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기관총이 개발되기까지


 - '기관총(Machine gun)'이란, 다수의 탄을 총 안에 담아두고 총알을 장전, 발사, 탄피 배출, 재장전까지 완전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기관'이 달려 있는 총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는 요즘 총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에(흔히 말하는 자동소총이라든지), 이런 총이 일반화된 현대에는 '수백 발 이상의 총알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고도 총이 무사할 수 있는' 특정한 부류의 총을 일컫는 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 총알을 빠른 속도로 연달아 발사하는 무기는 총기류의 발명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왔습니다. 초기의 화승총은 총알과 화약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아직 총알을 자동으로 장전하고 발사하는 기술적 바탕이 없었기 때문에(이를테면 '탄피'가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산탄포를 쏘거나 여러 개의 총열을 묶어놓는 식으로 문제를 보완하려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중국과 조선에서 쓰인 삼안총(三眼銃)이라든지.


[삼안총]


 - 19세기 초중반 발명된 탄피는 기관총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문제를 해결시켜 주었습니다. 총알과 화약이 일체화되면서 총알을 장전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총알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발사하기도 한결 쉬워졌으니까요.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세기 후반에는 기관총의 할아버지 쯤으로 불리는 두 총기가 등장합니다. 미트라예즈(Mitrailleuse)와 개틀링(Gatling)입니다.


[미트라예즈에 총알 장전 중]


 - 미트라예즈는 1851년 벨기에에서 개발되었고, 개틀링은 1862년 미국의 리처드 개틀링(1818-1906)이 발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총열을 사용한다는 기존의 개념을 답습하고 있지만, 기계적인 구조를 채용하여 본격적인 연사(連射)가 가능하도록 한 최초의 무기입니다.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기관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개틀링의 경우 분당 1200발(개량형 기준)까지 발사가 가능할 정도였다니 기관총의 위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1874년식 개틀링의 구조]


 - 마침내 1883년 미국 출신 영국인 하이럼 맥심(1840-1916)이 진정한 의미의 '기관총'을 최초로 발명해냈습니다. 맥심은 '총을 발사할 때의 반동'을 가지고 총알을 재장전해보자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으면 알아서 장전과 발사와 재장전이 반복되는 현대 총의 구조를 최초로 구현했습니다. 이후 그가 만든 개념은 기관총 뿐만 아니라, 소총을 비롯한 개인화기 전체에 적용됩니다.


 - 그런데 기관총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하나 있었으니, 총알을 연속으로 발사하다보면 자연스레 총열이 너무 뜨거워지고(그야 화약이 계속 '폭발'하는 것이므로), 이는 쿡 오프(사용자의 뜻과 관계없이 총알이 발사되어버리는 것) 문제라든지 총열의 변형이라든지 하는 여러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렇다고 개틀링처럼 총열 자체를 여러 개 달아놓으면 총이 너무 무거워지므로, 뜨거워진 총열을 냉각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됩니다(맥심 기관총의 경우 수냉식 냉각 시스템을 가지고 있음).



2. 제국주의 침략의 치트키(?)가 되다


 - 기관총은 등장하자마자 세계 역사를 뒤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총기류는 빠른 사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칼과 창, 활만으로 총에 대항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좀 많이 죽을 각오를 하고 압도적인 수로 달려들면, 제아무리 훈련된 총병이라도 버틸 수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고, 식민지 경영도 대부분 해안의 항구도시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 그런데 기관총은 (총알을 쏜다는 점만 같고) 전혀 다른 개념의 무기. 좁은 공간에 총을 난사하는 것이니, 그 공간에 사람이 밀집할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칼이나 창을 들고 밀집대형으로 쳐들어오는 원주민들을 기관총으로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밀림과 사바나를 탐험하던 몇 명 혹은 몇십 명의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잡기 위해 몰려오는 수백이나 수천 명의 원주민들을 기관총 한두 정으로 박살내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 남의 이야기 같지요? 1894년 제2차 동학전쟁에서 딱 이런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2만 명을 넘는 동학군은 충청도 공주를 목표로 진격했고, 도중 우금치 고개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기다리던 5천여 명의 관군+일본군 콤보에 말 그대로 학살을 당합니다. 당시 동학군의 전법이란 밀집대형을 갖추고 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었으니, 기관총에는 말 그대로 밥이 될 수밖에요.



[ 우금치 전투 기록화. 안타깝지만 이래서는 차라리 전투보다 학살이라고 봐야겠죠]


 - 이제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략은 해안을 넘어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물론 이에는 밀림의 전염병을 이겨내게 해 준 의학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존의 무역 거점을 넘어 대륙 전체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완성된 것은 20세기 들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누가 더 많이 갈라먹을까'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한판 붙었던 '파쇼다 사건'이 1898년에야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 이렇게 기관총(과 의사와 선교사)을 앞세워 유럽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관총이 원주민이 아닌 유럽인 자신들을 향해 사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 생각을 충분히 해본 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 제1차 세계대전 : 그리고 스스로를 학살하다


 -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발전한 무기체계가 전쟁의 양상을 바꿀 것이라는 조짐은 있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은 수동식 기관총 등의 연사화기가 최초로 사용된 전쟁이었고, 남북 모두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기존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낳았습니다. 무기의 살상력이 높아지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지고, 이 병력이 더 강력한 무기에 몰살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각국은 전쟁 한 번 이기려고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하게 되었습니다(이를 '총력전'이라 합니다).



[전쟁 양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피켓의 돌격'.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조지 피켓(1825-1875) 지휘하의 남부군은 방어라인이 갖추어진 북부군 진영으로 착검 돌격하였고, 한 시간 남짓만에 약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유럽의 전술 또한 기본적으로 전근대적 밀집대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술했듯이 기관총은 적이 밀집해 있을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데, 적의 (부정확한) 포화에 '쫄지 않고' 밀집대형으로 적진 앞까지 전진하여 백병전을 치르는 19세기 유럽 군대의 전술은 기관총 앞에서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남북전쟁을 비롯한 몇 차례의 전쟁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유럽인들은, 1914년부터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처참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몇 달 사이에 끝날 것이라 장담하던 전쟁은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동맹측과 협상측 양쪽에서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방어라인을 구축하면서 역사상 유례 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 길고 복잡하게 뻗은 참호의 최전방 요소에는 어김없이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참호 점령을 위해 돌격하는 적군을 몰살시키는 역할을 지나치게 잘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유럽 군대의 기본전술은 밀집대형으로 착검 돌격이 다였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보다도 멍청한 상황. 결국 협상측과 동맹측은 적군의 기관총에 수없이 많은 생명을 갖다바치는 짓거리를 3년 이상이나 계속하게 됩니다.


[방독면을 쓴 기관총 사수들]


 - 결국 유럽 열강은 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나서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게 됩니다. 총알을 막고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전차(탱크), 그리고 병사의 전투력을 소리없이 무력화할 수 있는 독가스의 등장으로 비로소 전쟁의 모습은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관총의 효용성은 그 이후에도 죽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에서도 기관총은 다양한 형태로 개량되며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4. 결론 : 진정한 제국주의 무기, 최초의 대량살상무기


 - 기관총은 유럽 제국주의가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요소 중 하나입니다. 유럽인들은 기관총을 들고 어디로든 쳐들어갔고, 그 각각의 지역에서 수많은 원주민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이후 그 지역을 점령하고 수탈하였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인이 원주민에 대해 가진 우월의식은 상당 부분 이 기관총에서 비롯하였고, 이를 풍자한 노래가 있었을 정도입니다.


"전진하라 명받은 병정들아 이방인의 땅으로 가자 / 기도서는 네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총을 쥐어라 / 그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좋은 소식과 / 널리 평화의 복음을 전하라 / 맥심 기관총을 가지고서 // 가련한 원주민들에게 말하라 / 그들이 얼마나 죄지은 모임지 / 그들의 이방 사원을 / 영혼의 장터로 돌려놓자 / 만약 그들이 네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 이방 원주민들에게 맥심 기관총으로 설교하라 // 이방인들이 십계명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 그들의 추장을 꾀어 그 땅을 손에 넣어라 / 혹여 그들이 미혹되어 그대에게 설명을 원한다면 / 다시 산 위에서 맥심 총으로 설교하라" <Onward Chartered Soldiers>. 찬송가 <Onward Christian Soldiers>를 개사


 - 하지만 재미있게도, 혹은 안타깝게도 이방인을 학살하는 데 쓰인 기관총은 나중에는 유럽인 자신을 학살하는 데 더 효율적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에게 '총으로 흥한 자는 총으로 망한다'는 준엄한 교훈을 주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유럽은 20년 후 한 차례의 세계전쟁을 더 치르고 나서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사망자는 대부분 참호전의 전사자 (출처)]


 - 이후에도 기관총은 세계 각지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기술 발전에 따라 활용도는 오히려 증가하여 이제 소형 기관총은 분대급 지원화기로까지 쓰일 정도입니다(대한민국 국군 기준). 유럽에서는 더 이상 기관총이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지만, 아직 세계 각지의 전장에서 기관총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라는 기관총의 악명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의 결과 핀란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내전을 수습하고 이후 스탈린 지배체제에서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떠오른 이후, 소련은 핀란드를 비롯해 혁명기에 '상실'한 옛 제국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 1930년대 후반 이후 가속화된 나치 독일의 폭주가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처음에는 적대 관계였지만(나치 독일은 반공국가), 세력 확대에 대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이 조약에서는 동부 유럽의 분할에 대한 합의가 들어있었습니다.


 - 소련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자 서둘러 조약에 명시된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손을 잡았지만, 분명 서로를 장래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유리한 고지를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동유럽 쪽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하기 무섭게 소련 역시 자신들의 몫을 뜯어먹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죠.


 - 그렇게 소련은 폴란드 동부(현재의 벨라루스 일대)와 발트 3국을 무력 점령합니다. 이 지역은 러시아 혁명 이후 신생 소련을 떠나 독립한 곳입니다. 이 지역을 점령한 소련의 다음 타겟은, 역시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영토였던 핀란드였습니다.


 - 장차 독일이 북유럽 쪽으로 침공해 올 가능성에 대비해서라도 소련은 핀란드 지역을 점령해 둘 필요가 있었죠. 소련은 먼저 발트 3국에서 한 것처럼, 군사력을 등에 업은 굴욕적 방위 조약(영토 할양, 발트 해 연안 항구들의 조차 등)을 핀란드에 요구하지만 핀란드는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 이로써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되었고, 침공의 구실이 필요했던 소련은 국경 지대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에게 발포했다고 주장하며(이는 훗날 날조된 것으로 판명) 1939년 11월 29일 외교 관계를 단절, 곧바로 그 다음날 23개 사단, 46만 명의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으니 이것이 바로 '겨울 전쟁'입니다.


 - 소련군은 단숨에 핀란드의 방어선인 '만네르하임 선'까지 밀어부쳤고, 점령지의 한 마을에서 오토 빌레 쿠시넨을 수장으로 하는 괴뢰 정부를 수립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신속하게 밟아나갑니다. 하지만 스탈린과 소련이 간과한 사실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대숙청'의 여파였습니다.


 - 1930년대 내내 소련을 뒤흔든 대숙청은 소련 군부에서는 상당히 늦게서야 시작되었지만, 그 상처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크게 남았습니다. '종심 이론'의 창시자인 투하쳅스키 원수(그는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과 악연이 있어 사이가 나빴음)를 비롯하여, 소련의 군사 이론을 주도하던 고위 장교들이 대부분 숙청당한 것입니다.


 - 이후 소련군은 고급 지휘관이 대거 사라지면서, 위관급 연대장이나 영관급 군단장이 등장하는 참상(?)을 곳곳에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신진급 장교들에게 충분한 경험과 지도력을 쌓게 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1939년 소련군의 현실이었습니다. 거기에 대숙청의 여파로 지휘관들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작전 수행조차 할 엄두를 내기 싫었고, 이는 소련군 대졸전 전설의 씨앗이 됩니다.


 - 전쟁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수오무살미 전투입니다. 수오무살미는 핀란드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소련군 입장에서는 핀란드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여 분단시키려는 계획의 초입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었죠. 1939년 12월 7일, 이 곳을 점령하기 위해 소련군 2개 사단(제44소총병사단, 제163소총병사단.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1개 전차여단이 추가로 기입되어 있음)이 진격을 시작합니다.


[사진 1 : 수오무살미]


 - 그런데 핀란드 중북부의 겨울은 말 그대로 혹한이었고, 여기에 폭설까지 겹치며 소련군의 진격을 방해합니다. 수오무살미로 진격하던 2개 사단은 수오무살미까지 전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라테 길(Raate Road)'이라 불리는 얼어붙은 도로 위에 발이 묶여버리게 됩니다. 도로상에 길게 늘어선 소련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매복해 있던 핀란드군 제9보병사단이었습니다.


 - 스키부대가 주축이 된 핀란드군은 소련군 대열의 사이사이를 끊고, 그곳에 도로 장애물 등을 설치하여 서로간의 연락을 차단해버립니다. 소련군 2개 사단은 어느새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쪼개져 도로상에 고립되어 버렸고, 핀란드군은 그 소규모 부대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장작을 쪼개듯 했다는 뜻에서 '모티(장작) 전술'이라 부릅니다.


[사진 2 : 당시의 전투 상황도. 소련군의 진형이 조각조각 끊어지고 있음]


 - 전투는 해를 넘겨서까지 계속 이어졌고, 모든 전투가 종료된 것인 1940년 1월 8일. 살아남은 소수의 소련군은 무기고 장비고 다 내버린 채, 동쪽의 얼어붙은 호수를 맨몸으로 건너 도망쳐야 했습니다. 핀란드군 1개 사단(1만 1천여 명)으로 소련군 2개 사단(5만여 명)을 섬멸한 '수오무살미 전투'는 겨울 전쟁 중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소련 입장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 이 참사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희생양부터 찾기 바빴는데, 제44사단장은 현장에서 총살당했으며, 이외 수십 명의 고위 장교들도 교체되었습니다. 당시 총사령관은 적백내전의 명장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는데, 수십 년간 변화한 전쟁 양상에는 무지했던 그를 스탈린이 질책하자 "유능한 장교들을 네가 다 죽여버렸잖아!"라며 패기 넘치는 항의를 날립니다(보로실로프가 스탈린과 절친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 실제로 이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숙청당하지 않았음).


 - 다만 이후에는 소련군에서 몇 남지 않은 유능한 장교인 세묜 티모셴코를 전장에 보내어 작전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그의 주도로 소련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결국 핀란드의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합니다. 견디지 못한 핀란드는 결국 항복하였고, 소련은 처음 요구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조약을 핀란드에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원래의 목표였던 핀란드 전체 점령은 실패했고, 국제적 여론은 참담할 정도로 악화되어 소련은 국제연맹에서 축출당하는 굴욕까지 당합니다. 이것보다도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온갖 추태들로 인해 소련군은 '오합지졸'이란 인상을 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으며 이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자신감을 얻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 전쟁에 대한 핀란드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핀란드는 단지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해' 독일과 동맹, 소련이 얻어터지는 틈을 타 카렐리야 지협을 비롯해 소련이 점령한 지역들을 곧바로 되찾아버립니다. 하지만 딱히 독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던 핀란드는 얼마 후 진격을 멈추었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과 협상을 통해 국가를 보전할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점령한 땅은 다시 상실하였고 이 지역은 소련 패망 후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남아 있습니다.


참고, 사진 출처 : 

『독소 전쟁사』 글렌츠/하우스, 열린책들

한국어 위키백과 "겨울 전쟁"

영문 위키피디아 "Battle of Suomussalmi"



 -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이후 급격하게 미쳐돌아가기 시작한 일본은, 무리한 팽창정책이 화를 불러와 1940년대에 이르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라는 양면전쟁의 구도 속에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유럽의 웬만한 국가와 1:1로 붙어도 이기기 힘들 정도였음에도, 그야말로 폭주하듯이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거대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일본은 각각 초반에는 그나마 좀 앞서나가는 듯하다가 이내 압도적 국력차에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한 데는 고질병이었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알력다툼이 한몫 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일본 육군-해군 간 반목은, 당시 독립된 군체계가 아니었던 항공전력을 따로 구성하여 운영하고 육군이 항공모함잠수함 부대를 운영한다거나, 타 군의 전략을 스파이를 통해 '알아내야' 했을 정도...... 육군 주도의 중일전쟁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자, 이를 의식한 해군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게 태평양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여기엔 미국이 적극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 일본 측의 오판이 겹쳐 있기도 했습니다.


 -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항모전단이 궤멸당한 이후, 비행기의 자폭공격을 골자로 한 특공작전이 발동됩니다(이것이 바로 '카미카제'). 물론 이미 해상이든 항공이든 미군에 압도당하게 된 일본군으로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긴 했지만, 이러한 자폭공격은 결국 그나마 남은 전력과 숙련된 군인들마저 무의미하게 소모한 결과 일본이 더 빨리 망하는 데 기여할 뿐이었죠.


 - 비행기만으로는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아예 자폭 그 자체를 목적으로, 그것도 여러 종류의 병기를 개발하게 되는데...


 #1. MXY-7 "오카"



 - 기존의 비행기들이 아까웠는지 일본군은 자폭용 비행기를 개발합니다. 아니, 비행기라고 보기도 좀 그렇습니다. 사진만 봐도 잘 날게 생기진 않았는데, 이 비행기(?)는 혼자 이륙하지도 못하고, 빈약한 로켓엔진 하나만 달랑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날아다닐까요? 공격기나 폭격기 등을 모기(母機)로 삼아 함께 이륙하고, 목표에 가까워지면 떨어져 로켓엔진을 가동하며 엔진이 꺼진 이후로는 활공을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대략의 운용 형태)


 - 이것만 해도 심각한데, 자폭공격이 그나마 성공하기라도 하려면 일단 모기가 격추당하지 않고 목적지에 접근하고, 모기에서 떨어진 오카가 격추되지 않고, 동력조차 꺼진 이후에는 신의 조종능력으로 목표에 정확히 갖다박아야 합니다. 과연 공격에 성공할 수는 있을까요?...... 실제로 '오카'는 총 10여 회 출격에 모기와 오카의 승무원을 합하여 400여 명 이상이 전사했고, 전과는 미군 구축함 1척 격침에 그칩니다. 아무튼 탄두 자체의 위력은 대단했으니, 미군은 여러 의미를 담아 오카를 '바카(바보) 밤'이라고 불렀다는군요.


 #2. 가이텐



 - 공중으로는 부족했는지 수중에서도 자폭병기가 개발됩니다. 가이텐의 모체인 '93식 어뢰'는 일본이 그나마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산소어뢰'입니다. 그런데 산소어뢰 자체가 전쟁 후반에는 사장된 기술체계였고 이 무식한 크기를 자랑하는 어뢰 또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바로 이것을 개량하여 조종실(!!!)을 만들어 놓은 것.


 - 가이텐은 본래 자폭병기는 아닐 예정이었는데, 일정 거리까지 접근하면 진로를 고정시키고 조종사가 탈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부의 높으신 분들은 위력을 키우라고 요구했고, 가뜩이나 큰 어뢰가 더 커지면서 가이텐은 끝까지 조종을 하지 않으면 똑바로 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결국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기존의 설계고 뭐고 자폭병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산소어뢰가 사장된 것은 특유의 민감한 성질을 비롯한 이런저런 문제 때문이었는데, 특히 이놈은 오래 추진하면 유독가스가 발생하여 조종사를 질식(!!)시키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장거리 주행은 어림도 없었고, 목표에 가까이 접근에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기에 억지로 달아놓은 조종실은 지나치게 비좁았고, 조종 자체도 무진장 어려웠다고......


 - 어쨌든 1944년 말부터 가이텐은 실전에 투입되어 함선 4척 격침, 2척 대파(大破)라는 눈물나는 전과를 올립니다. 가이텐은 한자로 '回天'이 되며 '국면을 좋게 전환시킴'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그냥 조종사를 하늘로 돌려보내버리(?)는 병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3. 신요



 - 이것은 자폭용 보트입니다. 모터보트에 대량의 폭약을 싣고 돌진하는 일종의 '화공선'이었는데, 문제는 <삼국지연의> 정도에서나 나오던 화공선이 20세기 한복판에 등장했다는 것.


 - 아무래도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치 않다보니 무려 6,000여 대가 만들어졌는데, 누가 made by 일본군 아니랄까봐......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일단 작은 보트에 300kg이나 되는 폭약을 달아놓았으니, 파괴력은 좋겠지만 기동성에는 쥐약이었고 무게중심도 맞지 않아 조종하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 수천 대나 만들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전과가 알려진 것은 없고, 연합군의 상륙전에서 일부 활용된 적이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일본군은 자폭용 잠수함 '카이류(海龍)', 인간 기뢰 '후쿠류(伏龍)' 따위의 다양한 자폭병기를 개발했지만 (다행히도) 이것들은 실전에 활용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이 외에도 대전차 죽창(!!)이니 인간지뢰(!!!)니 하는,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자폭병기들은 정작 본전치기조차 하지 못한 채 일본의 명줄을 재촉하는 역할이나 하게 됩니다.


 - 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자폭특공을 매우 즐겨 지시한 도미나가 교지(1892-1960)입니다. 62회에 걸쳐 특공을 명령하여 약 400여 대의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날려먹은 그는 정작 위기 상황에서 적전도주를 감행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꼴통으로 유명한 일본군 수뇌부도 이것까진 봐주지 못하겠던지 그를 만주 관동군 장교로 좌천시켜버렸을 정도. 그에 비하면 실제 자폭공격에 투입된 이들의 모습은 차라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대일본제국 카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작전이다. 자살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전제주의 국가다운 발상이다. 이런 짓으로 반짝 효과를 볼 수야 있겠지만, 패전을 막을 수는 없겠지." - 특공대원 우메하라 유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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