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phie-Carmen Eckhardt-Gramatté (1898(1899)-1974)

Symphony No.1 in C E.104



 - 이 비범한 ㅡㅡ; 이름을 가진 인물은 러시아계 캐나다인으로, 작곡가, 피아니스트,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으며(출생연도가 1898년과 1899년으로 각기 다르게 적혀 있는데, 그레고리력(세계 표준)과 율리우스력(제정 러시아 사용)의 차이로 보입니다), 초명은 Sofia (Sonia) Fridman-Kochevskaya입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8세에 파리 콘서바토리에 유학하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작곡을 트리플복수전공하게 됩니다.


 - 11세에는 파리, 제네바, 베를린을 순회하며 첫 번째 연주회를 열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번갈아가며 연주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1920년 화가 발터 그라마테(1897-1929)와 결혼하였고, 이후에도 1925년 에드윈 피셔(1886-1960)와 독일에서 연주회를 여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1929년 그는 남편을 결핵으로 잃고 말았습니다.


 - 이후 그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자신의 첫 번째 피아노/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였고, 1934년에는 저널리스트 겸 예술사학자인 페르디난트 에크하르트(1902-1995)와 재혼하였습니다. 1936~39년 사이에는 베를린에서 막스 트라프(1887-1971)에게 작곡을 배웠고, 이후 남편과 함께 비엔나로 이주하여 작곡가로 활동하였습니다(제2차 세계대전도 겪었을 텐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찾기 어렵네요).


 - 1953년에는 다시 아메리카로 이주, 캐나다의 위니펙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 활동과 함께 음악 교육자로 활동하며 몇몇 학생을 지도하였습니다. 1974년 트럼펫 협주곡을 작업하던 도중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향곡은 2개가 있으며, 1번 교향곡은 1939년에 작곡하였습니다.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Hymnus an das Leben>


 - 프리드리히 니체는 현대 철학의 문을 연 역사적인 철학자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음악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실제로 어느 부분에서는 음악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전문적 음악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왔으며 10대 때의 짧은 시기동안이나마 여러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청년기 이후로는 철학 연구에 집중하느라 작곡에서는 멀어졌지만, 이후로도 음악은 그의 삶이나 사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니체는 1869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교수로 채용되었고, 이 무렵 스위스에 머물며 작곡활동을 하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나게 됩니다. 니체는 음악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바그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여러 해 바그너와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새로운 자극을 받았는지, 중단했던 작곡 활동에 다시 손을 대어 몇 개의 작품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 다만 시간이 지나며 니체는 바그너를 차츰 멀리하게 되었는데, 이는 바그너의 사상에서 기독교나 반유대주의 등 니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들이 강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웃기게도 그의 사상은 사후 자신의 후처 코지마와 나치의 합작으로 반유대주의 사상인 것처럼 왜곡되었고, 이러한 오해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880년대가 되면 니체는 역설적으로 격렬한 바그너 반대자가 되었고,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등의 저술을 통하여 바그너를 비판하게 됩니다.


 - 1882년경 니체는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루 살로메(1861-1937)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살로메가 자신의 철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반한 니체는 그에게 청혼을 하지만 곧바로 차이고 말았습니다. ㅡㅡ; 살로메의 회고에 따르면, 철학적으로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17세나 연상인데다 이미 이런저런 지병(매독, 사시, 치질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가던 니체는 육체적으로는 도무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 다만 두 사람은 철학적으로는 깊은 교감을 나누었고 이후 살로메의 동료인 파울 레에(1849-1901)와 함께 '철학적 교류만이 개재된' 3인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니체는 살로메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얼마 뒤 두 번째로 청혼했다가 다시 거절당했으며 결국 동거 생활은 파탄나게 됩니다. ㅡㅡ; <삶을 위한 찬가>는 살로메의 시를 바탕으로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여 작곡한 합창곡으로 1887년 완성되었습니다.





John Field (1782-1837)
Nocturne No.2 in c H25


 - '녹턴(Nocturne)'이라는 단어는 '밤의 기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Noturnus'에서 유래하였는데, 중세부터 쓰여 왔으며 당시에는 예배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후 18세기에 'Notturno'라는 명칭으로, 주로 저녁이나 밤에 연주되는 연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녹턴은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밤의 고즈넉하고 때로는 고독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주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악곡의 장르가 되었는데, 대중에게는 쇼팽의 녹턴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녹턴'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인물은 존 필드입니다.


 -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얼마 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어릴 적에 이미 재능을 보여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에게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대단해서 12세 때 이미 웨일스 공(영국의 왕세자) 주최의 음악회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며, 20세 때는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클레멘티와 함께 전 유럽에 순회 공연을 떠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된 순회 공연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끝났는데, 여기서 필드는 스승과 헤어져 그대로 러시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드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교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녹턴이 만들어졌고, 필드는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 러시아 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반으로 모스크바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821년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주하였습니다. 이 무렵 필드는 상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결과 보드카 알코올 중독이 찾아왔고 자연히 건강도 악화되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1820년대 후반에는 직장암까지 발병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 차원에서 오랜만에 서유럽으로 떠났습니다.


 - 필드는 요양차 서유럽에 와서 겸사겸사 음악 활동도 재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멘델스존 등의 음악가들과도 만나 교류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당시 이미 쇼팽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첫 녹턴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드와 쇼팽을 비교하기도 했고, 쇼팽이 필드의 제자 아니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습니다(음악을 들으면 알겠지만 둘의 스타일은 꽤 다름). 쇼팽은 필드의 음악에 관심은 있었지만, 썩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 서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수술을 받는 등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필드의 건강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폴리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러시아에 있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8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필드는 마지막 몇몇 작품들을 작곡하고 마지막 음악회를 수행한 후, 1837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피아니스트답게 작품 중 많은 수는 피아노곡이며, 그 중에서도 자신이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 녹턴이 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필드의 음악은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간결한 테크닉과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노래'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의 녹턴은 18곡 정도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녹턴으로 보기 애매한 작품이나 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도 있어 작품 수는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1859년 출판된 악보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Kaikhosru Shapurji Sorabji (1892-1988)

<Opus Clavicembalisticum>





 카이코스루 소랍지는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런던 근교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도계로 뭄바이 파르시(조로아스터교도 공동체)의 후예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시칠리아인으로 오페라 가수 출신입니다. 그의 본명은 '레온 더들리 소랍지'였지만 후에 개명하였는데, 자신이 파르시의 후예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소랍지가 음악을 배우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소랍지의 어머니가 음악을 그만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소랍지는 어머니에 의해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청소년기까지 주로 독학과 개인교습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인물은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 피터 월록(1894-1930)으로, 그와의 친교를 통해 소랍지는 작곡과 음악평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페루치오 부조니(1866-1924)의 도움으로 음악계에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소랍지의 음악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쇤베르크, 스크랴빈, 말러, 드뷔시 등 시대 전환기에 등장한 작곡가들의 독특한 음악, 그리고 자신의 출신에서 비롯한 인도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점차 '난해하고 길며 어려운' 성향을 띠게 되었는데, 이를 상징하는 작품이 바로 1930년에 완성한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입니다. 이 작품은 총 12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곡 연주에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물론 이후의 작품 중에는 연주 시간이 훨씬 더 걸리는 것들도 있습니다. ㅡㅡ;


 곡이 연주하기 너무 어려운데다 소랍지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이 생겼고, 결국 소랍지는 타인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수십 년간이나 금지하고 악보 출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1951년에는 런던을 떠나 이주하였고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소랍지는 자신의 작품을 녹음하는 것도 매우 싫어했는데, 그나마 주변 사람들의 제안으로 간간이 녹음이나 보존 작업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금령(禁令)은 1970년대 중반 마이클 하버만(1950-)과 욘티 솔로몬(1937-2008)에게 자기 작품의 연주를 허용하면서비로소 풀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1982년에는 존 오그돈(1937-1989)이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을 런던에서 공개 연주한 사례가 있습니다. 90세를 넘어서까지 건강을 잃지 않았고, 1988년 사망하였습니다.


 소랍지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연주 난이도가 높고 연주 기법도 상당히 독특(혹은 이상)한 것이 많은데다 대체로 연주 시간도 장난 아니게 길어서 연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봉인 해제 많은 피아니스트가 도전하지만, 일단 정상급 기교에 체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곡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라 자주 연주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존 오그돈 등의 몇몇 연주자들이 음반을 녹음하는 등의 노력을 해 오고 있습니다.

 

[2018. 5. 23. 수정]




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

Etude <Le Festin D'Esope> Op.39 No.12


 - 샤를 발렌틴 알캉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전성기에는 쇼팽, 리스트와 함께 당대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본명은 '샤를 발렌틴 모랑주'이며, '알캉'은 역시 음악가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사용한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파리 음악원 입시를 위한 일종의 음악학원을 운영하였고,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알캉은 유년기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산하여 불과 6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에르 지메르만(1785-1853)을 사사하였습니다.


 - 이후로도 천재성은 가라앉지 않아 파리 음악원을 최우등(프리미에 프리)으로 졸업하였고, 20대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쇼팽, 리스트와 함께 젊은 비르투오소로 거대한 명성을 쌓게 됩니다. 폴란드 출생이지만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쇼팽과는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친구 사이였는데, 쇼팽이 자신의 연주회에 알캉을 초청할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 순조로운 젊은 시절을 보낸 알캉은, 절친 쇼팽이 병으로 요절하고 스승 지메르만이 은퇴한 후 앙투안 마르몽텔(1816-1898)과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알캉은 이후 오랫동안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성서와 탈무드에 천착하는 은둔 생활을 거의 30여 년 가까이 이어가게 됩니다.


 - 은둔 중에도 작곡과 출판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1877년에 비로소 알캉은 봉인 해제 은둔에서 벗어나 연주회를 비롯한 대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습니다. 1888년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였는데, 책장에서 탈무드를 꺼내다가 책장이 넘어지면서 깔려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ㅡㅡ; 다만 이는 약간 후대에 나온 이야기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답게, 알캉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이외에 교향곡 하나와 몇몇 실내악곡이 있습니다. 동시대의 쇼팽과 리스트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근래 와서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앞의 두 작곡가와 비슷하게, 알캉 역시 고난이도의 연습곡을 다수 작곡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Op.39의 12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Michael Haydn (1737-1806)

Symphony No.25 in G MH 330

(Mozart Symphony No.37 in G K.444)


 - 먼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교향곡 37번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악보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된 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곡의 작곡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고,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80-1952) 등 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현재는 1악장의 서주만 모차르트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형이 비엔나 슈테판 성당 합창단에 입단한 이후 합창단 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1708-1772)의 도움으로 미하엘을 비롯한 동생들 역시 합창단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하이든 형제는 변성기가 오면서 차례로 합창단을 떠났으며, 미하엘의 경우 퇴단 직후 그로스바르다인(現 루마니아 오라데아)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762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이후 남은 평생을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36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1768년 미하엘은 성악가로 활동한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1745-1827)와 결혼하였는데, 잘츠부르크에서 친분 관계를 맺게 된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군요. 둘 사이에 자식은 딸(알로이지아 요제파)하나가 유일한데, 그나마 생후 1년 남짓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미하엘은 몇몇 부분에 대하여는 형인 요제프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종교음악의 경우 요제프 스스로가 자신보다 미하엘이 뛰어나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하엘은 주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대표작들 또한 교회음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레퀴엠 c단조>는 미하엘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물론 고전시대 작곡가답게, 43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다수의 세속음악도 만든 바 있습니다.


 - 다만 아무래도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대라, 그의 작품인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으며 요제프의 작품에 섞여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똑같은 '하이든'이다보니 풀 네임을 쓰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의 교향곡 25번이죠. 여담으로 미하엘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경우 미하엘이 술을 너무 마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는군요.





Josef Strauss (1827-1870)

Polka <Ohne Sorgen> Op.271


 -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차남으로,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려고 하였지만 군사훈련을 버티기에는 그리 강건하지 못하여, 전공을 수학과 공학 쪽으로 바꾸었고 수학 참고서를 낼 정도로 나름의 입지를 확보하였습니다.


 - 음악가 데뷔는 상당히 얼떨결에 이루어졌는데, 1853년 요한 2세가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자 요제프에게 땜빵(?) 지휘를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 교육을 계속해왔던 그는 이를 수락하였는데, 데뷔 무대가 의외의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 슈트라우스 일가의 일원답게 요제프 역시 왈츠 등의 경음악 분야에서 맹활약하였는데, 요한 2세가 "형제 중 최고의 재능은 요제프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공계 쪽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보니 공과대학이나 산업체 등의 행사에서 많은 음악을 의뢰받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음악 스타일 때문이었다는군요.


 - 워낙 인기가 많았다보니 슈트라우스 일가는 모두 과로에 시달려야 했는데, 요제프 역시 과로로 건강을 많이 해쳤고 1870년 폴란드 공연 중 무대에서 갑자기 쓰러져 그 길로 사망했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세간에서는 그의 사인에 대해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심지어 러시아 군인의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설까지 있었다고), 장례와 매장에 관여한 사람들의 증언으로 일단은 과로사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 283곡의 자작곡 뿐 아니라 편곡한 작품 또한 굉장히 많았는데, 막내동생인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1835-1916)이 형들의 사후 악단을 해체하면서 요제프의 악보 상당수를 폐기해 버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에두아르트 역시 음악가였지만 형들의 명성에 묻히는 경향이 있었고(심지어 자신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여기에 큰 불만을 가졌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Giovanni Sgambati (1841-1914)

Symphony No.1 in D Op.16


 - 스감바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겸 작곡가입니다. 로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의 트레비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수이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약간의 교회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부터 로마로 돌아와 정착하였고, 때마침 1861년 로마로 이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휘자 활동은 독일계 작곡가의 음악을 이탈리아에 소개한 것이 돋보이는데, 베토벤 교향곡 3번과 7번의 이탈리아 초연을 맡았고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 등 여러 작품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 1860년대 후반 뮌헨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기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피아노곡을 많이 썼으며, 1901년 완성한 레퀴엠 같은 대작도 있습니다. 교향곡은 총 두 곡이 있고, 1번 교향곡은 1881년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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