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

Etude <Le Festin D'Esope> Op.39 No.12


 - 샤를 발렌틴 알캉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전성기에는 쇼팽, 리스트와 함께 당대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본명은 '샤를 발렌틴 모랑주'이며, '알캉'은 역시 음악가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사용한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파리 음악원 입시를 위한 일종의 음악학원을 운영하였고,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알캉은 유년기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산하여 불과 6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에르 지메르만(1785-1853)을 사사하였습니다.


 - 이후로도 천재성은 가라앉지 않아 파리 음악원을 최우등(프리미에 프리)으로 졸업하였고, 20대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쇼팽, 리스트와 함께 젊은 비르투오소로 거대한 명성을 쌓게 됩니다. 폴란드 출생이지만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쇼팽과는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친구 사이였는데, 쇼팽이 자신의 연주회에 알캉을 초청할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 순조로운 젊은 시절을 보낸 알캉은, 절친 쇼팽이 병으로 요절하고 스승 지메르만이 은퇴한 후 앙투안 마르몽텔(1816-1898)과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알캉은 이후 오랫동안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성서와 탈무드에 천착하는 은둔 생활을 거의 30여 년 가까이 이어가게 됩니다.


 - 은둔 중에도 작곡과 출판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1877년에 비로소 알캉은 봉인 해제 은둔에서 벗어나 연주회를 비롯한 대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습니다. 1888년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였는데, 책장에서 탈무드를 꺼내다가 책장이 넘어지면서 깔려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ㅡㅡ; 다만 이는 약간 후대에 나온 이야기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답게, 알캉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이외에 교향곡 하나와 몇몇 실내악곡이 있습니다. 동시대의 쇼팽과 리스트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근래 와서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앞의 두 작곡가와 비슷하게, 알캉 역시 고난이도의 연습곡을 다수 작곡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Op.39의 12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Gabriel Faure (1845-1924)

<Dolly> Suite Op.56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


 - 가브리엘 포레는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음악교육자로 활동하였으며 20세기 초 프랑스 음악계의 개혁에도 일정 부분 공헌한 인물입니다. 포레는 1883년 조각가 엠마누엘 프레미에(1824-1910)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고 여기저기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그 중 유명한 사례가 엠마 바르다크(1862-1934)와의 불륜염문이었는데, 바르다크는 가수이며 은행가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바르다크에게는 엘렌이라는 딸이 있었고 '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포레는 엘렌을 위하여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만들고 그의 애칭을 제목에 붙였습니다. 이 작품은 이후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습니다.


[후기] 어느 시점부터 (듣거나, 연주하거나를 막론하고) 요란한 작품만큼이나 이런 잔잔한 곡들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글쎄, 그만큼 정신이 성숙해서일지 낡아서(?)일지는 잘 모르겠네요. 따지고 보면 저 둘은 비슷한 말 아니던가? 연주할 때 특별할 건 없는데, 리듬을 꼬아놓은 곡이 몇 있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듭니다.





Alexander Borodin (1833-1887)

Symphony No.1 in Eb


 -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 작곡가, 사회운동가입니다. 사후에는 작곡가로서의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생전의 본업은 화학자로 그의 이름을 딴 화학반응(보로딘 반응. 이후 하인츠(1904-1981)와 클레어 훈스디에커(1903-1995) 부부가 연구를 진전시켜 '훈스디에커 반응'으로도 불림)이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 일단 출생 배경부터가 막장 범상치 않은데, 조지아계 귀족인 아버지와 유럽계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를 수 없어 아버지 소속의 농노의 가문으로 입적하고 그의 성을 따라 '보로딘'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출생 이후에는 어머니가 양육하였으며, 경제적으로 꽤 유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만 당시 가족 중 대부분이 여성이라 어릴 적에는 반(半) 여성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순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군요.


 - 취미로 악기를 배우며 9세 때 짧은 곡을 작곡하였을 정도로 음악에는 재능이 있었지만, 딱히 음악가 쪽 진로는 고려하지 않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화학과 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독일로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던 1862년 발라키레프를 만나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후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는데,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는 틈틈이 작곡을 병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보로딘이 작곡에 투자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활동 영역을 넓힌 후기에 더 심해져 거의 작곡에 신경쓰지 못할 지경까지 갔고, 결국 그가 말년에 작업하던 여러 작품들은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거나 후배 작곡가들의 추가적인 작업을 통해서야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 교향곡 1번은 완성 2년 후인 1869년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호평을 받으며 작곡가 보로딘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보로딘은 곧바로 교향곡 2번과 오페라 <이고르 공> 작곡에 착수하였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논문 표절 논란까지 겹쳐 연구 및 논문 관련 활동에 집중하는 바람에 두 작품은 오랫동안(<이고르 공>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Symphony No.1 in g Op.13 <Winter Dreams>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5 가을 연주회)


 - 차이콥스키의 첫 번째 교향곡은 그가 28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던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법무관으로 진로를 틀어야 했는데, 법률학교에 재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음악원이 신설되면서 그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니콜라이 루빈시테인(1835-1881)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음악원에 재임한 1866년부터 교향곡 작곡에 착수하여 2년 후 완성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1번입니다. 차이콥스키는 각 악장에 각각 "겨울 여행의 몽상" "어둠의 땅, 안개의 땅" "춥고 오랜 여행에 지친 여행자의 꿈" "꽃망울이 열리고"라는 표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나 대체로 고향 러시아를 상징하는 '추운 겨울'에서 온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초기 작품이라 작곡 기법상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초연에서 평이 괜찮았음에도 몇 차례 곡을 고쳐 1875년 출판하였습니다.


[후기] 블로거는 별로 연주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물론 완전 새롭게 연습을 해야 하니 부족한 실력에 고생이 많지만, 그래도 하던 것만 자꾸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이 작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딱 한 번 연습만 해 본 곡이라 어딘가에서 꼭 한 번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Josef Strauss (1827-1870)

Polka <Ohne Sorgen> Op.271


 -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차남으로,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려고 하였지만 군사훈련을 버티기에는 그리 강건하지 못하여, 전공을 수학과 공학 쪽으로 바꾸었고 수학 참고서를 낼 정도로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습니다.


 - 음악가 데뷔는 상당히 얼떨결에 이루어졌는데, 1853년 요한 2세가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자 요제프에게 땜빵(?) 지휘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 교육을 계속해왔던 그는 이를 수락하였는데, 데뷔 무대가 의외의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 슈트라우스 일가의 일원답게 요제프 역시 왈츠 등의 경음악 분야에서 맹활약하였는데, 요한 2세가 "형제 중 최고의 재능은 요제프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공계 쪽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보니 공과대학이나 산업체 등의 행사에서 많은 음악을 의뢰받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음악 스타일 때문이었다는군요.


 - 워낙 인기가 많았다보니 슈트라우스 일가는 모두 과로에 시달려야 했는데, 요제프 역시 과로로 건강을 많이 해쳤고 1870년 폴란드 공연 중 무대에서 갑자기 쓰러져 그 길로 사망했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세간에서는 그의 사인에 대해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심지어 러시아 군인의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설까지 있었다고), 장례와 매장에 관여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일단은 과로사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 283곡의 자작곡 뿐 아니라 편곡한 작품 또한 굉장히 많았는데, 막내동생인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1835-1916)이 형들의 사후 악단을 해체하면서 요제프의 악보 상당수를 폐기해 버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에두아르트 역시 음악가였지만 형들의 명성에 묻히는 경향이 있었고(심지어 자신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여기에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Johann Strauss II (1825-1899)

Waltz <Fruhlingsstimmen> Op.410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왈츠'라는 춤곡 형식은 19세기 유럽을 완전히 평정하다시피 했는데, 당시 유럽의 대도시는 부유층의 무도회로부터 서민의 길거리 음악에 이르기까지 온통 왈츠로 차 있었습니다. 비엔나의 왈츠를 평정한 게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父子)인데,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가 되었으며, 말년의 아버지와 흥행 경쟁까지 벌여가며(요즘도 그렇지만 이런 대결구도는 대중의 관심을 받기 딱 좋았지요) 비엔나 왈츠의 최강자로 군림했습니다. <봄의 소리>는 1883년 슈트라우스가 헝가리로 연주 여행을 갔다가 초대받아 간 저녁 파티에서 거의 즉흥적으로 만들어 다듬은 작품입니다. 본래는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곡이었으며, 이후 관현악용으로 편곡한 버전이 널리 연주되고 있습니다.


[후기] 슈트라우스 일가의 왈츠는 빼놓을 수 없는 앙코르 곡목이죠. BGM으로도 많이 쓰이다보니 귀에 익은 작품들이 많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처음 듣는 왈츠가 쏟아져나올 정도로 많은 작품을 쓴 작곡가들이기도 합니다.





Gioacchino Rossini (1792-1868)

<Guillaume Tell> "Overture"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 흥미롭게도 로시니는 37세 때 <빌헬름 텔>을 완성한 이후 39년을 더 살았지만, 남은 기간 동안 오페라를 단 한 개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서양음악의 성향이 낭만파로 옮겨가고 성악가들의 창법도 변화하면서, 기본적으로 이전 시대의 작곡가였던 로시니가 이에 발맞추지 않은(혹은 못한) 것이라는 게 유력한 추측입니다. <빌헬름 텔>은 스위스 독립과 관련된 '빌헬름 텔'의 전설을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가 쓴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그랜드 오페라(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한 거대규모 오페라)'입니다.


[후기] 역시 첼로파트에게는 곡의 처음에 등장하는, 첼로만의 합주가 기억에 남지요.





Giovanni Sgambati (1841-1914)

Symphony No.1 in D Op.16


 - 스감바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겸 작곡가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트레비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수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약간의 교회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부터 로마로 돌아와 정착하였고, 때마침 1861년 로마로 이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휘자 활동은 독일계 작곡가의 음악을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이 돋보이는데, 베토벤 교향곡 3번과 7번의 이탈리아 초연을 맡았고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 등 여러 작품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대 후반 뮌헨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피아노곡을 많이 썼으며, 1901년 완성한 레퀴엠 같은 대작도 있습니다. 교향곡은 총 두 곡이 있고, 1번 교향곡은 1881년 완성되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