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는 한 정치가의 기자회견이 화제입니다. 노노무라 류타로(野々村竜太郎) 효고현 의원의 기자회견인데, 그는 최근 약 300만 엔 정도의 공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 300만 엔은 공무활동비 명목으로, 주로 교통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보고했지만 모 온천에 다녀온 게 100회를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영수증이나 다른 상세한 활동보고도 없어서 논란이 되고 있지요. 이와 관련하여 그는 기자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기자회견에서 노노무라 의원은 괴성을 지르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이며 전 일본인의 어이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현 의원이 되었다" "여러분이 날 뽑아줘서 내가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등의 발언을 쏟아냈지만, 정작 공금유용 의혹에 대하여는 제대로 된 해명을 하지 않았고(...) 결국 천하에 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죠.


기자회견 영상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한지라 그는 단숨에 일본의 합성 필수요소로 등극하게 되는데...


감동적인 버전


노노무라의 숲


F1 버전


기타 연주(...)


피아노 연주(...)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 합주 버전(......)


이게 한국에도 알려지고, 한국에서는 그러잖아도 최근에 정치인 필수요소가 등장했던지라...



(...)


실제로 한국에서는 '일본판 고승덕'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애비메탈(...) 패러디 곡을 올린 뮤지션이 노노무라 의원 영상을 가지고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올리기도 했죠.






부페 크람폰 (Buffet Crampon) 클라리넷의 제작 공정




순서대로
 - 옥토콘트라알토 클라리넷 Eb

 - 콘트라베이스 클라리넷 Bb

 - 콘트라알토 클라리넷 Eb

 - 베이스 클라리넷 Bb

 - 알토 클라리넷 Eb

 - 바셋 호른 F

 - 바셋 클라리넷 A

 - 소프라노 클라리넷 A (통칭 A 클라리넷)

 - 소프라노 클라리넷 Bb (통칭 Bb 클라리넷)

 - 소프라노 클라리넷 C

 - 소프라니노 클라리넷 D

 - 소프라니노 클라리넷 Eb (통칭 피콜로 클라리넷)

 - 피콜로 클라리넷 Ab

 - ??




[1939~2013년의 Habemus Papam. 순서대로 비오 12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이후 바티칸에서는 '콘클라베'라 불리는 절차를 거쳐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데, 후임 교황이 최종 선출되면 선임 부제 추기경이 대중 앞에서 새로운 교황을 소개하게 됩니다. 이를 보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고, 추기경의 발표와 새 교황의 첫 강복('Urbi et Orbi')을 함께합니다. 추기경의 발표는 정해진 대사에 새 교황의 이름, 교황명을 포함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Habemus Papam'은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대사의 양식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경우).

<Annuntio vobis gaudium magnum:

Habemus Papam!

Eminentissimum ac reverendissimum Dominum,

Dominum 'Georgium Marium' Sanctæ Romanæ Ecclesiæ Cardinalem 'Bergoglio',

Qui sibi nomen imposuit 'Franciscum'.>


<매우 기쁜 소식을 발표하겠습니다.

새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지극히 탁월하시고 공경하올 분,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이십니다.

이분은 자신을 '프란치스코'로 명명하셨습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 - 1643)는 만토바 궁정과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시기적으로는 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과도기를 지낸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형성기에 있던 가극(오페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작품 중 <오르페오>는 근대적 오페라의 효시로 유명합니다.

<오르페오>는 1607년 만토바 궁정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그 무렵 만들어진, 가곡의 전신이라 할 형태의 연극들에서는 매우 소규모의 악기편성이 동원되었고 음악은 보조적인 역할을 맡는 것이 보통이었던 데 비해, 만토바 궁정의 많은 음악가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몬테베르디는 <오르페오>에서 관현악단만 4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편성을 통해 음악을 중요한 위치에까지 올려놓습니다. 단 이때까지는 '모노디(monody, 통주저음 반주를 포함한 독창 형식)'로 대표되는 '가사 우위'의 원칙이 살아있었고, 가사와 음악 중 어느 쪽이 중심인가 하는 문제가 이후 오랜 기간 서양음악의 중요한 떡밥이 되죠.

바로크 시대 초기의 음악인 만큼, 고전파 이후 오케스트라에서 사장된 여러 악기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리코더라든지, 비올족 현악기라든지.




구소련의 록 그룹 KINO의 8집 앨범에 수록된, KINO를 대표하는 명곡.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장기화로 침체에 빠져 있던 소련의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데, 전장에 끌려가는 한 병사의 목소리로 전쟁이 아닌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보컬인 빅토르 최(초이)의 중저음 보컬이 일품. KINO와 빅토르 초이는 당시 소련의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1990년 의문의 교통사고(KGB의 음모라는 설이 있음)로 세상을 떠난 빅토르 최는 지금까지도 구소련-러시아 대중음악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최근 게임 GTA4의 BGM으로도 수록되어 새삼 화제가 되었습니다.


<1절>

Теплое место, но улицы ждут
(쬬플라예 몌스따, 노 울리쯰 쥐둣)
따스한 곳에서도 거리는
Отпечатков наших ног.
(앗피찻꼬프 나쉬흐 녹)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네.
Звездная пыль - на сапогах.
(즈뵤즈드나야 쁼 나 사빠가흐)
군화 위에는 - 별의 먼지가 있네.
Мягкое кресло, клетчатый плед,
(먁까예 끄례슬라 클롓챠띄 쁠롓)
아늑한 안락의자의 격자무늬 덮개에는
Не нажатый вовремя курок.
(녜 나좌띄 보브리먀 꾸록)
제 때에 당기지 못한 방아쇠가 있네.
Солнечный день - в ослепительных снах.
(솔녜치늬 젠 바슬례삐쳴늬흐 스나흐)
눈부신 꿈속에서 - 햇볕 내리쬐는 날이여.

<후렴>

Группа крови - на рукаве,
(그루빠 끄로비 나 루까볘)
혈액형이 - 소매 위에,
Мой порядковый номер - на рукаве,
(모이 빠럇코븨 노몌르 나 루까볘)
나의 군번이 - 소매 위에,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в бою, пожелай мне:
(빠졜라이 므녜 우다취 바유 빠졜라이 므녜)
전장에 뛰어드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오.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니 아스땃쨔 베따이 뜨라볘)
이 풀밭에 남게 되지 않기를,
Не остаться в этой траве.
(니 아스땃쨔 베따이 뜨라볘)
이 풀밭에 남게 되지 않기를.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пожелай мне удачи!
(빠졜라이 므녜 우다취, 빠졜라이 므녜 우다치)
행운을 빌어주오, 행운을 빌어주오!

<2절>
И есть чем платить, но я не хочу
(이 예스찌 쪰 쁠라치쯔 노 야 녜 하추)
치를 수 있는 어떠한 대가로도
Победы любой ценой.
(빠볘듸 류보이 쪠노이)
승리는 원치 않는다오.
Я никому не хочу ставить ногу на грудь.
(야 니까무 니 하추 스타비쯔 노구 나 그루찌)
내 발로 누군가의 가슴을 밟고 싶지 않기에.
Я хотел бы остаться с тобой,
(야 하쪨 븨 아스땃짜 스 따보이)
나 너와 함께 할 수 있더라면,
Просто остаться с тобой,
(프로스따 아스땃짜 스 따보이)
단지 너와 함께 할 수 있더라면,
Но высокая в небе звезда зовет меня в путь.
(노 븨소까야 브 네베 즈볘즈다 자뵷 미냐 브 뿌찌)
그러나 하늘 높은 곳의 별[소련군 고위 장교를 의미]
이 내게 가라 하네.




 -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이후 급격하게 미쳐돌아가기 시작한 일본은, 무리한 팽창정책이 화를 불러와 1940년대에 이르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라는 양면전쟁의 구도 속에 스스로 빠져들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유럽의 웬만한 국가와 1:1로 붙어도 이기기 힘들 정도였음에도, 그야말로 폭주하듯이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거대국가에 선제공격을 가한 일본은 각각 초반에는 그나마 좀 앞서나가는 듯하다가 이내 압도적 국력차에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한 데는 고질병이었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알력다툼이 한몫 했습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일본 육군-해군 간 반목은, 당시 독립된 군체계가 아니었던 항공전력을 따로 구성하여 운영하고 육군이 항공모함잠수함 부대를 운영한다거나, 타 군의 전략을 스파이를 통해 '알아내야' 했을 정도...... 육군 주도의 중일전쟁이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자, 이를 의식한 해군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게 태평양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여기엔 미국이 적극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 일본 측의 오판이 겹쳐 있기도 했습니다.


 -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항모전단이 궤멸당한 이후, 비행기의 자폭공격을 골자로 한 특공작전이 발동됩니다(이것이 바로 '카미카제'). 물론 이미 해상이든 항공이든 미군에 압도당하게 된 일본군으로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하긴 했지만, 이러한 자폭공격은 결국 그나마 남은 전력과 숙련된 군인들마저 무의미하게 소모한 결과 일본이 더 빨리 망하는 데 기여할 뿐이었죠.


 - 비행기만으로는 부족해지자 일본군은 아예 자폭 그 자체를 목적으로, 그것도 여러 종류의 병기를 개발하게 되는데...


 #1. MXY-7 "오카"



 - 기존의 비행기들이 아까웠는지 일본군은 자폭용 비행기를 개발합니다. 아니, 비행기라고 보기도 좀 그렇습니다. 사진만 봐도 잘 날게 생기진 않았는데, 이 비행기(?)는 혼자 이륙하지도 못하고, 빈약한 로켓엔진 하나만 달랑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날아다닐까요? 공격기나 폭격기 등을 모기(母機)로 삼아 함께 이륙하고, 목표에 가까워지면 떨어져 로켓엔진을 가동하며 엔진이 꺼진 이후로는 활공을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대략의 운용 형태)


 - 이것만 해도 심각한데, 자폭공격이 그나마 성공하기라도 하려면 일단 모기가 격추당하지 않고 목적지에 접근하고, 모기에서 떨어진 오카가 격추되지 않고, 동력조차 꺼진 이후에는 신의 조종능력으로 목표에 정확히 갖다박아야 합니다. 과연 공격에 성공할 수는 있을까요?...... 실제로 '오카'는 총 10여 회 출격에 모기와 오카의 승무원을 합하여 400여 명 이상이 전사했고, 전과는 미군 구축함 1척 격침에 그칩니다. 아무튼 탄두 자체의 위력은 대단했으니, 미군은 여러 의미를 담아 오카를 '바카(바보) 밤'이라고 불렀다는군요.


 #2. 가이텐



 - 공중으로는 부족했는지 수중에서도 자폭병기가 개발됩니다. 가이텐의 모체인 '93식 어뢰'는 일본이 그나마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산소어뢰'입니다. 그런데 산소어뢰 자체가 전쟁 후반에는 사장된 기술체계였고 이 무식한 크기를 자랑하는 어뢰 또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바로 이것을 개량하여 조종실(!!!)을 만들어 놓은 것.


 - 가이텐은 본래 자폭병기는 아닐 예정이었는데, 일정 거리까지 접근하면 진로를 고정시키고 조종사가 탈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부의 높으신 분들은 위력을 키우라고 요구했고, 가뜩이나 큰 어뢰가 더 커지면서 가이텐은 끝까지 조종을 하지 않으면 똑바로 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결국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기존의 설계고 뭐고 자폭병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산소어뢰가 사장된 것은 특유의 민감한 성질을 비롯한 이런저런 문제 때문이었는데, 특히 이놈은 오래 추진하면 유독가스가 발생하여 조종사를 질식(!!)시키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장거리 주행은 어림도 없었고, 목표에 가까이 접근에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거기에 억지로 달아놓은 조종실은 지나치게 비좁았고, 조종 자체도 무진장 어려웠다고......


 - 어쨌든 1944년 말부터 가이텐은 실전에 투입되어 함선 4척 격침, 2척 대파(大破)라는 눈물나는 전과를 올립니다. 가이텐은 한자로 '回天'이 되며 '국면을 좋게 전환시킴'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그냥 조종사를 하늘로 돌려보내버리(?)는 병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3. 신요



 - 이것은 자폭용 보트입니다. 모터보트에 대량의 폭약을 싣고 돌진하는 일종의 '화공선'이었는데, 문제는 <삼국지연의> 정도에서나 나오던 화공선이 20세기 한복판에 등장했다는 것.


 - 아무래도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치 않다보니 무려 6,000여 대가 만들어졌는데, 누가 made by 일본군 아니랄까봐......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일단 작은 보트에 300kg이나 되는 폭약을 달아놓았으니, 파괴력은 좋겠지만 기동성에는 쥐약이었고 무게중심도 맞지 않아 조종하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 수천 대나 만들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전과가 알려진 것은 없고, 연합군의 상륙전에서 일부 활용된 적이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일본군은 자폭용 잠수함 '카이류(海龍)', 인간 기뢰 '후쿠류(伏龍)' 따위의 다양한 자폭병기를 개발했지만 (다행히도) 이것들은 실전에 활용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이 외에도 대전차 죽창(!!)이니 인간지뢰(!!!)니 하는,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자폭병기들은 정작 본전치기조차 하지 못한 채 일본의 명줄을 재촉하는 역할이나 하게 됩니다.


 - 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자폭특공을 매우 즐겨 지시한 도미나가 교지(1892-1960)입니다. 62회에 걸쳐 특공을 명령하여 약 400여 대의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날려먹은 그는 정작 위기 상황에서 적전도주를 감행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꼴통으로 유명한 일본군 수뇌부도 이것까진 봐주지 못하겠던지 그를 만주 관동군 장교로 좌천시켜버렸을 정도. 그에 비하면 실제 자폭공격에 투입된 이들의 모습은 차라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대일본제국 카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작전이다. 자살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전제주의 국가다운 발상이다. 이런 짓으로 반짝 효과를 볼 수야 있겠지만, 패전을 막을 수는 없겠지." - 특공대원 우메하라 유지. 전사.



[원문 작성일 : 2013. 5. 2. 예전 티스토리 블로그]

 

 - 한 차례의 침체기와 관중 세대교체를 거치며 많이 바뀌었다지만 초창기 프로야구의 응원문화는 때로는 유럽축구의 훌리건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살벌했던 바 있습니다. 경기장에 이물투척은 예사요, 술 취한 관중의 그라운드 난입은 심심하면 벌어졌고, 마산구장에서 있었다는 '투수 새총 저격사건'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곤 하죠. 30년간의 기술력 상승으로 새총이 레이저로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응원팀의 패배에 분노한 홈팀 팬들이 원정팀 버스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입니다.

 

(사진 1 :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 

 

 - 1990년 8월 26일, 막바지 여름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날 잠실구장에서는 관중난동의 T.O.P라 불릴만한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 이 날 잠실구장에서는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 해까지 4연속 우승을 하였지만 시즌 초반의 부진으로 간신히 4강권에 턱걸이하고 있던 해태, LG그룹의 팀 인수 후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를 달리고 있던 LG의 경기는 당연히 큰 관심을 끌었고, 전통(?)의 강호와 신흥 강호라는 라이벌 구도가 새로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이거즈의 수도권 원정경기에는 홈 팬에 필적할만한 원정 팬이 몰리고, 이 날 역시 경기장을 가득 채운 양 팀 팬들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한껏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 초반 양 팀 선발투수인 김용수(LG)와 신동수(해태)의 호투로 경기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의 긴장 속에 이어졌습니다.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7회. 6회에 3점을 내 먼저 앞서간 LG의 공격에서 해태의 투수진은 주자의 도루저지에 실패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 7회에만 무려 7실점을 허용하고 맙니다. 세븐 갤러리가 털립니다 지고는 있었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고 경기를 지켜보던 해태 팬들은 투수진의 멘붕 앞에 덩달아 멘붕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투수진을 아끼기 위해 경기를 사실상 포기하고 2진급 투수들을 기용한 코끼리김응룡 감독의 용병은 해태 팬들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맙니다. 

 

 - 7회 말 LG의 공격이 끝나자 어느 술 취한 해태팬이 그라운드로 난입했고,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곤봉 등으로 구타, 이를 지켜보는 해태팬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8회 초 해태의 공격이 시작된 9시 12분, 원정측 관중석에서 500여 명의 관중이 그라운드로 우르르 밀려들어옵니다. 삽시간에 그라운드를 점거해버린 이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대놓고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베이스와 광고들을 떼어내고 거기에 불까지 지릅니다. 이 혼란 속에서 홈 팀 관중 한 명이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던 관중의 머리를 철제의자로 가격, 체어샷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맙니다. 물론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이긴 했지만



 - 이를 시작으로 잠실구장은 거대한 콜로세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라운드를 점거한 해태팬과 주로 스탠드를 지키던 LG팬 사이에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대 혈투가 벌어집니다. 음료수캔이나 소주병은 말할 것도 없고, 관중석의 의자를 뜯어내는 등등 경기장 내의 모든 기물들이 던져지고 휘둘러지는 광경이 벌어집니다. 관중들은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각목이나 철제의자들을 무기로 사용하기도... 사태를 도무지 수습할 수 없었던 구단측에서는 분위기를 좀 가라앉히려 전광판에 태극기를 띄우고 스피커로 애국가를 틀어대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

 

(사진 2 : 애국심 X까.jpg) 

사진 출처 :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30118152706823

 

 - 결국 혼란은 무장경찰 3개 중대가 긴급투입, 그라운드의 관중들을 몰아내며 가까스로 수습됩니다. 앞서 과잉진압 논란을 낳았던 경찰은 이번에는 난동이 벌어진 후 30분이 넘게 지나서 투입, 늑장대응 논란도 함께 낳게 됩니다. 간신히 혼란을 진압하고 그라운드를 대충 정리한 후  경기는 1시간 7분이 지난 10시 19분에 속개, 별다른 이변 없이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사진 3 : 청룡언월도?)

 

(사진 4 : 체어샷!) 

 

 - 후폭풍은 거셌습니다. 난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관중들이 대거 연행, 이 중 19명이 구속되고 11명은 집행유예까지 선고받았습니다. 외국 언론에도 오르내리며 대통령이 직접 사태의 해결을 지시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고, 야구팬의 폭력적인 응원문화 또한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죠. KBO에서는 반복되는 관중 난동을 방지하기 위해 지정좌석제 도입을 검토하는 등 묘안을 찾고자 골몰하지만, 90년대 말까지 이러한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 이러한 경기장 내 폭력을 없애지 못했던 것은 한국프로야구의 형성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신군부 독재정권이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자 프로스포츠를 적극 도입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프로야구의 도입은 본질적으로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지역연고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각 지역 대표구단들 사이의 경기는 지역감정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 자기들에게 던질 돌을 경기장 내에서 던져대게 만들었으니 독재정권으로서는 꽤 성공한 전략이었을지도? 실제로 이러한 과격성은 당시 어느 팀 팬덤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5 :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흥분한 빙그레 팬들이 빙그레 선수단 버스를 박살내기도 했다) 

 

 - 이러한 관중 난동은,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대 말 IMF 등의 요인으로 프로야구 관중이 크게 줄어들며 점차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1999년 플레이오프 7 차전에서의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호세 고간 명중사건 등 몇몇 사건들을 마지막으로 대규모의 관중 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2010년대 들어 프로야구의 인기는 예전을 능가할 만큼 높아졌지만 그와 함께 관중의 세대교체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며 응원문화 자체가 전체적으로 예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물론 2011년의 문학구장 소요사태를 보자면, 폭력성 자체는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도 싶지만...

 

(사진 6 : 대한민국의_흔한_캠프파이어.jpg) 

 

 - 독재정권과 지역감정에 기대어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이제 그러한 요소들과는 별 관계없는 관중들로 경기장을 꽉꽉 채울 수 있을만큼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합니다. 물론 당시의 극성맞은 응원문화를 그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폭력과 지역감정이 난무하던 시절보다는 응원하는 재미는 좀 덜해도 순수하게 야구를 즐기기에는 더 좋아진 지금이 그나마 낫지 않겠는가... 하는 게 글쓴이의 생각입니다. 물론 지금도 선수에 대한 욕설이나 관중난입 정도는 존재한다지만, 그라운드가 물병과 맥주캔으로 뒤덮일 일이 별로 없게 됐다는 게 어딥니까. 

 

참고 1 : http://sports.media.daum.net/baseball/news/breaking/view.html?newsid=20130118152706823

참고 2 :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E%A0%EC%8B%A4%EA%B5%AC%EC%9E%A5%20%ED%8C%A8%EC%8B%B8%EC%9B%80%20%EC%82%AC%EA%B1%B4 (엔하위키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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