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하이든]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말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를 넘어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대작곡가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1809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질 법도 했지만,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도중으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신나게 털리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ㅡㅡ; 큰 행사를 벌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 거기에 하이든 본인의 유언도 있고 하여, 시신은 간단한 장례 이후 비엔나 구역 내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치됩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 1820년, 하이든의 옛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하이든의 시신을 이장하여 자신들의 가문 묘지에 안치하기로 결정하고 무덤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은, 머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하이든의 반쪽짜리 시체였습니다.



1. 누구의 짓인가?


 - 당연하게도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시 가문의 수장 니콜라우스 2세(1765-1833)는 범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이전부터 나돌던 소문을 바탕으로 요제프 칼 로젠바움(1770-1829)과 요한 네포무크 페터(?-?)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로젠바움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비서였고, 하이든이 결혼을 주선한 적이 있을 만큼 그와 친분이 있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 당연히 니콜라우스는 로젠바움과 페터의 집을 수색하여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아나섰지만, 로젠바움의 부인 테레제 가스만(하이든에게 소개받은 그 사람)이 두개골이 숨겨진 매트리스를 깔고 앉아 버티는 바람에 찾아내는 데 실패합니다. 이후에도 니콜라우스는 로젠바움을 계속 추궁하고, 결국 사실을 실토한 로젠바움은 두개골을 니콜라우스에게 전달하는데 이게 또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ㅡㅡ;


 - 1829년 로젠바움이 사망하면서부터 하이든의 머리는 기나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단 범행 동료인 페터에게 머리가 전달되었고, 이후에는 그의 주치의 칼 헬러, 그 다음에는 의사 겸 병리학자인 칼 폰 로키탄스키(1804-1878)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사방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1895년에는 비엔나 악우(樂友)협회가 하이든의 머리를 기증받고, 협회 내에 전시하기에 이릅니다.



2. 왜 그런 짓을?


 -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선 골상학(骨相學, Phrenology)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는 근대 의학의 태동기에 유행한 분야로, 현재는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뇌 각 부분의 지능이나 정신작용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연구자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부류가 범죄자와 천재의 두뇌였습니다.


 [골상학은 현재는 유사과학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 하필 로젠바움과 페터는 이 골상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에게 음악천재 하이든의 두뇌는 최고의 연구재료였던 것입니다. 하이든이 매장되고 며칠 후 두 사람은 묘지 관리인들을 매수한 후, 하이든의 머리를 도굴하여 빼돌렸던 것입니다. 페터는 실제로 하이든의 뇌를 연구해본 후 "음악과 관련된 부위가 매우 발달해 있었다"고 말했다는데, 과학적 신빙성은 저 너머에.


 -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는, 천재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으면 자신과 자손들이 천재가 된다는 이상한 미신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예술가들은 사후 머리를 도난당하기 일쑤여서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베토벤 역시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친구들이 밤새 묘지를 지킬 정도였고, 매장지가 알려지지 않은 모차르트의 경우 매장에 참여한 인부에게 도굴을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3. 머리를 되찾기까지


 -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받은 가짜(?) 머리가 진짜인 줄 알았고, 그 사이 하이든의 진짜 머리는 비엔나 악우협회에서 방문객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새로운 당주 파울(1901-1989)은 머리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었고 하이든의 머리를 되찾아 온전한 유해를 안치할 계획을 세웁니다.


 - 이러한 계획에 따라, 하이든 탄생 200주년인 1932년에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젠슈타트의 교회에 하이든을 위한 영묘를 만들고 비엔나 악우협회에 머리의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악우협회의 비협조 속에 사태는 법정싸움으로 번졌고, 이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분쟁은 한참 동안이나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 결국 1954년에야 모든 소송이 마무리되고, 하이든의 머리는 죽은지 145년만에야 자신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하이든의 시신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대한 추모행사와 함께 영묘에 안치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간 하이든의 몸과 함께한 가짜 머리 또한 함께 안치되어, 현재 하이든의 시신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군요.



 [하이든이 안치된 영묘]


참고자료 :

영문 위키피디아 "Haydn's head"

정준극씨 블로그 "하이든 머리 수난사건" 



1. LED가 뭔데?

 

- LED(Light Emitting Diode), 한국어로 '발광 發狂 말고 다이오드'입니다. '다이오드'라는 명칭이 붙은 걸 보니 반도체 소자의 일종이고, 그 중 빛을 내는 성질을 가진 특정 종류의 소자를 의미합니다. 최근 LED 이야기가 사방에서 나오는 것은 이 특이한 소자의 발전이 빛을 다루는 전반적인 분야에 큰 변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LED가 일종의 반도체 소자라고 말했으니 여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 봅시다. 일단 '반도체'란 말을 많이 쓰지만 이게 대체 뭔가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죠. 일단 반도체는 도체(전기가 통함)와 부도체(전기가 거의 통하지 않음) 사이의 물질이라고 흔히 정의됩니다. 이들은 보통 14족 원소들인데, 전자의 개수와 전자가 없는 빈 칸의 개수가 같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 중고등학교 과학 지식을 가지고 이해를 해 봅시다. 주기율표에서 '족'이란 최외곽 전자 개수와 관계가 있죠. 14족 원소들은 최외곽 전자 개수가 4개이고, 여기엔 전자가 8개까지 찰 수 있으니(물론 큰 원소들은 최외곽 전자가 18개까지 차겠지만 우린 거기까지 가지 않을 겁니다) 전자 4개에 빈 칸 4개가 있는 셈이죠. 이들 빈 칸을 일반적으로 '정공(혹은 양공)'이라 합니다.

 

 - 순수한 14족 원소는 전자와 정공의 수가 같기 때문에 별 일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순물이 섞여 전자와 정공의 개수가 바뀌면 상황이 달라지죠. 전자가 더 많아지면 남는 전자는 정공을 찾아다닐 것이고, 정공이 많아지면(전자가 적어지면) 남는 정공들은 전자가 들어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게 됩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두 물질을 붙여놓은 다음 거기에 전류를 흘려보냅니다. 전류가 흐른다는 건 전자가 이동한다는 것과 동의어니까, 이를 이용하여 두 물질 사이에서는 전자가 정공을 찾아다니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전자는 한 쪽에만 많이 있지 않았나요? 그래서 실제로 두 물질 사이에서 전자는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반도체 소자의 기본 원리입니다.

 

- 두 물질 중 전자가 많은 쪽은 전기적으로 음성(-)을 띠기 때문에 N형(Negative), 정공이 많은 쪽은 (+)를 띠므로 P형(Positive) 반도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당연히 전류는 P형→N형으로 흐르죠. N형과 P형을 하나씩 붙여놓은 것을 '다이오드', 번갈아가며 세 개를 붙여놓은 것을 '트랜지스터'라 합니다.

 

- 그런데 전자는 이동하면서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고, 몇몇 종류는 이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방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LED입니다. 여기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은 일정한데, 빛에서 에너지의 양은 파장의 길이와 관련이 있고 파장의 길이란 빛에서는 바로 색깔이죠. 특정한 물질로 LED를 만들었을 때 특정한 색의 빛이 나온다는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자세히 설명하려면 Energy Band Gap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어려우니 생략).


[대충 이런 원리]


 

2. LED 개발의 역사

 

- LED의 원리 자체는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영국의 엔지니어 헨리 조셉 라운드(1881-1966)는 진공관 다이오드의 대체물질을 연구하던 중 특정 재료에 전류를 흘려보낼 때 빛이 방출되는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학술지에 소개하였습니다. 다만 라운드의 전공 분야가 이 쪽이 아니기도 해서 그는 이걸 소개만 하고 끝내 버렸고, 이후 몇몇 학자들의 관련 연구만 진행되었습니다.

 

- 1950년대 이후 반도체 소자가 개발되고 관련 지식이 쌓이면서, 발광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가시광선을 방출하는 소자를 개발하여 실제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였고, 마침내 1962년 닉 홀로니악(1928-)이 GaAsP(갈륨+비소+인)을 이용한 적색 LED를 개발하여 최초로 실용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황색, 황록색, 주황색 등의 LED가 속속 개발되어 LED 실용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등에서 흔히 보는 단순한 색의 전광판이 바로 초기 LED의 대표적인 활용 사례죠. 그런데 LED의 활용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청색 LED가 실용화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물론 청색 LED의 개발 자체는 초창기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실제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효율적인 소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LED 사용 확대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1994년 나카무라 슈지(1954-), 아마노 히로시(1960-), 아카사키 이사무(1929-) 등이 GaN(질화갈륨)을 이용한 새로운 청색 LED를 개발하며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녹색 LED도 곧 개발되었습니다.

 

- 이게 왜 중요하냐면, 청색-녹색 LED가 개발되면서 드디어 빛의 3원색을 모두 LED로 구현하게 되었고, LED로 백색 빛을 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LED를 조명이나 영상화면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부터죠. 그 중요성이란 이 세 명의 과학자가 함께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3.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

 

- 일단 생각나는 곳은 바로 전광판. 간단한 글자와 그림을 표현할 수 있는 LED 전광판은 꽤 오래 전부터 실용화가 되었고, 일찍부터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황색-적색-황록색을 활용한 전광판이 바로 초창기 LED 기술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물건이죠.


[우리에게 익숙한 LED 전광판]


- LED의 활용도가 폭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청색-녹색 LED 개발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빛의 3원색을 모두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이를 모두 합친 백색 빛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이것은 조명이라든지 디스플레이라든지 등등 빛을 활용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거든요(괜히 다른 색도 아니고 청색 LED 개발자들이 노벨상을 받은 게 아닙니다).


- 이들의 생산이 본격화된 2000년대 이후 LED를 활용한 물건은 우리 주변에서 점차 많아지게 됩니다. 당장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상당수는 집 전등을 LED 조명으로 쓰고 있을 겁니다. 블로거의 집도 책상 조명은 모두 LED 램프를 쓰죠. 그리고 LED 디스플레이(TV나 모니터)가 상용화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건 LCD 액정 뒤에 있는 광원을 LED로 바꾼 것을 이야기합니다.


 

[LED TV의 원리. 일반 LCD TV보다 더 얇게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 그 외에 신호등 조명이 LED로 바뀌기 시작한 건 좀 됐고, 가로등이나 공공건물 조명도 LED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LED 조명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일까요? 우선 LED가 기존 전등에 비해 가진 효율성의 우위 때문입니다. 열이 많이 방출되어 에너지 낭비가 심한 다른 조명과 달리 열 방출이 비교적 적습니다(블로거는 이 글을 쓰면서 책상 스탠드 전구에 손을 30초쯤 대고 있었습니다. 다른 조명이면 바로 화상을 입죠).


- 두 번째 이점은 전구의 수명입니다. 주기적인 전등 교체가 필요한 백열등이나 형광등에 비하여 훨씬 긴 수명을 자랑하죠(다만 반영구적인 것까지는 아니고, 특히 LED 소자는 열에 악하기 때문에 제대로 방열을 해주지 못하면 수명이 다른 전등보다도 훨씬 짧아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 다양한 빛을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 물론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들도 있다는군요. 위에서 말한 열 문제도 그렇고,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현재는 전기 종류를 변환(교류→직류)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열 낭비가 적잖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직 백열등-형광등을 압도할 정도의 효율은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 LED의 가능성을 두고 2000년대 이후 수많은 업체가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아직 기술이나 경험이 부족하고 시장이 '생각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고 있는 등의 이유로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망하는 기업이 많다고 합니다. 과당경쟁이 벌어지면서 가격이 지나치게 빨리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는군요. 관련기사


- LED 조명의 가능성 자체는 분명 거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광합성에 적합한 파장의 빛을 방출하는 LED 조명을 이용한 농작물 재배가 시도되고 있고, 벌레가 특정 파장의 빛을 좋아한다는 특징을 활용한 특수 용도의 조명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시장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측면은 있지만, 앞으로 계속 성장할 분야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Nikolay Yakovlevich Myaskovsky (1881-1950)

Symphony No.25 in Db Op.69


 -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 지방에서 출생한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는, 어려서부터 음악 관련 활동을 했지만 공병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공병 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다만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틈틈이 개인교습을 받다가 스승인 라인홀트 글리에르(1875-1956)의 추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 음악원에서는 아나톨리 랴도프(1855-1914)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를 사사하였고, 동시에 전위적인 모습을 보이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이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 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프로코피에프와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이후에도 오랫동안 친교를 유지하였습니다.


- 1911년 졸업 후 모교 강사와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장교로 재징집당했고,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시기에는 구 제국군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가족들 중 다수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은 붉은 군대에 동참하였고, 1921년 제대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 이후로는 음악교육자로 활동하면서 교향곡을 중심으로 한 작곡 활동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이 무렵부터 작품 성향이 상당히 보수화되었는데, 이 때문인지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별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프로파간다 작품을 발표하는 등 체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시베리아로 피신하였고, 그 와중에도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쟁 후 1947년 '즈다노프 비판' 때는 먀스콥스키 역시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여,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 등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격을 당하고 gg를 선언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받은 스트레스에 암이 겹쳐, 결국 몇 년간의 투병 끝에 1950년 사망하였습니다.


-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기악, 특히 교향곡이나 현악사중주 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가 발표한 교향곡은 총 27곡으로 역대 러시아 출신 작곡가 중 가장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사조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고 오페라나 발레음악을 시도한 흔적도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작곡 성향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 교육자로서도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작곡가 중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나 드미트리 카발렙스키(1904-1987) 등 다수가 구소련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Johan Halversen (1864-1935)

Suite Ancienne Op.31


 - 할보르센은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 지휘자 겸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초년부터 바이올린 연주자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스톡홀름 음악원 졸업 후 콘서트마스터(악장)로 활동하며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하던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다시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베르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 베르겐 국립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 크리스챠니아(현 오슬로) 국립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을 역임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오슬로 음악애호협회 오케스트라(현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대 음악감독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 그는 작곡가로서는 30곡 이상의 오페라와 연극 부수음악, 다수의 관현악곡 등의 작품을 썼으며, 에드바르트 그리그(1843-1907)의 노르웨이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외에도 대중들에게는 헨델의 하프시코드용 파사칼리아를 바이올린-비올라 이중주로 편곡한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Alan Hovhaness (1911-2000)

Symphony No.2 Op.132 <Mysterious Mountain>


  - 본명은 앨런 바네스 차크매키언(Alan Vaness Chakmakjian). 아버지가 아르메니아계였고, 자신의 음악세계 또한 아르메니아 쪽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4세 때부터 작곡을 했으며, 10세 때 이미 2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무대에까지 올릴 정도로 천재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 호바네스는 고등학교 졸업 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1934년에는 핀란드 여행을 하였는데 이 때 장 시벨리우스(1865-1957)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1942년 탱글우드 뮤직센터에서 아론 코플랜드(1900-1990)와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 그의 작품을 강하게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이후 호바네스는 그 때까지의 자기 작품 대부분을 폐기해 버렸습니다.


  - 1948년 보스턴 음악원 교수로 부임하지만, 3년 후 뉴욕으로 옮겨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1955년 초연된 교향곡 2번 <신비로운 산>으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의 지휘로 연주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 위에 언급한 작품 폐기 사건 이후 호바네스는 주로 전통 음악, 특히 아버지의 고향인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10여 년간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메니아뿐 아니라 아시아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일본과 한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을 직접 여행하며 이 지역의 음악들을 직접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 상당한 다작(多作)을 했는데, 작품번호가 붙은 것만 400곡 이상이고 그 중 교향곡은 67곡에 이릅니다. 전반적으로 현대문명의 파괴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 같은데, 197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공포스럽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유럽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특히 스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활동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에는 딱 한 번 방문하였는데 1965년 미국 정부의 후원하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것이 유일합니다.


  - 여담으로 교향곡 16번의 정식 제목은 <한국의 가야금, 타악,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16번>으로, 호바네스는 1963년 아시아 여행 중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전통음악을 접하며 받은 강한 인상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향곡 16번의 초연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1936-)씨와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이루어졌습니다.





- 이 전설적(?)인 시는 중국 출신의 언어학자 자오위안런(1892-1982)이 지은 것입니다. 예술적 의미가 있다기보단, 언어학적인 문제제기를 위해 만든 시라고 하는군요. 한자는 배우고 쓰기가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에 근대 이후로 꾸준히 로마자 표기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자오위안런은 로마자 표기가 현대중국어 구어체(백화문(白話文))에는 적합하지만 전근대 문어체인 한문을 표기하는 데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시는 백화문이 아닌 옛날 한문의 문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문]


石室詩士施氏, 嗜獅, 誓食十獅。Shí shì shī shì Shī Shì, shì shī, shì shí shí shī.
氏時時適市視獅。Shì shí shí shì shì shì shī.
十時, 適十獅適市。Shí shí, shì shí shī shì shì.
是時, 適施氏適市。Shì shí, shì Shī Shì shì shì.
氏視是十獅, 恃矢勢, 使是十獅逝世。Shì shì shì shí shī, shì shì shì, shǐ shì shí shī shì shì.
氏拾是十獅屍, 適石室。Shì shí shì shí shī shī, shì shí shì.
石室濕, 氏使侍拭石室。Shí shì shī, Shì shǐ shì shì shí shì.
石室拭, 氏始試食是十獅。Shí shì shì, Shì shǐ shì shí shì shí shī.
食時, 始識是十獅, 實十石獅屍。Shí shí, shǐ shì shì shí shī, shí shí shí shī shī.
試釋是事。Shì shì shì shì.



[해석(출처 : 위키백과 "시씨식사사")]


석실(石室)의 시인 시씨는 사자를 먹기를 즐겨 열 사자를 먹기로 하니
종종 저자에 사자를 보러 나감이라.
열시에 열 사자가 저자에 오니
그때 마침 시씨도 저자에 있더라.
열 마리 사자를 보고 활을 쏘니 열 사자는 곧 세상을 떠나
열 사자를 끌고 석실로 갔노라.
석실이 습하여 종에게 닦으라 하고
석실을 닦고 나서 그는 열 사자를 먹으려 하는데
먹으려 할제 열 사자를 보니 열 개의 돌 사자 주검이라.
이 어찌 된 일이오.





Vasily Sergeyevich Kalinnikov (1866-1901)

Symphony No.2 in A


 - 바실리 칼리니코프는 러시아의 작곡가로,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곤란을 겪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음악적 재능은 일찍부터 보였지만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년기의 대부분 동안 음악활동과 노동을 병행하며 극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몸을 혹사한 결과 그는 나중에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결핵을 지병으로 얻게 됩니다.


 -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칼리니코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1년 후 음악원을 그만두고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학교로 재입학하는데 여기서는 관현악단 활동을 하면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여기서 몇몇 우수한 스승에게 체계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1892년 학교를 졸업한 후 칼리니코프는 모스크바 마루이 극장의 지휘자로 지원하였는데, 이 때 심사위원이었던 차이콥스키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지휘자로 추천하게 됩니다. 드디어 음악가로서 본궤도에 오르나 했지만 이 무렵부터 결핵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되어, 건강이 악화된 칼리니코프는 지휘자직을 사임한 후 기후가 온화한 흑해 근방으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 그의 작곡 활동은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895년 완성한 교향곡 1번이 러시아를 넘어 전 유럽에 알려지면서 드디어 그는 유명 음악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또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P. 유르겐손(차이콥스키 등을 지원한 모스크바의 출판업자) 등의 후원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그를 가로막은 것은 건강 문제였습니다.


 - 그의 일생에 남은 시간은 단 5년 뿐이었고, 계속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에서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결국 짧은 시간동안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한 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두 개의 교향곡, 미완성 오페라 <1812년>, 톨스토이의 사극에 붙인 극음악 <황제 보리스> 등이 있습니다. 교향곡 2번은 1897년 완성되었습니다.



 -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이하 김성근)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안 좋은 쪽으로. 한화가 김성근을 선임할 때만 해도 2015년 한화의 변화할 모습에 대한 기대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의외라고 할만하죠. 야알못이라 깊은 분석은 어렵고,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생각하며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 김성근은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야구지도자 중 하나입니다. 김응룡 전 감독 정도만이 비교대상이죠. 그런 그가 2010년대 압도적 최하위팀 한화를 맡을 때, 블로거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해 한화가 어떻게든 분명 발전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첫 해에 5강에 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따져보는 수준이었죠. 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분명 전체적으로 보면 한화는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습니다(이는 그동안의 한화가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김성근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아 버렸습니다. 블로거가 보기에도 현재의 김성근은 분명 한화를 망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 글은 그러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1. 김성근, 전형적인 '한국형' 리더


 - 일단 김성근이라는 캐릭터가 왜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표상으로 대접받는지를 생각해봅시다. 김성근의 스타일은 리더가 목표와 실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아랫사람'들은 거기에 절대적으로 따르면 되는, 전형적인 독재자형 리더십이죠('독재자'라는 단어가 입맛이 쓰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쓴 것이지 부정적 의미로 쓴 건 아닙니다).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발전신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명한 지도자(독재자)가 방향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강제적인 통제와 더불어)지시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충실히 따르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현재도 잘 먹힌다는 건 현재의 대통령이 당선된 과정을 보면 명백하고, 그런 사회에서 김성근의 리더십은 가장 이상적인 것임에 분명합니다.

 - 그런데 여기엔 분명한 후과가 따르죠. 독재자형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리더를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탄압, 그리고 리더가 옳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을 때의 후유증을 낳습니다. 김성근이 대단히 인간적이고 아랫사람을 잘 챙기는 지도자인 것은 유명하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스타일의 아랫사람에게는 끝없이 매몰차고 가혹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인 한대화 전 감독의 경우, OB에서 뛰던 시절 질병(A형간염)의 여파로 강훈련을 소화할 몸상태가 아니었음에도 '훈련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김성근의 눈 밖에 나고, 쫓겨나다시피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며 나중에 쌍방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한대화는 김성근의 반대로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한 바 있습니다.

 - 김성근 스타일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양으로 질을 커버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2010년대쯤 되어서는 김성근식 훈련의 강도와 분량이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런 게 일반적이었던 20세기에도 김성근은 선수를 대단히 많이 '굴리는' 감독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선수들에게 다양한 방식의(나쁘게 말하면 별별 희한한 방식의) 훈련을 시키죠. 빠른 성적향상을 위해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시키고,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훈련법은 감독이 직접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방식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건 다들 짐작하실 겁니다.

 - 그에게 '한국적'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링크를 참고.


2. 김성근은 리빌딩형 감독이 아니다


  - 2015년의 한화는 철저한 리빌딩이 필요한 팀입니다. 주전급 선수의 뎁스가 처참할 정도로 얇기 때문에(차라리 선수들 다 팔아치우던 시절의 히어로즈가 더 나아 보입니다. 블로거는 넥센 팬), 일단 선수층의 두께를 키우는 일부터가 필요하고 이건 1~2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넥센이 아직도 이 문제로 허덕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신다면). 이런 팀에는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지도자를 앉혀놓고 한 3~5년쯤은 성적에 연연할 필요가 없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리빌딩이 가능하죠.


 - 김성근은 어떨까요? 분명 김성근은 그동안 이러한 팀들을 맡아 성공적인 육성 능력을 보여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팀들을 맡아 첫 해부터 좋은 성적을 거두었죠. 여기서 '첫 해부터'라는 게 중요. 즉 김성근은 선수를 장기적으로 키우기보다, 단기간에 가능한 한 빨리 선수를 키워낸 다음 그 선수들을 200% 활용하여 최대한의 성적을 거두는 스타일의 감독인 셈입니다. 단기간에 선수를 키워내려면, 결국 훈련의 강도를 최대로 높이는 것밖에 답이 없죠. 김성근 특유의 미친 듯한 훈련량은 상당 부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는 선수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오버페이스'가 됩니다. 6개월 이상 계속되는 페넌트레이스 일정에 강훈련, (투수의 경우) 혹사까지 겹치게 되면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체력 및 근력소모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선수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주게 될까요? 김성근을 변명할 여지가 있다면 적어도 그는 선수의 상태에 대한 세심한 관리를 한다는 점인데, 김성근식 관리는 선수를 최대한 혹사한 후 나가떨어질 때쯤 일정한 휴식을 부여하는 방식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신체가 점점 소모되는 것을 온전히 막지는 못합니다(재료과학에서는 '피로파괴'라고 합니다).


 - 위에서 분석해봤듯이 김성근은 '빨리 만들어서 빨리 써먹는' 타입의 감독입니다. 적어도 먼 미래를 우선시하는 감독은 아니죠. 그가 몸담았던 팀이 그가 나간 이후로 하나같이 성적이 추락하는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팀이 아예 망해버린 쌍방울을 빼고)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프론트나 후임 감독의 삽질이라고만 해석하기엔 곤란할 것입니다. 비록 그가 5년 이상 장기간 재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김성근이 끝까지 책임을 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후임자를 대단히 난감하게 만드는 감독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3. 선수의 특성을 무시하는 방향제시


 - 김성근식 리더십의 다른 문제는 '선수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그의 밑에 있는 선수는 일률적으로 '적당히 날씬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김성근의 강훈련을 거쳐가게 되면 누구라도 살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ㅡㅡ; 최근 프로야구 선수들이 체중을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되면서, 살을 지나치게 찌워 문제가 되는 선수들도 제법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수들을 제외한, 현재 상태로도 별 문제가 없는 선수들까지 강제 다이어트(?)를 하게 된다는 것.


 - 이번 시즌 양훈의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경찰청에서 제대하여 올시즌 한화로 복귀한 양훈은 김성근의 지시로 살을 뺐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우수한 피지컬이 무기인 양훈은 살을 뺀 이후 젓가락이 되어 ㅡㅡ; 구위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시즌 초 버려지다시피 넥센으로 트레이드됐죠. 그런 양훈을 받은 넥센은 김성근과 정확히 '반대로' 가게 됩니다. 짧은 기간 동안 무서울 정도의 벌크업을 통하여, 거의 다른 사람 수준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 이후 양훈은 넥센의 새로운 필승조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많은 걸 시사하죠.


 - 혹자는 선수들 개개인에 맞는 다양한 훈련법을 적용하는 감독이지 않냐고 반론을 제기하실텐데, 그건 그것대로 맞습니다.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건 큰 틀에서, '최대한 많은 훈련과 이를 통하여 강인하고 가벼운 몸 만들기'라는 기본 전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감독에게, 위에서 말한 한대화 같은 선수가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당뇨병 환자였던 심성보 정도일텐데, 김성근이 직접 훈련 스케줄을 따로 짜 줄 정도로 신경을 썼다지만 (본인의 태만 때문이건 어쨌건) 좋은 결과는 내지 못했으니 야만없이라 하겠습니다.


4. 투수혹사 문제에 대한 단상


  - 투수의 수명에 대한 김성근의 생각은 전형적인 일본식 마인드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야구에서는 '투수의 팔은 던지면 던질수록 단련된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투수가 최대한 많은 공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니까 매년 고시엔 대회에서 연일 완투를 거듭하는 고교선수가 나와도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고, 선발 투수가 많은 공을 던져 완투하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는 거죠. 반면 미국은 정 반대로 생각하는데, '투수가 평생 던질 수 있는 공의 개수는 정해져 있다'고 보고 학교야구에서 투수들의 투구수를 철저히 제한합니다. 놀란 라이언이 예찬하는 '롱토스 훈련법'의 경우도 찬반 양론이 거세고, 이를 즐겨 하는 선수들 중 다수가 나중에 구속 저하 증세를 보인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인 쪽으로 여론이 가고 있죠.

 - 이것에 대해 블로거는 뭐라 할 수 있을 만큼의 식견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일본인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 활약하다가 하나같이 드러눕는 게 과연 우연일까 싶기는 합니다.

 - 한국야구로 돌아와 보죠. 20세기의 야구 감독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김성근 또한 팀의 마운드를 우수한 몇몇 투수들에게 최대한 집중시키는 투수 운용을 합니다. 가깝게는 SK 감독 시절 정우람, 전병두, 박희수 등 몇몇 불펜투수가 수많은 혹사 관련 기록들을 만들어냈던 바 있죠. 여기에 대하여는 항상 '김성근은 철저한 관리 하의 혹사를 한다'라는 변명이 따라붙는데, 글쎄요 저 SK 불펜 3인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5년째 재활, 재활과 복귀를 반복, 마침내 퍼져버린 것으로 의심됨)를 생각하면 그 관리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한화의 '살려조'에 대한 우려가 많은 건 결코 과한 게 아닙니다.


5. 결론 - 김성근은, 20세기는 끝났다


  - 지금 시점에서 어떤 욕을 먹더라도, 김성근이 20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는 데 이견은 없습니다. 라이벌 김응룡이 커리어 막판에 웃음후보(?)가 되었음에도 10회 우승 감독이라는 금자탑을 아무도 폄하하지 않는 것과 같죠.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앞으로도 통할 것인가에 대한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 블로거는 김성근에 대하여 '분명 저런 방식이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를텐데 그것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정도의 생각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2015년 이후 한화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여기에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죠. 일단 (안타깝게도) 김성근은 커리어 막판에 김응룡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오히려 시즌 중반 이후 그의 모습은, 그동안 그의 뻣뻣한 이미지를 보완하던 '최소한의 유연성'마저 집어던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성근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성공신화, 발전의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몇몇 투수들의 팔을 제물로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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