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착취자가 사라지면 그래도 무언가 나아질 거라며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누가 그들을 착취하느냐의 차이였을 뿐임은 머지 않아 드러납니다. 일단 본섬 외의 주민들에게 징수하던 인두세는 류큐 처분 이후에도 1900년대까지 그대로 존속됩니다. 새로운 착취자인 일본 정부는, 수백 년간 유지된 주요 수입원을 하루아침에 포기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 한편 본섬과 주변 지역을 막론하고 실시된 것이 바로 가혹할 정도의 동화정책, 아니 '문화 말살' 정책입니다. 전통적인 류큐 언어의 사용은 금지되었고, 그 자리에 표준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합니다. 학교에서는 철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이루어졌고,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을 비롯한 류큐 왕국의 흔적은 방치되고 파괴되어 유명무실해집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식 성씨로의 '창씨개명'을 강요당합니다.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지요? 이로부터 수십 년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에게는 식민 지배의 연습장이었던 셈입니다.


 - 명목상 일본 내 행정구역, 실질적 식민지, 오키나와의 여러 섬과 그곳의 주민들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은 어김없이 불어닥칩니다.


 - 미국에게 강력한 선빵(진주만 공습)을 한 방 날린 일본군은 잠시간 잘 나가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전쟁모드로 돌입한 미군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며 태평양 절반을 차지한 판도를 급속도로 잃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다시피하던 일본 군부는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 이후로 일본의 지상과제는 '어떠한 피해도 감수하고 천황(과 지배계급)의 자리를 보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자신들의 피해는 상관없이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고, 연합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최대한 꺾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 이를 위하여 일본군은 본토와 주변의 주요 점령지를 온통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갔고, 몇 년간 일본군을 '사냥'해오던 연합군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최남단에 있는 이오지마 섬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피해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합군의 피해가 커질지언정 승패에는 변동이 없었고, 연합군의 다음 목표가 된 곳이 바로 오키나와 본섬이었습니다. 물론 이곳은 이미 일본군과 주민의 강제동원으로 섬 전체(특히 인구가 밀집한 남부지역)가 요새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일본군과 주민들은 섬 곳곳에 파놓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안 방어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던지라, 매우 순조롭게 상륙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이 섬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에는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느니 자결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이들을 일회용 자살병기로 써먹기까지 하였습니다. 임산부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연합군에게 자살돌격하도록 한다거나......


 - 일본의 철저한 세뇌교육은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연합군에 항복했다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살해당한다'는 인식을 심어놓았고, 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항복할래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섬 곳곳에서 학살 뿐만 아니라 집단 자살도 예사로 벌어집니다. 주민들은 연합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없게 되면 '명예롭게 죽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습니다.


 - 연합군은 곳곳에 산재한 참호와 동굴을 점령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독한 연막탄까지 동원해야 했고, 결국 일본군의 모든 은신처를 파괴하고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거의 3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1만2천명, 일본군 사망자는 6만5천명(미국측 추산),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는 12만명(일본측 추산)에 달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는 약 3~40만명 정도였습니다.


 - 다수의 일본군과 자신들의 식민지를 희생하는 대가로 일본은 그들의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예상을 초월하는 피해규모에 질려 다음 계획이었던 본토 침공 작전을 사실상 포기했고, 이는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대체됩니다. 20만명의 사망자와 이를 능가하는 방사능 피폭자를 더한 끝에 일본은 항복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상당수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인구의 1/3이 사망한 오키나와는 그대로 미국의 식민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오키나와 섬 전체를 미군 기지로 만들어갔습니다. 일본군에게 자결을 강요당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제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미군 전투기의 비행 소음을 매일같이 듣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치며 미군기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폭격하는 비행기들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는 악마의 비행기가 날아오는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부르며 치를 떨었고, 이 말을 듣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리는 악마가 되기 싫다'며 마찬가지로 치를 떨었습니다.


 -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다시 일본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우측통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뀐다거나 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 가지, 섬의 미군기지만큼은 떠나는 일 없이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소위 '오키나와 반환'이란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그저 지배자가 바뀐 것, 아니 어쩌면 지배자가 둘이 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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