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l August Nielsen (1865-1931)

Symphony No.2 Op.16 <The Four Temperaments>

연주 : 하나클랑 졸업생 오케스트라 HALO (2015 정기연주회)


 - 닐센은 덴마크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전반적으로는 신고전주의(구체적으로는 反바그너)에서 출발하여 현대음악과 고전주의 사이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한 음악가입니다. 2번 교향곡의 주제는 고대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인간의 네 가지 기질에서 따 왔는데, 닐센이 어느 선술집에서 이를 표현한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곡에 착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 악장이 하나의 기질을 상징하고 있는데, 각각 'Chloeric(담즙질, 충동적)' 'Phlegmatic(점액질, 나태함)' 'Melancholic(우울질)' 'Sanguine(다혈질'을 뜻합니다.


[후기] 북유럽의 작곡가 중 닐센은 그리그, 시벨리우스에 비해 묻히는 경향이 크지만 그 업적은 크게 뒤처지지 않지요. 블로거가 닐센의 작품을 제대로 접해본 건 이 연주가 처음이었고, 지금 교향곡 2번은 블로거가 즐겨 듣는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1 in C Op.21

연주 : 한국 대학생 연합 오케스트라 KUCO (2014 여름 연주회)


 - 베토벤이 교향곡이라는 형태의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면, 무엇보다 음악회의 보조 음악이었던 교향곡을 음악회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토벤이 1번 교향곡을 완성한 것은 1800년, 나이 30세 때로 그의 선배들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 비해 상당히 늦은 시작입니다. 실제로 그 이전에도 베토벤은 상당히 많은 교향곡 초안을 만들었지만 작품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았으니, 처음부터 교향곡 자체에 큰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번 교향곡은 지금에 와서는 선배들의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는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그래도 나름 새로운 시도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진보적인 음악으로 이런저런 논란을 낳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기] 베토벤 교향곡 입문용으로 괜찮은 작품. 좋게 평가하면 하이든-모차르트의 고전적 스타일과 베토벤 고유의 스타일을 모두 맛볼 수 있고, 나쁘게 평가하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라 할만하죠.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7 in A Op.92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4 봄 연주회),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여름 연주회)


 -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은 5번과 6번 교향곡이 완성된 지 4년쯤 지난 1812년에 완성되었고, 5-6번의 관계와 비슷하게 8번 교향곡과 거의 동시기에 작곡이 진행되었습니다. 동시기의 작품임에도 7번과 8번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른데, 7번의 경우 도취적일 정도로 힘차고 경쾌한 느낌을 전반적으로 주고 있습니다. 작곡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연속된 전쟁의 영향으로 애국주의가 판치고 있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7번의 분위기는 대중들에게 큰 호평을 받아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다만 베토벤 본인의 경우 8번을 7번보다 오히려 더 뛰어난 작품으로 자평했다는군요.


[후기] 베토벤의 교향곡을 더블베이스 연주자는 대체로 싫어합니다. 보통 첼로와 더블베이스는 동일한 음형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첼로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들이 더블베이스에게는 거의 HELL 난이도가 되거든요. 뭐, 블로거는 첼로를 연주하고 첼로에게도 베토벤 교향곡은 어렵긴 하지만 아예 못 해먹을 정도까진 아닙니다. 7번 교향곡은 말 그대로 질주하는 마음가짐으로 연주해야 재미있고,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연주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더군요. ㅡㅡ;





Franz Schubert (1797-1828)

Symphony No.5 in Bb D.485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4 봄 연주회)


 - 변성기가 오면서 국립신학교를 퇴학한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일종의 대체복무 성격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는 초등학교의 조교사직을 맡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일은 그에게 맞는 일이 아니었고, 실제로 그는 교사직보다도 작곡과 음악 관련 활동에 열중하여 수많은 명곡을 만들었습니다. 1816년에는 견디다 못하여 라이바흐 초등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로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고, 결국 아버지와 충돌한 후 집을 나와버리게 됩니다. 교향곡 5번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고, 격동의 시기였음에도 3주 남짓한 기간동안 빠르게 작곡되었습니다. 다만 이 곡의 초연은 슈베르트의 사후인 1841년에야 실현되었습니다.


[후기] 규모가 '너무 작아서' 연주해보기 은근히 까다로운 곡이죠(아무래도 클라리넷이 없다는 게). 2악장은 슈베르트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이 인상적이고, 3악장은 딱 들어도 모차르트의 40번 3악장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옵니다. 또 해 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





Nikolay Yakovlevich Myaskovsky (1881-1950)

Symphony No.25 in Db Op.69


 -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 지방에서 출생한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는, 어려서부터 음악 관련 활동을 했지만 공병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공병 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다만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틈틈이 개인교습을 받다가 스승인 라인홀트 글리에르(1875-1956)의 추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 음악원에서는 아나톨리 랴도프(1855-1914)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를 사사하였고, 동시에 전위적인 모습을 보이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이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 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프로코피에프와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이후에도 오랫동안 친교를 유지하였습니다.


- 1911년 졸업 후 모교 강사와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장교로 재징집당했고,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시기에는 구 제국군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가족들 중 다수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은 붉은 군대에 동참하였고, 1921년 제대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 이후로는 음악교육자로 활동하면서 교향곡을 중심으로 한 작곡 활동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이 무렵부터 작품 성향이 상당히 보수화되었는데, 이 때문인지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별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프로파간다 작품을 발표하는 등 체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시베리아로 피신하였고, 그 와중에도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쟁 후 1947년 '즈다노프 비판' 때는 먀스콥스키 역시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여,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 등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격을 당하고 gg를 선언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받은 스트레스에 암이 겹쳐, 결국 몇 년간의 투병 끝에 1950년 사망하였습니다.


-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기악, 특히 교향곡이나 현악사중주 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가 발표한 교향곡은 총 27곡으로 역대 러시아 출신 작곡가 중 가장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사조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고 오페라나 발레음악을 시도한 흔적도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작곡 성향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 교육자로서도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작곡가 중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나 드미트리 카발렙스키(1904-1987) 등 다수가 구소련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Alan Hovhaness (1911-2000)

Symphony No.2 Op.132 <Mysterious Mountain>


  - 본명은 앨런 바네스 차크매키언(Alan Vaness Chakmakjian). 아버지가 아르메니아계였고, 자신의 음악세계 또한 아르메니아 쪽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4세 때부터 작곡을 했으며, 10세 때 이미 2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무대에까지 올릴 정도로 천재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 호바네스는 고등학교 졸업 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1934년에는 핀란드 여행을 하였는데 이 때 장 시벨리우스(1865-1957)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1942년 탱글우드 뮤직센터에서 아론 코플랜드(1900-1990)와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 그의 작품을 강하게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이후 호바네스는 그 때까지의 자기 작품 대부분을 폐기해 버렸습니다.


  - 1948년 보스턴 음악원 교수로 부임하지만, 3년 후 뉴욕으로 옮겨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1955년 초연된 교향곡 2번 <신비로운 산>으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의 지휘로 연주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 위에 언급한 작품 폐기 사건 이후 호바네스는 주로 전통 음악, 특히 아버지의 고향인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10여 년간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메니아뿐 아니라 아시아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일본과 한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을 직접 여행하며 이 지역의 음악들을 직접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 상당한 다작(多作)을 했는데, 작품번호가 붙은 것만 400곡 이상이고 그 중 교향곡은 67곡에 이릅니다. 전반적으로 현대문명의 파괴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 같은데, 197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공포스럽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유럽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특히 스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활동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에는 딱 한 번 방문하였는데 1965년 미국 정부의 후원하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것이 유일합니다.


  - 여담으로 교향곡 16번의 정식 제목은 <한국의 가야금, 타악,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16번>으로, 호바네스는 1963년 아시아 여행 중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전통음악을 접하며 받은 강한 인상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향곡 16번의 초연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1936-)씨와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이루어졌습니다.





Johannes Brahms (1833-1897)

Symphony No.4 in e Op.98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13 10주년 기념 연주회)


-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브람스의 네 교향곡을 1-2번과 3-4번의 두 묶음으로 나누면, 앞의 두 곡이 비슷한 시기에, 뒤의 두 곡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브람스는 3번 교향곡을 완성한 다음 해인 1884년에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 그 해 여름 휴가에서 앞의 두 악장을, 다음 해 여름 휴가에서 뒤 두 악장을 완성하였습니다. 곡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지나치게 복고적이라는 인식이 있어 발표 초기에는 평이 엇갈렸으나, 반대로 매우 혁신적인 작품이라는 상반된 해석도 존재합니다.


[후기] 브람스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 가장 까다로운 점이라면, 역시 마디의 구분점과 리듬의 구분점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겁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일단 마디수 세는 게 굉장히 어렵고, 곡의 느낌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헷갈려서 연주가 전반적으로 어그러지기 쉽거든요. 연주를 해 보면 자기가 어디를 쫓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 곡 전반에 걸쳐 정신줄을 꼭 잡고 있어야 합니다. 블로거는 이 곡까지 브람스 교향곡 4개 중 2번을 뺀 나머지 세 개를 모두 해 봤습니다. 2번은 언제 연주를 할 수는 있을까요?





Johannes Brahms (1833-1897)

Symphony No.3 in F Op.90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3 가을 연주회)


-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은 1883년 여름~가을에 걸쳐 작곡이 진행되었고, 전작인 2번 완성 후 6년이 지나 만들어졌습니다. 전작 완성 이후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작곡 자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구상해 두었던 이런저런 악상들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브람스는 여름 휴가 동안 곡의 기본적인 틀을 거의 만들었고, 비엔나로 돌아온 이후 관현악 편곡과 소소한 개정을 거쳐 가을에 완성하였습니다. 초연은 같은 해 12월에 한스 리히터(1843-1916)의 지휘로 연주되었고, 상당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후기] 개인적으로는 느린 악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3악장 처음의 첼로 연주는, 첼로 연주자라면 절대 놓칠 수 없죠. 예전에 많이 읽었던 관현악법 교재에서는 이 부분을 두고 "왜 바이올린도, 비올라도 아닌 첼로였을까?"라는 질문으로 썰을 풀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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