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시점에서 북한이 확실히 실패한 국가라는 데 반박할 분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알고보면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민주적인 국가였고 지금보다 더 발전할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 여러 분기의 방향이 김일성에게로 집중된 결과 '공화국 아닌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실패한 북한을 낳게 됩니다. 이번에는 북한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북한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북한을 만든 여러 정치세력


[해방시기 북한 지도부 : 왼쪽부터 김두봉, 허헌, 김원봉, 박헌영, 김일성. 뒤쪽 얼굴만 나온 인물은 김달현]


 -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북한은 본래 1인독재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에는 몇 년에 걸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총집결하였고, 그들이 각각 하나씩의 파벌을 이루어 서로 견제하는 형태의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독립운동 세력 자체의 분화가 심했고, 소련과 중국에 모두 접했다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북한의 정치 지형은 상당히 복잡한 상태로 출발하게 됩니다.


[연설하는 김두봉]


 - 연안파 : 중국 일대에서 활동하던 세력.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쫓겨간 산시성 옌안(연안) 일대에서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김두봉, 김무정 중심의 조선독립동맹과 김원봉과 갈라져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여 '조선의용군'을 결성하였고, 중국공산당과 함께 중일전쟁 게릴라전에 참여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김두봉, 김무정 등은 귀국하여 북한 지도부에 참여하였으며, 상당수는 중국에 남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 국공내전 종전 이후 조선의용군의 잔여 병력은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주축이 됩니다. 이들은 국외 무장투쟁세력 중 가장 큰 규모였고(한국광복군의 몇 배에 달함), 정규전이나 게릴라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귀국한 연안파 세력은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을 결성하고, 이는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의 전신인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습니다.


[박헌영]


 - 국내파 : 말 그대로 일제강점기 한반도 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 세력입니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약 3년여간 4차례에 걸쳐 대탄압을 당하고도 다시 조직을 재건하는 근성을 ㅡㅡ; 보이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되고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의 권고에 따라 재건을 포기하고 해체하였습니다. 이후 주요 멤버들이 투옥, 망명, 도피생활을 이어가며 지하활동 중심의 운동을 이어갔고, 해방 직전에는 박헌영, 이현상 등을 중심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였습니다.


 -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중심)와 함께 가장 발빠른 행보를 보였으며, 미군정이 시작되자 합법정당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부분열이 상당히 심했으며, 미군정기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좌파 계열 몇몇 정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합니다. 이후 미군정이 좌파 세력을 점차 불법화하자 활동이 급진화·폭력화되고, 결국 남한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져 박헌영 등 지도부 상당수가 북한으로 건너갑니다.


[꽃미남 김일성. 1946년]


 - 만주파 :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 쪽에서 활동한 항일 게릴라 세력. 만주 쪽 한국인 게릴라와 중국공산당 무장세력, 반일 성향의 독립세력 등이 중국공산당 주도로 1930년대 중반 '동북항일연군'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게릴라가 친일단체 연루 혐의로 숙청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민생단 사건), 여기서 살아남은 젊은 지휘관들 가운데 김책, 최현 등의 지지를 받은 김일성이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 김일성의 게릴라는 1937년 압록강 최상류 보천보에 침입하여 주재소(파출소) 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전과를 올립니다(보천보 전투). 전투 자체는 별것 없었지만, 국내에 무장독립운동이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선전효과가 있었습니다(동아일보는 고의적으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대 초반 사실상 섬멸되어 김일성 등은 소련으로 건너갔고, 이 때 김일성은 그를 눈여겨본 스탈린에 의해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됩니다.


[허가이. 본명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 소련파 : 소련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하였지만, 김일성을 비롯하여 그의 세력에서 행정능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실제로 김일성 중심의 항일게릴라 중에는 문맹도 상당수였다고). 그래서 북한의 행정을 담당하고 김일성의 북한 통치를 지원하기 위하여, 당시 소련에 거주하며 소련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려인들을 다수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 이들은 허가이, 박창옥, 조기천(시인) 등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 하에 있으며 북한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소련에서 출생하여 자랐고 한반도 내에는 별다른 연고가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북한 내에 정치적 기반은 상당히 취약한 편이었습니다.


[조만식]


 - 非 사회주의 계열 :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대표적. 조선민주당은 평양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조만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천도교청우당은 1946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결성하며 북한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중도우파적, 종교적(조만식은 기독교계 인물)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는 기독교, 천도교 신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소련군정은 처음에는 이들의 정치적 활동을 보장하였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종교세력이 이어지기는 어려웠고, 양당의 지도자인 조만식(조선민주당)과 김달현(천도교청우당) 등이 각각 숙청당하면서 이들 정당의 세력은 무력화되었습니다. 이후 두 정당은 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이 되어, 현재는 조선노동당을 내세우기 귀찮은 사소한 ㅡㅡ; 사안들에 이름 빌려주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2. 대숙청 비긴즈 : 6.25에 대한 책임전가


 - 일단 북한의 지도자는 김일성이었습니다(소련이 그렇게 앉혀놨으니까). 다만 김일성의 세력은 처음에는 북한(조선노동당)의 여러 정파 중 하나일 뿐이었고, 심지어 조선노동당의 첫 번째 지도자는 김일성이 아닌 김두봉이었습니다(물론 이는 김일성이 너무 젊었기 때문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에 가까움).


 -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남한을 침공하여 무력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ㅡㅡ; 여기에는 국내파의 대표인 박헌영도 적극 찬동하였고(박헌영의 정치적 기반이 본래 남한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임), 이들은 소련으로 달려가서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락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야 당시 북한은 소련의 속국에 가까웠으니, 종주국 소련의 지지와 지원 약속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스탈린이 이들에게 퇴짜를 놓습니다. 각각 소련과 미국의 영향 아래 있는 두 세력간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소련-미국 간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련은 도저히 새로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고요? 불과 3~4년 전까지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거의 3000만 명이 죽었습니다. ㅡㅡ; 더구나 스탈린은 아직 소련이 미국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ㅗ"를 날리는 건 당연.


["전쟁? ㅎㅎ X까"]


 - 하지만 생각없는 김일성에게는 국제외교나 냉전 그딴 거 없었습니다. ㅡㅡ; 김일성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스탈린을 졸라댔고, 박헌영이 옆에서 "남한을 침공하면 남한 내 게릴라와 민중이 호응하여, 미국 개입 전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자 스탈린은 마지못해 전쟁을 승인하게 됩니다. 단 '중국한테 물어보라'는 조건을 달았고, 소련의 직접 지원은 거부합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조선의용군에게 도움을 받은 것 때문에 '미군 참전'을 전제로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 사실 조선의용군이 합류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소련이나 중국의 지원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보험'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던 38선에서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을 단행하며 민족의 대재앙 6.25가 시작됩니다.


[북한과 소련의 북침 선전을 비판한 유고슬라비아 신문 만평. 코페자]


 - 인민군의 공격은 서울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3방향으로 침공하여 서울과 그 일대의 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시작부터 엇나가기 시작하였으니, 가장 동쪽으로 진격하던 인민군 2군단이 전차 한 대 없던 국군 6사단에 대패하면서 국군 포위섬멸에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심지어 국군이 한강대교를 너무 일찍 날려먹는 X맨 짓을 했음에도!).


 - 결국 동쪽에서 진입하는 게 늦어지면서 인민군의 나머지 부대는 점령한 서울에서 3일간을 허송세월했고, 그동안 박헌영의 장담과는 달리 남한의 후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남로당 세력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때마침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땅을 받은 남한의 농민들은 남한의 붕괴를 지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전쟁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면서, 북한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벌어주는 치명적인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보셨을 지도]


 - 물론 3일 이후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급하게 상륙한 미군 선발부대를 탈탈 털어버리는 전과도 올렸지만, 압록강을 앞에 두고 기세가 한계에 달했고 국군과 UN군의 방어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끝도 없는 붕괴가 시작, 김일성과 북한 정부는 평양을 버리고 평안북도(자강도) 강계로 도망쳤으며 국군이 압록강변까지 도달하는 대굴욕을 당합니다.


 - 이때부터 김일성은 전쟁에 승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패전 책임을 다른 세력에 떠넘겨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에 이릅니다. 일단 연안파의 중심 인물인 김무정(2군단장, 민족보위성 부상 등 역임)을, 낙동강 전선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숙청하였습니다. 그가 인민군 내 연안군 파벌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의 숙청을 계기로 연안파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김무정은 얼마 후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여생을 지낸 것으로 추정).


[6.25 당시 대북삐라 중 하나. 그런데_그것이_실제로_일어났습니다.jpgee]


 - 그 다음 타겟은 국내파. 실제로 국내파의 지도자인 박헌영은 김일성과 맞먹는 개전 책임이 있었고(강계에서 박헌영과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두고 잉크병을 던지며 개싸움을 벌인 일화는 유명), 김일성이 전쟁 책임을 전가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하였고, 패전 책임을 물어 국내파의 다른 인물인 이승엽(전쟁 중 서울시장에 임명) 등과 함께 처형해 버렸습니다. 국내파는 이로써 사실상 소멸합니다.


 - 소련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소련파의 리더 허가이는 국내파의 박헌영과 이승엽이 체포되자 이들을 적극 변호하였는데 이것이 김일성의 분노를 샀고, 1953년 7월 자신의 사무실에서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북한의 공식 발표는 자살이었지만, 글쎄요(허가이는 소련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그를 암살한 후 외교적 마찰을 의식하여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이 유력)? 가뜩이나 기반이 부족한 소련파는 허가이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게 됩니다.


 - 이렇게 자신에게 있던 전쟁 책임을 다른 세력에 떠넘기는 데 성공한 김일성은, 전쟁의 (사실상) 패배에도 자신의 권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김일성과 만주파는 조선노동당 내 권력을 착실하게 늘려, 1950년대 중반에는 중앙위원회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이미 무력화된 국내파를 제외하고, 연안파와 소련파는 만주파의 독주에 위기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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