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 2018 춘계답사 - 2일차

일시 : 2018. 3. 22. ~ 23.

답사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아침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합니다. 오늘도 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첫 번째 답사지는 충주읍성입니다. 물론 성 자체는 일제강점기에 헐려 남아있지 않지만, 그 내부의 관청 건물 중 몇 채가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재작년 쯤 올라온 기사에 따르면 읍성에 쓰인 돌들이 잇따라 발견된 것을 계기로 충주의 몇몇 시민단체에서 읍성 복원을 추진한다고 하는군요. [기사보기]



 이곳은 충주의 동헌(東軒. 관아의 중심 건물)으로 쓰인 '청녕헌'입니다(한자 발음상 '청령헌'이라고도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870년 화재 이후 다시 건축한 것으로, 특이하게도 해방 후까지 계속 쓰여 중원군(現 충주시의 읍면 지역) 군청이 되었다가, 1983년 청사를 이전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관아의 정문입니다. 답사일행이 다른 문으로 출입했기 때문에 확인을 미처 못 하였는데, 이 문은 관아 안쪽으로는 '중원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바깥쪽에는 '충청감영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한때 충청감영(요즘식으로 말하면 충청도청)이 소재하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의 절반 이상은 충청감영이 공주에 있었고 이전에는 청주에도 감영이 있었다니 그 기간은 길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는 충주 일대 행정구역이 강등과 승격을 정신없이 반복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충청도가 이름을 바꾼 역사(충청도, 충공도, 청홍도, 공홍도, 공충도......)를 보면 화려하다 못해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ㅡㅡ;



 관아라고는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많지 않아서, 동헌인 청녕헌과 아래에 소개할 제금당, 산고수청각 정도 뿐입니다. 덕분에 충주 관아에는 이렇게 빈 터가 많이 있습니다.



 관아 한켠에는 수령이 500년을 넘은 느티나무가 하나 서 있습니다. 나름 보호수라서 그런지 사방에 철로 된 기둥으로 받쳐 놓았습니다. 아마 이곳 충주 관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나무겠지요?



 또 하나 독특한 유적(?)이라면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충주 또한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여럿 있고, 그들이 잡혀 와 심문을 당한 곳이 이곳 관아였기 때문에 이곳에 비석을 세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남아 있는 다른 두 건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곳은 '제금당'으로, 충주에 왕실 손님이 방문했을 때 일종의 영빈관(?)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합니다. 청녕헌이 중원군청으로 쓰이던 당시에는 중원군수 집무실로 쓰였고, 군청 이전 후 청녕헌과 함께 원상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조금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으니 이곳은 '산고수청각'으로, 제금당에 귀빈이 방문했을 때 일종의 비서실 역할을 수행한 곳입니다. 여담으로 이 두 건물에는 청녕헌과는 달리 단청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는데, 문득 궁금해져서 교수님에게 이유를 묻자 교수님은 옛 건물을 복원할 때 '멋있어 보여서' 고증을 제대로 않고 무식하게 단청을 칠하는 경우가 자주 있으니 너무 신경쓰지는 말라고 전제를 깔고 ㅡㅡ; 만약 고증이 제대로 된 거라면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 단청을 칠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중원루 곁에 있는 '축성사적비'는 1869년 충주읍성을 개축한 이후 세운 기념비입니다. 이제는 읍성은 없고 사적비만 ㅡㅡ;



 충주 관아는 이쯤 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겠습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흔적이 발견된 조동리 선사유적지입니다. 이곳은 1990년 9월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강변의 퇴적층이 깎여나가는 바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이 홍수는 당시 광명시에 살던 블로거의 기억에도 얼핏 남아 있는데, 블로거의 집은 피해가 없었지만 살던 아파트 1층이 흙탕물 바다가 었습니다).



 이곳 유적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면 단연 붉은색 굽잔토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붉은간토기의 일종으로, 모양으로 봤을 때 실용 목적보다는 제사 등의 목적으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이 녀석은 복제품으로,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다가 최근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그래서 박물관 내에는 진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녀석이 조동리 유적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보니



 그걸 본딴답시고 뒤켠에는 이런 무식한 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ㅡㅡ;



 박물관 내에는 조동리에서 출토된 유물 뿐 아니라 충청도 일대에서 나온 다양한 선사시대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복제품들입니다. 진품들은 아마 그 동네에 있든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든지 하겠지요?



 조동리 유적지 현장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집터로 쓰였을 법한 구덩이들이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토기의 형태가 한강-금강 유역 스타일과 남해안 쪽 스타일 모두 존재하는 등 두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충주의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기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바로 탄화된 곡물들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는 농경생활을 한 흔적인데 이 씨앗들은 한국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고 합니다.



 ??? 그 곁에 웬 뜬금없는 전시실이 하나 있는데, 1970년대를 장식한 '통일벼'를 개발한 농학자 허문회(1927-2010)의 기념실입니다. 허문회 박사가 충주 출신이고, 때마침 조동리 유적에서 탄화된 곡물 흔적도 발견되고 했으니 겸사겸사 공간을 만든 모양입니다. 통일벼는 '보리밥보다 맛없다'는 악평도 들었고 병충해에 약하다는 결함도 있었지만, 어쨌든 월등한 생산량으로 1970년대 후반 쌀 자급자족에 큰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이후로는 상술할 문제점(특히 병충해) 때문에 일반 농가에서는 더 이상 재배하지 않지요. 요즘이야 그렇게 생산량에 목숨 걸 이유가 없기도 하고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는 길에 점심을 먹었습니다. 잠시 여유시간이 생겨 바로 앞에 있는 남한강변으로 나와 보았습니다.



 다음 답사지는 청룡사지입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구체적 연도나 창건자는 불명),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놀다 사라진 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존재합니다.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협조한 보각국사 혼수(1320-1392)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입적하였고, 태조의 명으로 절이 크게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건재하다가 폐사지가 되었는데, 한 전설에 따르면 조선 말 민씨 일족의 한 유력자가 바로 근처에 묘를 쓴 이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몰래 절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ㅡㅡ; 하지만 이후 그 무덤은 벌초하러 가는 사람마다 목숨을 잃곤 했기 때문에 결국 다른 곳으로 이장해 버렸다고. ㅡㅡ;



 이곳은 골짜기 한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내려 등산(?)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밑에 나올 마지막 답사지보다야



 절의 다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현재는 보각국사 승탑과 관련 유물들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승탑 본체는 국보로, 앞의 석등과 뒤 비석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승탑은 나름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는데도 상당히 크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당시 보각국사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승탑 뒤에는 보각국사탑비가 서 있습니다. 글은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 권근(1352-1409)이 지었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보통 탑 윗부분에 얹어놓는 장식물이 없고, 가장자리를 사선으로 깎아낸 것이 독특한 모습입니다.



 사실 승탑 외에는 볼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ㅡㅡ; 다시 길을 내려오면서 다른 소소한 유물들을 관람하기로 합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보각국사 승탑보다는 조금 밋밋(?)한 승탑이 있는데, 위에 둥글게 생긴 녀석은 어제 충주박물관에서 본 것과 비슷하지만 훠얼씬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석종(鐘)형 승탑은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양식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지나친 화려함을 삼가는 분위기 + 불교를 억제하는 사회였던 것과 관련이 있겠지요?



 내려가는 길에는 비석이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위전비'로 청룡사 창건과 관리 등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도들이 논밭을 기증한 내역을 기록한 것입니다. 숙종 때 만들어졌고 당시 사찰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자 이제 산을 내려와서 이번에는 강으로 가 봅시다. 조선시대 물류 중심지로 번영했던 목계나루입니다. 이곳 건너편에는 경상도 쪽에서 죽령과 조령을 넘어온 세곡(稅穀)을 임시 저장하던 '가흥창'이 있었고, 가흥창에 저장된 곡식은 목계나루에서 배에 실어 남한강을 따라 서울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민간 상선들도 오가고, 큰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기 마련이지요.



 이곳은 '목계별신제'와 관련한 설명을 듣기 위해 들른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마을마다 이런저런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목계나루처럼 큰 시장이 있는 곳에서는 무당패 등등을 초빙하여 여러 날 동안 일종의 지역축제 형태로 개최했다고 합니다. 이는 신앙적인 의미도 물론 있지만 (제사를 열면 사람들이 모이니까) 상권 활성화라는 의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하고 똑같네 사진의 '부흥당'은 제사를 지내는 서낭당의 역할을 한 곳인데, 본래의 부흥당은 인근 부흥산이라는 곳에 있고 이것은 근래에 신축한 것입니다. 옆에는 부흥당의 유래를 기록한 비석도 서 있습니다. 목계별신제는 명맥이 끊겼다가 문화행사로 부활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 그리고 다른 곳을 둘러보는데...... 없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ㅡㅡ; 사실 목계나루는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잘나갔지만 일대에 신작로와 철도(충북선)가 뚫려 치명타를 입었고, 바로 옆에 다리(목계교)가 개통하며 그나마 있던 나룻배도 사라졌으며, 1970년대 마을이 큰 수해를 입은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옛 영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도로 너머 작은 마을만 남아 옛 영광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마을 입구에는 '목계나루터'라고 쓰인 비석이 서 있는데, 저 '터'라는 글자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경종대왕 태실입니다. 이곳도 가는 길이 꽤 험해서 한참동안 거름 냄새를 만끽하며 시골길을 걸어간 이후



 또다시 등산을 해야 합니다. ㅡㅡ;



 어쨌든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면 요런 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경종의 태(胎)를 안치한 태실입니다. 아기가 출생할 때 함께 나오는 태는 한국에서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서(태아가 태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맞는 말) 아주 중요하게 여겼으며, 왕실 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태만큼은 아주 소중히 담아 관리했다고 합니다(심지어 이걸 말렸다가 약으로도 썼다는군요). 특이 왕이 될 사람의 태는 명당 중의 명당을 엄선하여 따로 돌방을 만들어 보관했는데, 태는 사람의 운명과 직결되고 특히 왕의 운명은 국가 전체의 운명과도 결부되니 가능한 한 좋은 대접을 했던 겁니다.



 이곳에는 비석이 두 개 서 있습니다. 하나는 '강희 27년(1688년)'과 '원자아기씨'가 쓰여 있는 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옹정 4년(1726년)'과 '경종대왕'이 적혀 있는 비석입니다. 찾아보건대 첫 번째 비석은 경종 출생 직후 태실을 이곳에 처음 만들 때 세운 것이고, 경종 사후 영조 2년에 태실을 현재의 형태로 정비하였는데 그 때 세운 비석인 듯 합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여러 왕과 왕족들의 태실이 관리 명목으로 대부분 서울 근처 서삼릉 일대로 옮겨진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경종 태실도 강제이전했다가 1976년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경종의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는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는군요.



 태실은 일반적으로 '음택풍수'의 명당인 '돌혈'에 위치합니다. 지형이 상당히 독특한데, 앞으로는 훤히 뚫려있고(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시야가 닿는 곳에 집 한 채 있으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옆과 뒤쪽으로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실이 있는 이 언덕은 그 산들과 동떨어져 외따로 우뚝 솟아 있어서 아주 특이한 풍광을 만듭니다. 이제 해가 기우는 걸 보니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네요. 산을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옵니다. 고작 이틀 지났는데 한 일주일은 된 것 같습니다. ㅡㅡ;




 이것이 입학 후 세 번째 정기답사인데, 다른 답사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1학년 때 다녀온 공주-부여(이건 글이 없으니 찾지 마세요)와 서울의 경우에는 다들 한 나라의 수도였던 적이 있고, 당연히 기록이나 유적,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역사 또한 이런 곳들을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요. 이런 곳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런 유적과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만 사람이 살았던 건 당연히 아닙니다. 충주는 한 나라의 수도가 된 적이 딱히 없었을 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언제나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입니다. 당연히 이들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는 이번 답사로도 확인한 바이지만 그것들 중 상당수는 교과서 등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무학대사는 알아도 보각국사는 잘 모르고, 우륵이 가야금 탄 이야기는 알아도 그와 함께 충주에 왔을 신라와 가야의 이주민들은 잘 모릅니다. 조동리의 굽잔토기는 먼 타지로 나가 관람객을 맞다가 최근에야 돌아왔고, 물류의 중심지였던 목계나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교과서에 나온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온 흔적을 다루는 게 역사라면 사람이 살았고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의 역사가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이곳에서 블로거가 계속 느꼈던 것은 (탄금대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답사지들이 나름 역사공부에 손가락(?)쯤 담궈 보았다는 블로거에게도 제법 생소한 것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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