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총통선거에 출마한 후보는 총 세 팀으로, 차이잉원-첸젠런(민주진보당/무소속), 주리룬-왕루쉬안(중국국민당/무소속), 쑹추위-쉬신잉(친민당/민국당)이 후보로 등록하였습니다. 중국국민당의 경우 본래 총통 후보자는 훙슈주(중화민국 입법원 부원장)였으나, 중국국민당과 후보 본인의 지지도가 추락을 거듭하자 10월 17일 전격적으로 후보를 주리룬(신베이 시장, 중국국민당 주석)으로 교체한 바 있습니다.


 - 범람연맹에서 둘, 범록연맹에서 하나 출마한 모양새인데, 본래 범록연맹 쪽에 후보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민주진보당 창당멤버였고 당 주석(대표)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무소속 정치인인 스밍더(1941-)입니다. 2000년 탈당 이후 천수이볜과 대립, 천수이볜 집권 당시 반정부 활동을 전개한 바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민주진보당의 원로급 인사이기 때문에 민주진보당 쪽에서 바짝 긴장하였으나, 타이완의 선거 규정상 무소속 총통후보는 27만명의 추천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에 실패하여 ㅡㅡ; 실제 출마는 무산되었습니다.


 - 현재 선거의 판세는 차이잉원 후보의 독주 아래, 범람연맹의 두 후보(주리룬, 쑹추위)간 단일화 압력이 존재합니다. 쑹추위 후보는 일단 선거전 완주를 공언하고 있으며, 차이잉원의 독주가 가속화되며 '단일화를 해도 패배하는' 분위기가 강해진 이후로는 단일화를 추진할 동력도 비교적 약해진 상황. 다만 쑹추위 측의 지지도가 상당히 하락한 상황이라 막판 단일화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5년 6월~11월 사이의 여론조사 결과 모음. 출처 위에서부터 차이잉원/훙슈주-주리룬/쑹추위]


 - 그 외 소소한 특이점으로, 타이완의 총통선거는 입법의원(국회의원) 총선거와 함께 치러지며, 후보자 등록과 유세 등의 선거 일정 또한 동일합니다. 그리고 후보자 번호를 추첨식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문제되는 '번호 보고 찍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번 총통선거 후보자들은 세 진영 모두 정부후보가 남-녀 조합에 서로 다른 당 후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1. 정세(1) : 양안관계


 - 중국이 타이완을 국력으로 압도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양 진영의 양안관계 인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국민당의 기조는 초기의 '본토수복'노선에서 이제는 양안간 우호관계를 대표하는 정당처럼 인식될 정도가 되었으며 ㅡㅡ; 민주진보당 역시 초기의 강경한 독립주의 노선에서 상당히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다만 어느 노선을 걷더라도 경제면에서는 이미 타이완이 중국 대륙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출의 40% 이상을 중국이 담당하고 있을 정도. 이러한 배경에서 2011년 1월 양안간의 (사실상) FTA인 '양안경제협력구조협의(ECFA)'가 발효되었는데, 이에 대한 여론의 역풍이 상당했고 민주진보당이 강하게 반발하여 한국에나 있을 줄 알았던 국회 공성전까지 벌어졌습니다. 2013년에는 서비스-노동분야에 대한 협정이 추가로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한 비준에 반대하여 2014년 대학생들이 입법원에서 점거농성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2010년 입법원 공성전 亂!]


 - 여기에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 이후 타이완 여론의 대(對)중국 인식이 급격히 악화됩니다. 중화민국이 본토를 수복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니 양안의 통합은 결국 타이완이 중국에 흡수통합 되는 형태일 가능성이 높은데, 여기서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인 홍콩식 '일국양제'가 바로 그 홍콩에서 흔들리는 것을 지켜본 여론이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쪽으로 크게 이동했기 때문. 마잉주 총통은 부랴부랴 홍콩의 시위대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중국국민당은 여론의 역풍을 제대로 맞고 말았습니다.



2. 정세(2) : 경제난


 - 1980~1990년대 전성기를 누린 타이완의 경제는 2000년대 이후 심한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는 경제성장률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정부 부채비율 역시 급증하는 등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는 중. 비록 정부의 금과 외환 보유량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장기화되는 경기 침체는 서민경제에 직격탄을 날려 노동자 임금이 1990년대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하락해 있습니다. 2010년 기준 타이완 대졸자의 평균 초봉은 22624 대만달러, 약 80만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2006년 이후 타이완 경제성장률. 출처]


 - 여기에 꾸준히 이루어져 온 타이완 자본의 중국 진출은 결과적으로 타이완 내 산업체의 중국 이전으로 이어지고, 이는 타이완 내 일자리의 감소로 연결되며 서민경제의 침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서민경제의 침체는 출산율 감소로, 출산률 감소는 잠재성장률의 지속적 감소로 이어지기에 타이완 경제의 앞날은 상당히 어둡다 하겠습니다.


 - 마잉주 정부가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려 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타이완 경제의 중국 예속을 심화시킬 뿐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으며, 특히 2차로 협의된 서비스-노동시장의 경우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어 타이완의 일자리가 잠식당할 것이라 하여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2014년 타이완 입법원 점거사태가 바로 이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대학생이 점거를 주도한 것은 청년층이 이 협정에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입법원 점거농성. 출처]


 - 이에 대하여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일단 양대정당의 총통후보가 모두 TPP 가입 추진을 공약하였으며, 단지 중국 측의 반응이 큰 변수가 되는 상황. 중국이 TPP에 참여할 경우 타이완은 자연스레 밀려날 가능성이 높은데, 중국은 TPP에 대항한 새로운 경제협정(RCEP) 체결을 추진 중이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가입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TPP 가입 시 타이완의 공식 국가명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3. 정부 : 레임덕과 '9총통'


 - 총체적 난국 속에 마잉주 정부는 말 그대로 여론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미 마잉주가 재선에 성공한 직후부터 여론은 좋지 않아서, 2013년 9월 여론조사에서 마잉주 총통의 지지율은 9.2%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로도 검찰의 국회 도청 사건, ECFA 확대 반대, 홍콩 우산 혁명 등 악재들이 계속 튀어나오면서 추락한 지지율은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 여론조사 결과. 출처]


 -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아 2014년에는 민주진보당 측에서 탄핵까지 거론하는 최대 위기를 맞기도 하였는데, 마잉주의 모친상 중에 민주진보당 입법의원이 빈소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벌어지면서 ㅡㅡ; 여론의 역풍을 맞는 바람에 마잉주는 한 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론이 크게 변화한 것까지는 아니라서 2014년 11월 지방선거에서는 중국국민당이 참패하였고, 이에 책임을 지고 마잉주는 중국국민당 주석직을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 2015년 2.28 사건 추모식에서는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에게 악수를 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였고(커원저는 2.28 희생자의 후손), 대중에게는 자신의 이름과 지지율을 겹쳐 '9총통(九總統)'이라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2015년 11월 7일 전격 성사된 '양안 정상회담'이 반등의 계기가 되었는데, 양측 정상이 국가원수 자격으로 만난 것은 국부천대 이후 최초의 일이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마잉주와 시진핑. 출처]


 - 이 회담에서 두 정상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재확인했는데, 다분히 이번 총통선거를 겨냥한 행보로 보입니다. 일단 정상회담을 기회로 마잉주 정부의 지지율은 19%로 두 배나 ㅡㅡ; 상승했고, 주리룬 후보의 지지율도 소폭이나마 상승했지만 돌아선 여론을 돌려놓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입니다. 정상회담에서 천명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하여도 반응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데, 직후의 여론조사에서는 46.7%가 새 입법의회에서 마잉주의 제안을 기각해야 한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 타이완(중화민국)이 총통(대통령)선거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제14대 중화민국 총통 선거는 2016년 1월 16일에 투표가 시행되며, 세 명의 총통 후보가 출마한 상태입니다. 타이완의 총통 선거는 러닝메이트 시스템으로, 총통 후보와 부총통 후보가 하나의 후보로 함께 출마하게 되어 있습니다(미국 대통령 선거와 동일).


 - 타이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과 민주진보당을 중심으로 한 '범록연맹'입니다. 양대정당의 상징색이 각각 남색과 녹색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죠. 두 세력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타이완의 정체성'으로, 즉 '중화민국'이냐(범람연맹) '타이완'이냐(범록연맹)의 차이입니다. 이외의 정치적 노선 차이가 크지는 않으나, 대체로 범록연맹 쪽이 조금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현재 세 후보의 소속 정당은 범람연맹측에서 둘(중국국민당, 친민당), 범록연맹측에서 하나(민주진보당)입니다.



1. 타이완은 어떻게 한족의 땅이 되었는가


 - 타이완의 정치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타이완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이완이 중국의 영역에 온전히 들어온 것은 17세기로, 그 이전 타이완을 지배한 원주민은 현재 태평양 종족(오스트로네시아)의 조상쯤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17세기 이전에는 몇몇 역사기록에 단편적으로만 등장하던(중국 문명은 몇몇 시기를 빼고는 해양 진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타이완이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웃기게도 중국이 아닌 유럽 문명에 의해서입니다.


 - 유럽인이 타이완 섬에 최초로 상륙한 것은 1590년,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서였습니다. 이들은 타이완에 상륙하였지만 정착하지는 않고, 숲이 우거진 타이완을 '일하 포르모사(아름다운 섬)'이라 명명하고 떠나갔습니다. 이 무렵 대륙의 명 제국이 파탄 상태에 빠지면서 타이완의 주변 해안지역(푸젠 성, 저장 성)의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으니 한족이 타이완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입니다.


 - 1624년 타이완 섬 근처의 펑후 제도를 점유중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명 제국과의 협의를 통하여 펑후 제도와 타이완 남서부를 교환하게 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현재의 타이난 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이 일대의 토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노동자를 대규모로 모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족의 이주가 본격화됩니다. 타이완 섬 북부에서는 에스파냐가 성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는데, 두 세력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고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를 몰아내는 결말을 맞습니다.


 - 다만 네덜란드의 천하도 얼마 가지 못하여, 1661년 남명(南明) 계열의 정성공(1624-1662)이 바다를 건너 타이완 섬을 공격하였고 네덜란드는 1662년 타이완 섬에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정성공은 그 직후 사망하였는데, 그 일족은 3대에 걸쳐 타이완을 지배하였고 이들의 '정씨 왕조'는 1683년 청 제국에 의하여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 청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한족의 이주가 가속화되어, 이제 타이완 섬의 주역은 완전히 한족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근대 이전까지 타이완 섬에 이주한 한족을 '본성인'이라 하며, 이들은 대부분 푸젠, 저장 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언어('대만어') 또한 이 지역의 언어와 유사합니다. 원주민 중 서부의 평지에 살던 부류는 '평포족'이라 하며 이 시기 대부분 한족과 섞여 존재가 희미해졌고, 동부 산지를 중심으로 거주한 '고산족'은 현재까지 동화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 식민(植民)의 역사


 - 1874년 류큐(오키나와)의 어민들이 타이완 섬 동부에 표류하였다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타이완 섬에 출병, 원주민들과 전투를 치릅니다(모란사 사건). 당연히 이곳의 지배자인 청 제국은 강하게 항의하였고, 일본군 또한 풍토병(말라리아) 확산으로 더 이상의 전투가 곤란해져 둘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협상의 결과, 당시 명목상 중국-일본의 이중 속국이었던 류큐는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하에 완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 이후 청불전쟁(1884-1885) 때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파견된 류명전(1836-1896)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타이완 성(省)'이 설치되었는데, 타이완 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청의 시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면서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하였고, 이후 1945년까지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 일본의 타이완 지배는 큰 틀에서는 한반도 식민지배와 큰 차이는 없었지만, 이 시기 형성된 타이완인의 대일(對日) 감정은 한국인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복잡한 무엇이 있습니다. 타이완의 한족들에게는 이전의 청 제국 역시 사실상의 식민 지배자였고, 이들에게 청과 일본은 '외부의 지배자'라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또한 (한족과 원주민을 가리지 않고) 일본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긴 했습니다. 특히 유명한 사건은 1930년 원주민의 일파인 아타얄족이 전개한 '우서 항쟁'.


 - 타이완 주민의 정치운동은 1937년 '지방자치연맹'의 해체와 함께 사실상 막을 내렸고,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타이완 역시 한반도와 비슷한 '황민화' 그리고 전시동원체제 속에서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연히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식민 지배는 막을 내렸고, 타이완의 주권은 청을 계승한 중화민국에게로 넘어갔는데 이것이 오히려 타이완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3. 외성인(外省人)의 독재, 그리고 민주진보당


 - 타이완이 중화민국 영토로 돌아온 이후에도, 당시 국공내전에 정신이 팔려 있던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 통치에 있어 딱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주민들의 불만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기 타이완의 통치는 본성인을 배제한 채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외성인)이 독점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본성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 1947년 2월 27일,담배를 무단으로 팔던 한 노점상이 단속원에게 구타를 당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들에게 항의하였는데,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다음날 시작된 항의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졌고, 이들의 요구가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으로 발전하자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1887-1975)는 국민혁명군을 파견하여 본성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2.28 사건). 당시 살해당한 본성인은 약 3만여 명에 달하며, 대규모 약탈까지 겹쳐 타이완 전역은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 타이완의 역사는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전하면서 한층 더 꼬이기 시작했는데, 국민당은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 목숨을 부지하였고 타이완은 수십 년간 계엄령이 발동된 상태로 장제스의 1인 독재 체제로 전락하였습니다. 당시 타이완의 정당은 오로지 중국국민당 하나뿐(북한에도 있는 관제야당 하나 없이!)이었고, 본성인 중심인 중국국민당 외의 다른 정치 활동은 철저히 탄압받았고 본성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대만어) 사용까지 억압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1975년 장제스의 사후에야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1978년 총통에 취임한 장징궈(장제스의 아들)는 정부에 본성인의 기용을 확대하는 등 전향적인 조치들을 시행하였습니다. 1986년 민주화 운동가들이 모여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선언하였는데, 이전과 달리 장징궈는 이들을 탄압하지 않았고 새로운 정당의 설립을 사실상 묵인하였습니다. 이들이 창당한 '민주진보당'은 다음해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타이완의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4. 양대정당 체제의 성립


 - 민주진보당은 1991년 <타이완독립강령>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이완 독립주의의 기치를 들었고, 이는 기존의 진보적 성격과 함께 민주진보당의 노선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민주진보당의 행보는 기존 피지배층이었던 본성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현재까지 민주진보당은 '진보, 본성인, 타이완 독립주의'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물론 한국만큼이나 타이완의 정치 지형도 노선이 분명하게 나뉘지 않으며, 민주진보당의 '진보' 역시 그다지 좌파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자연히 중국국민당의 노선은 '보수, 외성인, 하나의 중국'으로 대표됩니다. 다만 중국국민당은 중화민국 중심의 중국 통일을 내세우고 있어,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일 노선과는 또 다릅니다. 즉 타이완의 독립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국민당이 함께 반대하지만, 타이완의 중화인민공화국 편입은 중국국민당과 민주진보당이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상당히 묘한 ㅡㅡ;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


 - 타이완 최초의 야당 민주진보당은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1950-)이 당선되면서 드디어 정권교체를 달성하였습니다. 범람연맹의 후보가 둘로 분열되었고(롄잔(1936-), 쑹추위(1942-)) 민주진보당 역시 기존의 타이완 독립주의를 상당부분 후퇴시키며(<타이완전도결의문> 채택) 중도층을 끌어온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천수이볜 정부는 경제 침체, 지지자들에게도 비판받는 반(反) 개혁적 행보 등이 겹치며 정권을 다시 중국국민당에게 넘겨주었고, 퇴임 이후 천수이볜은 희대의 부정부패 스캔들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일단 천수이볜과 지지자들은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합니다).


 - 일단 양측을 규정하는 첫 번째 요소가 '국가적 정체성'이라고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력차가 너무 커진 것, 그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의 독립을 결사반대하고 있는 점 등이 겹쳐 있다보니 양당의 주장도 상당히 애매해져가는 경향은 있습니다. 중국국민당은 '본토 수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하며, 민주진보당 역시 예전처럼 강경한 타이완 독립주의를 주장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입니다.


 - 현재의 타이완 총통은 천수이볜의 후임자인 마잉주(1950-, 중국국민당)가 재임 중입니다.





Mily Balakirev (1837-1910)

Oriental fantasy <Islamey> Op.18


 - 발라키레프는 러시아 5인조의 리더로, 5인조 형성 당시 유일한 전업 음악가였습니다. 다만 발라키레프 역시 처음부터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학에서는 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소년기에는 알렉산드르 우루이비셰프(1794-1858, 러시아 최초의 음악평론가)에게 음악을 배웠고, 대학 졸업 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미하일 글린카(1804-1857)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글린카는 발라키레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격려하였습니다.


 - 이후 1856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발표하며 음악가로 본격 데뷔하였고, 이후 2년 사이 자신의 두 후원자가 세상을 떠났지만 민족주의적인 스타일의 음악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습니다. 이 무렵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과 만나 교류하였는데, 이들의 모임에 몇 년 후 보로딘이 합류하면서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5인조'가 형성됩니다.


 - 이후 작곡, 지휘, 음악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서유럽식 낭만주의를 지지하는 루빈시테인 형제에 대항하여 무료 음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870년대 들어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으니, 발라키레프는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되었고 음악 활동을 5년 이상 전면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이 시기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그를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초빙하려 하였지만, 자신의 음악이 "지식보다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가르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며 고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1883년 러시아 궁정 성가대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무료 음악학교 활동도 재개하였습니다. 1894년 음악감독직을 사퇴한 이후 말년에는 다시 창작 활동에 집중하여 두 개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소나타들을 발표하였고, 자신의 과거 작품에 대한 개정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 <이슬라메이>는 1868년 9월에 완성되었으며, 발라키레프가 캅카스(코카서스) 지방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어 약 한 달여만에 만든 작품입니다. 발라키레프의 대표작이며, 특히 그 엄청난 연주 난이도로 더 유명합니다. 피아노 솔로곡 중 가장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며, 웬만한 피아니스트는 연주하기 곤란할 정도라 곡을 조금 쉽게 편곡한 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도전하는 작품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Alexander Borodin (1833-1887)

Symphony No.1 in Eb


 -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 작곡가, 사회운동가입니다. 사후에는 작곡가로서의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생전의 본업은 화학자로 그의 이름을 딴 화학반응(보로딘 반응. 이후 하인츠(1904-1981)와 클레어 훈스디에커(1903-1995) 부부가 연구를 진전시켜 '훈스디에커 반응'으로도 불림)이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 일단 출생 배경부터가 막장 범상치 않은데, 조지아계 귀족인 아버지와 유럽계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를 수 없어 아버지 소속의 농노의 가문으로 입적하고 그의 성을 따라 '보로딘'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출생 이후에는 어머니가 양육하였으며, 경제적으로 꽤 유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만 당시 가족 중 대부분이 여성이라 어릴 적에는 반(半) 여성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순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군요.


 - 취미로 악기를 배우며 9세 때 짧은 곡을 작곡하였을 정도로 음악에는 재능이 있었지만, 딱히 음악가 쪽 진로는 고려하지 않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화학과 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독일로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던 1862년 발라키레프를 만나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후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는데,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는 틈틈이 작곡을 병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보로딘이 작곡에 투자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활동 영역을 넓힌 후기에 더 심해져 거의 작곡에 신경쓰지 못할 지경까지 갔고, 결국 그가 말년에 작업하던 여러 작품들은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거나 후배 작곡가들의 추가적인 작업을 통해서야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 교향곡 1번은 완성 2년 후인 1869년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호평을 받으며 작곡가 보로딘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보로딘은 곧바로 교향곡 2번과 오페라 <이고르 공> 작곡에 착수하였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논문 표절 논란까지 겹쳐 연구 및 논문 관련 활동에 집중하는 바람에 두 작품은 오랫동안(<이고르 공>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Michael Haydn (1737-1806)

Symphony No.25 in G MH 330

(Mozart Symphony No.37 in G K.444)


 - 먼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교향곡 37번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악보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된 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곡의 작곡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고,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80-1952) 등 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현재는 1악장의 서주만 모차르트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형이 비엔나 슈테판 성당 합창단에 입단한 이후 합창단 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1708-1772)의 도움으로 미하엘을 비롯한 동생들 역시 합창단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하이든 형제는 변성기가 오면서 차례로 합창단을 떠났으며, 미하엘의 경우 퇴단 직후 그로스바르다인(現 루마니아 오라데아)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762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이후 남은 평생을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36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1768년 미하엘은 성악가로 활동한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1745-1827)와 결혼하였는데, 잘츠부르크에서 친분 관계를 맺게 된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군요. 둘 사이에 자식은 딸(알로이지아 요제파)하나가 유일한데, 그나마 생후 1년 남짓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미하엘은 몇몇 부분에 대하여는 형인 요제프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종교음악의 경우 요제프 스스로가 자신보다 미하엘이 뛰어나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하엘은 주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대표작들 또한 교회음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레퀴엠 c단조>는 미하엘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물론 고전시대 작곡가답게, 43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다수의 세속음악도 만든 바 있습니다.


 - 다만 아무래도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대라, 그의 작품인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으며 요제프의 작품에 섞여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똑같은 '하이든'이다보니 풀 네임을 쓰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의 교향곡 25번이죠. 여담으로 미하엘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경우 미하엘이 술을 너무 마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는군요.





Josef Strauss (1827-1870)

Polka <Ohne Sorgen> Op.271


 -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차남으로,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려고 하였지만 군사훈련을 버티기에는 그리 강건하지 못하여, 전공을 수학과 공학 쪽으로 바꾸었고 수학 참고서를 낼 정도로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습니다.


 - 음악가 데뷔는 상당히 얼떨결에 이루어졌는데, 1853년 요한 2세가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자 요제프에게 땜빵(?) 지휘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 교육을 계속해왔던 그는 이를 수락하였는데, 데뷔 무대가 의외의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 슈트라우스 일가의 일원답게 요제프 역시 왈츠 등의 경음악 분야에서 맹활약하였는데, 요한 2세가 "형제 중 최고의 재능은 요제프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공계 쪽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보니 공과대학이나 산업체 등의 행사에서 많은 음악을 의뢰받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음악 스타일 때문이었다는군요.


 - 워낙 인기가 많았다보니 슈트라우스 일가는 모두 과로에 시달려야 했는데, 요제프 역시 과로로 건강을 많이 해쳤고 1870년 폴란드 공연 중 무대에서 갑자기 쓰러져 그 길로 사망했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세간에서는 그의 사인에 대해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심지어 러시아 군인의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설까지 있었다고), 장례와 매장에 관여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일단은 과로사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 283곡의 자작곡 뿐 아니라 편곡한 작품 또한 굉장히 많았는데, 막내동생인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1835-1916)이 형들의 사후 악단을 해체하면서 요제프의 악보 상당수를 폐기해 버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에두아르트 역시 음악가였지만 형들의 명성에 묻히는 경향이 있었고(심지어 자신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여기에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Giovanni Sgambati (1841-1914)

Symphony No.1 in D Op.16


 - 스감바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겸 작곡가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트레비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수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약간의 교회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부터 로마로 돌아와 정착하였고, 때마침 1861년 로마로 이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휘자 활동은 독일계 작곡가의 음악을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이 돋보이는데, 베토벤 교향곡 3번과 7번의 이탈리아 초연을 맡았고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 등 여러 작품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대 후반 뮌헨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피아노곡을 많이 썼으며, 1901년 완성한 레퀴엠 같은 대작도 있습니다. 교향곡은 총 두 곡이 있고, 1번 교향곡은 1881년 완성되었습니다.





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

Piano Quartet No.1 in g Op.1


 - 모차르트의 자녀는 총 4남 2녀였는데, 생후 1년 내에 죽은 네 명을 제외하고 살아서 장성한 자식은 아들 두 명입니다. 그 중 2남인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1784-1858)는 음악 교육을 중도에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막내아들인 프란츠 크사퍼만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 태어났고,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4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프란츠 크사퍼'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유명한 제자 중 하나인 프란츠 크사퍼 쥐스마이어(1766-1803)의 이름과 같은데, 이 때문에 프란츠 크사퍼가 알고보면 쥐스마이어의 자식일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기도 했습니다(사실무근).


 - 어머니 콘스탄체 베버(1763-1842)는 모차르트 사후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과 재혼하였는데, 정식 재혼은 1809년으로 한참 뒤였지만 이미 179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니센은 덴마크의 외교관으로 모차르트의 팬이기도 했는데,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집을 출판할 때 협력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아무튼 콘스탄체와 니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두 사람의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때마침 둘 모두 생부를 닮아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콘스탄체와 니센은 이들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프란츠 크사퍼의 경우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음악적 재능은 동생이 더 많았는지, 중도에 음악을 포기한 형에 비해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못지않은 재능을 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옥죄었는지 이후 프란츠 크사퍼의 음악은 아버지 시대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 그는 청장년기에는 주로 렘베르크(現 폴란드 리비우)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음악교육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물론 렘베르크뿐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연주와 지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820년대에는 400명의 아마추어 가수로 조직된 '성 체칠리아 합창단'을 결성하여 지휘를 맡았고, 유명 작곡가 50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변주곡 프로젝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1838년 비엔나로 돌아왔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설립식에서 합창 지휘를 맡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들이었으니 모차르테움의 음악감독을 맡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는데, 프란츠 크사퍼가 아버지의 후광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1년부터는 카를스바트(現 체코 카를로비바리)에 거주하면서 교육에 전념하던 중, 1844년 위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상술했듯이 프란츠 크사버가 음악인의 길을 걷는 데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아버지의 후광이 크게 작용한 바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의 이름값이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주는 바람에, 그의 작품세계가 아버지의 그것을 벤치마킹한 수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사후에는 아버지의 명성에 완전히 묻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값에 눌려 살다 보니 인간적으로도 그리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와 비교당하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으며, 성격 또한 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겸손한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담감과 성격 문제 때문인지 평생 솔로 독신으로 살았고 자녀도 없는데, 하필 그의 형도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모차르트의 대는 이들을 끝으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ㅡㅡ;


 - 피아노사중주 1번은 공식 작품 번호가 붙은 첫 작품으로, 11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들으면서, 과연 그가 '모차르트'가 아닌 '프란츠 크사퍼'로서 평생을 살았다면 과연 어떤 음악세계를 보여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짧게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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