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를 통하여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친일파라 묶어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들을 각각의 '인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친일행위를 한 의도와 목표가 제각각이었으니 이를 면밀히 분석해야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이규완(1862-1946)처럼 '진심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함께 고민해 봅시다. 어차피 역사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이규완, 1930년

 

1. 갑신정변의 행동대원

 이규완은 1862년 서울 한성부 교외(뚝섬)에서 종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친이라고 말은 하지만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수백 년 전 임영대군(세종대왕의 4남)까지 무려 15대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별 의미는 없고, 아버지 이기혁 또한 나무를 파는 행상을 하며 여느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형과 누나, 동생 몇 명이 있다는 정도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9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아버지가 곧 재혼하였지만 계모 또한 그가 1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본적지인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사는 숙부 집에 가서 자랐는데, 나름 큰 뜻이 있었던지 한번은 서울로 올라갔다가 박영효(1861-1939)의 행차를 목격하고는 무턱대고 박영효의 집에 쳐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었지만 그는 하인들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이내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습니다. 면식도 없는 귀족집안에 감히 들이대는 배짱을 높이 평가하였는지, 아니면 그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 박영효는 글조차 모르던 이규완이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게 했고 나중에는 유학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박영효

 이규완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불과 한 살이 많았던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으며 최고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와 친해진 이규완에게도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1883년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2개월간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돌아온 직후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관비(官費)유학생에 선발,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과 도야마 하사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택견의 명수였는데 이 시절에 서재필에게 개인적으로 무예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년 뒤 이규완은 하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병조 소속 무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이 시기 이미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개화파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하였습니다. 총대장은 서재필이었으며 이규완 역시 별동대 대장으로 여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나름 갑신정변의 주축 중 하나였지만 이 시기 그는 정변 지도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 영 미덥지 않아 했다네요.

갑신정변의 진앙지 우정총국

 아무튼 1884년 12월, 거사의 날 이규완은 자신의 별동대를 이끌고 정변에 참여합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별궁 점거 및 방화, 요인 암살 등이었는데 특히 우정총국에서 민영익(1860-1914)을 직접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것이 이규완이었다고 합니다(알려져 있듯이 민영익은 호러스 알렌에게 수술과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집니다). 그렇게 정변의 중요 인물로 활약하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규완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향합니다. 피신 당시 그는 부상을 입은 서광범과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달렸다고 전해집니다.

 

2. 망명생활과 귀국, 다시 망명(무한반복)

 이규완은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망명자들은 자객에게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였다고 합니다. 정변 지도자들은 계속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1894년 김옥균 암살을 주도한 이일직이 일본에서 박영효 등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이규완은 이를 알아내고 이일직을 체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일직을 감금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와중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진행되고 이규완을 비롯하여 생존한 정변 지도자들이 사면됩니다. 이에 이규완 역시 박영효 등과 함께 귀국한 뒤 3품 경무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동학군과 연계하여 시도하려 한 쿠데타 계획에 대하여 경무관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흥선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갑신정변 때 이규완이 민영익의 귀를 벤 일은 유명했던지라, 송병준과 이완용은 이규완만 보면 "X알 간수 잘 해야지" 하는 성희롱농담을 지껄이곤 했다는군요.

 고위 관료로 평탄하게 흐를 것 같던 이규완의 삶은 그의 은인 박영효와 함께 다시 폭풍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는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친러 행보를 우려하여 계획한 암살 미수사건(을미사변 한 달 전 발생한 별개 사건)에 참여하였는데, 이 계획이 누설되어 박영효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변복을 하고 함께 몸을 피하였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다음 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유길준 일파와 일본의 합작으로 정말로 살해당한(을미사변) 뒤 귀국하였지만, 얼마 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건청궁 옥호루

 1898년 그는 조선(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고 이후 한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지원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부의 탄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만 등 활동가들을 포섭하여 고종 폐위 운동을 획책합니다. 고종 황제를 쫓아내고 박영효를 추대하려는 시도였는데 이는 얼마 뒤 발각되었고 이규완은 체포당한 이승만, 이상재 등을 뒤로 하고 또 ㅡㅡ;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이런저런 고종 폐위 음모를 추진하며 비밀리에 한국을 오가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는 없었고 그 와중에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선고까지 받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박영효, 이준용, 유길준 등 망명자의 사면을 제안할 때 그의 이름도 있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여 신변을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당하자 그는 고종에게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연히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3. '진심으로' 청렴했던 친일 관료

 그가 최종 귀국한 것은 1907년으로 그 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비로소 사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통감부의 추천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취임하는데, 처음 그는 "문맹이 관료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양하려 하였지만 글 배웠다며? 통감부의 거듭된 강권에 결국 관찰사 직책과 중추원 찬의 직책을 수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으며 직책명이 도지사로 바뀐 1924년까지 직을 수행한 뒤 퇴임하였습니다.

함경남도지사 재직 시기 이규완

 그는 전형적인 '자치론' 지지자였는데, 다른 유명한 자치론자들과 비교하면 3 · 1운동 이후가 아니라, 병합 직후부터 꾸준히 이런 주장을 반복하였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기왕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상 조선의 주민들을 동등한 일본인으로 대우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조선인 역시 일본에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일본과 총독부의 방침과 달랐으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총독부에 건의를 날렸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후 민원식, 박중양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적 자치론으로 이어집니다.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규완의 경우 자기 자신이 그야말로 철저히 검약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는 그 맥을 달리 합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하고 남은 땟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말고 텃밭에 거름 등으로 활용하게 했고, 평소 어디로 이동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비용을 절약하고자 기차 3등칸을 타거나 싸구려 주막을 이용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시기에는 어떤 사람이 진수성찬을 차려 접대를 하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며 뒷간에 똥통(!!!)을 지고 가서 거름을 옮겨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 이후 사람들이 그를 거창하게 대접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 청렴함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리기에 이릅니다.

이규완의 사상이 압축된 '일생역행'

 그의 청렴함은 조금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하겠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밑바닥에서 자기 노력으로 출세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도전과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한 그는 조선이 남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를 '게으름'에서 찾았던 것 으로 보입니다. 나태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노력하여 민족적 역량을 키워야 그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극단적일 만큼 부지런히 살고 근검절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독립운동 중 실력양성론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목표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자'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규완의 생각은 우리가 부족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하자는 데 머물렀고, 그래서 결국 독립론이 아닌 '자치론'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3·1운동 당시에도 그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항일운동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4. 퇴임 이후, 말년

 1924년 도지사직을 퇴임한 이후 이규완은 더 이상 중요한 공직에는 나서지 않았고, 함경북도지사나 중추원 참의 등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하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청량리와 춘천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운영하였으며, 여러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現 김천고등학교) 설립 자금을 후원하는 등 이런저런 사회사업을 벌여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동양척식회사 고문 자격으로 황해도 봉산·재령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 강령 발표 소식.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출범한 조선물산장려회의 회장에 추대되어 1년간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단체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협력했던 이규완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신간회 활동의 한 축이었던 실력양성론이 자신의 신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기꺼이 참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신간회는 합법단체였으니 관료 출신인 그가 활동을 꺼릴 필요도 크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그는 일관되게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바닷가를 간척하여 농지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개간한 땅의 일부를 자기 아들들에게 경영하도록 넘겨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삼남 이영일(1903-1984. 화가, 교육자로 활동)이 자기 몫으로 받은 야산을 매각하려 하자 강하게 반대하여 팔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외에는 조선산림협회 이사로 10년 이상 활동하거나 한성시탄(柴炭)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자기 사업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춘천 농장의 사과나무와 차남 이선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규완에게도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라는 요구가 들어오는데, 친일 관료 출신으로는 조금 특이하게도 그는 이런 쪽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최대한 회피하였습니다. 신문에 전쟁 독려 기사를 기고하는 일은 사회사업이 바쁘다는 핑계와 문맹이라는 핑계로 글 배웠다며?(2) 최대한 거절하였고, 방공호를 건설하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행사에 연사 등으로 참여하기는 했는데, 대부분 조선인 참전 병사를 위한 후원회 등 조선인과 직접 관련된 행사에 치중하였다니 나름 일관성은 있었던 셈입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일본 온천에 요양을 다녀오는 등 활동이 뜸해졌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개간 사업에는 계속 관여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일관성 甲 그가 사망한 것은 1946년으로 그와 젊어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승만뿐 아니라 김구 역시 자신의 측근을 조문단으로 보내는 등 사회 각계의 추모를 받았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과 항일의 경계, 그리고 의도와 결과의 문제

 여러모로 평가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고위급 관료를 역임한 친일부역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조선 민족에 애정을 가지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평생 보여준 삶의 모습은 표리부동한 자의 보여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나름 진실된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열심히 노력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꿔보자"는 그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진심이 실제로 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상술했듯이 이규완의 주장은 실력양성주의 항일운동과도 상당 부분 통하는 데가 있고, 양쪽은 1920년대 말 신간회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가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았는지,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주권을 잃었다'는 데 너무 강박적으로 집착하였는지 그의 생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본 아래에서의 자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며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일까요, 아니면 결과일까요? 이규완의 의도가 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어떤 식으로든 협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와 결과, 아마도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규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블로거,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각자 선택할 문제이겠지요.

 여담 하나. 항일유공자 중 그와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이규완(1901-1961)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안성 원곡면 지역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니 그 활동이 꽤나 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후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여담 둘. 이규완은 갑신정변으로 첫 부인과 이혼한 뒤 일본 망명 중에 이매자(1880-1961?, 초명 나카무라 우메코)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매자는 일본인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스페인 왕족 출신 캐나다인 마가렛 고츠(1855-1928)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인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무려 2억 달러나 되는 유산을 상속하였다는 떡밥이 존재합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거액인데 1920년대 당시에는 지금 돈으로 무려 3조 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나름 유언장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실물이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며, 이야기 자체도 확실한 게 없고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냥 그런 전설이 있더라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규완 가문의 상속비화. 일요신문 1963년 7월 7일

 

참고자료 : 
 "땟물까지도 아낀 조선 최고의 자린고비 관리 이규완", 대한기계학회 (링크)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규완 이야기", DVDPrime 프라임차한잔 게시판 (링크)
 "이규완(李圭完)-3.1운동-애국장", 블로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링크)
 "日帝 함남지사 이규완 가문의 2억 달러 유산, 과장인가 사실인가", 월간조선 (링크)
 "이규완",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한국어 위키백과
 "이규완(1862)", 나무위키


 친일파를 생각할 때 한국인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만,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한국인들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본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중에도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특히 그런 사람이 세계적인 종교의 중요 인물 쯤 되는 거물이라면 여기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살펴볼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다진 위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본에 적극 협력한 친일행위자라는 거대한 어두움을 함께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귀스타브 뮈텔 주교]




1. 뮈텔 선교사 조선에 오다


 뮈텔은 1854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조선에 온 것은 1881년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면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정식 수교하기 전까지 양측은 적대 관계였고(병인양요 등 무력충돌도 있었다보니)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도 그 때까지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로 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뮈텔은 1885년 본국의 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조선을 잠시 떠났습니다(30세 무렵에 교수로 임용된 것을 보니 능력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1890년 가톨릭 조선대목구(現 서울대교구) 교구장 장 블랑(1844-1890)이 선종(사망)하자 후임으로 그가 임명되었고,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33년까지 무려 43년간 교구장 자리를 지켰고, 이제 막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를 양성하였고,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또한 그의 재임기에 지은 것입니다. 독일의 성 베네딕토회에 요청하여 한국에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판공성사 제도가 그의 재임기에 정착된 것입니다.


[명동성당]


 그가 재임하는 동안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일대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이 때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바뀝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함경도, 간도)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메리놀 외방전교회 관할)가 신설되는 등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부임할 당시 17,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도 1930년대가 되면 서울대목구에서만 50,000~60,000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여러 대목구와 지목구가 분리된 이후의 통계입니다).


 뮈텔 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날부터 죽기 며칠 전까지 꾸준히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와 편지, 각종 사목문서 등을 통틀어 '뮈텔 문서'라 부르며 초기의 한국 가톨릭과 뮈텔 주교 개인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 가톨릭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와 관련한 사적지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종교지도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겠습니다만......




2. 주교 뮈텔의 그림자 : 민족을 팔아 부흥을 얻다


 한국 가톨릭의 성장 뒤에는 바로 일본 당국과의 지저분한 협력관계가 있었습니다. 뮈텔 주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심지어 이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일본의 인정과 협조를 얻어냈고, 그 바탕 위에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잘 알려진 사례로 뮈텔과 안중근 사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중근은 부자(父子)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데,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 뮈텔은 그와의 모든 우호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심지어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준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1860-1936) 신부가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겠다고 요청하지만, 일본 당국까지 허락한 사안을 뮈텔은 거부하고 빌렘 신부가 안중근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뮈텔의 입장은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성사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동생 안명근이 그를 찾아 고해성사를 집전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다시 거절하면서 "안명근이 아주 무례했다"고 일기에 써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빌렘 신부는 그의 금지령을 씹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는데, 뮈텔은 정치적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빌렘에게 2개월 성사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에 빌렘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교황청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가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고 징계를 직권으로 철회했습니다. ㅡㅡ;


[안중근을 면회하고 있는 빌렘 신부]


 안중근과 그의 악연은 이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추진하던 대학 설립에도 반대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유란 게 무려 한국인이 학문을 익히면 가톨릭 신앙에 소홀해진다는 말 같지도 않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오죽하면 안중근이 충격을 받아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기까지 했다는군요. 물론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교육사업에 힘쓰긴 했지만 이는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는 '교육은 하되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식민 당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명한 일로는 105인 사건의 결정적 단초가 된 고해성사 밀고 사건이 있습니다.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계획을 두고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에서 계획을 털어놓자, 미리 뮈텔로부터 안중근 집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빌렘은 뮈텔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이를 뮈텔이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안명근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신민회가 풍비박산나고 말았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


 이는 종교지도자가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이며,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행동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가톨릭계의 골치를 썩이던 명동성당 진입로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고개(現 충무로) 방향 진입로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침범하여 사실상 길이 막혀 있는 상태였고, 성당 측에서는 1906년부터 계속 소송을 걸었지만 번번이 패소해 왔습니다. 이에 뮈텔은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그 대가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1운동에서도 그는 당연히 신학생들에게 시위 참여 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고 참여한 학생들은 여지없이 퇴학 처분을 내렸습니다(이러한 입장은 뮈텔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미참여를 비판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약(?)상은 그의 일기에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어 후세에 그 전말이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3. 종교적 고찰 : 과연 그는 제대로 된 사제로서 자격이 있는가?


 이런 짓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그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닦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뮈텔 문서 등 그와 관련한 사료들이 많이 발굴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진행된 최근에는 그의 행적이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다수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후술할 고해성사 밀고 논란까지 가면 그가 아예 사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단 그는 한반도 선교에 일생을 바친 주제에 심각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의 법정에 출두하면 한국인의 눈에는 '유럽인이 한국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서 대놓고 한국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 신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만큼 한국인을 아래로 보았습니다. 한국인 사제들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 훗날 부산교구에서 활동하는 사제 김명제(1908-1960)가 그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재임기에 한국인을 위한 많은 사업이 벌어진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우매한 한국인'을 위한 동정적 시각이 강하게 들어있었고 자신들(유럽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보고 벌인 일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안중근과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뮈텔은 오로지 가톨릭 선교에만 몰두해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폭압적 식민지배에 협조함은 물론,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을 우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루된 가장 큰 떡밥으로 단연 '고해성사 밀고'를 들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제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결코 어디에도 발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겼을 경우 즉각 파문당하거나 이에 준하는 중징계를 받습니다. 물론 안명근이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앞으로 저지를 범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고해성사의 형태로 고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큰 논란을 자초한 셈입니다.


[뮈텔 주교의 일기는 현재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는 것을 막은 것 또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제의 기본을 망각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빌렘 신부는 비록 105인 사건 당시에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한 1차 책임자라는 문제는 있지만 뮈텔의 반(反)한국인 성향에 반발하여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결국 1914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방해한 뮈텔의 이러한 행적들은 그 상당수가 교회법조차 무시한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더 큰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짓거리들을 행한 결과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거의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를 상당히 앞서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다만 이는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교황청에서 직접 이를 수용하도록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후로도 한국 가톨릭은 몇몇 신자들의 개별적 활동을 제외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권력에 협조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당장의 교세를 확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결국 한국인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은 하지만 그 정도는 점차 감소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에 밀려 '기독교'라는 명칭 자체를 사실상 개신교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의 행적은 한국 가톨릭을 위해 좋은 것이었을까요?




4. 정리 : 무엇을 위한 종교여야 하는가?


 뮈텔 주교의 행적은 이러저러하게 연구가 되고 있지만,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재임기가 한국 가톨릭의 (사실상)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도 있겠습니다. 뮈텔과는 거의 반대 방향의 사목을 한 김수환 추기경조차도 그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옹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이 이후의 한국 가톨릭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톨릭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동안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였습니다. 19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등 사회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제들이 다수 등장하여 활동하고 나면서부터야 가톨릭의 교세가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한국 가톨릭에 끼친 해악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분명 그가 주장했던 중요한 논리는 '정교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이를 대가로 종교시설 유지에 편의를 얻어내는 모습은 정교분리보다는 차라리 '정교유착'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며 정당한 사회참여마저도 막아세웠던 것입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24인 시복미사. 광화문광장]


 사실 블로거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서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개신교와 이를 막아세웠던 가톨릭의 처지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사회문제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며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개신교는 정교분리 운운하면서 정작 뒤로는 심한 권력지향성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리를 떠나 사회적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종교의 역할이란 사회의 소외당한 자, 탄압받는 자,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탄압받는 한국인의 목소리를 외면한 뮈텔 주교의 행적, 그리고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재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는 과연 제대로 된 종교인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느 쪽을 더 옳다고 하실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가톨릭평화신문, 「[특집]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④ 안중근과 빌렘 신부, 그 운명적 만남

가톨릭프레스, 「명동성당 길과 바꾼 105인 사건

연합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통신문> 국내 최초 공개

중앙일보, 「[분수대]뮈텔 주교와 김추기경

한겨레,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김정환,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교회사연구』 3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김정환,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읽다」,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 지금까지 다루었던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식과 경륜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혹은 비뚤어진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왜곡하고 악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악질 친일파로 비판받는 자들 중에는 진심으로 일본의 침략이 한국에 좋을 것으로 믿었던 순진한, 아니 멍청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동학 지도자 중 하나였더 이용구(1868-1912)의 일생이 좋은 표본이 될 것입니다.


[그의 위엄 돋는 콧수염을 보라!]



1. 동학군의 행동대장 이상옥


 - 이용구는 1868년 경상도 상주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로 근근이 생계를 잇다가 19세 때는 청주로, 20세 때는 충주로 옮겨 살았습니다. 초명은 우필(愚弼)이었고, 뒤에는 상옥(祥玉), 만식(萬植)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 가난한 농민으로 자라난 그의 인생은 나이 23세 때,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하면서 크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입교 후 그는 당시 동학 교주 최시형(1827-1898)의 밑에서 수학(修學)할 기회를 얻었고, 훗날 3대 교주가 되는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족제자(高足弟子. 학식, 품행 등이 뛰어난 제자)로 동학의 중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질 무렵, 이용구는 호서지방(충청도)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남접과 북접의 세력권. 화살표는 1차 봉기 때의 진로]


 - 북접은 전라도 쪽 남접에 비하여 온건한 성향이었고, 1차 봉기 때는 아예 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북접 쪽에 있었던 최시형은 현실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것을 원했고, 그래서 정치성이 강한 남접의 봉기를 지지하지 않았음). 하지만 1차 봉기의 여파로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고, 특히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남접 쪽에서 2차 봉기가 터졌습니다.


 - 이 때도 최시형, 이용구 등 북접의 지도부는 정부와의 타협을 주장하였지만, 남접군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격파하자 마침내 동학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손병희와 이용구(당시 이름은 이상옥) 등이 이끄는 북접군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남접군과 합류하고, 충청도의 중심지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습니다. 이용구, 아니 이상옥은 충주와 청주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을 격파하고, 이후 공주로 진격하는 손병희 군대의 우익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우금치에 있는 동학농민군 위령탑]


 - 하지만 공주 근처 우금치에서 동학의 주력군은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참패하였으며, 다른 전선에서도 잇따라 밀리며 동학군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용구의 부대는 논산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섬멸되고, 이용구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포위를 뚫고 충주로 도망쳐 몸을 숨겼습니다.



2. 일본 물 먹고 오더니 좀 이상해졌다


 - 이후 이용구는 수년간 가족을 데리고 피난 생활을 해야 했는데, 먼저 그의 아내가 체포되어 수감된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이용구 역시 1898년 체포당하기에 이릅니다. 얼마 뒤 최시형도 체포되었고, 최시형은 결국 처형당했는데 이용구는 어찌어찌하여 죽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 한편 최시형 사후 3대 교주가 된 인물이 바로 손병희였는데, 그는 계속 탄압이 이어지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동학의 포교와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세계 돌아가는 정세도 익힐 겸) 등 몇몇 지도자들과 함께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용구 역시 손병희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이용구는 얼마 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먼저 귀국, 지하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 이용구의 행보가 어딘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이용구는 국내의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진보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보회는 송병준(1857-1925) 등이 이끌던 듣보잡 단체에 흡수통합되었는데, 그 단체의 이름은 일진회(一進會).


[일진회 회원들의 단체사진. 1908년]


 - 비록 진보회가 흡수당하는 형태였지만, 인원은 진보회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일진회는 단숨에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통합 일진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용구는 러일전쟁 중 일본 지지를 선언하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일진회는 회원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의선 철도 건설(본래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으려고 하였으나, 만주 쪽으로 가려는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김)에 노역을 하도록 했습니다.


 - 당연히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이용구의 이러한 행보를 보고 경악하였고(동학이 원래 극렬 반외세 성향임을 생각합시다), 이용구의 행보를 적극 제지하려 하였지만 이용구가 이를 들을 턱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진회가 을사조약 지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계기로, 손병희는 직접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였으며 이용구와 그를 따르던 62명의 신자를 제명하였습니다.


 - 이에 이용구는 깨갱......할 리가 있나요. 제명당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라는 신흥종교를 만들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물론 출신이 출신인지라 시천교는 실제로는 동학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두 종교가 양립한 상황에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서로간에 전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ㅡㅡ;



3.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 이후 이용구는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올라 일진회를 이끌었는데, 실제로는 우치다 료헤이(1874-1937) 등 일본인 고문들이 단체를 배후조종하고 있었습니다. 통감부 설치 이후 사실상 통감부 산하의 어용조직처럼 되어버린 일진회는 이후 일본 침략의 앞잡이로 맹활약(?)했는데, 두드러진 분야는 성명문, 유세, 강연 등 친일 여론을 조장하는 프로파간다 활동이었습니다.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훗날의 다이쇼 덴노)의 한국 방문 때 일진회가 세운 환영 아치]


 - 당연히 일진회의 행보는 모두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특히 이 시기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은 너나할 것 없이 일진회 회원들을 우선 타겟으로 삼아 공격하였습니다. 1907~1908년 사이 1년여간 의병의 공격으로 사살된 일진회 회원만 9천여 명에 달했다고. ㅡㅡ;


 - 물론 이미 일본에 먹히다시피 한 일진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급기야 1909년 말부터는 소위 '합방청원서'를 잇따라 발표하며 한국-일본 간 병합을 청원(!!!)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일진회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일진회 내부에서도 탈퇴자가 속출할 만큼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부 내에서도 일진회 수괴인 송병준과 이용구를 처형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 여기저기서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몸을 피하여 일본 군경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 와중에도 일진회 산하 조직들을 동원하여 합방청원을 지지하도록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렵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제 회원은 기껏해야 10만 명 미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는 4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찰추산 vs. 주최측추산?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이좋(?)게 찍은 사진. 우측이 이용구]


 -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1848-1913)에게 '합방 청원운동 비용과 합방 후 간도 이주비용'으로 야반도주? 300만 엔(현재 환율로 1000억 원을 넘습니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가쓰라는 "300만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지원해줄 것"이라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병합이 실현된 이후, 일진회에 대한 일본의 대답은 "ㅗ"였습니다. ㅡㅡ;


 - 병합 직후 일본 당국은 모든 한국인 단체를 강제해산하였고, 거기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해체와 함께 일진회에 지급된 보상금은 300만은 커녕 고작 15만 엔에 불과했으며, 10만 회원이라 치면 1인당 1.5엔에 불과한 ㅡㅡ;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이용구는 결국 몸져누웠고, 그 길로 병세가 악화되어 1912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4. 도대체 왜 그랬을까 : 그는 순진, 아니 멍청했다


 - 이용구는 죽기 얼마 전 문병을 온 우치다에게 "우리는 참 멍청한 짓을 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닐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스스로 '속았다'고 생각했던 건 물론 일진회의 협력에 뒤통수를 날린 일본의 행동이 일차적인 이유였겠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운 속사정도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이용구는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아시아주의(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인종이 단결하여 백인 세력에 맞서자는, 일종의 동아시아판 인종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우치다를 만났을 때 이용구가 제시한 한일병합의 형태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유사한 '이중제국'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일종의 '동군연합'으로, 헝가리는 국방, 재정,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 자치권을 보유]


 - 즉 일본의 덴노가 전체를 다스리는 공동의 황제이되, 한국과 일본은 독자성을 유지하고 서로간에 평등한 병합을 하자는 이야기. 물론 이 말을 들은 우치다 등의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이에 적극 동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병합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한국이 일본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는 형태였습니다. 애초에 아시아주의 자체가 이 무렵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 병합 직후 일진회가 별 대가도 받지 못하고 해체당하는 모습을 겪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속아서 살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전국민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어가며 벌였던 자신의 활동이 모두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절감한 이용구는 말 그대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차는 떠나갔는데요.



5. 정리 : 우리가 멍청해서는 안 되는 이유


 - 이용구는 분명 대단한 역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농민이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는 그에 걸맞는 통찰력을 갖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 일본 내에서도 변질되어버린 아시아주의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으며 그 이상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제국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 이 정도의 지도력을 갖추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 놓으면, 당연히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이용구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든 그와 그가 이끄는 일진회의 활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말 그대로 길을 닦아주는 꼴이었으며, 그들은 만고의 매국노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 물론 그 멍청함이란 이용구에게 어떠한 변명도 되지 못합니다. 그의 이상은 이미 뜬구름 잡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의 침략으로 이미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몰라서 그랬든, 아니면 알고도 그랬든간에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어디까지나 이용구 자신에게 있습니다.


 - 이러니 그가 나중에 "내가 속았다"라고 아무리 울분을 토한들 소용이 없지요. 우리는 그를 한심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불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속은 게 맞다 치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에게 속은 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일생에 대하여 '멍청함으로 만고에 죄를 지은 매국노'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속았다고 해서, 여기에 그의 이름이 빠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angchil.egloos.com/958648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C%9D%B4%EC%9A%A9%EA%B5%AC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530&index_id=cp05300109&content_id=cp053001090001&search_left_menu=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5/read/22293702 (이용구의 이중제국 제안)



 - '헬조선'이라는 말이 중요한 화두가 될 정도로 요즘 한국인들에게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아예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뭘 해도 안될 열등종족'으로 비하하며 소위 '선진적'인 다른 사회를 찬양하는 극단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요즘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한국인은 답이 없다'로 일관한 신념형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중양. 1900년경]



1. 근성으로 출세한 가난뱅이


 - 박중양의 출신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아버지 박정호는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지주 집 마름 노릇으로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출신이 이렇다 보니 그의 초년은 분명히 알려진 게 별로 없는데, 일단 출생년도가 1872년인지 1874년인지 분명치 않고, 심지어 그가 반남 박씨인지 밀양 박씨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ㅡㅡ; 초명은 박원근이었고, '중양'은 성인이 된 후 개명한 것입니다.


 - 초년의 박중양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출세욕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처음 실시된 일본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지만 여러 차례 낙방하였습니다. 그는 급진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을 존경하였는데,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일파가 죽거나 망명하고 결국 김옥균이 암살까지 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씨 조난사건>.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유학생 선발에 계속 도전하면서, 박중양은 서울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타진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드디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약 7년간 일본에 국비장학생으로 유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비유학생인데도 생활비는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는지, 유학기간 내내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는군요.


 - 박중양은 우선 기독교 목사인 혼다 요이츠(1848-1912)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그가 운영하던 아오야마학원(現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중학부로 진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토는 그에게 경찰, 행정 쪽으로 집중해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


 - 그렇게 그저 가난한 유학생1에 불과했던 박중양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내가 바다에 빠져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하필 거기 있던 박중양이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그를 구했던 것. 자기 아내를 살려주고 그에 대한 사례와 선물도 일절 사양한 박중양의 태도에 이토는 꺼뻑 죽었다고 합니다. ㅡㅡ; 이후 박중양은 이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박중양 또한 (의외로) 한국인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이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2. '한국인은 답이 없다'


 - 그런데 이 시기 고종 황제와 대립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와 관련하여, 박중양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혹시 박영효의 일파가 아닌가' 의심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학비와 자객을 동시에 선사하는 고국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점차 키워가게 됩니다.


 - 일본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이토의 조언을 따라) 경찰과 행정 업무 쪽이었습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박중양은 도쿄 부기학교에서 금융 업무를 전공하였고, 동시에 도쿄 경시청(경찰청)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분야를 깊이 공부하게 됩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매우 성실해서 다른 유학생들이 흔히 빠지는 유흥과 잡기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성을 쓰며 일본의 엘리트 계층과 활발한 교유를 했다고 합니다.


 - 1903년 귀국하여 곧바로 관리서(管理署) 주사(主事)로 임용되었지만, 개혁세력을 적극 등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상소가 황제에게 올라가지도 못하는 일을 겪은 후 바로 관직을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다음 해 러일전쟁이 터지자, 박중양은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취직(?)하여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활동하였습니다. 유학시절과 일본군 종군시절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친절함에 매료되었고 ㅡㅡ; 이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 1904년 11월 농상공부 주사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상소가  외면당하자 자청하여 대구로 내려가 한국인 관료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박중양은 상대적으로 일본 편을 들거나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였고, 일본인들의 신뢰와 호의를 얻게 됩니다. 1905년 2월에는 잠시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에 임명되는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유명한 촉석루를 제외한)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는 위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ㅡㅡ; 지방관으로 가서 반달리즘이라니


[진주성은 해방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됩니다]


 - 이후 6월에는 의친왕 이강을 대표로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난 박중양은 "한국은 도저히 답이 없으니, 미국 유학이나 하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토는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관직에 있을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수행원 임무가 끝난 이후 도쿄에 남아 다시 유학하고, 다음 해 귀국하였습니다.


 - 귀국한 박중양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임용되었고, 이후 그는 이토와 통감부를 뒷배경으로 쾌속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06년 7월 대구 판관으로 파견된 박중양은 그 길로 대구군수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하자마자 대구군청 신축부터 강행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대구군수 재임기에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위업을 세웠습니다. ㅡㅡ; 성곽 해체 전문가


[당시 대구 동쪽 성벽을 허문 자리에 개설한 도로가 그 유명한 대구 동성로]


 -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생각은 있었는지, 을사조약과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후 평안남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북도 관찰사(도지사)를 역임하였으며 한일병합 직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한일병합 당시에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국민이 충성할 의무는 없다"며, 슬퍼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라



3. 일제강점기의 활약(?)상


[박중양의 친필 휘호]


 - 병합 이후로도 박중양은 지방과 중앙을 오가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1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두 번에 걸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1940년대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충청남도, 황해도(2회), 충청북도 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 관료로서 활동도 두드러집니다.


 - 3·1운동 때는 자제단(시위 중단을 설득, 종용하며 적극 참여자를 신고하는 일을 하였던 친일 성향 단체)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경성(서울)과 대구 지역 자제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박중양 개인은 한국인 노점상을 괴롭히던 일본인을 아끼던 지팡이로 두들겨 팬다든지, 일본인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딱히 한국인으로서라기보단 '조선인도 똑같이 일본 신민이 되었는데 왜 사람 차별하는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1923~25년 사이 충북도지사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이런저런 스캔들을 일으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4년 속리산을 유람하던 중 비 내리는 진흙탕 길(現 말티재)에서 진종일 고생한 박중양은, 빡친 나머지 보은군수에게 대대적인 신작로 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공사 과정에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을 해야 했고, 심지어 농번기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토목기사와 순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소요사태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박중양이 지시한 도로공사와 농민 소요 기사.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


 - 그해 말에는 더 큰 스캔들을 일으켰으니, 속리산의 산사(山寺)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귀빈을 대동하고 술자리를 가진 후 취중에 여승 한 명과 성관계를 하고, 그 여승이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권력자의 성추문'이라는 특성상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다가, 다음해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등의 폭로로 세간에 알려졌고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박중양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이런 대형 스캔들을 연달아 일으키고도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유용한 인물이었으니, 이후로도 박중양은 중추원과 지방행정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박중양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엔 좋은 취지같지만 일본 중의원에 조선인 쿼터를 허용해달라는 등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같은 시기 유행한 자치론과도 통합니다).


 - 당연하게도, 193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로 참여하였고, 1945년 초에는 조선인 몫으로 할당된 일본 귀족원 의원 7명(박중양, 윤치호 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1942년에도 선임되었으나 본인이 거부). 당시 일본은 중의원(하원) 임기가 만료되면 다음 선거에서 조선인 몫으로 23명을 선출하도록 할 생각이었다는군요. 소원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4. 해방 이후 : 나는 떳떳하다. 너희들이 노답일 뿐


 -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후 박중양은 윤치호 등과 함께 감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는데, 그 직후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일본도 머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 직전인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피고용인들을 약간의 퇴직금과 함께 내보내고, 해방 직후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습니다. 그는 이 재산을 경성 근처의 양로원과 보육원에 무기명 기부한 후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 당연히 그는 친일 반민족분자의 수괴로 지목되어 가는 곳마다 욕설과 드잡이, 심하면 투석(投石)까지 당하곤 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민족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에 더하여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가 훨씬 살기 좋았으며, 일본은 한국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가 여기에 또한 독립은 미국의 은총으로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운동가라고 어깨에 힘 주는 사람들은 전부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1945년 말 박중양은 미군정 간부들과 이승만 등을 만나,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데 친일행위자를 왜 처벌하려 드는가? 난 어차피 위선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 처단하려거든 나를 처단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한국인이 과연 독립할 자격이나 있는 놈들인지 모르겠다고 조롱한 적도 있다는군요. ㅡㅡ;


[반민특위에 출두하는 박중양]


 - 당연히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수감되었는데 당시 그를 조사한 수사관은 "다른 기회주의 친일파와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만 한국인이지 생각과 행동은 그냥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재판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조롱을 굽히지 않았고, 애국지사연하며 부정하게 산 놈들보다 자신은 훨씬 떳떳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평생 관료로 살면서도 부정축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된 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부모의 묘소를 대구 오봉산(現 침산공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도 그곳에 은거하며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1957년 신년에는 이승만더러 "미군 없으면 도망이나 칠 놈"이라며 조롱하는 등 개X끼 vs. X발놈 당시의 정부통령을 싸잡아 욕하다가 명예훼손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고, 정부는 주둥이를 멈추지 않는 박중양을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그는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정신병원 수감을 거부하였습니다. ㅡㅡ;



5. 정리 : '국개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 실로 뭐라 판단하기 어려운 박중양의 일생을 훑어보았습니다. 박중양은 자기 민족이 쓰레기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앞서 살펴본 기회주의자들과는 다른 '확신범'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 영민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친일과는 엄연히 다르면서도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얼핏 보면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윤치호와 비교해도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윤치호의 사상이 '한국인은 현상태로는 답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라도 근대로 발전해보자'였다면, 박중양의 그것은 '한국인은 뭘 해도 답이 없으니 그냥 일본인이 되어버리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윤치호와 다르게, 박중양의 행적은 (심지어 그게 한국인에게 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철저히 '일본인으로서의 한국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 여기까지 보고 나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살짝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국 사회의 침체와 혼란이 장기화되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은 더 이상 답이 없다" "한국인은 썩어빠진 놈들" "한남충을 재기하자" "노무현 운X하盧?" 등등 극단적인 담론이 창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거,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0년 전 박중양이 내린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박중양이 결국 어떤 인생을 살았나 생각하면,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라면, 박중양도 윤치호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건설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의 의지를 꺾은 것은 자신의 이상과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망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피와 땀을 흘리며,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절망은 '너무 성급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박중양과 윤치호가 뭐라 생각했든, 한국이 강대국에 의해 독립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한국인은 노답"이라며 욕설과 한탄을 멈추지 않는 분들께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이 말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두 해 노력한다고 역사는 전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든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역사는 결국 전진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1014289 ('산하의 오역')



 대한제국의 황족들은 나라의 멸망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개중에는 적극적인 친일분자가 되어 자신들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참여한 이들도 있고, 소극적이나마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대체로 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멸망에 적어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친일분자로 활약한 대한제국의 황족, 영선군 이준용입니다.


[그림으로만 봐도 위엄돋는 그의 풍채]




1. 영선군, 왕의 조카가 된 남자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 이재면(1845-1912)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서 고종(이재황)의 친형입니다. 즉 이준용은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셈으로,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장손이기도 합니다. 친동생 이문용(1882-1901)이 19세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이재면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출생 후 영선군(永宣君)이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자 측근인 허욱(1827-1883)을 가정교사로 삼아 글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명석하고 뛰어난 자질을 보여 흥선대원군이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재면이 그리 강단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데 비해, 이준용은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재면보다도 장손 이준용을 더욱 총애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용은 냉혹한 현실정치의 생리에 일찍부터 눈뜰 수 있었는데, 이 시기 고종과 민씨 세력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흥선대원군은 싹수가 보이는 이준용을 고종의 대안으로 점찍게 됩니다. 그러한 주변 환경 속에서 자란 이준용은 1880년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으로 성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1880년대 초 음서를 통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4년 말에는 세자익위사(세자의 호위를 담당) 세마(洗馬, 정9품)에 올랐는데 이는 갑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급진개화파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장손인 이준용을 적극 기용하였던 것입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이준용 역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정변의 직접 참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음서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하급 관직을 전전하던 그는, 1886년 과거시험에 정식으로 급제한 이후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문관 정자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이준용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듬해(1887년)에는 이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반(反) 고종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고종 및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데서 비롯합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 등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친(親) 고종 세력과 적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왕을 갈아치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영선군 이준용이었습니다. 확실히 자기 편이기도 하고, 인물이 영특하여 아내의 조종을 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고종의 장남이자 궁인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1868-1880)을 밀어주려고 하였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대타로 이준용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그 세력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이준용의 삶은 1880년대 중반부터 격랑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습니다.



2. 나도 왕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1886년,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1859-1916)의 조종으로 첫 번째 쿠데타 시도가 벌어집니다. 위안스카이는 친러정책을 강화하던 고종과 명성황후에 맞서, 고종을 쫓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앉힌 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 자신들이 조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만만찮은 야심가라 쿠데타 계획에 호응하려 했지만, 정작 청 본국에서 이를 반대하여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를 알아낸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하여, 오히려 이준용 본인의 처지가 난처해지는 역효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1887년부터 이준용은 3년간 모친상을 치르면서 다양한 세력의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준용을 경계하고 항상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친 이후 그는 성균관, 규장각, 승정원 등의 요직을 거쳐 1892년에는 이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면서 점차 그를 지지하는 친위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운현궁]


 이렇게 되자 이준용은 본격적으로 고종-명성황후의 주된 정적이 되었습니다. 1892년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 이재면-이준용 부자의 집에도 폭탄이 설치되었지만 사전에 발견되어 피해는 없었습니다(이 사건에 대하여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준용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한번은 길에서 자객을 만났지만 간신히 따돌려 목숨을 구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준용 쪽에서도 가만 있을 수 없지요. 갑오개혁 당시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출을 몰래 추진하였지만 일본 측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일본 주도의 개혁에 반발하는 유학자들이나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여 고종을 몰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계획이 탄로나면서 실패합니다. 이 시기 이준용은 대원군파와 척을 진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는 이들을 포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길준 등을 대원군파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하여 이준용은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895년 초 이준용은 개화파 인사 김학우(1862-1894)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 개화파 세력은 (차마 흥선대원군을 족칠 수는 없으니)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지만,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자행되는 등의 사실이 알려지며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준용은 유배형에 처해지며 목숨만은 건지게 됩니다.


 얼마 뒤 이준용은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투옥당했지만 때마침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본 측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났습니다. 석방과 동시에 그는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일본 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대체로 이 무렵부터 그가 친일 성향을 띠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좌절된 야망과 말년


 그런데 다음해 아관파천으로 조선 내 친일파가 몰락하면서, 이준용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길로 망명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897년 그는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1899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본국에서는 안경수(1853-1900) 등이 다시 그를 옹립하려는 쿠데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준용의 귀국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조용히 망명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등 지속적으로 조선(대한제국) 정치에 관여하려 하였습니다. 당연히 더욱 열받은 고종은 일본에까지 자객을 보내어 이준용을 제거하려 시도하지만, 의외로 이준용 자신의 무력(武力)이 출중했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ㅡㅡ;


[영친왕과 엄귀비. 고종은 정적인 이준용과 의친왕을 배제하기 위해, 엄귀비 소생인 영친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고종은 그의 강제송환을 요구했고, 이토는 그 대신에 주요 망명 인사들을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준용은 이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던 모양이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준용은 여전히 고종을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며 그의 꿈은 사실상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그는 조약 체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왕 한 번 해보려는 이준용의 야망은 자신이 협력하던 일본에 의해 좌절당한 것입니다(그는 이후로도 1909년 무렵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였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이준용은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1909년부터 그는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로 재직했는데, 이곳은 단군신화를 일본 아마테라스 신화에 종속시키는 역사왜곡을 추진한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준용은 왕족+친일파로서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고, 아버지(83만 엔 수령)와는 별도로 거액(16만 8천 엔)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병합 때 이희 공(公)으로 봉해진 이재면이 1912년 사망하자 이준용은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빈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다른 종친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준용은 자신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이준용의 나이는 고작 40대였지만 젊어서부터 갖은 고난과 비만을 겪은지라 그의 건강은 상당히 나빴고, 이후로는 신장병과 심장질환 등에 시달리며 병석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만년에 낳은 딸 이진완(1916-1997) 외에 아들이 없었던 이준용은 1917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차남 이우(1912-1945)를 양자로 들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습니다. 양자 이우는 왕족으로서 일본군 고위 장교가 되었으며, 나름 반일 성향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휘말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의 아들 중 이청(1936-)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4. 정리 : 대한제국 황족의 운명


 한일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족은 '멸망한 나라의 왕족'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자체를 아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격하하고, 일본 황실에 다음가는 지위인 '왕공족'으로 대우하였습니다. 물론 더 이상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대접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구(舊) 황족들은 복잡한(하지만 대체로 행복하지 못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고종과 순종은 궁궐에서 반쯤 갇혀 살다 죽었고(고종은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지요), 이재면-이준용 부자처럼 일본에 적극 협력한 부류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병합 이후에는 거액의 은사금과 작위 외에 일본에게서 딱히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고종의 자식들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나 덕혜옹주(1912-1989)의 경우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덕혜옹주]


  분명한 사실은 이들 황족 중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과 그의 아들(그리고 이준용의 양자)인 이우 등 몇몇이 반일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의친왕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사실상 독립운동과 멀어졌고, 이우는 사실상 볼모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하다가 히로시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이 일본 당국의 감시 하에 있는 처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더라도 대한제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황족들이 나라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후 딱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고종과 순종 복위(복벽운동)을 추진하는 항일세력이 있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사실상 모든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으로 대동단결하게 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나마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주던 일본의 실드마저 사라지자, 이들은 더 이상 왕족으로서 살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해방된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은 수십 대를 거슬러올라가야 핏줄이 이어지는 전주 이씨 이승만이었고, 미국 체류시절 자신을 '프린스 리'로 소개할 만큼 자기 핏줄을 의식했던 이승만은 구 황족에 대한 예우를 대부분 박탈하고 영친왕의 귀국을 가로막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거든


[황족 X까! 이젠 내가 짱이라고!]


 당연하게도 이때까지 살아남은 황족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거주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고,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에야 병든 몸으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 강제로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 간 이래 지속적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이혼까지 겪는 등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역시 한참 뒤에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한국에 남아 있었던 의친왕은 노년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 시기 영양실조와 홧병에 시달리다 사망하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대한제국 멸망과 한일병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일단 이들이 세계사의 격변기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던 점, 외세의 침략에 기껏해야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며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이준용의 경우처럼 아예 대놓고 친일행위를 일삼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황족에 대한 이후 한국인들은 준엄한 평가를 내렸고,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영영 되찾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2018. 9. 25. 수정]



 역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한국인치고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완용은 한국인에게 '매국노'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완용의 일생 전반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조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참고가 되자면, 이완용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일생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합니다.


[일단 침 한 번 뱉고 시작할까요?]




1. 입양 로또를 맞은 신동


 이완용은 1858년 6월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現 성남시 분당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역사학자 이병도는 전북 익산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더라' 수준이라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본관은 우봉 이씨로, 고려시대 이래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완용의 직계는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잔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준(초명 이호석) 역시 간신히 선비 행세나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변에 이름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10세 때 우봉 이씨 가문의 유력자인 이호준(1821-1901)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호준에게는 서자(이윤용)만 있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이호준 집안의 적자(嫡子)로서 입적된 것입니다(요즘 시각으로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랬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이호준과 이석준은 본관만 같지 촌수가 32촌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라 하필 그가 양자로 선택된 것은 의외인데, 아마도 이완용의 재능이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당시 이호준은 판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으며, 자신의 딸은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 조성하(1845-1881)와,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각각 혼인시키는 등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몰락 양반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완용이, 최고 귀족 가문의 (호적상) 적장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완용의 삶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역시 본래 다른 집안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양아버지가 조선 정계의 거물이었던지라 이완용은 한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소위 '경화거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된 처지에 이복형제도 있었던지라 이완용은 처음에는 말수가 매우 적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이호준이 양아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3세 때 집안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고,이후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들에게 유교 경서를 배웠습니다.


 1882년 이완용은 증광시(增廣試)에 전체 28위로 급제하였고, 처음 임명된 관직은 주서(정7품)였습니다. 사실 과거시험에서 28위라면 급제 순위 중 병과(丙科-3등급)였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후순위였는데, 양아버지 이호준이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ㅡㅡ; 시작부터 낙하산이라니 




2. '기계같은 자'의 출세 : 능력은 있으나, 양심은 없다


 과거 급제 이후 이완용은 엘리트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습니다. 그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외직(지방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군과 관련된 직위)로 발령됐는데, '해방영' 자체가 민씨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편제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민씨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아버지 이호준이 민씨 세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1880년대 초반 조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애초에 그가 급제한 증광시 자체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ㅡㅡ; 급진개화파니 온건개화파니 수구파니 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중앙 관료가 된 그는 젊은 엘리트면서도 근대니 개화니 하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화파 관료들과도 딱히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고, 때마침 외직에 나가 있었기도 하여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의 영어수업 장면]


 1886년 이완용은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하였고, 동시에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와 과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완용이 서양 문물을 제대로 접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왕년의 신동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887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 세자의 교육 책임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 손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광혜원 설립자, 주한미국공사 역임)이 이완용을 두고 '기계같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기계처럼 철저하게 업무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양심과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완용은 젊어서부터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며, 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그가 정치적 격변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든지, 이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정치적 변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보신(保身)과 출세에 치중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옛 주미 조선공사관 건물]


 1887년 이완용은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듬해 초 박정양이 공사에서 해임될 때 함께 해임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약속한 외교적 관례를 박정양이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후 이완용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1888년 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얼마 뒤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


 영어교육을 통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다보니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미국은 '조선을 침략할 위험이 적고, 부강한 국가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조선 정부는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에 대단한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에 파견된 이완용은, 미국 현지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대사성, 전환국총판, 외무협판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자신도 살해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음식도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통조림만 먹었을 만큼 고종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친미파 · 친러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입니다.

[춘생문으로 추정되는 곳. 이후 문은 철거되었고 現 청와대 춘추관 부지 내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역시 춘생문 사건에 직접 관여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완용 등의 관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하였습니다(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탔고, 아관파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만큼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로 구성된 친러파 내각에서 중심 인물이 됩니다.


 새 내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이완용은 정부 관료의 대표격으로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위하여 출범한 단체였는데, 실제로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우자 이완용은 독립문의 한자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건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한자 현판.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 명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고종이 환궁한 이후 터졌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독립협회는 점차 반(反)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띠었고, 친러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친러파 관료이면서 독립협회 중심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양쪽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결국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폭발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된 직후 이마저도 파직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동시에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때 독립협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후 벌어진 독립협회 대탄압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보신甲! 그래도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며 인생 최대의 위기ㅡㅡ;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1901년 양부 이호준이 급사한 이후 고종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복권시키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당시 임명된 관직은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한직(閑職)이었습니다.




4. 마지막 변신 :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다


 이완용은 1904년 양부의 3년상을 끝낸 이후 190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취임하여 예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이 전쟁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우세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대한제국은 왕년의 친미파 이완용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잡아먹는 것을 용인한 상태였고, 당연히 이완용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침략자에게 들러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였습니다. 지금껏 출세와 보신에 힘쓰며 친미파와 친러파로 철새마냥 떠돌았던 이완용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친일파로 갈아타게 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 양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는데, 정작 이에 대한 결정권은 대신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 대신들을 회유 및 협박하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학부대신 이완용도 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평]


 이미 일본의 침략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완용은 처음부터 이토에게 협조적으로 나섰고, 이토는 이완용을 전면에 내세워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이토는 조약 체결과 관련한 어전회의를 강제로 열었는데, 처음에는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다수가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습니다(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만 찬성파).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는 가운데 이완용은 자신을 만고의 매국노로 만드는 발언을 하여 대신들을 설득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언제까지나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외교권 양도 문제는 훗날 대한제국의 역량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레 반환될 것이며, 조약의 내용에 황실의 안전과 존엄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을 추가하면 충분하다."


 결국 이토의 협박과 이완용의 설득에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토는 8명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5명의 동의를 얻어내자 "이것으로 안건은 가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5명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입니다(반대자 중에서 이하영은 얼마 뒤 조약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일단 을사오적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을사오적의 쌍판때기 얼굴.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같은 날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궁궐 내에서 고종을 협박하는 가운데 '외교권 양도'와 '통감부 설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약(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정작 을사오적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기대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어떻게든 다른 강대국의 호의를 얻어 독립을 지켜보고자 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노력들을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5. 나라판 값으로 얻은 부귀영화


 조약 체결의 일등공신이 이완용이었던만큼 이후 이완용의 출세길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의정대신,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일본에 의하여 구성된 내각의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좀 보였는지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 취임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이토 통감의 권유를 받고 결국 취임을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였고, 얼마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에서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정미칠적).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일본과 사법권 양도 협약을 체결하였고(기유각서), 다음해(1910년)에는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한일 병합조약(경술국치)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직접 서명하였습니다(경술국적). 그랜드슬램 달성!!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은 조약 내용에 아예 '공로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작위와 은금(恩金) 수여'를 조항으로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백작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15만 엔(원)이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도 받았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억~150억원 정도). 다만 그보다 많은 은사금을 받은 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대한제국 황족들이었습니다(의친왕과 이재면(고종의 형)의 경우 83만 엔을 수령하였습니다).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나라가 망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으니 당연히 전국민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그가 의병장 허위(1855-1908)의 사형을 주장하자 옛 황국협회 관계자들(허위가 황국협회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과 분노한 주민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이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수습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주도하자 이번에는 항일단체(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완전 잿더미가 되어 이완용은 이복동생 이윤용의 집에 한동안 피신해 있어야 했다고.


[이후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친일 관료들을 목표로 한 모든 암살단의 제1호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당시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은 성당 앞에서 인력거에 탑승하던 중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이재명(1887-1910)의 습격을 받고 왼쪽 폐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죽지 않은 것은 인력거꾼 박원문(1865-1909)이 이재명을 제지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외과의사들의 손에 맡겨져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통당한 폐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완용은 이후 남은 평생을 후유증인 천식과 폐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쌤통 체포된 이재명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습니다.


[말년의 이완용]


 일제강점기 이완용은 친일 귀족의 대표 노릇을 하며, 건강 문제를 빼면 순탄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으로 알려져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은사금을 잘 굴려먹었는지 그는 말년에는 137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부(巨富)가 되었고, 차남 이항구(1881-1945) 역시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6. 죽음과 그 이후


 이재명 의사의 습격 이후 악화된 이완용의 폐병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1926년 총독부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이후 2월 11일 69세를 일기로 뒈졌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2월 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유명한 비판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하였지만 다행히 현재까지도 그 원문이 남아 있습니다.


[검열삭제 이전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습니다.


[파헤쳐진 이완용 무덤]


 그의 후손들의 삶은 별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그것도 매국노의 수괴)인 마당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얼굴 들고 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완용의 장남(이승구, 1880-1909)은 요절하였는데,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즉 이완용에게는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부끄러움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완용의 작위를 물려받은 차남 이항구는 해방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중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 이병주는 일본에 귀화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가졌던 재산(특히 토지)가 워낙 방대했다보니, 해방 후 흩어진 그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후손들의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돌아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1998년에는 서울 북아현동 일대 토지의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윤형은 돌려받은 땅을 곧바로 처분하여 수십억 원을 벌었고, 이 돈을 그대로 들고 도로 캐나다로 튀어버렸다는군요. ㅡㅡ;


 그의 악명 덕에 오래도록 애먼 피해자들도 속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이완용과 같은 우봉 이씨 출신이라 이완용의 친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제로는 촌수로 따져 30촌을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병도 본인이 친일부역자였고, 이완용의 관짝을 구하여 불태웠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행들이 겹쳐 있기도 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은 이완용의 아들 중 한 명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도 간간이 욕을 먹는데, 여긴 아예 본관부터가 다릅니다(경주 이씨).


 반대로 이완용의 덕(?)을 본 경우도 있으니, 붕당 대립에 휘말려 역적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남인, 북인, 소론 등)이 1908년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순종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개중에는 진짜 역적이나 간신들도 있고 고종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인물도 있다보니 크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 일종의 소소한 과거사 정리를 한 것 정도로 보입니다.




7. 정리 : '똑똑한 기회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일생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이완용, 그의 변신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히 '강자'에게 빌붙는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그는 대부분 고종이 협력하려는 열강 국가에 붙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종이 미국에 협조적일 때는 친미파,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을 때는 친러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황제)과 노선을 함께하는 이러한 처세가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종이 기댈 곳이 없어져버린 시점에, 이완용은 고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침략자 일본에 앞장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는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고종의 뒤통수를 친 대가로 얻어낸 것은 '황실의 존재만은 남겨준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였으며,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식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보다 철저히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서만 활용했고, 이러한 처세 속에서 그의 능력은 대한제국이라는 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커녕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개인의 능력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이 결여된 자에게 지나치게 큰 능력과 권한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부 고위층의 거대한 스캔들로 국가 전체가 뒤집어진 근래의 사태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완용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당 지도부와 정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책무를 일개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넙죽 바쳐버린 참상을 보면, 저들의 재능은 도대체 사회와 역사, 심지어 그들 개인을 위해서라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역사는 '양심 없는 능력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블로거는 이분들을 감히 '이완용의 후예들'이라 칭하겠습니다]




참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2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books.google.co.kr/books?id=PmMzC...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발췌)

http://www.hansung.ac.kr/web/hhistory/44?... (<춘생문 사건의 발생 배경과 영향에 대한 재고>, 김성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9/2009082900337.html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2018. 7. 13. 수정]



 우리는 흔히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한 자들을 '친일파'라는 한 단어로 묶어버리지만, 실제로 친일파의 범주에 들어가는 수많은 인물들은 '일본에 부역하였다'는 공통점을 빼면 친일행위의 배경이나 사고방식, 전후의 행동과 결과에 제각기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친일행위를 그 자체로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되, 친일파들 개개인의 삶을 분석하는 것 또한 병행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많은 친일행위자 중 몇 명을 선정, 그들의 인생과 사상을 간단히 짚어보며 친일행위의 배경을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윤치호(1864-1945)입니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고 그 누구보다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 또한 가졌지만, 현실의 벽 앞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친일파로 전락하고 만 윤치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양면적 삶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윤치호]




1. 희대의 어학천재 윤치호


[ㅎㄷㄷ한 해평 윤씨 가계도]


 윤치호의 출신인 해평 윤씨('해평'은 경북 구미시의 지명) 가문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 급성장한 신흥 명문가였습니다. 임진왜란기 인물인 윤두수(1533-1601)의 자손 중, 조선 말기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만 따져도 윤웅렬, 윤영렬, 윤치호, 윤치왕, 윤치소, 윤치성, 윤치영, 윤일선, 윤보선, 순정효황후 윤씨 등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지요.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의 처가도 이쪽이며(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 아나운서 윤인구씨도 이 가문 출신입니다(윤치영의 손자).


 불과 3대 남짓만에 격동기 역사적 인물들이 거의 두 자릿수 단위로 쏟아져나왔다는 건 결코 범상한 일은 아닙니다. 해평 윤씨 가문의 이 수많은 인재들은 정치, 군사, 학술, 의료, 경제계 등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흥미롭게도 친일파와 항일운동가, 소극적 부역거부자가 뒤얽혀 있습니다(이를테면, 윤치소는 거부(巨富)이자 친일파였지만 그의 장남 윤보선은 항일운동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1840-1911)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유홍기(1831-?)에게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 인물로, 별기군 책임자를 맡는 등 주로 무관(군인) 쪽에서 활동한 관료입니다. 김옥균 등의 동료였으나 갑신정변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아 정치적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대한제국 막판에 친일파로 돌아서 일본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윤웅렬은 뒷배경이 없는 것 치고는 거의 기적적인 출세를 한 인물이지만, 서얼 출신에 무관이라 일평생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장남 윤치호의 재능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고(윤치호는 서자였는데, 윤웅렬은 윤치호를 적자(嫡子)로 만들어주기 위해 나중에 그의 생모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하였음), 온건개화파 정치인 어윤중(1848-1896) 밑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어윤중이 정치적 거물이었으니, 인맥을 만들어주려 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1907년경 촬영한 윤웅렬 가족사진. 앞의 꼬꼬마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으로, 윤웅렬이 뒤늦게 재혼하여 낳은 자녀들]


 윤치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는데, 본래 서자였던 그는 기술교육을 받을 예정이었지만 아버지 윤웅렬이 백방으로 손을 써 도진샤(同人社)에 입학하여 인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882년에는 아버지가 임오군란을 피해 잠시 일본에 망명하여(그가 별기군 책임자였기 때문) 윤치호와 함께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근대 교육을 받으면서, 윤치호는 기존 조선의 전통이나 성리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근대사상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과 이를 받아들여 근대화된 일본을 비교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국까의 기질이 여기서부터 한편 유학기간 중 윤치호는 김옥균의 조언으로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가 어학천재임이 이 때 드러났는데, 영어를 고작 4개월간 배우고는 대단한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부럽다


 윤치호는 1883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1826-1913)의 통역관으로 일하였고, 4개월 배웠다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영어 능력을 더욱 갈고닦아 진정한 영어마스터의 반열에 오릅니다. 고급 라틴어 계열 어휘라든지, 다른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묘한 뉘앙스까지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ㅡㅡ;




2. 정치적 도피유학에 오르다


 잘나가던 시절도 잠시,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은 그의 가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윤웅렬과 윤치호는 모두 급진개화파 인사들과 친한 사이였지만, 정작 정변 참여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일단 둘 모두 갑신정변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정변 계획을 알고서도 입을 닫는 등 어느 쪽이라고 보기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게 됩니다. ㅡㅡ; 어쨌든 양쪽에서 줄타기를 절묘하게 한 덕에, 윤웅렬 부자는 개화파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윤치호가 급진개화파와 친한 사이라는(실제로도 내심으로는 정변 성공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게 걸릴 수밖에 없었고, 윤치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가 고종의 허락을 받아 도피유학길에 올랐습니다(실제로 고종은 윤치호의 신변에 몇 차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를 상당히 아꼈던 듯). 윤치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중국 상하이의 중서서원(中西書院, 대만 둥우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습니다.


[상하이 중서서원 건물의 현재 모습. 학교 자체는 둥우대학(東吳大學)으로 개명한 후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하이가 조선과 가깝다 보니 윤치호는 유학지에서도 보수파 자객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유학이고 뭐고 정상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떨어지자 울분에 잠겨 술과 성(性)을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됩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를 죽이러 간 암살자들은 윤치호가 반 폐인이 된 것을 보고 별로 위협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암살을 포기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ㅡㅡ;


 방황하던 윤치호는 종교에 귀의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의 설득에 감화된 그는 곧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자신의 생활을 조금씩 고쳐가며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비참한 상태(특히 청인들의 불결한 위생관념)에 진절머리를 내고, 청과 다를 바 없던 조선을 하루빨리 근대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에모리 대학 유학시절의 윤치호. 우측은 <윤치호 일기> 자필본]


 중서서원에서 학업에 매진하던 윤치호는 1887년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은 후 다음 해 미국 유학에 올랐습니다(중간에 일본을 경유하면서 김옥균, 박영효와 만났는데, 윤치호는 김옥균이 사실상 정치적 폐인이 되어 여자관계에만 열중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잠깐만 당신은 상하이에서 어땠는데?).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영어와 신학 등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다시 조지아 주의 옥스퍼드 대학교와 에모리 대학교로 옮겨 공부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깊이 다지는 동시에,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체험(하나는 미국의 발전한 정치와 사회, 다른 하나는 극심한 인종차별)을 하게 됩니다. 윤치호는 합리성과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미국 사회를 조선이 가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아시아인을 학대하는 미국인(나아가서는 백인)을 증오하며 아시아 중심의 인종주의에 경도되어갔습니다. 자신을 돕는 선교사들까지 은연중 자신을 차별하는 것을 보며, 그는 많은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윤치호와 마애방, 그들의 자녀들. 1902년 촬영]


 모멸감을 견디며 에모리 대학교까지 졸업한 이후, 윤치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중서서원의 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로 건너온 김옥균을 다시 만났는데, 김옥균을 돕는다는 홍종우에 대하여 "스파이일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김옥균이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ㅡㅡ; 상하이에 체류하는 동안 윤치호는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1871-1905)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첫 번째 부인과는 1885년 이혼).




3. 독립협회에서 경술국치까지


 1895년 초 윤치호는 조선으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집안 전체에 기독교를 전도하고 가문 소속 노비를 전부 해방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정부 관료로 일하며 미국 남감리교의 한국 선교를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그 해 10월에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12월에 춘생문 사건(일본의 위협을 피해 고종을 궁 밖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에 간접 연루되어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아버지 윤웅렬이 가담했기 때문인데, 윤웅렬은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윤치호는 막 미국에서 돌아온 필립 제이슨(서재필)을 만나 조선의 정세를 전하고, 그가 추진한 신문(독립신문) 발간 사업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다만 윤치호는 왕년의 개화파 동지 서재필이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변모하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깡그리 지워버린 것에는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립 제이슨과 함께 일하던 윤치호는 고종의 명을 받고 민영환의 외교 순방(러시아 황제 즉위식 참석 등)에 수행원으로 동행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절단. 앞줄 두 번째가 윤치호, 세 번째가 민영환]


 윤치호는 러시아와 유럽 각국, 베트남 등을 거쳐 1897년 귀국하였고, 직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습니다. 필립 제이슨, 개화사상가, 정부 관료들이 함께 모여 창립한 독립협회는 이 해 내부 의견충돌로 정부 관료층이 대부분 탈퇴(이들은 대체로 친러파였는데, 독립협회가 반러 성향을 보였기 때문)했고, 이후 잠시간 필립 제이슨이 회장직을 맡았다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운영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때 독립협회는 절정기에 올라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 등을 잇따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여기서 결의한 내용은 정부 정책에도 상당부분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에서 결의한 상소에 따라 '중추원'이 초기적인 의회 형태로 개편되고, 윤치호는 몇몇 정부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원에 선임되었습니다.


[경운궁 대안문(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수파 관료들과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고,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던 고종은 민권운동을 이끌던 독립협회를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결국 '황국협회'를 사주한 보수파의 폭력, 그리고 이어지는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강제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치호는 나름 '민권운동'을 하는 자신들을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따라) 역적으로 매도하며 비난하는 다수 민중의 모습을 보며, 민중을 계몽하여 조선(대한제국)을 합리적인 근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윤치호의 사상은 민중을 계몽보다는 '개조'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스스로 근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 강제로라도 근대화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윤치호는 정부 관료로 평범하게 활동하였는데 주로 지방 행정직을 전전하였습니다. 강대국의 압박이 계속 심해지는 시국에 윤치호는 미국의 역할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미국 역시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방관하기만 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하자 윤치호는 거리로 뛰쳐나가 체결에 서명한 관료들을 성토하였으나 당연히 소용 없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아내 마애방이 출산 중 사망하는 개인적 불행까지 겹치며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는 관료 활동과 병행하여 민족 계몽운동 쪽에서만 간간이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대한자강회라든지, 신민회라든지 하는 단체들에서 활동했고(그나마 신민회의 경우 실질적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이름만 걸어놓은 것에 가깝다고도 합니다), 이와 동시에 몇몇 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신돌석 등의 의병장이 한국인의 밀고로 죽거나 체포된 것을 알고 나서는 이 민족은 답이 없다로 일관하게 됩니다. ㅡㅡ;




4. 일제강점기 초기의 행적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윤치호는 자신에게 주어진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낙향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귀족 작위를 받은 아버지 윤웅렬이 1911년 사망하자, 아버지의 작위는 또 별 말 없이 물려받았습니다. ㅡㅡ; 하지만 얼마 뒤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이름만 빌려줬든 어쨌든) 신민회 주요 인사 중 하나였던 윤치호는 도리없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함께 징역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귀족 작위는 박탈됩니다.


[105인 사건 때, 압송되는 관련 인사들]


 처음에는 일본의 전향 요구를 강경하게 거부하던 그였지만, 1915년 결국 친일 전향을 선언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윤치호의 이러한 심경 변화에 대하여는 이런저런 의견이 있는데, 난생 처음 겪는 옥살이를 견디지 못했다는 설, 애초에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던 만큼 계속 일본에 저항하기는 심정적으로 어려웠으리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출옥 후 윤치호는 적극적 친일행위를 하진 않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사실상 손을 떼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여 피지배민족의 독립을 지지하였(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연히 흥분에 휩싸인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윤치호는 윌슨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저건 승전국의 식민지를 위한 발언이 아니다"라며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3·1운동 역시 그는 참여나 협력을 거부하고, 오히려 "청년들을 앞세워 사지로 밀어넣었다"며 민족대표들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래도 3·1운동 때 수많은 사람들(특히 청년들)이 참여한 데 나름대로 큰 인상을 받기는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도 그는 여기에 참여는 거부하지만, 그가 입수한 정보를 일본에 발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언론에 "조선이 자치와 독립을 얻고 싶으면 일본에게 잘 보여서 호의를 사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등, 도대체 뭐가 뭔지 알기 어려운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3·1운동 당시 사진]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체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희망(의 잔재), 당시의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적 현실주의, 한때 자신이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일본에 대한 동경, 그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과 압도적인 힘에 대한 굴종 등, 상반되는 여러 생각들이 애매하게 뒤엉켜 있던 윤치호의 포지션은 독립운동가로도, 적극적 친일파로도 보기 어려운 애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윤치호가 천착한 것은 실력양성과 그에 이어지는 '자치론'이었습니다. 윤치호는 교육과 사회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대하여는 '가망없는 짓'으로 간주하고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1920~30년대 걸쳐 아버지와 가문을 통해 받은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운동과 교육활동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꾸준히 일본 당국의 회유를 받기도 했으나, 윤치호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을지언정 일본과의 적극적인 협력 역시 거부합니다. 여담으로 윤치호는 본래 여성 교육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셋째 아내(백매려, 1890-1943)와 딸들이 자신에게 비판적 언사를 일삼자 여성교육에 대한 회의론자로 돌아섰다고. ㅡㅡ;




5. 마침내 정신줄을 놓은 말년의 윤치호


 1938년 윤치호가 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공갈 협박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감시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아니 그렇게 똑똑한 양반이 그런 거 하나 눈치를 못 챘나? 한편 수양동우회 ·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잡혀가 고초를 겪게 되자, 윤치호는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당국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사실 사촌 윤치영(1898-1996)까지 잡혀간데다 자신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판국이었으니, 자신과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윤치호는 이후 일본의 지배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적극 친일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들었습니다. ㅡㅡ; 1940년 창씨개명 때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으나, 결국 문중회의를 열고 대다수 의견에 따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정합니다(이 때 윤보선 혼자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결성되었고, 안창호와 이광수 등이 운영을 주도하였습니다. 1937~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해체당한 이후,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다수 회원이 친일 쪽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을 계기로 윤치호는 완전히 친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윤치호는 처음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일본의 세계정복, 혹은 미국의 승리)를 놓고 갈등하였고, 미국이 승리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그렇게 잘 맞던 그의 촉이 마지막 한 순간에 어긋났으니, 윤치호는 미국의 승리보다 일본의 승리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최종적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ㅡㅡ;


 이 때 윤치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신줄을 놓은 데 대하여, 혹자는 그가 유학시절 미국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따돌림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상술했듯 유학 시절의 상처 때문에 윤치호는 서양 세계를 '경외'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이런 시각 때문에 그 서양과 일본의 싸움을 냉정한 시각으로 볼 수 없었으리라는 것. 아무튼 윤치호가 적극적 친일파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1943년 11월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윤치호의 학도병 참가 독려 기고문]


 이후 윤치호는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고, 중추원(이 때의 중추원은 총독부의 자문기관 겸 명예직으로, 고위 친일파에게 주어지는 자리) 참의직과 일본 제국의회 의원직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1945년 4월에는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확대와 처우개선(?)을 감사하는 사절단의 대표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이미 그 시점에서 일본이 쫄딱 망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생각했든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일제강점기 막판 수괴급 친일파였던 그는 당연하게도 전민족의 A급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윤치호는 사람들의 거센 비판에 맞서 자신을 변명하였고, 속속 귀국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너희들 때문에 해방이 된 줄 아느냐?"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별다른 탄압을 받진 않았는데, 미군정의 태도(한국을 '점령지'로 간주한 것)에는 또 비판적 입장이었습니다.


[말년의 윤치호]


 물론 그가 아무리 "친일파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떠든다 한들, 30년 넘게 쌓인 사람들의 분노를 무마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친일파의 상징이 되었고, 개성의 자택이 괴한에게 공격당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의 압박과 해방 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1945년 11월 말 윤치호는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쓰러졌고 며칠 후 뇌일혈이 겹쳐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81세). 일각에서는 자살설도 있긴 한데 신빙성은 높지 않습니다.


 그의 유언은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였다고 합니다. ㅡㅡ;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셀프디스? 아니면 고도의 자기변명?




6. 정리 : 그의 복잡한 삶을 도대체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 윤치호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천재이자 지식인 중 하나입니다. 그는 4개월만에 영어를 마스터한 어학천재였으며, 대다수 독립운동 세력의 낭만적 현실 인식을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교육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민족 계몽에 투신한 활동가이기도 했고, 자신의 명망과 지위, 재산을 바탕으로 안창호, 이상재 등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성과 활동력이 결국 '자포자기'로 흘러버리곤 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본질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지만,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손을 놓아버리곤 했던 것입니다.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을 통틀어 윤치호는 그것들의 실체를 명확히 통찰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제대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상처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 또한 보였습니다. 윤치호가 미국 유학 시절 당한 온갖 차별과 폭력은 평생동안 상처가 되어 그의 사상에 그림자를 남겼고, 그는 자신이 겪은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인생 막판에 '반대 방향의 인종주의'를 선택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윤치호의 삶은 그와 동시대를 지낸 개화기 지식인 일반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끝까지 일본에 저항한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일본에 들러붙은 사람도 있으며, 항일에서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사람, 친일파에서 항일로 돌아선 사람 등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사상과 삶의 여정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화는 해야 할텐데, 정작 내부에서 그럴 동력은 없고, 관료들은 국가의 미래에 별 비전이 없고, 왕실은 교통정리를 할 능력과 의지가 없고, 시간은 없는데 외부의 압박은 갈수록 심해지고, 민중은 근대화 자체에 비협조적이었던 게 당시 한반도의 정세였습니다. 먼저 근대화된 지식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결국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파가 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소수는 아예 바다 저 멀리 떠나버리기도 했지요. 분명한 건, 그들은 분명 이 사회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가능성을 사회를 위해 제대로 활용한 경우는 결코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윤치호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어학천재였지만 정작 그 재능을 한국의 언어를 위해서 거의 쓰지 않았고(당시 한국어 어휘가 시원찮다고, 국문으로 쓰던 일기를 영문으로 바꿔버렸을 정도), 세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으면서도 이를 단지 자신의 정신승리와 남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 넣다시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지식이란,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한국사료총서(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 中 <국역 윤치호 일기>




[2018. 5. 23. 수정]




작곡 : 프란츠 에케르트 (1852-1916)

작사 : 민영환 (1861-1905)

제정 : 1902년

폐지 : 1910년


 - 대한제국의 국가로 쓰인 이 노래는, 대한제국 자체가 금방 멸망했기 때문에 국가로서는 몇 년 쓰이지 못한 비운의 노래입니다. 작곡자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본래 독일 해군 소속 음악가로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근대식으로 편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대한제국에 파견된 것은 1901년이었는데, 일본에서 경험했듯이 대한제국에서도 국가를 만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예상대로 정부가 국가 제작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 에케르트는 민요 선율에 바탕을 두고 작곡을 진행하여, 1901년 고종 탄신일에 궁궐에서 초기 버전을 연주하였고 다음해 최종적으로 완성하여 대한제국 국가로 공식 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망해감에 따라 이 노래 또한 풍운에 처하게 되었는데, 공식적으로 연주된 것은 1907년 순종 즉위식 이후로 없었으며 1909년에는 일본이 다른 애국창가와 함께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습니다. 공식적으로는 1910년 병합과 함께 폐지되었습니다.


 - 이후로는 당연히 공식적으로 부를 수 없었으며 주로 해외 교민들에 의해 전파되었는데, 전파가 주로 구전으로 되었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별로 가사에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남북한 정부 모두 새로운 노래를 국가로 선정하면서 이 노래는 사실상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원곡 가사는 충정공 민영환이 작사하였으며, 대한제국이 전제 제국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찬양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 가사 (원곡) ###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를 도으ᄉᆞ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ᄉᆞ
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셔서
만수무강하시고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셔서
오, 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 가사 (1925년 하와이 한미클럽 버전) ###

상뎨(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영원무궁토록
나라태평ᄒᆞ고 인민(人民)은 안락ᄒᆞ야
위권(威權)이 셰샹에 떨치여
독립자유부강을
일신(一信)케ᄒᆞ소서
상뎨(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하느님은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영원 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여
위엄과 권세가 세상에 떨치여
독립 자유 부강 을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나라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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