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 다루었던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당대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식과 경륜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혹은 비뚤어진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왜곡하고 악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악질 친일파로 비판받는 자들 중에는 진심으로 일본의 침략이 한국에 좋을 것으로 믿었던 순진한, 아니 멍청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동학 지도자 중 하나였더 이용구(1868-1912)의 일생이 좋은 표본이 될 것입니다.


[그의 위엄 돋는 콧수염을 보라!]



1. 동학군의 행동대장 이상옥


 - 이용구는 1868년 경상도 상주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로 근근이 생계를 잇다가 19세 때는 청주로, 20세 때는 충주로 옮겨 살았습니다. 초명은 우필(愚弼)이었고, 뒤에는 상옥(祥玉), 만식(萬植)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 가난한 농민으로 자라난 그의 인생은 나이 23세 때,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하면서 크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동학 입교 후 그는 당시 동학 교주 최시형(1827-1898)의 밑에서 수학(修學)할 기회를 얻었고, 훗날 3대 교주가 되는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의 고족제자(高足弟子. 학식, 품행 등이 뛰어난 제자)로 동학의 중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질 무렵, 이용구는 호서지방(충청도)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남접과 북접의 세력권. 화살표는 1차 봉기 때의 진로]


 - 북접은 전라도 쪽 남접에 비하여 온건한 성향이었고, 1차 봉기 때는 아예 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북접 쪽에 있었던 최시형은 현실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것을 원했고, 그래서 정치성이 강한 남접의 봉기를 지지하지 않았음). 하지만 1차 봉기의 여파로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고, 특히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남접 쪽에서 2차 봉기가 터졌습니다.


 - 이 때도 최시형, 이용구 등 북접의 지도부는 정부와의 타협을 주장하였지만, 남접군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격파하자 마침내 동학군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손병희와 이용구(당시 이름은 이상옥) 등이 이끄는 북접군은 전라도에서 올라온 남접군과 합류하고, 충청도의 중심지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습니다. 이용구, 아니 이상옥은 충주와 청주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을 격파하고, 이후 공주로 진격하는 손병희 군대의 우익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우금치에 있는 동학농민군 위령탑]


 - 하지만 공주 근처 우금치에서 동학의 주력군은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참패하였으며, 다른 전선에서도 잇따라 밀리며 동학군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용구의 부대는 논산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섬멸되고, 이용구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로 간신히 포위를 뚫고 충주로 도망쳐 몸을 숨겼습니다.



2. 일본 물 먹고 오더니 좀 이상해졌다


 - 이후 이용구는 수년간 가족을 데리고 피난 생활을 해야 했는데, 먼저 그의 아내가 체포되어 수감된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이용구 역시 1898년 체포당하기에 이릅니다. 얼마 뒤 최시형도 체포되었고, 최시형은 결국 처형당했는데 이용구는 어찌어찌하여 죽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 한편 최시형 사후 3대 교주가 된 인물이 바로 손병희였는데, 그는 계속 탄압이 이어지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동학의 포교와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세계 돌아가는 정세도 익힐 겸) 등 몇몇 지도자들과 함께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용구 역시 손병희를 따라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이용구는 얼마 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먼저 귀국, 지하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 이용구의 행보가 어딘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무렵 이용구는 국내의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진보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보회는 송병준(1857-1925) 등이 이끌던 듣보잡 단체에 흡수통합되었는데, 그 단체의 이름은 일진회(一進會).


[일진회 회원들의 단체사진. 1908년]


 - 비록 진보회가 흡수당하는 형태였지만, 인원은 진보회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일진회는 단숨에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통합 일진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이용구는 러일전쟁 중 일본 지지를 선언하고,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일진회는 회원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의선 철도 건설(본래 대한제국 정부에서 지으려고 하였으나, 만주 쪽으로 가려는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김)에 노역을 하도록 했습니다.


 - 당연히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이용구의 이러한 행보를 보고 경악하였고(동학이 원래 극렬 반외세 성향임을 생각합시다), 이용구의 행보를 적극 제지하려 하였지만 이용구가 이를 들을 턱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진회가 을사조약 지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계기로, 손병희는 직접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였으며 이용구와 그를 따르던 62명의 신자를 제명하였습니다.


 - 이에 이용구는 깨갱......할 리가 있나요. 제명당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라는 신흥종교를 만들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물론 출신이 출신인지라 시천교는 실제로는 동학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두 종교가 양립한 상황에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서로간에 전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ㅡㅡ;



3.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 이후 이용구는 정식으로 회장 자리에 올라 일진회를 이끌었는데, 실제로는 우치다 료헤이(1874-1937) 등 일본인 고문들이 단체를 배후조종하고 있었습니다. 통감부 설치 이후 사실상 통감부 산하의 어용조직처럼 되어버린 일진회는 이후 일본 침략의 앞잡이로 맹활약(?)했는데, 두드러진 분야는 성명문, 유세, 강연 등 친일 여론을 조장하는 프로파간다 활동이었습니다.


[1907년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훗날의 다이쇼 덴노)의 한국 방문 때 일진회가 세운 환영 아치]


 - 당연히 일진회의 행보는 모두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특히 이 시기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은 너나할 것 없이 일진회 회원들을 우선 타겟으로 삼아 공격하였습니다. 1907~1908년 사이 1년여간 의병의 공격으로 사살된 일진회 회원만 9천여 명에 달했다고. ㅡㅡ;


 - 물론 이미 일본에 먹히다시피 한 일진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급기야 1909년 말부터는 소위 '합방청원서'를 잇따라 발표하며 한국-일본 간 병합을 청원(!!!)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일진회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일진회 내부에서도 탈퇴자가 속출할 만큼 많은 반발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부 내에서도 일진회 수괴인 송병준과 이용구를 처형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 여기저기서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몸을 피하여 일본 군경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 와중에도 일진회 산하 조직들을 동원하여 합방청원을 지지하도록 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렵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실제 회원은 기껏해야 10만 명 미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는 4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찰추산 vs. 주최측추산?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이좋(?)게 찍은 사진. 우측이 이용구]


 - 당시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 지도부는 일본 총리 가쓰라 타로(1848-1913)에게 '합방 청원운동 비용과 합방 후 간도 이주비용'으로 야반도주? 300만 엔(현재 환율로 1000억 원을 넘습니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가쓰라는 "300만이 아니라 3000만 엔이라도 지원해줄 것"이라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병합이 실현된 이후, 일진회에 대한 일본의 대답은 "ㅗ"였습니다. ㅡㅡ;


 - 병합 직후 일본 당국은 모든 한국인 단체를 강제해산하였고, 거기에는 일진회 등 친일단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해체와 함께 일진회에 지급된 보상금은 300만은 커녕 고작 15만 엔에 불과했으며, 10만 회원이라 치면 1인당 1.5엔에 불과한 ㅡㅡ;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심한 충격을 받은 이용구는 결국 몸져누웠고, 그 길로 병세가 악화되어 1912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4. 도대체 왜 그랬을까 : 그는 순진, 아니 멍청했다


 - 이용구는 죽기 얼마 전 문병을 온 우치다에게 "우리는 참 멍청한 짓을 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속았던 건 아닐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스스로 '속았다'고 생각했던 건 물론 일진회의 협력에 뒤통수를 날린 일본의 행동이 일차적인 이유였겠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운 속사정도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이용구는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아시아주의(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인종이 단결하여 백인 세력에 맞서자는, 일종의 동아시아판 인종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우치다를 만났을 때 이용구가 제시한 한일병합의 형태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유사한 '이중제국'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일종의 '동군연합'으로, 헝가리는 국방, 재정,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 자치권을 보유]


 - 즉 일본의 덴노가 전체를 다스리는 공동의 황제이되, 한국과 일본은 독자성을 유지하고 서로간에 평등한 병합을 하자는 이야기. 물론 이 말을 들은 우치다 등의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이에 적극 동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병합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한국이 일본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는 형태였습니다. 애초에 아시아주의 자체가 이 무렵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는 논리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 병합 직후 일진회가 별 대가도 받지 못하고 해체당하는 모습을 겪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속아서 살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전국민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어가며 벌였던 자신의 활동이 모두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절감한 이용구는 말 그대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차는 떠나갔는데요.



5. 정리 : 우리가 멍청해서는 안 되는 이유


 - 이용구는 분명 대단한 역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농민이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는 그에 걸맞는 통찰력을 갖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 일본 내에서도 변질되어버린 아시아주의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으며 그 이상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제국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 이 정도의 지도력을 갖추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 놓으면, 당연히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이용구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든 그와 그가 이끄는 일진회의 활동은 일본의 한국 침략에 말 그대로 길을 닦아주는 꼴이었으며, 그들은 만고의 매국노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 물론 그 멍청함이란 이용구에게 어떠한 변명도 되지 못합니다. 그의 이상은 이미 뜬구름 잡는 구시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의 침략으로 이미 한국인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는 일본의 침략에 협력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몰라서 그랬든, 아니면 알고도 그랬든간에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어디까지나 이용구 자신에게 있습니다.


 - 이러니 그가 나중에 "내가 속았다"라고 아무리 울분을 토한들 소용이 없지요. 우리는 그를 한심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불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그가 속은 게 맞다 치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에게 속은 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일생에 대하여 '멍청함으로 만고에 죄를 지은 매국노'라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속았다고 해서, 여기에 그의 이름이 빠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angchil.egloos.com/958648

http://blog.ohmynews.com/jeongwh59/tag/%EC%9D%B4%EC%9A%A9%EA%B5%AC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530&index_id=cp05300109&content_id=cp053001090001&search_left_menu=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5/read/22293702 (이용구의 이중제국 제안)



 - '헬조선'이라는 말이 중요한 화두가 될 정도로 요즘 한국인들에게는 한국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아예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뭘 해도 안될 열등종족'으로 비하하며 소위 '선진적'인 다른 사회를 찬양하는 극단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요즘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번에는 '한국인은 답이 없다'로 일관한 신념형 친일파, 박중양(1872?-1959)의 일생을 살펴보겠습니다.


[박중양. 1900년경]



1. 근성으로 출세한 가난뱅이


 - 박중양의 출신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아버지 박정호는 몰락한 향리 가문 출신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지주 집 마름 노릇으로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출신이 이렇다 보니 그의 초년은 분명히 알려진 게 별로 없는데, 일단 출생년도가 1872년인지 1874년인지 분명치 않고, 심지어 그가 반남 박씨인지 밀양 박씨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ㅡㅡ; 초명은 박원근이었고, '중양'은 성인이 된 후 개명한 것입니다.


 - 초년의 박중양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돈도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출세욕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880년대 처음 실시된 일본 유학생 선발에 응시하였지만 여러 차례 낙방하였습니다. 그는 급진개화파의 수장인 김옥균을 존경하였는데,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일파가 죽거나 망명하고 결국 김옥균이 암살까지 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씨 조난사건>.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유학생 선발에 계속 도전하면서, 박중양은 서울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타진하였습니다. 이후 1896년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거기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드디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약 7년간 일본에 국비장학생으로 유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비유학생인데도 생활비는 제대로 지원되지 않았는지, 유학기간 내내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는군요.


 - 박중양은 우선 기독교 목사인 혼다 요이츠(1848-1912)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그가 운영하던 아오야마학원(現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중학부로 진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토는 그에게 경찰, 행정 쪽으로 집중해 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


 - 그렇게 그저 가난한 유학생1에 불과했던 박중양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내가 바다에 빠져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하필 거기 있던 박중양이 곧장 바다로 뛰어들어 그를 구했던 것. 자기 아내를 살려주고 그에 대한 사례와 선물도 일절 사양한 박중양의 태도에 이토는 꺼뻑 죽었다고 합니다. ㅡㅡ; 이후 박중양은 이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박중양 또한 (의외로) 한국인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이토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2. '한국인은 답이 없다'


 - 그런데 이 시기 고종 황제와 대립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와 관련하여, 박중양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혹시 박영효의 일파가 아닌가' 의심하는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학비와 자객을 동시에 선사하는 고국의 모습에 진절머리를 냈고,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점차 키워가게 됩니다.


 - 일본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이토의 조언을 따라) 경찰과 행정 업무 쪽이었습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박중양은 도쿄 부기학교에서 금융 업무를 전공하였고, 동시에 도쿄 경시청(경찰청)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 분야를 깊이 공부하게 됩니다. 그의 일본 생활은 매우 성실해서 다른 유학생들이 흔히 빠지는 유흥과 잡기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며,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성을 쓰며 일본의 엘리트 계층과 활발한 교유를 했다고 합니다.


 - 1903년 귀국하여 곧바로 관리서(管理署) 주사(主事)로 임용되었지만, 개혁세력을 적극 등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상소가 황제에게 올라가지도 못하는 일을 겪은 후 바로 관직을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다음 해 러일전쟁이 터지자, 박중양은 일본군 고등통역관으로 취직(?)하여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활동하였습니다. 유학시절과 일본군 종군시절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친절함에 매료되었고 ㅡㅡ; 이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를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 1904년 11월 농상공부 주사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상소가  외면당하자 자청하여 대구로 내려가 한국인 관료와 일본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박중양은 상대적으로 일본 편을 들거나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였고, 일본인들의 신뢰와 호의를 얻게 됩니다. 1905년 2월에는 잠시 진주 판관 겸 진주군수 서리에 임명되는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유명한 촉석루를 제외한) 진주성의 일부를 해체하는 위업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ㅡㅡ; 지방관으로 가서 반달리즘이라니


[진주성은 해방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게 됩니다]


 - 이후 6월에는 의친왕 이강을 대표로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 스승 이토 히로부미를 다시 만난 박중양은 "한국은 도저히 답이 없으니, 미국 유학이나 하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이토는 엄격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관직에 있을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수행원 임무가 끝난 이후 도쿄에 남아 다시 유학하고, 다음 해 귀국하였습니다.


 - 귀국한 박중양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으로 임용되었고, 이후 그는 이토와 통감부를 뒷배경으로 쾌속승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06년 7월 대구 판관으로 파견된 박중양은 그 길로 대구군수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하자마자 대구군청 신축부터 강행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대구군수 재임기에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구읍성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위업을 세웠습니다. ㅡㅡ; 성곽 해체 전문가


[당시 대구 동쪽 성벽을 허문 자리에 개설한 도로가 그 유명한 대구 동성로]


 -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생각은 있었는지, 을사조약과 고종 강제퇴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후 평안남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북도 관찰사(도지사)를 역임하였으며 한일병합 직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한일병합 당시에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국민이 충성할 의무는 없다"며, 슬퍼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라



3. 일제강점기의 활약(?)상


[박중양의 친필 휘호]


 - 병합 이후로도 박중양은 지방과 중앙을 오가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910년대 후반과 1930년대 두 번에 걸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1940년대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충청남도, 황해도(2회), 충청북도 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 관료로서 활동도 두드러집니다.


 - 3·1운동 때는 자제단(시위 중단을 설득, 종용하며 적극 참여자를 신고하는 일을 하였던 친일 성향 단체)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경성(서울)과 대구 지역 자제단을 조직하여 이끌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박중양 개인은 한국인 노점상을 괴롭히던 일본인을 아끼던 지팡이로 두들겨 팬다든지, 일본인들 앞에서 대놓고 비판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딱히 한국인으로서라기보단 '조선인도 똑같이 일본 신민이 되었는데 왜 사람 차별하는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 1923~25년 사이 충북도지사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이런저런 스캔들을 일으켜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1924년 속리산을 유람하던 중 비 내리는 진흙탕 길(現 말티재)에서 진종일 고생한 박중양은, 빡친 나머지 보은군수에게 대대적인 신작로 공사를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공사 과정에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을 해야 했고, 심지어 농번기에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토목기사와 순사를 집단폭행하는 등 소요사태로 번지기까지 했습니다.


[박중양이 지시한 도로공사와 농민 소요 기사.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


 - 그해 말에는 더 큰 스캔들을 일으켰으니, 속리산의 산사(山寺)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 귀빈을 대동하고 술자리를 가진 후 취중에 여승 한 명과 성관계를 하고, 그 여승이 며칠 후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권력자의 성추문'이라는 특성상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다가, 다음해가 되어서야 동아일보 등의 폭로로 세간에 알려졌고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박중양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이런 대형 스캔들을 연달아 일으키고도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유용한 인물이었으니, 이후로도 박중양은 중추원과 지방행정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박중양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얼핏 보기엔 좋은 취지같지만 일본 중의원에 조선인 쿼터를 허용해달라는 등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같은 시기 유행한 자치론과도 통합니다).


 - 당연하게도, 193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발기인과 대주주로 참여하였고, 1945년 초에는 조선인 몫으로 할당된 일본 귀족원 의원 7명(박중양, 윤치호 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1942년에도 선임되었으나 본인이 거부). 당시 일본은 중의원(하원) 임기가 만료되면 다음 선거에서 조선인 몫으로 23명을 선출하도록 할 생각이었다는군요. 소원이 이루어졌다! 정말로??



4. 해방 이후 : 나는 떳떳하다. 너희들이 노답일 뿐


 -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후 박중양은 윤치호 등과 함께 감사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는데, 그 직후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 소식을 듣고 '일본도 머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 직전인 8월 10일 집안의 하인과 피고용인들을 약간의 퇴직금과 함께 내보내고, 해방 직후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습니다. 그는 이 재산을 경성 근처의 양로원과 보육원에 무기명 기부한 후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 당연히 그는 친일 반민족분자의 수괴로 지목되어 가는 곳마다 욕설과 드잡이, 심하면 투석(投石)까지 당하곤 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민족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에 더하여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가 훨씬 살기 좋았으며, 일본은 한국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가 여기에 또한 독립은 미국의 은총으로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운동가라고 어깨에 힘 주는 사람들은 전부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1945년 말 박중양은 미군정 간부들과 이승만 등을 만나,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데 친일행위자를 왜 처벌하려 드는가? 난 어차피 위선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으니 처단하려거든 나를 처단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자 한국인이 과연 독립할 자격이나 있는 놈들인지 모르겠다고 조롱한 적도 있다는군요. ㅡㅡ;


[반민특위에 출두하는 박중양]


 - 당연히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 수감되었는데 당시 그를 조사한 수사관은 "다른 기회주의 친일파와는 다르게 박중양은 몸만 한국인이지 생각과 행동은 그냥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재판에서도 자신의 주장과 조롱을 굽히지 않았고, 애국지사연하며 부정하게 산 놈들보다 자신은 훨씬 떳떳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평생 관료로 살면서도 부정축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된 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부모의 묘소를 대구 오봉산(現 침산공원)으로 이장한 뒤 자신도 그곳에 은거하며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1957년 신년에는 이승만더러 "미군 없으면 도망이나 칠 놈"이라며 조롱하는 등 개X끼 vs. X발놈 당시의 정부통령을 싸잡아 욕하다가 명예훼손으로 입건된 적도 있었고, 정부는 주둥이를 멈추지 않는 박중양을 아예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그는 1959년 사망할 때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정신병원 수감을 거부하였습니다. ㅡㅡ;



5. 정리 : '국개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 실로 뭐라 판단하기 어려운 박중양의 일생을 훑어보았습니다. 박중양은 자기 민족이 쓰레기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앞서 살펴본 기회주의자들과는 다른 '확신범'이었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누구보다 영민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위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친일과는 엄연히 다르면서도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얼핏 보면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윤치호와 비교해도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윤치호의 사상이 '한국인은 현상태로는 답이 없으니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라도 근대로 발전해보자'였다면, 박중양의 그것은 '한국인은 뭘 해도 답이 없으니 그냥 일본인이 되어버리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못하고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윤치호와 다르게, 박중양의 행적은 (심지어 그게 한국인에게 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철저히 '일본인으로서의 한국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 여기까지 보고 나서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살짝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국 사회의 침체와 혼란이 장기화되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국은 더 이상 답이 없다" "한국인은 썩어빠진 놈들" "한남충을 재기하자" "노무현 운X하盧?" 등등 극단적인 담론이 창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거, 곰곰이 생각해 보면 100년 전 박중양이 내린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박중양이 결국 어떤 인생을 살았나 생각하면,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당신은 어떤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라면, 박중양도 윤치호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건설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의 의지를 꺾은 것은 자신의 이상과 반대로 돌아가는 세상,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한 절망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피와 땀을 흘리며,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절망은 '너무 성급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 박중양과 윤치호가 뭐라 생각했든, 한국이 강대국에 의해 독립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도 "한국인은 노답"이라며 욕설과 한탄을 멈추지 않는 분들께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이 말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두 해 노력한다고 역사는 전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든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역사는 결국 전진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egloos.zum.com/nasanha/v/11014289 ('산하의 오역')



 -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수년 전 큰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애국가의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윤치호 역시 민족반역자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를 친일파들이 만들었다는 게 논란의 핵심. 당시에는 국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현재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국민이 알지만 동시에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안익태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안익태]



1. 숭실학교의 유망주, 유학길에 오르다


 - 안익태는 1906년 12월 평양에서 7형제 중 셋째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객주(위탁판매, 중개 등을 하는 중간상인)업을 하였다고 하며, 그의 바로 앞 형인 안익조(1903-1950)는 일제강점기 의사와 군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안익조 또한 안익태처럼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며, 일본군 장교(군의관)로 복무한 이력 덕분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형제가 사이좋게 친일행위


 - 안익태는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고등보통학교(해방 이전에는 숭실학교가 평양에 소재)에 재학하였는데, 여기서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음악 외에 특이한 이력으로는 숭실학교 야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숭실중학의 4번타자로 전조선야구대회까지 출전했다니 운동선수로도 꽤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922년 10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야구대회 기사. 선수명단에 안익태의 이름이 있습니다]


 - 이후 안익태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흔히 1921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확실한 것은 아닌데 상술했듯이 1922년 야구대회에 숭실학교 대표로 출전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現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 음악특기자 자격으로 입학하였고, 1926년에는 구니타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하였습니다.


 - 안익태는 구니타치 학교를 졸업한 1930년 미국으로 유학, 신시내티 음악원과 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첼로와 지휘를 전공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유명 지휘자인 레오폴드 스토콥스키(1882-1977)와 교류하였고, 스토콥스키의 도움으로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지는 등 음악가로 본격적인 데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인교회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지휘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2. 유럽 진출과 활동


 - 안익태가 처음 유럽 땅을 밟은 것은 1936년이었습니다. 이 때 그는 파울 힌데미트(1895-1963),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 등을 만나 교류하고, 바인가르트너의 도움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아 유럽 무대에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아일랜드에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안익태. 1940년]


 - 이 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사실과 다르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빨라도 1941년 이후이고, 그나마도 후술할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연관이 있다는 것. 일단 확실한 것은 1938년부터 3년간 헝가리 리스트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1882-1967) 등에게 작곡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 안익태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경우, 미국과 유럽을 오가던 1936~37년 사이에 작곡되었고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애국가의 그 선율은 그 이전인 1935년 미국에서 구상하였고(애국가 작곡 시기는 표절 논란과도 관련이 있어 중요), 6.25 전쟁 이후 마지막 부분이 추가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한국 환상곡> 전곡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인데, 자세한 논란은 후술합니다.


 - 지금이야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안익태의 주요 활동은 어디까지나 지휘였고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에 걸쳐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바로 이 시기의 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3.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


 - 2006년 유럽에 유학하여 음악학을 공부하던 송병욱씨는 1942년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 환상곡>을 지휘한 동영상을 소개하며, 안익태의 친일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이미 2000년경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있었는데, 당시 단순히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영상'으로 알려진 게 사실은 만주국 기념 음악회였음을 밝혀낸 것입니다.


[안익태의 <만주국 환상곡> 지휘 장면]


 - 더 나아가서 <만주국 환상곡>의 음악이 <한국 환상곡>과 상당 부분(특히 6.25 이후 추가된 부분) 일치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음악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고,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도 안익태의 해방 전 유럽 활동은 그 세부적인 내용이 잘 밝혀져 있지 않았는데, 이를 파헤쳐 보니 대부분 친일 행적이었다는 것입니다.


 -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게 속속 드러납니다. 일단 안익태는 유럽 활동 내내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하였으며, 흔히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하면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고 막연히 알려진 것도 대부분 <에텐라쿠>나 <교쿠토(극동)> 등 프로파간다성 작품들을 연주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1941년에는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 축하 음악회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연주한 것까지 새로 알려졌습니다. ㅡㅡ;


 - 이 과정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초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유럽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통설과는 달리, 실제 안익태를 도운 것은 주로 '일본-독일협회'의 지원이었고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은 것도 오히려 이 단체의 주선을 통해서였다는 것.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의 제자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한두 번 만났을 때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들은 게 크게 부풀려졌을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에하라 고이치의 기고문]


 - 2015년에는 안익태의 후원자로 알려진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에 기고한 <안익태 군의 편모>라는 글에는 안익태의 이런저런 친일 행적과,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도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안익태 본인이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간판을 이용하여 유럽 각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4. 마요르카에서의 말년


 - 어쨌거나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1944년 파리에서의 지휘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전범으로 몰릴 위험을 피하고자(안익태는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독일에서의 친일 활동이란 곧 나치에 협력하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도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 이후 1946년에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고, 같은 해 스페인인 롤리타 탈라베라(1915-2009)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취득합니다. 이후로는 마요르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스위스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객원 지휘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한국 환상곡>의 완성된 버전을 공연한 바 있습니다.


[1960년대 초, 5.16 '혁명' 기념식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 해방 이후 안익태가 처음 한국을 찾은 것은 1955년인데, 하필이면 대통령 이승만의 생일 기념 연주회를 지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ㅡㅡ; 이후 고국에 뭔가 봉사하고 싶었는지 잠깐, 친일파였잖아 군사정부와의 협조로 1962년부터 3년간 서울 국제음악제를 주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이후 재정난과 국내 음악계와의 마찰 등의 사유로 이어지지 못했고, 여기에 안익태는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결국 얼마 뒤 안익태는 간경화증 진단을 받았고, 1965년 7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이후 더 이상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두 달 뒤인 9월, 안익태는 간경화가 악화되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병원에서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5. 정리 : 사후의 논란과 애국가 문제


 - 그의 사후 <한국 환상곡>은 한국의 역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며,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꾸준히 연주되는 레퍼토리였습니다. 애초에 그의 생전인 1940년대에 <한국 환상곡>의 일부인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안익태와 애국가는 심지어 안익태 본인의 생전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일단 1960년대 처음 불거진 애국가 표절 논란입니다.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는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연구로는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안익태의 유럽 방문 전이었고, 유럽 지역의 노래를 일일이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표절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게 유력합니다.


[애국가 표절 논란의 주인공인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 표절 논란은 이렇게 흐지부지됐지만, 2000년대 안익태의 친일 행적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애국가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친일파의 곡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쓸 수 있는가'라는 것. 뿐만 아니라 애국가 저작권 문제도 제기되면서 그야말로 '노래 하나에 전국이 들끓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일단 저작권 문제는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롤리타 안이 쿨하게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일단락되었고, 애국가 교체 논란도 현재는 어느 정도 잦아든 것으로 보입니다.


 - 어쩌면 안익태의 일생은, 왕족이나 엘리트 관료의 삶보다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 때, 그의 친일 행적은 유럽에서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적극 이용한 결과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물론 그가 서양음악 불모지에서 대단한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 음악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와 함께 그 재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의 일생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ahneaktai.or.kr/?page_id=62 (안익태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osen.mt.co.kr/article/G1109303001 (야구선수 안익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15474 (송병욱씨 인터뷰)

http://weekly.donga.com/List/3/all/11/78800/1 (친일논란 관련 주간동아 기사)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102808201102638&mobile=Y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1)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 (에하라 고이치 관련 기사 2)



 -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자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그랬다" "모두가 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등등의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곤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친일파 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제대로 대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협력 사실 자체를 반성하지 않고 정당화 · 합리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공개적으로 참회한 사람들도 있긴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쪽이 당연한 것인데도, 공개적으로 반성을 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슬픈 현실이겠지요. 이번 글에서는 일본에 굴복하여 협력하였지만, 해방 이후 "나의 사지를 찢어달라"며 대중 앞에서 잘못을 뉘우친 최린(1878-1958)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최린]



1. 민족대표 33인, 천도교의 지도자


 -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고, (당연하게도) 어릴 때는 한학을 배우다가 한양으로 이주한 후에는 개화파 청년들과 어울리며 근대 학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의 하급 관료로 일했는데, 이 무렵 개화파 망명자들과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일심회'어디선가 들어보셨다면 그것과는 다른 단체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 이후 1904년에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본격적인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도쿄 제1중학을 거쳐 메이지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들의 차별적 행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퇴학당하거나 체포당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최린은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1861-1922)와 교류하였고, 이를 계기로 1909년 귀국 후 천도교에 정식 입교하였습니다.


 - 최린이 귀국한 시기는 대한제국 멸망 직전이었고, 최린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는 등 국권 수호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병합 이후에는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는데, 천도교계 재단이 운영하는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고등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전경. 1917년. 출처]


 - 1910년대 후반부터 주로 해외 교민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이 잇따랐고, 이것이 일본의 통제를 뚫고 국내에 전해지면서 국내에 남아있던 지도자들도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1918년 무렵부터 천도교계의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은 은밀히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였고, 여기에 불교, 기독교(개신교)계가 합세하면서 소위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됩니다.


 - 이들은 독립선언서 작성을 최남선에게 맡기고, 때마침 고종이 사망하자 고종의 장례일(인산일)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인쇄소가 친일경찰 신철(?-1919)에게 발각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신철이 독립선언서를 보고도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최린은 급히 신철을 만나 설득하였고, 신철은 그 설득을 받아들여 입을 다물고 신의주로 출장을 떠나버립니다.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거사일은 이틀 앞당겨져 3월 1일이 되었고, 그 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들 아시겠지요? 민족대표들은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를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요릿집 태화관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한편 최린의 설득을 받아들인 신철은 3·1운동 발발 이후 이를 은폐하였음이 발각되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기 직전 음독자살하였습니다.



2. 민족대표에서 민족반역자로


 -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된 최린은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얼마 전에 출소하였습니다. 그 무렵 손병희가 (수감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최린은 천도교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수감생활 도중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1920년대 이후 최린은 다분히 개량주의 성향을 보이게 됩니다.


 - 한편 손병희 사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게 되었는데, 최린은 천도교청년당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천도교 교단이 봉합과 재분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최린은 1929년 천도교 도령(교령)에 취임하여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이미 개량주의와 자치론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의 그는 조금씩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 한편 최린은 1927~28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 각국을 시찰하고 외교 활동을 수행하였는데, 이 와중 프랑스 파리에서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혜석은 일본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김우영(1886-1958)과 결혼한 상태였으니, 빼도박도 못할 불륜이지요. 결국 둘의 행각이 김우영에게 발각되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혼하였고, 불륜의 다른 한 쪽 당사자인 최린은 정작 나혜석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역대급 스캔들의 세 등장인물. 왼쪽부터 나혜석, 김우영, 최린]


 - 이에 나혜석은 '정조 유린죄' 명목으로 최린을 법원에 고소하였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소송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혜석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파격적인 성평등론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소송은 결국 나혜석의 패소로 끝났지만, 이미 최린은 멀쩡한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으로 사회의 조롱과 지탄을 받는 신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 개인사로 큰 곤욕을 치른 이후, 최린은 본격적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렸습니다. ㅡㅡ; 1933년 무렵부터 최린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1934년에는 일본의 회유를 받아들여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됩니다. 같은 해 천도교 신파 지도자들과 함께 '시중회'를 결성하였으나 이는 말만 종교단체이지 실질적으로 친일단체였습니다. 


[최린이 매일신보(1940년 2월 11일자)에 기고한 글. 내선일체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다]


 - 이후 해방 때까지 최린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니 '조선임전보국단'이니 하는 일본 관제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고, 각종 강연회와 언론 기고 활동을 벌이는 등 A급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양심(?)이 남아있었던지 당시 성북동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왕년의 동지 한용운(1879-1944)의 딸에게 생활비를 건네주었지만, 한용운이 이를 알자마자 "더러운 돈은 필요없다"며 내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3. 해방 후의 참회 - "광화문 앞에서 내 사지를 찢어달라"


 - 한반도가 해방을 맞자 최린은 다른 민족반역자들과 함께 거국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선 그가 천도교 지도자였기 때문에 천도교 내부에서 강한 비판이 일었고, 교단 내부에서는 최린이 민족반역자로서 갖은 죄를 범했으니 책임을 통감하고 은퇴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최린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빡친 교단에서는 최린을 천도교에서 영구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ㅡㅡ;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최린(우측). 좌측은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 그렇게 욕을 먹으며 그냥저냥 살아가던 최린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특위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면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재판 때 다음과 같은 최후변론을 남겼습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내가 반민족 행위에 대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내 사지를 소에 매달아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형을 집행해 달라. 그렇게 하여 민족에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 사실 이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는 다른 민족반역자들이 재판에서 보인 뻔뻔스러운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반민특위는 다들 아시다시피 온갖 난리 끝에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최린은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끝에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됩니다. 당연히 처벌은 없었지요.


 - 이후 건강 문제도 있고 하여 최린은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1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린은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당했고, 북한에서 대남 선전기관에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고, 북한 체제에 협력을 거부하였으니 대충 짐작이...... 1958년 사망한 것만 확인되어 있습니다. 1962년 남한에서 최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 하였으나, 친일행위가 너무 명백하여 ㅡㅡ; 무산된 바 있습니다.



4. 정리 : 결국 반성한 자는 소수였다


 - 나혜석은 최린과의 불륜과 소송전 이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고, 파격적인 여성해방운동을 벌였지만 사회적인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협력도 거부한 나혜석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각종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해방 직후 무연고자 병동에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반면 그의 남편이었던 김우영이나 불륜 상대였던 최린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해방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참 얄궂은 운명입니다.


 - 사실 최린이 해방 후에 진심으로 반민족행위를 반성했다지만, 블로거는 최린의 참회를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반민특위 재판에서 자신의 죄상을 자복하기 전 최린은 천도교계의 비판에 정면으로 반발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차례 병보석을 신청한 바도 있습니다.


 -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최린은 자신의 죄를 입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벌할 것을 '공개적'으로 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민족반역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어쩔 수 없는 것' 또는 '민족을 위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 "우리를 정죄하는 자들은 다 빨갱이들"이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서기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최린의 '소박한' 참회조차도 확실히 눈에 띄기는 합니다.


 - 슬프게도, 이러한 참회를 한 사람조차도 최린을 비롯해 몇몇밖에 없었다는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방법조차도 사라지는 바람에, 왕년의 민족반역자들은 이후 반공투사니 기업인이니 교육자니 하는 미명으로 그대로 사회 기득권으로 자리잡았고 그 후유증은 그들이 대부분 사망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3·1운동 직전에 벌어진 최린과 신철의 일화입니다.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였지만 후년에는 친일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최린, 친일경찰의 대선배로 한국인 탄압에 앞장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신철. 최린은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 모두 이름을 올렸고, 그곳에 신철의 이름은 없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http://egloos.zum.com/history21/v/971195 (최린과 신철)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21/2015042104138.html (최린과 나혜석) 댓글은 보지 않기를 권함


 대한제국의 황족들은 나라의 멸망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개중에는 적극적인 친일분자가 되어 자신들의 나라를 팔아먹는 데 참여한 이들도 있고, 소극적이나마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이들도 있지요. 하지만 대체로 이들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일본에 맞서지 않았으며, 대한제국 멸망에 적어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친일분자로 활약한 대한제국의 황족, 영선군 이준용입니다.


[그림으로만 봐도 위엄돋는 그의 풍채]




1. 영선군, 왕의 조카가 된 남자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 이재면(1845-1912)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서 고종(이재황)의 친형입니다. 즉 이준용은 고종의 친조카가 되는 셈으로, 흥선대원군에게는 적장손이기도 합니다. 친동생 이문용(1882-1901)이 19세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이재면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출생 후 영선군(永宣君)이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에는 흥선대원군의 식객이자 측근인 허욱(1827-1883)을 가정교사로 삼아 글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명석하고 뛰어난 자질을 보여 흥선대원군이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재면이 그리 강단있는 위인이 아니었던 데 비해, 이준용은 상당히 영리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재면보다도 장손 이준용을 더욱 총애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용은 냉혹한 현실정치의 생리에 일찍부터 눈뜰 수 있었는데, 이 시기 고종과 민씨 세력에 의해 권력을 상실한 흥선대원군은 싹수가 보이는 이준용을 고종의 대안으로 점찍게 됩니다. 그러한 주변 환경 속에서 자란 이준용은 1880년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으로 성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1880년대 초 음서를 통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84년 말에는 세자익위사(세자의 호위를 담당) 세마(洗馬, 정9품)에 올랐는데 이는 갑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급진개화파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적장손인 이준용을 적극 기용하였던 것입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이준용 역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정변의 직접 참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음서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하급 관직을 전전하던 그는, 1886년 과거시험에 정식으로 급제한 이후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문관 정자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이준용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 이듬해(1887년)에는 이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그는 반(反) 고종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흥선대원군과 고종 및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대립한 데서 비롯합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 등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친(親) 고종 세력과 적대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왕을 갈아치울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영선군 이준용이었습니다. 확실히 자기 편이기도 하고, 인물이 영특하여 아내의 조종을 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고종의 장남이자 궁인 이씨의 소생인 완화군(1868-1880)을 밀어주려고 하였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대타로 이준용을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그 세력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이준용의 삶은 1880년대 중반부터 격랑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습니다.



2. 나도 왕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1886년,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던 위안스카이(1859-1916)의 조종으로 첫 번째 쿠데타 시도가 벌어집니다. 위안스카이는 친러정책을 강화하던 고종과 명성황후에 맞서, 고종을 쫓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앉힌 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아 자신들이 조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청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만만찮은 야심가라 쿠데타 계획에 호응하려 했지만, 정작 청 본국에서 이를 반대하여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를 알아낸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하여, 오히려 이준용 본인의 처지가 난처해지는 역효과만 낳고 말았습니다. 1887년부터 이준용은 3년간 모친상을 치르면서 다양한 세력의 인물들과 교류하였으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준용을 경계하고 항상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친 이후 그는 성균관, 규장각, 승정원 등의 요직을 거쳐 1892년에는 이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면서 점차 그를 지지하는 친위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운현궁]


 이렇게 되자 이준용은 본격적으로 고종-명성황후의 주된 정적이 되었습니다. 1892년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 이재면-이준용 부자의 집에도 폭탄이 설치되었지만 사전에 발견되어 피해는 없었습니다(이 사건에 대하여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준용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한번은 길에서 자객을 만났지만 간신히 따돌려 목숨을 구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이준용 쪽에서도 가만 있을 수 없지요. 갑오개혁 당시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출을 몰래 추진하였지만 일본 측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일본 주도의 개혁에 반발하는 유학자들이나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여 고종을 몰아내고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도 세웠지만 역시 계획이 탄로나면서 실패합니다. 이 시기 이준용은 대원군파와 척을 진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는 이들을 포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길준 등을 대원군파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하여 이준용은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1895년 초 이준용은 개화파 인사 김학우(1862-1894)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 개화파 세력은 (차마 흥선대원군을 족칠 수는 없으니)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지만,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자행되는 등의 사실이 알려지며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준용은 유배형에 처해지며 목숨만은 건지게 됩니다.


 얼마 뒤 이준용은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투옥당했지만 때마침 을미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본 측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났습니다. 석방과 동시에 그는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왔고 얼마 뒤에는 일본 공사로 임명되어 1897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대체로 이 무렵부터 그가 친일 성향을 띠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좌절된 야망과 말년


 그런데 다음해 아관파천으로 조선 내 친일파가 몰락하면서, 이준용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길로 망명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897년 그는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1899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본국에서는 안경수(1853-1900) 등이 다시 그를 옹립하려는 쿠데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준용의 귀국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준용 자신도 조용히 망명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등 지속적으로 조선(대한제국) 정치에 관여하려 하였습니다. 당연히 더욱 열받은 고종은 일본에까지 자객을 보내어 이준용을 제거하려 시도하지만, 의외로 이준용 자신의 무력(武力)이 출중했기 때문에 암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ㅡㅡ;


[영친왕과 엄귀비. 고종은 정적인 이준용과 의친왕을 배제하기 위해, 엄귀비 소생인 영친왕을 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고종은 그의 강제송환을 요구했고, 이토는 그 대신에 주요 망명 인사들을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준용은 이토의 도움을 받아 다시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던 모양이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준용은 여전히 고종을 몰아내고 황제 자리에 오를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며 그의 꿈은 사실상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그는 조약 체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왕 한 번 해보려는 이준용의 야망은 자신이 협력하던 일본에 의해 좌절당한 것입니다(그는 이후로도 1909년 무렵까지 이런저런 시도를 계속하였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이준용은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고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1909년부터 그는 친일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로 재직했는데, 이곳은 단군신화를 일본 아마테라스 신화에 종속시키는 역사왜곡을 추진한 단체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준용은 왕족+친일파로서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고, 아버지(83만 엔 수령)와는 별도로 거액(16만 8천 엔)의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병합 때 이희 공(公)으로 봉해진 이재면이 1912년 사망하자 이준용은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빈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다른 종친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준용은 자신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이준용의 나이는 고작 40대였지만 젊어서부터 갖은 고난과 비만을 겪은지라 그의 건강은 상당히 나빴고, 이후로는 신장병과 심장질환 등에 시달리며 병석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만년에 낳은 딸 이진완(1916-1997) 외에 아들이 없었던 이준용은 1917년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차남 이우(1912-1945)를 양자로 들였고, 같은 해 사망하였습니다. 양자 이우는 왕족으로서 일본군 고위 장교가 되었으며, 나름 반일 성향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휘말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의 아들 중 이청(1936-)이 현재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4. 정리 : 대한제국 황족의 운명


 한일병합과 함께 대한제국 황족은 '멸망한 나라의 왕족' 신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 황실 자체를 아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격하하고, 일본 황실에 다음가는 지위인 '왕공족'으로 대우하였습니다. 물론 더 이상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러한 대접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구(舊) 황족들은 복잡한(하지만 대체로 행복하지 못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고종과 순종은 궁궐에서 반쯤 갇혀 살다 죽었고(고종은 독살당했다는 설이 있지요), 이재면-이준용 부자처럼 일본에 적극 협력한 부류도 있었지만 이들 역시 병합 이후에는 거액의 은사금과 작위 외에 일본에게서 딱히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고종의 자식들인 영친왕 이은(1897-1970)이나 덕혜옹주(1912-1989)의 경우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덕혜옹주]


  분명한 사실은 이들 황족 중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과 그의 아들(그리고 이준용의 양자)인 이우 등 몇몇이 반일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의친왕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다가 실패한 이후 사실상 독립운동과 멀어졌고, 이우는 사실상 볼모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하다가 히로시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이 일본 당국의 감시 하에 있는 처지였다는 것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더라도 대한제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황족들이 나라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후 딱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고종과 순종 복위(복벽운동)을 추진하는 항일세력이 있었지만, 1919년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사실상 모든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으로 대동단결하게 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나마 그들의 지위를 유지해주던 일본의 실드마저 사라지자, 이들은 더 이상 왕족으로서 살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해방된 한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은 수십 대를 거슬러올라가야 핏줄이 이어지는 전주 이씨 이승만이었고, 미국 체류시절 자신을 '프린스 리'로 소개할 만큼 자기 핏줄을 의식했던 이승만은 구 황족에 대한 예우를 대부분 박탈하고 영친왕의 귀국을 가로막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거든


[황족 X까! 이젠 내가 짱이라고!]


 당연하게도 이때까지 살아남은 황족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습니다.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거주하다가 뇌일혈로 쓰러졌고, 박정희가 집권한 이후에야 병든 몸으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덕혜옹주는 어린 시절 강제로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 간 이래 지속적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이혼까지 겪는 등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역시 한참 뒤에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한국에 남아 있었던 의친왕은 노년에 한국전쟁을 겪었고, 이 시기 영양실조와 홧병에 시달리다 사망하였습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대한제국 멸망과 한일병합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일단 이들이 세계사의 격변기를 헤쳐나가기에 충분히 유능하지 못했던 점, 외세의 침략에 기껏해야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며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이준용의 경우처럼 아예 대놓고 친일행위를 일삼은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황족에 대한 이후 한국인들은 준엄한 평가를 내렸고, 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영영 되찾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2018. 9. 25. 수정]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지배한 일본의 밑에는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식민지배를 도운 다수의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주인인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한국인들을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에 대한 단죄가 해방 후에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부역한 자들은 대부분 해방 후에도 자신들의 노하우를 팔아먹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들 중 '고문귀'로 악명을 떨친 친일경찰 하판락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말년의 하판락]




1. 왕년의 항일학생, 친일경찰로 변신하다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주군 명석면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진주제일보통학교(現 진주초등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 시절에는 반일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진주고보 졸업 직전인 1930년 초에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진주에서 발생한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구류 처분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하판락의 이름이 수록된 진주 학생항일운동 관련 기사]


 1930년 진주고보를 졸업한 하판락은 하급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순사 시험에 응시하여 1934년 합격하였습니다. 사천경찰서에서 처음 근무를 시작한 그는 1937년에는 부산으로 옮겨 순사로 계속 근무하다가 1939년에는 경상남도 고등경찰과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 경부 시험에 합격하여 순사부장, 경부보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해방을 맞게 됩니다.


 당시 그가 조선인으로 상당히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맡은 주업무가 '항일운동가 색출'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가 재직한 '고등과(고등경찰)'는 반체제인사 탄압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제국주의 일본의 경찰조직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반체제인사란 바로 항일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하판락은 항일운동가 탄압에 고등경찰의 일원으로서 앞장서고, 그 공(?)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판락이 단순히 항일운동가를 탄압한 사실만으로 악명을 얻은 건 아닙니다. 그가 악명을 하늘높이 떨치게 된 것은 그가 항일운동가를 탄압하는 방식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된 항일분자에 대해 비인간적 고문을 자행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평생 고치지 못할 장애를 얻었습니다. 이 악행을 바탕으로 하판락은 '고문귀'라는 으시시한 별명을 얻기에 이릅니다.




2. '고문귀'의 활약상


 그가 악명을 떨치게 되는 것은 1930년대 말 수십 명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탄압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진주 배돈의원 원장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김준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극히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자신도 조선인인 주제에) 피고문자에게 '조센징' 운운하며 욕설을 일삼아 '내가 동족에게 이런 짓까지 당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명한 개신교 목사를 밀정으로 포섭한 후, 그를 통하여 항일적인 신자들을 색출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항일운동가 탄압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그가 '고문귀'라는 악명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3년 이른바 '친우회 전단사건' 수사였습니다. 하판락은 당시 친우회 활동가로 검거된 여경수, 이미경, 이광우 등 8명을 수사하면서 극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고문의 결과 3명이 순국하고, 생존한 5명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후 수 년간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평생 장애를 안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고문 방식 중 하나. 상자 안에 수많은 못이 박혀 피고문자를 찌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그에게 고문을 당했고 남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간 이광우(1925-2007)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동지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화로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몸을 지지는 고문,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갖은 고문이 피고문자에게 가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판락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이 바로 '착혈 고문'입니다.


 역시 이광우의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그와 함께 체포된 이미경을 고문하면서 원하는 자백이 나오지 않을 경우 그의 혈관에 주사기를 꽂고 한가득 피를 뽑은 다음, 그의 신체에 그 피를 뿌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주사기로 피를 뽑아서...... 고문귀가 아니라 흡혈귀였네 이러한 고문의 결과 이미경은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여러 명의 항일운동가를 살해하거나 폐인으로 만든 대가로 하판락은 해방되는 순간까지 출세를 거듭하였습니다. 창씨개명 당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로 바꾸었는데 이게 조선인 티가 나는 이름이라(한자를 보면 '하판락'을 그냥 일본식으로 살짝 바꾼 것) 다시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로 바꾸었습니다(당시 창씨개명을 두 차례나 한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이후로도 해방 한 달 전에는 자기 친구의 형을 체포하여 고문하는 등, 철저히 일본의 개로서 살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3. 해방 후 : 잘 먹고 잘 살며, 최후까지 살아남다


  해방이 되었으니 그간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겠으나,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 미군의 행정편의주의로 인하여 하판락을 포함한 친일경찰들은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판락은 미군정 하에서 경남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근무하였고, 일본인의 재산(적산) 처리에 관여하며 상당량을 인마이포켓ㅡㅡ;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던 하판락은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된 1949년 초 그에게 고문사당한 여경수의 모친이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하면서 긴급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악행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졌던 터라, 부산에서 체포된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많은 부산시민이 "저 자는 우리가 여기서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압송을 반대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지만, 그는 당연히 자신의 고문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하판락(왼쪽)]


 하지만 결국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기소되었던 반민족분자들도 모두 무혐의 혹은 무죄판결로 풀려났습니다. 당연히 하판락도 석방되었는데, 이후 고향인 진주 명석면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바탕으로 부산 쪽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1956년, 지방의원 선거에 진양군(現 진주시) 제2선거구 후보로 출마하여 자기 가문의 전폭적 지원까지 등에 업고 유세를 펼쳤지만 당연히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한 하판락은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사업가로 변신, 신용금고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며 남은 평생을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사무소 신축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노인 복지 사업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사회사업가 행세를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을 가지고 부산광역시에서는 하판락에게 어버이날 표창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ㅡㅡ;


 그렇게 잊혀가던 그의 악행은 그에게 고문을 당한 이광우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훈장을 받으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광우의 훈장 서훈을 전후하여 그를 고문한 자의 이야기도 당연히 함께 언급되었고, 그를 고문한 하판락은 그 죄상이 세간에 다시금 알려지며 여론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이에 그는 2000년 대한매일(現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찰 간부 활동을 후회하며, 피해를 본 이들에게 사과한다"라고 같잖은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판락 사망 당시 MBC 뉴스데스크]


 하판락은 2002년 국회 민족정기의원모임에서 친일파 708명을 선정했을 때 유일하게 생존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그 이듬해 천수를 모두 누리고 91세로 뒈졌습니다죽었습니다. 같은 해 말 그의 고향 명석면에서 <명석면사(史)>를 발간할 때 저자 김경현씨가 하판락의 악행을 수록하려 했지만 하씨 문중의 큰 반발을 사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경현씨는 결국 직접 수록은 포기하고 편집후기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하여는 면사편찬위 결의로 삭제함"이라는 멘트를 넣어 간접적으로 하판락의 악행을 명시하였다고 하는군요.




4. 정리 : 하수인들을 앞세우는 지배자의 전략


 흔히 친일경찰의 상징으로 노덕술이 유명하며 그 외에 하판락 정도가 알려진 수준이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일본 치하의 경찰로 근무한 조선인은 제법 많은 수가 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항일운동 탄압에 앞장서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의 활약상은 때로는 일본인 경찰보다도 훨씬 악랄한 것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민족반역자로서 모두에게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웃기는 사실은 그 친일경찰들 자신도 지배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센징'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돕는 '도구'로써 친일부역자들을 이용했지만, 저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일부를 자신들의 수족으로 포섭하여 방패막이로 쓰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행태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이점이 있을까요? 일단, 지배자를 향할 피지배자의 분노가 당장 자기 눈앞에 있는 앞잡이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잡이로 선택된 자들은 대부분 양심보다 출세를 앞세우는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들의 주인에게 철저히 충성하여 자리를 보전하고 출세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언제 주인에게 내쳐질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이들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슨 짓이건 서슴지 않게 됩니다.


[역시 일본의 하수인으로 활약한, 어떤 인물에 관한 당시 신문기사]


 그러니까 피지배자의 일부를 앞잡이로 활용하는 전략은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효율성 최고의 전략인 셈입니다. 물론 그 앞잡이가 된 자들을 옹호하거나 동정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저들은 자발적으로 지배자의 앞잡이가 되었고, 자신들의 의지로 괴물이 된 거니까요.


 이렇게 일본의 하수인으로 일한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한 일이다"라며 스스로를 변호하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시에 굶주려가면서까지 일본에 저항하거나 적어도 협력을 거부한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고, 심지어 하판락같은 경우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족을 탄압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해방 후 이런 자들이 단죄받지 않고 평생을 잘 살다 죽은 것이야말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민족반역자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배부르며 정의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대대로 고생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엄두를 낼 수 있을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19950&cid=55772&categoryId=55836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9476 (오마이뉴스 기사)

http://www.bjynews.com/default/all_news_body.php?idx=4519&... (바른지역언론연대)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159. 민족반역자 하판락 특집

http://m.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60 (<명석면사> 관련 기사)




[2018. 9. 25. 수정]



 역사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한국인치고 이완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완용은 한국인에게 '매국노'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 외에, 이완용의 일생 전반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조명이 잘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참고가 되자면, 이완용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완용의 일생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합니다.


[일단 침 한 번 뱉고 시작할까요?]




1. 입양 로또를 맞은 신동


 이완용은 1858년 6월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現 성남시 분당구)에서 출생하였습니다(역사학자 이병도는 전북 익산 출신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더라' 수준이라 신빙성은 별로 없습니다). 본관은 우봉 이씨로, 고려시대 이래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완용의 직계는 8대조 이래로 과거 급제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잔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석준(초명 이호석) 역시 간신히 선비 행세나 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안이 가난한 것과는 별개로 이완용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변에 이름이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10세 때 우봉 이씨 가문의 유력자인 이호준(1821-1901)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호준에게는 서자(이윤용)만 있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이호준 집안의 적자(嫡子)로서 입적된 것입니다(요즘 시각으로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그랬으니 그러려니 합시다). 이호준과 이석준은 본관만 같지 촌수가 32촌으로 남남이나 마찬가지라 하필 그가 양자로 선택된 것은 의외인데, 아마도 이완용의 재능이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당시 이호준은 판중추부사를 역임 중이었으며, 자신의 딸은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 조성하(1845-1881)와,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각각 혼인시키는 등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몰락 양반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완용이, 최고 귀족 가문의 (호적상) 적장자가 된 것입니다. 당연히 이완용의 삶은 이 때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역시 본래 다른 집안에서 입양되어 온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양아버지가 조선 정계의 거물이었던지라 이완용은 한양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으며 소위 '경화거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의 자제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입양된 처지에 이복형제도 있었던지라 이완용은 처음에는 말수가 매우 적은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이호준이 양아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13세 때 집안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고,이후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당대의 대학자들에게 유교 경서를 배웠습니다.


 1882년 이완용은 증광시(增廣試)에 전체 28위로 급제하였고, 처음 임명된 관직은 주서(정7품)였습니다. 사실 과거시험에서 28위라면 급제 순위 중 병과(丙科-3등급)였고 그 중에서도 상당히 후순위였는데, 양아버지 이호준이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과 손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높은 관직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ㅡㅡ; 시작부터 낙하산이라니 




2. '기계같은 자'의 출세 : 능력은 있으나, 양심은 없다


 과거 급제 이후 이완용은 엘리트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습니다. 그는 규장각 대교를 거쳐 외직(지방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군과 관련된 직위)로 발령됐는데, '해방영' 자체가 민씨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편제였기 때문에 이 자리는 민씨 정권과 관련된 인물이 임명되는 자리였습니다. 이완용이 이런 자리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아버지 이호준이 민씨 세력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완용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1880년대 초반 조선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애초에 그가 급제한 증광시 자체가 임오군란을 진압한 기념으로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ㅡㅡ; 급진개화파니 온건개화파니 수구파니 하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중앙 관료가 된 그는 젊은 엘리트면서도 근대니 개화니 하는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화파 관료들과도 딱히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고, 때마침 외직에 나가 있었기도 하여 1884년 갑신정변의 폭풍에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의 영어수업 장면]


 1886년 이완용은 다시 중앙정치로 복귀하였고, 동시에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와 과학 등을 배웠습니다. 이완용이 서양 문물을 제대로 접한 건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왕년의 신동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887년에는 세자시강원 보덕(정3품, 세자의 교육 책임자)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 손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습니다.


 이 무렵 조선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 광혜원 설립자, 주한미국공사 역임)이 이완용을 두고 '기계같은 자'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가 기계처럼 철저하게 업무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양심과 줏대가 없는 인간이라는 양면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완용은 젊어서부터 대단히 권력욕이 강했다고 하며, 아버지 이호준과 함께 그가 정치적 격변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든지, 이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정치적 변신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보신(保身)과 출세에 치중한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옛 주미 조선공사관 건물]


 1887년 이완용은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주미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듬해 초 박정양이 공사에서 해임될 때 함께 해임되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약속한 외교적 관례를 박정양이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후 이완용은 동부승지, 이조참의 등 요직을 거쳐 1888년 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얼마 뒤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습니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


 영어교육을 통해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다보니 이완용은 처음에는 친미파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미국은 '조선을 침략할 위험이 적고, 부강한 국가이니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고, 조선 정부는 그래서 미국과의 관계에 대단한 공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국에 파견된 이완용은, 미국 현지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대사성, 전환국총판, 외무협판을 거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순탄한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일본이 자신도 살해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음식도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통조림만 먹었을 만큼 고종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친미파 · 친러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로 끝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일명 '춘생문 사건'입니다.

[춘생문으로 추정되는 곳. 이후 문은 철거되었고 現 청와대 춘추관 부지 내에 터만 남아 있습니다]


 이완용 역시 춘생문 사건에 직접 관여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미국 공사관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완용 등의 관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하였습니다(아관파천).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탔고, 아관파천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만큼 친일파를 숙청하고 새로 구성된 친러파 내각에서 중심 인물이 됩니다.


 새 내각에서 이완용은 외부대신,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서리)을 겸직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이완용은 정부 관료의 대표격으로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사업을 위하여 출범한 단체였는데, 실제로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세우자 이완용은 독립문의 한자 현판 글씨를 직접 쓰는 등 건립 사업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쓴 독립문 한자 현판.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 명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립문이 건설되고 고종이 환궁한 이후 터졌습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독립협회는 점차 반(反)러시아 성향을 강하게 띠었고, 친러파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친러파 관료이면서 독립협회 중심 인물'이었던 이완용은 양쪽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되고 말았는데, 결국 정부와 독립협회의 갈등이 폭발하자 그는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된 직후 이마저도 파직당할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동시에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당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때 독립협회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후 벌어진 독립협회 대탄압에서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보신甲! 그래도 그가 독립협회 초기에 중심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그는 지방직을 전전하며 인생 최대의 위기ㅡㅡ;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는 1901년 양부 이호준이 급사한 이후 고종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복권시키면서 비로소 중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당시 임명된 관직은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한직(閑職)이었습니다.




4. 마지막 변신 : 을사오적의 수괴가 되다


 이완용은 1904년 양부의 3년상을 끝낸 이후 190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취임하여 예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이 전쟁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우세로 흘러가자 다급해진 대한제국은 왕년의 친미파 이완용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마지막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보려 시도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하여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잡아먹는 것을 용인한 상태였고, 당연히 이완용은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그의 선택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라면 침략자에게 들러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자' 였습니다. 지금껏 출세와 보신에 힘쓰며 친미파와 친러파로 철새마냥 떠돌았던 이완용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친일파로 갈아타게 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새로운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 양도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는데, 정작 이에 대한 결정권은 대신들에게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이토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 대신들을 회유 및 협박하기 시작했고, 이중에는 학부대신 이완용도 있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을 풍자한 만평]


 이미 일본의 침략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이완용은 처음부터 이토에게 협조적으로 나섰고, 이토는 이완용을 전면에 내세워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11월 17일 이토는 조약 체결과 관련한 어전회의를 강제로 열었는데, 처음에는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다수가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습니다(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만 찬성파).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지는 가운데 이완용은 자신을 만고의 매국노로 만드는 발언을 하여 대신들을 설득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언제까지나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외교권 양도 문제는 훗날 대한제국의 역량이 충실해지면 자연스레 반환될 것이며, 조약의 내용에 황실의 안전과 존엄 유지를 보장하는 내용을 추가하면 충분하다."


 결국 이토의 협박과 이완용의 설득에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파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토는 8명 중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5명의 동의를 얻어내자 "이것으로 안건은 가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5명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입니다(반대자 중에서 이하영은 얼마 뒤 조약 찬성파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일단 을사오적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을사오적의 쌍판때기 얼굴. 왼쪽부터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같은 날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궁궐 내에서 고종을 협박하는 가운데 '외교권 양도'와 '통감부 설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약(을사조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일본 공사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고 이를 인정하지도 않았지만 정작 을사오적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에 기대고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어떻게든 다른 강대국의 호의를 얻어 독립을 지켜보고자 했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 노력들을 모두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5. 나라판 값으로 얻은 부귀영화


 조약 체결의 일등공신이 이완용이었던만큼 이후 이완용의 출세길은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의정대신, 의정부 참정대신을 거쳐 1907년 6월에는 일본에 의하여 구성된 내각의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서리)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좀 보였는지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 취임을 거부하려 하였지만, 이토 통감의 권유를 받고 결국 취임을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이를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하였고, 얼마 뒤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에서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정미칠적). 1909년에는 독단적으로 일본과 사법권 양도 협약을 체결하였고(기유각서), 다음해(1910년)에는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 양국의 병합을 결정하고 한일 병합조약(경술국치)에 총리대신 자격으로 직접 서명하였습니다(경술국적). 그랜드슬램 달성!!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은 조약 내용에 아예 '공로가 있는 한국인에 대한 작위와 은금(恩金) 수여'를 조항으로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백작 작위를 받음과 동시에 15만 엔(원)이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도 받았습니다(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0억~150억원 정도). 다만 그보다 많은 은사금을 받은 자들도 있었는데 바로 대한제국 황족들이었습니다(의친왕과 이재면(고종의 형)의 경우 83만 엔을 수령하였습니다).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까지, 나라가 망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으니 당연히 전국민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7년 그가 의병장 허위(1855-1908)의 사형을 주장하자 옛 황국협회 관계자들(허위가 황국협회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과 분노한 주민들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이는 그나마 큰 피해 없이 수습했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주도하자 이번에는 항일단체(동우회) 회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어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집이 완전 잿더미가 되어 이완용은 이복동생 이윤용의 집에 한동안 피신해 있어야 했다고.


[이후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남은 평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완용은 친일 관료들을 목표로 한 모든 암살단의 제1호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당시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의 추도식에 참석한 이완용은 성당 앞에서 인력거에 탑승하던 중 암살단의 일원이었던 이재명(1887-1910)의 습격을 받고 왼쪽 폐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죽지 않은 것은 인력거꾼 박원문(1865-1909)이 이재명을 제지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일본인 외과의사들의 손에 맡겨져 치료를 받고,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통당한 폐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이완용은 이후 남은 평생을 후유증인 천식과 폐렴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쌤통 체포된 이재명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순국하였습니다.


[말년의 이완용]


 일제강점기 이완용은 친일 귀족의 대표 노릇을 하며, 건강 문제를 빼면 순탄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하기도 하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비난하며 매일신보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으로 알려져 최근에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받은 은사금을 잘 굴려먹었는지 그는 말년에는 137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거부(巨富)가 되었고, 차남 이항구(1881-1945) 역시 일본에서 귀족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6. 죽음과 그 이후


 이재명 의사의 습격 이후 악화된 이완용의 폐병은 결국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1926년 총독부 신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이후 2월 11일 69세를 일기로 뒈졌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2월 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유명한 비판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당하였지만 다행히 현재까지도 그 원문이 남아 있습니다.


[검열삭제 이전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


 이완용의 무덤은 생전의 그와는 딱히 관계가 별로 없던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의 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그의 무덤에 대한 훼손 시도가 끊이지 않아 당국에서 순사를 보내어 따로 지켜야 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묘를 지켜 줄 공권력이 사라진 해방 이후 이완용의 묘는 온전할 날이 없었고,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은 1979년 증손자 이석형의 주도로 그의 묘를 아예 없애고 유골은 발굴하여 화장(火葬)해버렸습니다.


[파헤쳐진 이완용 무덤]


 그의 후손들의 삶은 별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조상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그것도 매국노의 수괴)인 마당에 후손들이 이 땅에서 얼굴 들고 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완용의 장남(이승구, 1880-1909)은 요절하였는데, 이완용이 자신의 아내(즉 이완용에게는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부끄러움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완용의 작위를 물려받은 차남 이항구는 해방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항구의 아들 중 이병길은 한국전쟁 중 실종, 이병주는 일본에 귀화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가졌던 재산(특히 토지)가 워낙 방대했다보니, 해방 후 흩어진 그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후손들의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돌아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1998년에는 서울 북아현동 일대 토지의 반환 소송에서 승소하여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이윤형은 돌려받은 땅을 곧바로 처분하여 수십억 원을 벌었고, 이 돈을 그대로 들고 도로 캐나다로 튀어버렸다는군요. ㅡㅡ;


 그의 악명 덕에 오래도록 애먼 피해자들도 속출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이완용과 같은 우봉 이씨 출신이라 이완용의 친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실제로는 촌수로 따져 30촌을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이병도 본인이 친일부역자였고, 이완용의 관짝을 구하여 불태웠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언행들이 겹쳐 있기도 합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은 이완용의 아들 중 한 명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도 간간이 욕을 먹는데, 여긴 아예 본관부터가 다릅니다(경주 이씨).


 반대로 이완용의 덕(?)을 본 경우도 있으니, 붕당 대립에 휘말려 역적이 되었던 조선시대의 많은 인물들(남인, 북인, 소론 등)이 1908년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는 순종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개중에는 진짜 역적이나 간신들도 있고 고종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인물도 있다보니 크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 일종의 소소한 과거사 정리를 한 것 정도로 보입니다.




7. 정리 : '똑똑한 기회주의자'는 세상을 어떻게 말아먹는가


 일생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한 이완용, 그의 변신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히 '강자'에게 빌붙는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그는 대부분 고종이 협력하려는 열강 국가에 붙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고종이 미국에 협조적일 때는 친미파, 고종이 러시아와 손을 잡을 때는 친러파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황제)과 노선을 함께하는 이러한 처세가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고종이 기댈 곳이 없어져버린 시점에, 이완용은 고종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침략자 일본에 앞장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는 이완용의 화려한 변신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고종의 뒤통수를 친 대가로 얻어낸 것은 '황실의 존재만은 남겨준다'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분명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고,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하였으며, 정세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낼 줄 아는 식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 능력을 사회를 위해서보다 철저히 자신의 보신과 출세를 위해서만 활용했고, 이러한 처세 속에서 그의 능력은 대한제국이라는 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커녕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의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개인의 능력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느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양심이 결여된 자에게 지나치게 큰 능력과 권한이 주어졌을 경우,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정부 고위층의 거대한 스캔들로 국가 전체가 뒤집어진 근래의 사태를 생각하며, 우리는 다시 이완용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당 지도부와 정부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책무를 일개 사이비 종교인의 딸에게 넙죽 바쳐버린 참상을 보면, 저들의 재능은 도대체 사회와 역사, 심지어 그들 개인을 위해서라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싶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역사는 '양심 없는 능력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블로거는 이분들을 감히 '이완용의 후예들'이라 칭하겠습니다]




참고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23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books.google.co.kr/books?id=PmMzC... (<인물로 읽는 라이벌 한국사> 발췌)

http://www.hansung.ac.kr/web/hhistory/44?... (<춘생문 사건의 발생 배경과 영향에 대한 재고>, 김성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9/2009082900337.html

나무위키, 한글 위키백과




[2018. 7. 13. 수정]



 박흥식(1900-1994)은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화신그룹의 창업자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국인 기업가입니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을 통하여 일본의 백화점 체인과 대등하게 맞짱 뜨는 굴지의 대기업체였지요. 하지만 그 뒷면에는 박흥식과 조선총독부의 긴밀한 유착관계가 깔려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 만개한 정경유착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백화점 왕, 박흥식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박흥식]




1. 쌀집 주인에서 백화점 재벌까지


 박흥식은 1900년(호적상으로는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이천 석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박창식은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1910년대 중반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박제현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이 알려져 있고, 1916년 홧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박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지에 일가를 떠맡게 된 16세의 박흥식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남포(남포)에 미곡상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흥식의 상술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박흥식의 가게는 날로 번창하였습니다. 박흥식은 1920년에는 자본금 5만 원(대략 ×1만~10만 정도를 하면 현재 환율과 대강 맞는다고 합니다)으로 인쇄업을 시작했고, 이후 지물(종이)업, 학용품 등 단기간에 대단한 사업 확장을 이루어내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미곡상은 곡물 수탈과도 연관되어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진남포를 평정(?)한 박흥식은 지금까지의 사업체를 정리한 후 1926년 경성에 레이드입성, 황금정(現 을지로2가)에 '선일지물주식회사'를 개업하였습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박리다매 원칙으로 경성 일대의 종이 소매상과 문구업자, 인쇄업자, 신문사 등을 끌어들였고, 때마침 조선총독부의 초등교육 확대로 교과서와 종이 수요가 급증하면서 선일지물은 불과 1년 남짓만에 경성 종이 수요의 20%를 담당하는 거대 기업체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흥강자의 등장에 기존 일본인 거상들이 적잖은 견제를 하였고,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흥식의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흥식이 주목한 것은 다양한 품목을 다루면서 대량의 상품을 거래하는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미쓰코시, 조지야 등 일본의 백화점 체인이 일본인 상권을 중심으로 영업하고 있었습니다.


 백화점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한 박흥식은 1931년 종로2가에 자리한 귀금속상 화신상회를 인수하고, 이를 화신백화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화(神話)가 시작됩니다.




2. 화신백화점의 신화창조


 박흥식은 거금을 투자하여 화신상회 자리에 지상 7층의 고층건물을 지었습니다(당시에 이 정도면 한반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대형 건물). 그런데 화신백화점은 시작부터 거친 경쟁에 내몰려야 했으니, 바로 옆에 최남(역시 한국인 거상이었으며 덕원상회, 요정 국일관 등으로 유명)이 '동아백화점'을 개업한 것입니다. 박흥식과 최남 모두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의 달인이었으며, 종로 바닥에서 그야말로 불꽃 튀는 혈전이 펼쳐집니다.


 동아백화점이 개업 첫 날 매상의 1%를 빈민구제사업에 내놓자, 화신백화점은 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내놓으며 맞섭니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마케팅 전쟁이 펼쳐졌고, 경성 상업대전(?)의 승자는 결국 화신백화점이 되었습니다. 출혈경쟁 과정에서 악재가 겹친 동아백화점이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은 최남으로부터 동아백화점을 인수하고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연결하여 하나의 쇼핑센터로 만들었습니다.


[전성기의 화신백화점]


 이제 화신백화점은 미쓰코시-조지야에 대항하는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경영난과 파업에 시달리던 평양 평안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박흥식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전국의 잡화상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화신의 이름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사업이었습니다.


 1934년 가맹점 모집 광고를 시작으로, 쇄도하는 신청자 중 300여 곳을 엄선하여 화신연쇄점 프랜차이즈가 출범하게 됩니다. 이들은 화신백화점의 거래선을 활용하여 일본 등지의 수입품을 수월하게 조달받고, 고객이 상품을 고르는 견본시장과 상품을 보관하는 대형 창고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사업도 대박을 냈고, 거상 박흥식은 금광왕 최창학, 경성방직 김연수와 함께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흥식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1935년 1월에는 화신백화점 본점의 두 건물 중 한 쪽(서관)이 큰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보험을 통하여 피해액은 거의 보전할 수 있었고, 박흥식은 오히려 서관을 더욱 큰 규모(지하1층, 지상6층)로 재건하여 1937년 11월 오픈하였습니다. 이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5층에는 고급 식당가가 있어 부유한 한국인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화신백화점 내부 구성]




3. 조선총독부와의 유착, 그리고 친일


 물론 화신백화점의 급성장은 기본적으로는 박흥식의 경영 수완으로 가능했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박흥식과 일본 지배자들과의 유착관계였습니다. 선일지물을 경영하던 1920년대부터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35년 화신연쇄점 사업을 시작할 때는 식산은행으로부터 3천만 원이나 대출을 받았고, 화신백화점 화재사건 때는 '경성 내 소방장비 부족'을 핑계로 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임시 사옥으로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봐주기라며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를 수습한 건 오히려 총독부였습니다. 이러한 특혜가 과연 그냥 가능했을까요? 그래도 이 무렵까지는 박흥식-총독부 사이의 유착이 직접적인 친일행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급속히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제 박흥식이 총독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1938년 발족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재임한 것을 시작으로, 박흥식은 이런저런 친일부역단체의 중역을 맡거나 <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주로 예술가나 언론,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것이죠. 조선의 대재벌 박흥식은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 바로 '자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4년 2월, 박흥식은 자본금 5천만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이하 조선비행기)'를 설립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쩨쩨하게 전투기 값 정도 헌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버린 겁니다! 당연히 회사 설립은 총독부의 적극 지원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조선비행기는 경기도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회사와 동양방적 공장 부지를 접수하고, 주변 토지까지 강제수용(즉, 강탈)하여 거대한 공장을 구축하였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군수공업이었으므로), 공장 노동자는 대부분 강제징용자로 채워졌습니다. 첨단 기술이 필요한 비행기 생산라인은 총독부의 중개로 관동군(만주 일대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선비행기(내지는 화신재벌)는 그 보답으로 한반도의 생산물(직물과 해물 등)을 관동군에 헌납하였습니다. 일본 당국의 전폭적 지원으로 시작된 조선비행기는, 박흥식에게는 친일행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노다지 사업이기도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조선비행기는 본격적인 비행기 생산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1945년 5월 테스트 1호기가 완성되어 8월에 시험비행까지 마쳤고, 9월에는 2, 3호기를 만들어 테스트한 후 대량생산에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1945년 8월 15일에 모두가 아시다시피......




4. 해방 이후, 흔들리는 박흥식 신화


 8·15 해방은 일본과의 유착으로 성장한 박흥식에게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물론 박흥식 본인이야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3~40대의 나이에 한국 최고의 재벌이 된 박흥식은 아직 일생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시기부터 기나긴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일단 박흥식은 군수기업이었던 조선비행기를 잽싸게 매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장 청산자금을 횡령하거나(5천만 원 중 2천만 원), 미군정에서 주민에게 배급할 물자를 불법으로 매매하여 수백만 원의 폭리를 취한 혐의로 1946년 기소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ㅡㅡ; 이후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편하였고, 1947년에는 흥한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박흥식의 친일행위를 모르는 바 아니었고, 1947년에는 산하 기업인 흥한피복 노동자들이 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그 주동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쭉 살펴보면 박흥식은 해방 후에도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자신의 탈법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과 기업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매판자본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박흥식 체포 뉴스. 경향신문 1949년 1월 11일자]


 어쨌든 혼란 속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반민족분자 청산을 목표로 특별법과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박흥식은 미국행 여권을 가지고 도피하려 하지만 실패, 제1호 검거자라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체포 당시 박흥식은 "서류 정리를 위해 5분만 시간을 달라"고 체포조에 간청해놓고, 뒷문으로 몰래 도주를 시도했다고 합니다. ㅡㅡ;


 박흥식이 제1호 타겟이 된 것은 그가 미국으로 도피하려고 한다는 정황이 입수되었고, 그가 정치계에 광범위한 인맥(특히 장택상 등 경찰 쪽 인맥)을 가지고 있어 반민특위 활동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반민특위 자체가 와해당하고, 박흥식은 재판에서 '공민권 2년 정지'라는 같잖은 구형을 받았으며 이조차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탄 화신백화점]


 일단 단죄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흥식의 사업은 갈수록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화신백화점 전체가 불타버렸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어찌어찌 재건했지만 전쟁기 물자부족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박흥식은 본래의 화신백화점 점포를 민간에 대규모로 임대하는 한편, 1955년 백화점 맞은 편에 2층 가건물을 지어 '신신백화점'으로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 신신백화점. 딱 봐도 허접(?)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유리창을 넓게 다는 등 꽤 볼만한 건물이었던 모양]


 이렇게 계속 사업이 계속되긴 했지만, 1950년대 경제적으로 피폐한 한국에서 대규모의 유통업이 번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충무로 일대의 옛 일본계 백화점을 인수한 새로운 경쟁자들에게도 조금씩 밀리면서 박흥식의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박흥식은 말 그대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5. 시대에 뒤처진 매판자본가의 몰락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박흥식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후 풀려났습니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그놈의 매판자본가 기질은 어디 가질 않아서, 화신그룹 주도의 신도시 개발을 추진하거나(이미 1930년대에 박흥식은 현재의 불광동 일대에 신도시 개발을 추진한 바 있음) 정부의 협조로 거대한 섬유공장을 짓는 등 권력을 등에 업고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박흥식의 경영은 먹히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권력자들이 박흥식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선 박정희는 박흥식의 1930년대 신도시 개발계획을 접한 후 한강 남쪽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계획하도록 지시했지만, 정작 박흥식이 신나게 계획안을 수립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개발 사업 자체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ㅡㅡ;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정희가 직접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유공업에 뛰어들어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한 박흥식의 도전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흥식은 흥한화섬을 설립하고 1966년 양주군 도농리(現 남양주시 도농동)에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건립하였습니다. 이 때 주특기 정경유착을 활용하여 은행에서 대규모 자금을 융통할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특혜 논란에 휩싸이며 정부도 은행도 박흥식을 외면해버리자 그는 사옥까지 팔아가며 무리하게 돈을 끌어모아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실적부진이 계속되자 박흥식은 견디지 못하고 불과 2년여만에 공장을 산업은행에 넘기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공장은 1980년대 환경재해와 산업재해의 상징 원진레이온이 됩니다). 흥한화섬이 망할 당시 68세의 박흥식은 "나는 아직도 현역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지만, 현실은......


 1970년에는 전기전자산업 진출을 목표로 일본의 소니(그 SONY)와 합작으로 '화신소니'를 창업하였지만, 이후 오일쇼크를 맞으며 경영부진에 빠졌고 이를 본 소니가 자본을 빼버리면서 망했습니다. 이렇게 산업계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는 와중에 그룹의 본가인 화신백화점은 차남 박병찬이 맡았지만 거하게 말아먹고 해외도피까지 하는 등 ㅡㅡ;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1980년 화신그룹은 공중분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해방 후 화신그룹의 몰락에는 박흥식의 경영철학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유통업으로 사업을 이룬 박흥식은 모든 사업에서 현금박치기 원칙을 고집했고, 이는 유통업 중심의 경영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산업자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습니다(당연하게도 공장을 세우려면 대규모의 초기투자가 필수적이라, 금융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음). 더구나 인플레이션이 심한 1950~70년대에는 현금은 가만 쥐고 있을수록 가치가 줄어들게 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박흥식은 경영 원칙을 바꾸지 못했않았고, 이는 1960년대 이후 산업자본으로의 진출 시도가 잇따라 파탄나면서 그룹 전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 박흥식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광신학원(광신중고등학교 재단)을 장남 박병석씨에게 물려주고 경영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후 박흥식은 일체의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으며, 자신이 살던 저택을 팔아치운 후 전셋집을 전전하며 조용히 살다가 1994년 9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파킨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가회동에 있었던 박흥식 자택. 그는 1931년부터 57년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지금도 광신학원 재단은 박흥식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년 전 박흥식의 동상을 학교 내에 건립하려다 각계의 비판과 반발을 맞고 철회한 바 있습니다.




6. 정리 : 그의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드리운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즉,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기업가였습니다. 분명 그는 작은 상점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통재벌을, 그것도 30대의 나이에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거대 유통자본과의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성과였으니, 박흥식이 당대 최고의 수완을 가진 경영자였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드리우는 분명한 그림자는, 그의 성장이 상당부분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사업 초기부터 박흥식은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각종 사업에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특혜의 대가로 박흥식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자발적이든 아니든)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것까지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박흥식은 자신의 친일부역행위가 절대 자발적인 게 아니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설령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들 그의 사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자업자득'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정작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형과 아버지의 일생과 대조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안겨줍니다.


 박흥식이 처음으로 선보인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는,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그의 수많은 후진들에 의해 만개하게 됩니다. 해방 직후 적산기업 불하를 시작으로 미군정, 자유당, 군부 등 권력자들과 결탁한 기업가들은 한국경제의 개미지옥에서 승승장구하였고, 이들은 삼성, 현대, 대우 등 세계적 규모의 대재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각종 특혜를 얻었고, 나아가서는 권력 그 자체를 돈으로 좌우할 수도 있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웃기게도 그 정경유착의 원조 박흥식은 정작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른 나이에 출세한 자들의 일반적 결함 - 자신의 성공 공식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정경유착이라는 그림자, 그리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의 말로......라는 두 가지를 남기고 역사에서 퇴장하였던 것입니다.


 화신그룹 해체 후 화신백화점 건물은 몇몇 소유자의 손을 거쳐 한보그룹으로 넘어갔고, 종로 일대의 도로확장 계획에 백화점 부지 상당부분이 포함되자 한보그룹은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옛 백화점의 모양을 살린 18층짜리 고층 건물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철거가 시작된 이후 소유권이 삼성생명(당시 동방생명)으로 넘어갔고, 골조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건물은 지상 33층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설계가 변경되어 완공, 현재의 종로타워가 되었습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오리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2&levelId=tg_004_1950&ganada=&pageUnit=10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67900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1437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30706463389581




[2018. 5. 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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