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Opera <Le Devin du Village> (1752)

루소, 1750년

 계몽주의 철학의 상징, 자유의지에 기반한 사회계약론과 교육론 등 수많은 분야에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시대의 민주주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철학자 루소는 학술활동과 동시에 음악가로도 제법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작가나 철학자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작곡가로도 상당한 명성을 날렸으며, 바로크에서 고전파로 음악 사조가 넘어가는 과도기에 음악에 관한 다양한 논쟁과 이론 정립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역시 정치적 문제로 아들을 떠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소는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간 루소는 엄격한 규율과 복종이 강제되는 작업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6세 때 가출을 하게 되는데,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바랑(Warens) 남작부인의 후원을 받게 됩니다. 루소의 재능을 알아보았는지 바랑 부인은 그에게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으며, 10여 살 연상의 남작부인을 '엄마'라고 부르던 루소는 이후 그녀의 정부(情夫)가 됩니다.

 바랑 부인의 지원으로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사색할 수 있었던 루소가 가장 열정적으로 빠져든 분야가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열정을 알아본 바랑 부인은 그를 성가대 학교의 악장인 르 메트르에게 보내어 음악 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본인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샹베리(Chambéry)에 있었던 남작부인의 저택에서 함께 음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루소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한 이 시절은 바랑 부인이 애인을 갈아치우면서 파탄났고, 잠시 방황하던 루소는 1740년 파리로 이주하여 당대의 유명 철학자들과 교류하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루소는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악보를 고안하여 1742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악보는 숫자를 사용하여 음높이나 셈여림 등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는데, 정작 아카데미에서는 큰 비판만 받고 그대로 묻혀 버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음악가였던 장 필립 라모(1683-1764)는 "참신한 아이디어이지만 음높이와 길이 등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연주자들이 바로 연주로 옮기기 까다롭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가로서 루소의 도전은 한 번의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루소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작곡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1740년대부터 이런저런 작품을 발표하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752년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가 큰 인기를 끌면서 단숨에 유명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루소 본인이 직접 대본과 곡을 모두 쓴 이 작품은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이라는 패러디물이 유럽 곳곳에서 인기를 끌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었습니다(이 패러디물을 기반으로 어린 모차르트가 자신의 초기 오페라 중 하나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 심하게 긴장한 나머지 그는 사정사정해서 알현을 취소하고 말았다는군요.

 이외에도 디드로 <백과전서>에서 음악 관련 부분 집필을 맡는 등 음악철학이나 이론 쪽에서도 활동하던 그는 1750년대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부퐁 논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게 됩니다. 발단은 페르골레시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가 1752년 파리에서 초연된 것이었는데, 장바티스트 륄리(1632-1687)로 대표되는 웅장한 프랑스 오페라와 달리 가벼운 주제와 서정적 멜로디를 특징으로 한 이탈리아식 '오페라 부파(프랑스어로는 '부퐁') 프랑스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에 계몽주의자와 백과전서파 등 새로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프랑스 오페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그 선두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계몽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같은 해 인기 오페라를 발표한 작곡가였던 루소였습니다. 루소의 포문은 당시 프랑스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라모에게 향했는데, 라모의 <우아한 인도의 나라>에 대하여 그는 화성이 너무 거창하다고 혹평하며 "마치 끊어지지 않는 소음 같다"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음악에서 자유로운 선율을 중시했던 루소에게는 근대 화성학의 기초를 세웠을 만큼 화성적인 음악을 중시한 라모와 음악적 측면에서 대척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대한 이 논쟁은 점차 확대되어 이탈리아 음악과 프랑스 음악 간의 대립, 나아가서는 이를 지지하는 신흥 지식계층과 왕족, 귀족 및 일반 청중간의 대립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양측 지지자간 결투까지 벌어질 정도로 과열된 이 논쟁은 정작 한쪽 중심인물이었던 라모가 1764년 사망하면서 허무하게 생물학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이 논쟁의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으며, 그 선두에 있었던 작품이 바로 루소의 <마을의 예언자>였습니다.

 루소의 대표곡 <마을의 예언자>는 서로 연인 관계인 두 양치기가 오해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것을, 마을의 점쟁이가 노력하여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는 내용의 단막극인데, 단촐하며 일상적인 줄거리가 당시 루소의 음악적 입장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 속에는(영상 50:43~)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 및 기독교 찬송가 <주여 복을 비옵나니> 등 여러 노래에 채용된 유명한 멜로디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서울경제 <[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때늦은 음악열정' 귓가에 들리는듯>
경상일보 <[구천의 음악이야기(201)]오페라 작곡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
아츠앤컬처 <환갑을 앞둔 철학자는 열두 살 신동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블로그 <음악사가 있는 고전 음악 박물관>
한국어 위키백과 "부퐁 논쟁", "장필리프 라모", "장바티스트 륄리", "오페라 코미크(장르)"
영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Le devin du village"
프랑스어 위키백과 "Jean-Jacques Rousseau"
나무위키 "장 자크 루소"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1984

 

 

 

Friedrich II von HohenzollernFriedrich der Große (1712-1786)

Flute Concerto No.4 in D




 이전에 철학자와 대통령의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왕입니다. 그것도 독일과 유럽의 근대사에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왕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18세기 계몽군주의 대표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그와 동시에 음악의 훌륭한 후원자였고 자기 자신이 음악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군주' 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하노버 왕가 출신. 1687-1757)는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들의 교육에도 신경을 써 프랑스 귀족 출신의 가정교사를 채용,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88-1740)가 좋게(?) 말하면 군국주의적이고, 대놓고 말하면 반(反)지성주의자에 매우 폭력적이기까지 한 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에 꽃 대신 전쟁용 북을 선택하여 치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결코 유약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눈에는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예술이나 문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지, 프랑스인 교사를 해임하고 음악을 즐기는 아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등 거의 가학적인 벌을 가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가정교육은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는군요.


 이런 식이니 부자지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혼담이 오갔던 것을 기회로 영국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장기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당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의심하여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사방에서 뜯어말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몇 년 후에야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그가 즉위 후 교양과 예술에 탐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 이러한 막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왕위에 올랐습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매우 다행히도 그는 그 때까지의 고난에도 미쳐버리지 않고 자신의 재능과 인간성, 교양을 지켜냈으며 이후 왕으로서 이룩한 일들은 굳이 여기서는 나열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소개할 것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어진 그의 음악 사랑과 아마추어 음악가로서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그는 재위 초기부터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1747년 프리드리히는 (당시에는 건반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정으로 초청하였는데, 바흐는 왕이 직접 만든 주제 선율을 가지고 3성 푸가를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즉석에서 훌륭하게 해냅니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바흐에게 6성 푸가를 만들어 볼 것을 주문하였고, 바흐는 그 자리에서는 아니고 나중에 따로 완성하여 왕에게 헌정하니 그 유명한 <음악적 헌정>입니다(그런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군요).


 사실 바흐와의 인연은 그의 아들인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1714-1788)가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가 왕세자였던 시절부터 궁정악단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즉위 후에는 정단원으로 승진하였고, 왕을 위한 작품들도 여럿 작곡하는 등 여러모로 프리드리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에는 음악적 관점에서 차이를 좀 보였다는데 그 때문인지 1768년 C. P. E. 바흐는 프리드리히의 만류까지 뿌리치고 함부르크 궁정악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즉위하자마자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04-1759)을 이탈리아로 보내 음악가들을 채용하는 등 궁정음악의 수준을 높이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하임 크반츠(1697-1773) 등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크반츠는 프리드리히 개인의 플루트 교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은 프리드리히 2세가 단순히 음악의 후원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상당한 수준의 음악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는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상당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그의 궁정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왕이 직접 협연한 플루트 협주곡에 대하여 영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음악사학자인 찰스 버니(1726-1814)는 "지금까지 내가 그 어느 애호가들이나 전문 플루트 연주자들에게서 들은 것보다 월등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립서비스 아닌가


 이를 보면 그가 음악가로서 적어도 아마추어의 평균보다는 훨씬 훌륭한 기량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음악적 성향으로, 말년이 되어서까지도 젊은 시절의 음악 취향을 그대로 가져가는 바람에 그의 말년에는 궁정에서 철 지난 음악만 줄창 연주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C. P. E. 바흐처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음악가 군주' 프리드리히 2세는 높은 음악적 소양으로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남긴 극히 드문 군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자작곡들 또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여 '수준은 괜찮지만 철저히 구시대적'인 범작으로 평가받고 있긴 하지만요. 그냥 국왕의 신분으로 후대인이 들어줄 만한 음악을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문헌 : 

 나주리, 「북독일의 ‘전고전주의’ -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음악과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클라비어 음악」, 『서양음악학』 12(2), 한국서양음악회, 2009.

 한국어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바흐(J. S. Bach) 음악의 헌정(A Musical Offering) BWV.1079", 곽근수의 음악이야기(http://sound.or.kr/)

 



Gregorio Allegri (1582-1652)

<Miserere mei, Deus>



[알레그리]


 알레그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전환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력을 로마에서 활동하며 주로 가톨릭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동생 도메니코 알레그리(1585-1629) 역시 음악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9살 때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 경력을 시작하였고, 1600년부터 1607년까지는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나니노(1560-1623)에게 음악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페르모의 성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부터 작곡가로 다수의 모테트와 성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로마 밖에서 음악 경력을 쌓던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주목을 받아, 1630년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의 콘트랄토로 부임하여 평생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미제레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그의 음악은 르네상스 - 바로크 사이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데, 대체로 교회음악은 이전 시대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기악음악 쪽에서는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진보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미제레레>는 시편 51편의 구절에서 유래한 성가로, 각각 5성부, 4성부로 된 두 합창단이 함께 부르는(그러니까 총 9성부) 노래입니다. 1638년경 부활주간의 예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후 시스티나 성당의 '테네브레(부활주간에 시행하는 일종의 촛불 예배)'에서 반드시 연주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음이 하이 C음까지 올라가는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이면서 신비로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에서는 이 작품을 교황청 내에서만 전수하며, 다른 곳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악보를 반출하는 등의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저작권 지키는 방법이 무지막지하기도 하지 그래서 이 작품은 그 작품성에 비하여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는 못하였는데, 1770년 로마를 방문한 모차르트가 예배에서 이 곡을 단 두 번 듣고 모두 암기하여 악보로 재현해 냈다는 것으로 후세의 우리에게까지 잘 알려지게 됩니다. 다만 이전에도 다른 필사본 자체는 바깥으로 나돌아다녔다고 하며, 나중에는 교황청의 금지령도 해제되어 정식 출판도 되었다는군요.




참고 : 

영문 위키백과,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나무위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한겨레)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소름' 돋는 곡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경향신문)




Giuseppe Domenico Scarlatti (1685-1757)

Keyboard Sonata K.96 <La Chasse>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738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겸 건반 연주자로, 바흐, 헨델 등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수놓은 작곡가입니다.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 역시 당대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하나로 주로 오페라와 칸타타 등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바 있습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음악을 매우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초기의 음악 수업 또한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661-1727) 등의 음악가들이 그를 가르쳤습니다.


 스카를라티는 1701년 나폴리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페라 작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네치아로 보냈는데 이후 1709년 무렵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해에 그는 로마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폴란드 여왕 마리 카시미르(1641-1716)의 전속 음악가가 되어 3년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의 소극장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만든 몇 편의 오페라 등 작품들이 알려지며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1715년에는 교황청 줄리아 성가대의 악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719년 그는 로마를 떠나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오페라 <나르시스>를 상연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포르투갈로 거처를 옮겨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는데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1711-1758)의 하프시코드 교사 일도 병행하였습니다. 계속 포르투갈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727~28년 사이에는 잠시 로마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1729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자(후에 왕이 되는) 페르난도 6세(1713-1759)와 혼인하면서 바르바라를 따라 사은품 1+1 스페인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스카를라티는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바르바라를 위하여 수많은(수백 곡이나 되는!) 건반 소나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멀찍이 런던에서 출판되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페르난도 6세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에 즉위하자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국왕 부부의 지원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6세 부부는 때마침 전설적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1705-1782)의 후원자이기도 해서 그는 파리넬리와도 교류하며 그를 위한 성악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건반(특히 하프시코드) 연주자로도 당대를 수놓은 거장이었는데, 한번은 동년배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건반 연주 대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대결에서 하프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 연주는 헨델이 승리하였고 두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친한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헨델은 자신의 작품에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의 주제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사례, 헨델 합주 협주곡 Op.6 No.1의 마지막 악장 -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K.2).


 스카를라티의 작품은 오페라 등 다른 장르도 많이 있지만, 역시 그를 대표할만한 것은 수백 곡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들입니다. 명연주자의 작품답게 화려한 기교를 세련되게 담고 있으며, 고향 이탈리아 뿐 아니라 말년을 보낸 스페인의 음악 스타일이 녹아있는 등 대단히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근대 이전의 음악가답게(?) 그의 작품은 양이 방대하고 소실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은 등 목록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데, 현재는 건반 소나타에 한하여 대체로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음악학자인 랄프 커크패트릭(1911-1984)가 총 555개의 목록으로 정리한 번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Dieterich Buxtehude (1637?-1707)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비올을 연주하는 북스테후데. 생전의 그를 그린 유일한 그림]


 - 북스테후데는 17세기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특히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의 초년에 대하여는 기록이 부족한데(그래서 출생년도가 불분명) 일단 출생지는 스웨덴(당시에는 덴마크령)의 헬싱보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오르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헬싱보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던 북스테후데는 1668년 뤼베크로 이주하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당시 크고 아름다운 대형 오르간과 소형 오르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툰더(1614-1667)의 후임자로 부임한 그는 툰더 시절에 시작된 '저녁 음악회(Abendmusik)'를 발전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오르간 연주자로도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 그런데 이 자리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으니 전임자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ㅡㅡ; 북스테후데 역시 부임 이후 툰더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7명의 딸을 낳았다니 금슬은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후 북스테후데는 남은 평생을 뤼베크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많은 제자를 두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과도 교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요한 파헬벨(1653-1706, 카논 변주곡의 원작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 수십 년이 지나 그가 노년이 되자 후임자 선정이 이슈가 되었는데, 이 무렵 헨델(마테존과 함께)과 바흐가 각각 1703년과 1705년에 그를 방문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특히 바흐는 자신이 일하던 아른슈타트의 교회에서 4주간 휴가를 얻어 400km나 떨어진 뤼베크로 왔는데, 북스테후데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복귀를 늦추고 4달 동안이나 머무르며 그와 교류하였습니다.


 - 북스테후데는 헨델과 바흐의 재능을 알아봤는지 후임자 자리와 함께 자신의 큰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는데, 큰딸을 본 두 사람은 하나같이 제안을 거절하고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ㅡㅡ; 음...... 결국 그는 큰딸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얼마 뒤 요한 쉬페르데커(1679-1732)가 큰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당시의 음악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북스테후데 역시 다양한 장르에 수많은 곡을 썼는데,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300여 곡 정도가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50곡 정도입니다. 그나마 후대의 작곡가들(바흐 등)이 그의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이 정도라도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 음악이며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간결한 형식이 특징입니다. 파사칼리아 d단조는 그가 쓴 유일한 파사칼리아입니다.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

<Stabat Mater>



 -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바이올린 및 오르간 연주자입니다. 바로크-고전파 전환기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명곡들을 남겼지만, 아주 젊은 나이(26세!)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드라기'인데, 조상의 출신지인 페르골라에서 따와서 '페르골레시'로 불린 게 굳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 페르골레시는 중부 이탈리아의 제시(안코나 근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가난했고 한쪽 다리를 저는 등 건강도 좋지 않았다는데,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지역 영주의 경제적 지원을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25년 그는 나폴리로 유학하여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치스코 페오(1691-1761)를 사사하였습니다.


 - 1731년 음악원을 졸업한 페르골레시는 작곡가로 활동하여 일찍부터 많은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는 나폴리 귀족 악단에 들어가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은 1733년 발표한 단막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였는데, 본래 다른 오페라의 일부였던 이 작품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의 기틀을 잡은 명작으로 평가됩니다.


 - 오페라의 성공을 바탕으로 1734년에는 나폴리 예배당에 악장 대리로 취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폐결핵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고, 이듬해부터 병이 크게 악화되어 의사의 권유에 따라 1736년 2월 타지로 요양을 떠났지만 차도가 없이 한 달 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해에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 <스타바트 마테르>(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애가(哀歌))라는 게 의미심장합니다.


 - 페르골레시의 음악은 웅장함보다는 섬세함, 그리고 풍부한 멜로디와 화성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그는 죽은 지도 20여 년이나 지난 후 난데없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으니, 대표작 <마님이 된 하녀>가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을 때 장 자크 루소(1712-1778)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 - 이탈리아 오페라를 놓고 벌어진 소위 '부퐁 논쟁'이 그것입니다.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BWV 1043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2, 3악장))


 - 바흐는 총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BWV 1043은 두 명의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717~1823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는 바흐가 안할트쾨텐 후국(侯國)의 궁정에서 활동하던 때입니다. 이 무렵 바흐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바흐의 대표작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BWV 1043입니다. 이 작품은 작곡 이후 악보가 분실되었는데,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1714-1788)가 기억을 되살려내어 복원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수 연주자의 협연으로 연주되는 협주곡(합주 협주곡) 형식은 고전파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상당히 인기있는 형태의 음악이었습니다.


[후기] 1악장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주해본 적이 있었는데(물론 블로거가 바이올린 협연을 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갔더니 해 본 적 없는 2, 3악장만 연주한다고 해서 순간 당황할 뻔한 일이 있었지요. 바로크 시대의 첼로와 베이스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을 연주할 일이 거의 없는데, 이 시기까지는 첼로에 엔드핀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연주를 해야 했고(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연주), 당연히 어려운 패시지는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Alessandro Marcello (1673-1747)

Oboe Concerto in d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마르첼로는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 뿐 아니라 미술, 문학 등에서도 재능을 나타내었고 취미로 예술 활동을 한 전형적인 귀족 음악가입니다. 동생 베네디토 마르첼로(1686-1739) 역시 음악가로, 오보에 협주곡은 기존에는 베네디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716년 출판된 악보가 뒤늦게 발굴되면서 알레산드로의 작품으로 밝혀졌습니다. 한동안은 잊혀져 있었으나 동시대 활동한 바흐가 건반악기용으로 편곡(BWV 975)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바 있습니다.


[후기] 바로크 음악이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 블로거는 바로크 음악의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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