. 20만명의 사망자와 이를 능가하는 방사능 피폭자를 더한 끝에 일본은 항복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상당수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인구의 1/3이 사망한 오키나와는 그대로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군 기지로 만들어갔습니다. 일본군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제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미군 전투기의 비행 소음을 매일같이 듣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미군기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악마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고, 이 말을 듣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리는 악마가 되기 싫다'며 마찬가지로 치를 떨었습니다.


 -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다시 일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섬의 미군기지만큼은 떠나는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위 '오키나와 반환'이란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그저 지배자가 바뀐 것, 아니 어쩌면 지배자가 둘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속)



 면적

 2,276.49 ㎢

 인구

 1,416,587 명 (2013. 10. 1.) 

 현청소재지

 나하 시 


 - 오키나와(沖縄) 현은 일본 남부의 류큐(流球) 제도의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지역입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본토보다는 오히려 타이완 섬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있으며,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하여 북쪽으로 올라오는 태풍의 주요 통과지점이기도 합니다(아마 여름철 태풍예보에서 "지금 태풍의 위치는 오키나와 남동쪽~"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외에서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라는 데서 짐작이 가능하지만, 오키나와는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가 공식적으로는 1879년, 비공식적으로는 1609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류큐 왕국은 그 이전 시대에 3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류큐 섬이 쇼(尙) 씨가 지배하는 추잔(中山)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되면서 성립되었고, 초기 불안정한 시대를 지나 16세기경에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동아시아 각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 하지만 그 전성기는 별로 길지 못해서, 16세기 후반 명,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이 동아시아 무역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나라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 일본 본토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 현)의 군대가 침략하는 것을 막지 못하여 일본(정확히는 사쓰마 번)의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다만 사쓰마 번은 류큐 왕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중국으로의 조공이 막혀 곤란에 처해 있던 일본은, 역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던 류큐를 이용하여 중국과 간접적으로 조공 무역을 할 요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산 사치품은 일본 지배계급을 회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은 류큐가 조공을 통해 사치품을 확보하면 이를 가로채는 방법으로 수요를 해결했습니다.


 - 류큐의 이점은 또 있었는데,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 중에서 사탕수수 농업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확보하면 설탕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사치품인) 설탕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류큐를 직접 통제하는 사쓰마 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이 유신시대 사쓰마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 류큐는 일본의 사탕수수+사치품 셔틀로 전락하게 되었고, 일본 본토의 착취와 무역 금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빠진 류큐 왕조는 결국 '세금'을 통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류큐 왕조는 류큐 본섬 이외 주변의 다른 섬들(북부의 아마미 제도는 아예 사쓰마 번에 편입당했으니 빼고)를 더 가혹하게 착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되죠. 다단계 착취......쯤 되려나?


 - 이들 섬들(야에야마라든지, 구메지마라든지 하는 지역)에 류큐 왕조는 '인두세'를 매깁니다. 즉 사람 수대로 세금을 매긴 것인데, 이 세금이 가혹했던데다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어린이나 노인에게까지 인두세가 매겨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는 세금이 매겨지는 사람의 머릿수를 줄여가며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불필요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세금을 줄인 거죠.


 - 이런 '독립국이지만 독립국이 아닌' 상태가 이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드라이브를 밟고 있던 일본이 이 틀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수준을 목표로 하던 일본은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지역의 식민 지배를 꿈꾸게 되었고, 그 테스트 무대로 이미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류큐를 선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명목상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이중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은 두 단계에 걸쳐 류큐를 멸망시킵니다. 이를 '류큐 처분'이라 합니다.


 - 1차 류큐 처분은 1872년, 류큐를 일본의 일개 번(藩, 영주가 통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격하시키고, 류큐 왕을 '류큐번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얼마 후 타이완 섬에서 류큐 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일본에서는 이를 핑계로 군대를 출병시켰는데, 중국에서 타이완 침공에 대응하는 것 이외에 류큐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 정부는 1879년, 류큐 번을 폐지하고 (잠시 가고시마 현에 편입했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2차 류큐 처분입니다.


 - 당시 류큐 처분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이었는데, 이전에 함포외교를 통해 류큐를 강제개항시킨 바 있는 미국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 전(前) 대통령을 중국으로 파견하여 이를 막아보려 노력하지만 정작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고, 류큐의 일본 편입은 어영부영 확고한 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 흥미롭게도, 류큐 처분에 대하여 류큐 본섬 이외의 지역은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상술했다시피 류큐 왕조에서 강요하는 '인두세'가 이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고, 이들의 노력이란 세금 명세서나 다름없는 사람 수를 줄이기 위해 임산부를 죽인다거나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자가 바뀌는 것을 환영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합니다. 적어도 인두세를 낼 필요는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 과연 이들의 작은 소망은 실현될 수 있었을까요? 오키나와의 끔찍한 역사가 이제 시작에 불과했음은, 시간이 지나며 명백해지게 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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