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x Bruch (1838-1920)

<Kol Nidrei> Op.47

연주 :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겨울 연주회)


 - '콜 니드라이'의 어원은 아람어 '콜 니드레(כָּל נִדְרֵי)'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속죄일에 부르는 성가 중 하나로 아람어 단어로는 원래 '모든 서약'이라는 의미이며, '신의 날'이란 '욤 키푸르'라는 속죄일 명칭의 의미입니다. 이 노래는 신(야훼)과 유대인 사이에 맺어진 약속(서약)을 유대인들 자신이 지키지 못한 데 대하여,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브루흐는 평소 각국의 민속음악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지휘하는 합창단의 유대인 단원 하나가 이 성가의 선율을 그에게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속죄일에 부르는 노래답게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좋은 협주곡을 많이 남긴 브루흐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여담으로 브루흐는 유대인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작품 하나 때문에 유대인으로 오인받고 나치 독일 시대에는 그의 작품이 금지곡이 되기까지 했다는군요.


[후기] 소싯적에는 웅장하고 힘차고 신나는 곡을 주로 들었는데,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물론 지금도 그렇게 나이든 건 아닙니......) 경건하고 차분한 작품에도 조금씩 흥미가 붙더군요. 작품의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감상하노라면 듣는 사람의 마음도 차분해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게 참 좋습니다.




Camille Saint-seans (1835-1921)
Symphonic Poem <Danse Macabre> Op.40
연주 :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겨울 연주회)

 - <죽음의 무도>는 중세 말기 이래로 전해진 유럽의 괴담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중세 말기는 흑사병의 대유행 등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고, 이 시기의 예술은 죽음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시체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산 사람을 만나거나 무덤에서 춤추는 모습을 그린 미술작품이 이 시기 이래로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죽음의 무도>라고 합니다. 이는 죽음의 보편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생상스의 이 작품도 그러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데, 직접적인 소재는 앙리 카잘리스(1840-1909)가 쓴 시에서 따 왔습니다. 시에서 따 온 작품이라 처음에는 성악곡으로 작곡하였는데, 이후 성악 파트를 바이올린 독주로 바꾸어 순수 관현악곡으로 만든 버전이 일반적으로 연주됩니다. '죽음'이 주제이긴 하지만, 해골들이 춤추고 노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라 곡의 분위기는 어둡거나 슬프지는 않습니다. 생상스는 이 작품의 선율을 <동물의 사육제>에 살짝 인용하여 써먹기도 하였습니다.


[후기] 이 작품을 언젠가 연주해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입니다(이 작품과 헷갈렸던 듯). 이 작품에서 상당히 인상깊었던 점이라면, 솔로 바이올린이 평소와 다른 음으로 튜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E현을 Eb로 튜닝해야 하는데, Eb 음을 개방현으로 소리내기 위해서지요(이러한 기법을 '스코르다투라'라고 합니다).




Giacomo Puccini (1858-1924)

"Musetta's Waltz" from <La Boheme>

연주 :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여름 연주회)


 - 오페라 <라 보엠>은 푸치니의 네 번째 오페라로 <나비부인>, <토스카>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주세페 지아코자(1847-1906)와 루이지 일리카(1857-1919)가 대본을 썼으며, 원작은 앙리 뮈르제(1822-1861)가 쓴 소설 <보헤미안들의 생활>입니다('보엠(Boheme)'은 '보헤미안'과 동의어). 다락방에서 함께 거주하는 예술가, 철학자들이 겪는 소박한 사건들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 이 작품은 1896년 토리노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초연 때는 언론과 평론가들에게서 혹평을 받았지만 이후 그 진가를 인정받아, 현재는 이탈리아 베리스모(사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제타의 왈츠"는 2막에 나오는 아리아로, 화가 마르첼로 앞에서 그가 사랑하는 무제타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후기] 오페라는 평소 잘 듣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쓸 만한 감상이 별로 없네요. 조만간 여건이 될 때 모차르트와 푸치니, 베르디의 오페라는 꼭 접해볼 생각입니다.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Violin Concerto in e Op.64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


 -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총 2곡이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번은 멘델스존이 유년기에 작곡한 것으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후반에야 재발견). 이 작품은 1843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어 1845년에 초연이 이루어졌으니, 멘델스존이 사망하기 불과 2년 전에 완성된 후기 작품입니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의 작품과 함께 최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걸작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3악장이지만, 각 악장이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후기] 음악을 듣다 보면 작곡가의 인생이 그들의 작품에 얼마나, 어떤 형태로 투영되는가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역대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 중에서 최강급의 금수저(?)였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평생 겪지 않고 산 사람이죠. 그의 음악세계는 고도의 세련미, 편안하고 밝은 느낌으로 정리할 수 있을텐데 아무래도 그가 처한 환경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이건 이전에도 어딘가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




Gioacchino Rossini (1792-1868)

<La Cenerentola> "Overture"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


 - <신데렐라>는 본래 유럽 지역의 전래 동화로, 17세기 이후 여러 작가들이 나름대로 정리, 각색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신데렐라 이야기는 대부분 프랑스를 대표하는 동화작가 샤를 페로(1628-1703)가 쓴 것이며, 특히 20세기에 디즈니 만화영화에 페로가 쓴 줄거리가 채택되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로시니의 오페라 역시 페로의 버전을 기초로 대본을 만들었으며, 로시니는 (늘상 그렇듯이) 마감에 쫓기며 불과 3주만에 전곡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곡은 여주인공 역할을 메조소프라노~콘트랄토에게 맡겼기 때문에 해당 파트의 가수가 드물어진 20세기 들어서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잊혀진 오페라들이 재조명될 때 함께 부활(?)하여 다시 상연되고 있습니다.


[후기] 이 작품을 MP3로 넣어놓고 많이 들어놓고서, 정작 곡 이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ㅡㅡ; 이제 로시니 서곡을 제법 많이 했다보니 이 곡도 전형적인 로시니 것이로구나...... 싶어집니다. 로시니가 고전파-낭만파 중간쯤에 있던 작곡가다보니, 첼로 같은 경우 곡 전반에서 고전파 스타일의 기계적인 부분들이 자주 나옵니다.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Hymnus an das Leben>


 - 프리드리히 니체는 현대 철학의 문을 연 역사적인 철학자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음악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실제로 어느 부분에서는 음악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전문적 음악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왔으며 10대 때의 짧은 시기동안이나마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청년기 이후로는 철학 연구에 집중하느라 작곡에서는 멀어졌지만, 이후로도 음악은 그의 삶이나 사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니체는 1869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교수로 채용되었고, 이 무렵 스위스에 머물며 작곡활동을 하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나게 됩니다. 니체는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바그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여러 해 바그너와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자극을 받았는지, 중단했던 작곡 활동에 다시 손을 대어 몇 개의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 다만 시간이 지나며 니체는 바그너를 차츰 멀리하게 되었는데, 이는 바그너의 사상에서 기독교나 반유대주의 등 니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이 강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웃기게도 그의 사상은 사후 자신의 후처 코지마와 나치의 합작으로 반유대주의 사상인 것처럼 왜곡되었고, 이러한 오해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880년대가 되면 니체는 역설적으로 격렬한 바그너 반대자가 되었고,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등의 저술을 통하여 바그너를 비판하게 됩니다.


 - 1882년경 니체는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루 살로메(1861-1937)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살로메가 자신의 철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반한 니체는 그에게 청혼을 하지만 곧바로 차이고 말았습니다. ㅡㅡ; 살로메의 회고에 따르면, 철학적으로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17세나 연상인데다 이미 이런저런 지병(매독, 사시, 치질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가던 니체는 육체적으로는 도무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다만 두 사람은 철학적으로는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이후 살로메의 동료인 파울 레에(1849-1901)와 함께 '철학적 교류만이 개재된' 3인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니체는 살로메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얼마 뒤 두 번째로 청혼했다가 다시 거절당했으며 결국 동거 생활은 파탄나게 됩니다. ㅡㅡ; <삶을 위한 찬가>는 살로메의 시를 바탕으로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여 작곡한 합창곡으로 1887년 완성되었습니다.




Cesar Antonovich Cui (1835-1918)

<Orientale> for Violin and Piano Op.50 No.9


 - 큐이(혹은 퀴)는 '작곡가'로서는 5인조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생전에는 주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5인조의 활동을 옹호한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또한 그는 보로딘과 함께 자신의 본업을 끝까지 고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큐이는 1835년 비르노(現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망명한 프랑스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 어려서부터 주로 쇼팽 쪽에 흥미를 가져, 폴란드 작곡가인 스타니스와프 모뉴슈코(1819-1872)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잇기 위해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에 입학,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57년 졸업 후에는 모교 교수로 채용되어 수십 년간 재직하였는데, 여기서 니콜라이 2세(1868-1918)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를 교육하였습니다.


 -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큐이는 발라키레프와 만났고, 이때부터 그는 군인으로서의 삶과 함께 음악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둘의 만남은 '러시아 5인조'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1864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도모스티>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글을 남겼고, 이후로 그의 음악적 활동은 주로 음악평론 쪽으로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 다만 큐이는 본업과 음악평론으로 바쁜 와중에도 꽤 많은 작품을 작곡한 다작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주로 가곡과 실내악 쪽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오페라나 관현악곡도 다수 썼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은 (특히 대편성의 관현악에 있어서) 5인조의 다른 인물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으며 5인조 중에서는 민족적 색채도 가장 약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사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으며 <오리엔탈> 등의 몇몇 소품들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큐이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군인(공병)이었고, 특히 축성법(築城法)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관련 연구는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효용성이 입증되었고, 큐이는 이러한 여러 업적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중장까지 진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음악 관련 활동은 꾸준히 이어갔는데, 1897년에는 신진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교향곡 1번에 대혹평을 날려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으로 3년간이나 작곡을 중단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ㅡㅡ;


 - 큐이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힘이 떨어지며, 쇼팽이나 리스트 시절의 실내음악에 머물러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이미 당대로부터)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현악곡이나 오페라는 별로 볼 것이 없으며,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소품이나 실내악에서는 건질 만한 작품이 좀 있다고 평가되며, <오리엔탈>을 비롯한 몇몇 작품이 그나마 알려져 있습니다.





John Field (1782-1837)
Nocturne No.2 in c H25


 - '녹턴(Nocturne)'이라는 단어는 '밤의 기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Noturnus'에서 유래하였는데, 중세부터 쓰여 왔으며 당시에는 예배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후 18세기에 'Notturno'라는 명칭으로, 주로 저녁이나 밤에 연주되는 연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녹턴은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밤의 고즈넉하고 때로는 고독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주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악곡의 장르가 되었는데, 대중에게는 쇼팽의 녹턴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녹턴'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인물은 존 필드입니다.


 -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얼마 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어릴 적에 이미 재능을 보여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에게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대단해서 12세 때 이미 웨일스 공(영국의 왕세자) 주최의 음악회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며, 20세 때는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클레멘티와 함께 전 유럽에 순회 공연을 떠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된 순회 공연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끝났는데, 여기서 필드는 스승과 헤어져 그대로 러시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드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교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녹턴이 만들어졌고, 필드는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 러시아 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반으로 모스크바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821년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주하였습니다. 이 무렵 필드는 상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결과 보드카 알코올 중독이 찾아왔고 자연히 건강도 악화되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1820년대 후반에는 직장암까지 발병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 차원에서 오랜만에 서유럽으로 떠났습니다.


 - 필드는 요양차 서유럽에 와서 겸사겸사 음악 활동도 재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멘델스존 등의 음악가들과도 만나 교류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당시 이미 쇼팽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첫 녹턴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드와 쇼팽을 비교하기도 했고, 쇼팽이 필드의 제자 아니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습니다(음악을 들으면 알겠지만 둘의 스타일은 꽤 다름). 쇼팽은 필드의 음악에 관심은 있었지만, 썩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 서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수술을 받는 등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필드의 건강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폴리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러시아에 있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8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필드는 마지막 몇몇 작품들을 작곡하고 마지막 음악회를 수행한 후, 1837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피아니스트답게 작품 중 많은 수는 피아노곡이며, 그 중에서도 자신이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 녹턴이 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필드의 음악은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간결한 테크닉과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노래'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의 녹턴은 18곡 정도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녹턴으로 보기 애매한 작품이나 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도 있어 작품 수는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1859년 출판된 악보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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