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ène Ysaÿe (1858-1931)
Sonata for Solo Violin Op.27 No.2

이자이, 1883년

 외젠 이자이는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입니다(한국에서 이름 표기가 중구난방인데, 프랑스식으로 '외젠 이자이'가 맞다고 하므로 일단 이에 따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사이 가장 뛰어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바이올린곡들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음악과 연관이 깊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자이가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것은 5세 때로,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쳤는데 2년 뒤에는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할 만큼 기량이 성장하였습니다. 다만 음악원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였는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거나 거리 연주자로 나서는 등 독자적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역시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앙리 비외탕(1820-1881)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그의 연주를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브뤼셀 음악원에 입학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음악원에 입학한 이자이는 비외탕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 등 대가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음악원 졸업 후 이자이는 벤야민 빌제 비어홀 오케스트라(現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연주 경험을 쌓은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27세 때는 파리 콩세르 콜론에서 솔로 연주자로 데뷔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모교인 브뤼셀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되어 교육활동에도 나섰는데 루이스 퍼신저(1887-1966),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등의 거장들이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연주자로도 계속 활동하여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특이점이라면 드뷔시, 프랑크, 생상 등 유럽의 수많은 대작곡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가 작곡자의 의도를 훌륭하게 해석하여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반대로 이자이 자신도 수많은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들을 동료 연주자들에게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와중에도 건강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그는 나중에는 연주보다는 작곡, 지휘, 교육 등의 활동에 더 치중하였고,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이 더욱 심해져 1931년 왼쪽 발을 절단하는 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사망한 뒤 브뤼셀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사후 1937부터 그를 기념하여 '이자이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이름을 바꾸어(영국 여왕과는 무관하며, 벨기에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경연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자이의 연주 스타일은 뛰어난 연주 테크닉에 기반한 정확한 연주였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위에 언급했듯이 수많은 작곡가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작품들 또한 자기 실력에 바탕해서 그런지 어렵고 난해한 곡들이 많다고 하며,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은 이자이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를 접하고 감명받아 만들었으며, 특히 2번의 첫 두 마디는 무반주 파르티타 3번의 도입부에서 따 왔습니다. 6개의 작품은 각각 당시의 명 연주자 6명에게 헌정하였는데 2번은 자크 티보(1880-1953)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외젠 이자이",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sound.or.kr/bbs/view.php?id=music3&no=767)
 김미정,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2번> (1923)에 관한 분석 및 연주법 연구」 (dspace.ewha.ac.kr/handle/2015.oak/213515)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작곡자 의도 완벽 해석… ‘헌정받기의 대가’ 이자이", 동아일보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509/84267346/1)
 "Eugène Ysaÿe", "Violin Sonata No. 2 (Ysaÿe)", 영문 위키피디아
 "외젠 이자이", 나무위키



Anton Stepanovich Arensky (1861-1906)

Piano Trio No. 1 in d Op. 32



[아렌스키. 1895년]


 아렌스키는 러시아 노브고르드에서 출생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입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는데 아버지는 의사 겸 첼리스트에,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적 환경 아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그는 9살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18세 때인 187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사사하였습니다.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82년 아렌스키는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 해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교수님은 22살! 이곳에서 그는 차이콥스키를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무렵부터 그는 잦은 폭음을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건강과 수명을 갉아먹게 됩니다. 그는 1895년까지 교수로 재임하며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등 많은 음악가를 가르쳤는데 스크랴빈과는 훗날 음악적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1895년 교수직을 사임한 아렌스키는 밀리 발라키레프의 뒤를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예배당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여 1901년 사임하고, 이후로는 작곡가로서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콜중독과 무절제한 생활의 결과 결핵에 걸려 있었고, 결국 이 때문에 1906년 핀란드 페르크예르비(現 러시아 카렐리야 지방의 키릴로프스코예)에 있는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름 러시아 음악사에서는 이름 있는 작곡가이기 때문인지 1987년 소련은 남극의 한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아렌스키 빙하"). 알렉산더 섬의 베토벤 반도의 보케리니 inlet에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차이콥스키와 쇼팽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차이콥스키의 영향이 커서 <차이콥스키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한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3개의 오페라와 2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수가 있지만 대체로 피아노곡을 비롯한 실내악곡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피아노 삼중주 1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1894년 완성되었습니다.




참고 : 

영문 위키백과, 러시아어 위키백과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1] [2]

http://classictong.com/artist/950




Fanny Mendelssohn-Bartholdy / Fanny Hensel (1805-1847)

Notturno in g



[파니 멘델스존. 1842년]


 파니 멘델스존(결혼 후에는 파니 헨셀)은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인 또한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음악적 활동도 꽤 활발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다만 보수적인 그의 아버지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음악가로 정식 데뷔를 하지 못하고, 평생을 아마추어로 만족해야 했던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멘델스존은 1805년 태어났고,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동생과 함께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생 펠릭스의 재능도 물론 대단했지만, 파니 역시 12세 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마스터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은 동생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동생처럼 그 또한 어린 나이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고, 많은 피아노 관련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초 유럽에서 살아간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는 게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펠릭스가 음악가로 활동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파니의 경우에는 연주활동은 물론 자작곡을 출판하는 것조차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파니에게는 그저 장식용일 뿐이다" 라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ㅡㅡ;


 결국 멘델스존은 이러한 부조리에 저항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타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음악가로 정식 데뷔하는 것을 포기했고, 음악을 아예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추어 음악가로 활동하며 동생의 음악 활동을 돕는 역할에 그쳤습니다. 1829년에는 화가로 활동하던 빌헬름 헨셀(1794-1861)과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동생과 남편만큼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비공식적으로나마 그가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습니다. 특히 동생 펠릭스와는 음악적, 인간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펠릭스는 "나보다 누나의 음악적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도 언급하였습니다. 펠릭스는 파니의 몇몇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도용이라거나 작품을 훔쳤다거나 한 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빌려 누이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것).


 정식 데뷔를 하지 못했을 뿐 그는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460편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이름으로 조금씩 정식 데뷔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1838년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생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것이 알려져 있고, 1846년에는 몇몇 자작곡을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Op. 1이 됩니다.


 이제 정말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세상에 선보일 찰나, 1847년 그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펠릭스는 며칠 뒤에야 누이의 부고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장례식이 끝난 이후였고, 충격에 과로가 겹쳐 몇 달 뒤 동일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한 비슷한 이유로 사망한 것을 볼 때 가족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헨셀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초기 낭만파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동생처럼 다수의 <무언가(無言歌)>도 작곡하였습니다(애초에 무언가 자체가 파니와 펠릭스의 음악적 교감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특히 피아노 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 부분에서는 동생 펠릭스보다도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녹턴은 1838년 작곡되었습니다.



 

Louis Moreau Gottschalk (1829-1869)

<Souvenir de Porto Rico>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


 - 고트샬크는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미국 출신으로는 거의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올리언스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영국 출신의 유대인 기업가였고, 어머니는 이 지역 출신 크리올(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자란 스페인계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뉴올리언스는 다양한 음악적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고, 고트샬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0년 11세 때 뉴올리언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고트샬크는 2년 후 유럽으로 유학하여 파리음악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그의 국적을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요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미국은 문화적으로는 유럽에게 개무시를 당했다고). 그래도 여기서 그는 베를리오즈에게 음악을 배우고 쇼팽, 리스트, 알캉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 실제로 그는 위의 거장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례로 쇼팽은 그의 재능을 두고 "피아노의 왕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는군요.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는 1853년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신대륙을 대표하는 피아노 연주자로 전 대륙을 떠돌며 활동하였습니다.


 - 그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내내 떠돌이로 점철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865년에는 오클랜드 여성신학교의 학생과 스캔들을 내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리는 등 사생활도 썩 깔끔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을 떠난 고트샬크는 주로 중남미 쪽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 중남미 특유의 음악 경향을 받아들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 그렇게 떠돌이 인생을 살던 고트샬크는 1869년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도중 황열병에 감염되고, 얼마 뒤 사망하였는데 키니네(퀴닌) 과다 복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추억>은 1857년 작곡되었으며, 그가 카리브 해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시기에 들은 음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1915)

Symphonic Poem(Symphony No. 4) <The Poem of Ecstasy> Op. 54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스크랴빈은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입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랴빈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숙모에게 양육되었습니다. 숙모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였으며 그는 숙모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 10대에 접어든 스크랴빈은 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여 1889년까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몸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 일단 유년학교 시절에도 스크랴빈은 음악교육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원 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는군요. 결국 그는 군사유년학교를 그만두고 1888년 음악원에 정식 입학하여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 안톤 알렌스키(1861-1906)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 스크랴빈은 피아노 연주자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음악원 시절 라이벌인 요제프 레빈(1874-1944)을 의식한 나머지 과도한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다행히 회복됨). 1892년 피아노과 졸업 학위를 딴 그는 작곡과 학위도 따려고 했지만 작곡 스승인 알렌스키와 작품 스타일 관련 문제로 갈등하였고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하게 됩니다.


 - 1894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얼마 뒤 음악 관련 기획자인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3)을 만나 그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돌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897년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 다시 정착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스크랴빈은 190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는데, 하필 이 때 타티아나 슐뢰저라는 사람과 바람이 나서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아내와는 이혼하고 <법열의 시> 뉴욕 초연이 취소되는 등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고, 19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쇼팽 등의 낭만파 경향을 이어받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히 변화하여, 다분히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음악은 불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는 등 아주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후년에는 음악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하여 1910년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초연 때는 아예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특수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던 스크랴빈은, 1915년 어느 날 윗입술에 생긴 작은 종기(혹은 뾰루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번져 ㅡㅡ;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법열의 시>는 1907~1908년 사이 작곡되었고, 간혹 교향곡(4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이 신비주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작곡가는 같은 제목으로 신비주의적 내용의 긴 시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Paul Dukas (1865-1935)

Symphony in C




 - 폴 뒤카스는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로, 드뷔시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실제로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으로는 상당히 다른 길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파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고,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동생을 출산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아주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고, 14세 때 병에서 회복하는 동안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881년 16세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조르주 마티아스(1826-1910)에게 피아노를, 테오도르 뒤부아(1837-1924)에게 화성학을, 에르네스트 기로(1837-1892)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당시 함께 공부한 학생 중 클로드 드뷔시가 있었고,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평생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 음악원에서 뒤카스는 나름 주목받는 학생으로 음악원 내부 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1888년 로마 대상 콩쿠르에서는 대상 수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이듬해 음악원을 자퇴한 후 작곡가 겸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첫 평론은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한 <니벨룽겐의 반지> 공연의 리뷰였다고 합니다.


 - 작곡가로서는 1892년 초연된 <폴리우크트> 서곡이 본격적인 데뷔작이었는데, 그는 이후 많은 작품을 쓴 모양이지만 워낙 완벽주의자라 많은 곡을 그냥 폐기했고, 세상에 알려진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빡세게 비평했던 모양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은 분명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가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음을 후세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 그의 작품세계는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독일 고전 스타일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프랑스의 음악 정신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라모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간주곡, 종곡>(1903)이 있으며, 유일한 교향곡 C장조는 1896년 작곡되어 이듬해 1월 폴 비달(1863-1931)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총 3악장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Henryk Wieniawski (1835-1880)

Violin Concerto No. 2 in d Op. 22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로, 생전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하였습니다. 파가니니 사후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 앙리 비외탕(1820-1881), 요제프 요하임(1831-1907) 등과 함께 19세기 중후반을 수놓은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로, 작곡가로서는 다수의 바이올린 곡을 남겼습니다.


 -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출생한 비에니아프스키는 여느 대음악가들이 그렇듯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843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그가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그의 재능을 확인한 음악원에서 특별히 입학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졸업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하였는데, 그의 동생이자 피아니스트인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1837-1912)와 함께 하기도 했다는군요.


 - 1847년에는 첫 작품인 <Grand Caprice Fantastique>을 작곡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2세...... 이후로도 그는 연주와 작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활동이 주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860년 그는 이사벨라 햄프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부모가 그의 결혼을 반대하자 <Légende>(Op. 17)라는 작품을 써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그 무렵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1872년까지 10여 년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러시아 음악 협회의 일원으로 오케스트라와 현악사중주 등의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교육 등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1872년부터 2년간은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고, 1875년에는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비외탕의 후임으로 선임되는 등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각지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이 때부터 건강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심할 때는 연주회를 중단해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진행하던 도중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오데사의 병원에 입원했고,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유명한 나데주다 폰 메크(1831-1894)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친구들 등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그는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생전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바이올린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떨쳤고, 그에 걸맞(?)게 그의 바이올린 곡들은 대부분 그 난이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1856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초연은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어졌고, 1879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자 역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연주 :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98. 지휘 :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


Franz Lehar (1870-1948)

Waltz <Gold und Silber> Op. 79


 - 프란츠 레하르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헝가리계 작곡가로, 헝가리식 이름은 '레하르 페렌츠(Lehár Ferenc)'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코마롬에서 출생하였고, 헝가리계인 아버지는 군악대에서 지휘자로 근무했습니다. 프라하 음악원에서 안토닌 베네비츠(1833-1926)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이 때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만나 작곡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받았지만 당시 음악원 규정상 연주와 작곡을 함께 전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규정에 따르면서 작곡을 독학해야 했습니다.


 - 1888년 음악원 졸업 후 레하르는 아버지의 악단에 부지휘자로 합류하여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최연소로 정식 밴드마스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육군 쪽에서 활동하던 그는 중간에 잠시 해군으로 옮겼고, 이 때 첫 번째 오페라를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육군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 1905년 초연한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유쾌한 미망인)>가 큰 호평을 받으며 레하르는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는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고, 오페레타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레하르는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비엔나의 오페레타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고, 큰 명성과 그에 걸맞는 부를 함께 거머쥐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오페레타 뿐 아니라 왈츠, 교향곡 등의 기악곡 또한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 승승장구하던 레하르도 1930~40년대를 풍미한 나치의 격동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출신이 헝가리계였고 심지어 부인은 개종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의 핍박을 받을 처지였지만, 히틀러가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ㅡㅡ; 그는 일단 나치의 탄압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치에 협력하는 모습은 보여야 했기 때문에 그는 히틀러 50세 생일 기념 음악회를 주도한다거나 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 그 와중에 그는 자기 주변에 있던 유대계 인사들을 인종청소로부터 보호하고자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치의 인종청소가 강화되자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 취리히에 머물게 됩니다. 그는 금방 비엔나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지만 망명지에서 자기 아내가 사망하고 유대계 친구들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 비엔나 복귀를 포기하고 종전 후 잘츠부르크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 <금과 은>은 1902년 작곡되었으며, 메테르니히 공주가 주최한 '금과 은' 무도회의 음악으로 위촉받아 만들었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일족의 전통을 따르라는 주문에 레하르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더해 작품을 썼고, 많은 인기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말년의 레하르는 "새로 왈츠를 쓰게 된다면 '금과 은' 정도는 어림도 없으니 <우라늄과 원자폭탄> 이라고 이름을 붙여 볼까?"라는 개드립 농담을 한 적이 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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