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ène Ysaÿe (1858-1931)
Sonata for Solo Violin Op.27 No.2

이자이, 1883년

 외젠 이자이는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입니다(한국에서 이름 표기가 중구난방인데, 프랑스식으로 '외젠 이자이'가 맞다고 하므로 일단 이에 따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사이 가장 뛰어난 연주자 중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바이올린곡들을 남긴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음악과 연관이 깊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자이가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것은 5세 때로,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쳤는데 2년 뒤에는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할 만큼 기량이 성장하였습니다. 다만 음악원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였는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거나 거리 연주자로 나서는 등 독자적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역시 벨기에 출신의 바이올린 거장 앙리 비외탕(1820-1881)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그의 연주를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브뤼셀 음악원에 입학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음악원에 입학한 이자이는 비외탕과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 등 대가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음악원 졸업 후 이자이는 벤야민 빌제 비어홀 오케스트라(現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연주 경험을 쌓은 그는 안톤 루빈스타인 등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27세 때는 파리 콩세르 콜론에서 솔로 연주자로 데뷔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모교인 브뤼셀 음악원에 교수로 임용되어 교육활동에도 나섰는데 루이스 퍼신저(1887-1966),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등의 거장들이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연주자로도 계속 활동하여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특이점이라면 드뷔시, 프랑크, 생상 등 유럽의 수많은 대작곡가들이 그에게 작품을 헌정했다는 사실인데 이는 그가 작곡자의 의도를 훌륭하게 해석하여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반대로 이자이 자신도 수많은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고 이 작품들을 동료 연주자들에게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와중에도 건강에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는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 그는 나중에는 연주보다는 작곡, 지휘, 교육 등의 활동에 더 치중하였고,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이 더욱 심해져 1931년 왼쪽 발을 절단하는 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회복하지 못했고 같은 해 사망한 뒤 브뤼셀에 있는 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사후 1937부터 그를 기념하여 '이자이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이름을 바꾸어(영국 여왕과는 무관하며, 벨기에 왕비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경연대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자이의 연주 스타일은 뛰어난 연주 테크닉에 기반한 정확한 연주였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위에 언급했듯이 수많은 작곡가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작품들 또한 자기 실력에 바탕해서 그런지 어렵고 난해한 곡들이 많다고 하며,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은 이자이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를 접하고 감명받아 만들었으며, 특히 2번의 첫 두 마디는 무반주 파르티타 3번의 도입부에서 따 왔습니다. 6개의 작품은 각각 당시의 명 연주자 6명에게 헌정하였는데 2번은 자크 티보(1880-1953)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참고자료
 "외젠 이자이",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sound.or.kr/bbs/view.php?id=music3&no=767)
 김미정,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 2번> (1923)에 관한 분석 및 연주법 연구」 (dspace.ewha.ac.kr/handle/2015.oak/213515)
 "[유윤종의 쫄깃 클래식感]작곡자 의도 완벽 해석… ‘헌정받기의 대가’ 이자이", 동아일보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509/84267346/1)
 "Eugène Ysaÿe", "Violin Sonata No. 2 (Ysaÿe)", 영문 위키피디아
 "외젠 이자이", 나무위키



Henryk Wieniawski (1835-1880)

Violin Concerto No. 2 in d Op. 22




 -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음악가로, 생전에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하였습니다. 파가니니 사후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 앙리 비외탕(1820-1881), 요제프 요하임(1831-1907) 등과 함께 19세기 중후반을 수놓은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로, 작곡가로서는 다수의 바이올린 곡을 남겼습니다.


 -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의 루블린에서 출생한 비에니아프스키는 여느 대음악가들이 그렇듯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843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그가 프랑스인도 아니었고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그의 재능을 확인한 음악원에서 특별히 입학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졸업 이후 그는 유럽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하였는데, 그의 동생이자 피아니스트인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1837-1912)와 함께 하기도 했다는군요.


 - 1847년에는 첫 작품인 <Grand Caprice Fantastique>을 작곡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2세...... 이후로도 그는 연주와 작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활동이 주였기 때문에 그가 작곡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860년 그는 이사벨라 햄프턴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부모가 그의 결혼을 반대하자 <Légende>(Op. 17)라는 작품을 써서 부모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 그 무렵 비에니아프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1872년까지 10여 년간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러시아 음악 협회의 일원으로 오케스트라와 현악사중주 등의 연주활동과 바이올린 교육 등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1872년부터 2년간은 루빈슈타인과 함께 미국을 여행하였고, 1875년에는 브뤼셀 왕립음악원에 비외탕의 후임으로 선임되는 등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로 각지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 하지만 이 때부터 건강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심할 때는 연주회를 중단해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1879년에는 러시아 각지를 돌며 연주회를 진행하던 도중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오데사의 병원에 입원했고, 차이콥스키의 후원자로 유명한 나데주다 폰 메크(1831-1894)와 비에니아프스키의 친구들 등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그는 이듬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생전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바이올린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떨쳤고, 그에 걸맞(?)게 그의 바이올린 곡들은 대부분 그 난이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은 1856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초연은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어졌고, 1879년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친구이자 역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헌정되었습니다.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Violin Concerto in e Op.64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6 봄 연주회)


 -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총 2곡이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번은 멘델스존이 유년기에 작곡한 것으로,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후반에야 재발견). 이 작품은 1843년부터 작곡이 진행되어 1845년에 초연이 이루어졌으니, 멘델스존이 사망하기 불과 2년 전에 완성된 후기 작품입니다.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의 작품과 함께 최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걸작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3악장이지만, 각 악장이 끊어지지 않고 끝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후기] 음악을 듣다 보면 작곡가의 인생이 그들의 작품에 얼마나, 어떤 형태로 투영되는가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역대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 중에서 최강급의 금수저(?)였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평생 겪지 않고 산 사람이죠. 그의 음악세계는 고도의 세련미, 편안하고 밝은 느낌으로 정리할 수 있을텐데 아무래도 그가 처한 환경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이건 이전에도 어딘가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BWV 1043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2, 3악장))


 - 바흐는 총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BWV 1043은 두 명의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717~1823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는 바흐가 안할트쾨텐 후국(侯國)의 궁정에서 활동하던 때입니다. 이 무렵 바흐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바흐의 대표작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BWV 1043입니다. 이 작품은 작곡 이후 악보가 분실되었는데,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1714-1788)가 기억을 되살려내어 복원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수 연주자의 협연으로 연주되는 협주곡(합주 협주곡) 형식은 고전파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상당히 인기있는 형태의 음악이었습니다.


[후기] 1악장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주해본 적이 있었는데(물론 블로거가 바이올린 협연을 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갔더니 해 본 적 없는 2, 3악장만 연주한다고 해서 순간 당황할 뻔한 일이 있었지요. 바로크 시대의 첼로와 베이스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을 연주할 일이 거의 없는데, 이 시기까지는 첼로에 엔드핀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연주를 해야 했고(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연주), 당연히 어려운 패시지는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Ludwid van Beethoven (1770-1827)

Triple Concerto in C Op.56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5 봄 연주회)


 - 삼중 협주곡은 세 악기의 합동 협주라는 특이한 형태의 작품으로, 이런 형태의 음악은 주로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고전 시대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이러한 형태를 베토벤이 왜 꺼내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베토벤의 전기 작가(하지만 신뢰성은 심히 의심받는)인 안톤 쉰들러(1795-1864)에 따르면 피아노는 베토벤의 후원자 중 하나인 루돌프 대공, 바이올린은 루돌프의 전속 음악가인 칼 자이들러, 첼로는 에스테르하지 가문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로 주자인 안톤 크라프트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합니다. 완성은 1804년에 되었지만, 루돌프 대공이 악보를 먹튀개인소장하는 바람에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군요.


[후기] 블로거는 이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베토벤 특유의 혁신성이 그닥 느껴지지 않거든요. 그래도 역시 (바로크 음악이 아닌) 세 악기의 동시 협주라는 게 독특한 매력이기는 하지요. 첼로를 듣보잡 취급했다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베토벤은 나름 첼로를 좋아해서 첼로 소나타를 썼다든지 삼중 협주곡에 첼로를 포함했다든지 정도의 노력은 했으니 경건히 들을 따름입니다.





Dmitry Kavalevsky (1904-1987)

Violin Concerto in C Op.48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4 봄 연주회)


 - 카발렙스키는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과 동시대 인물로, 주로 극음악 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입니다. 소련의 정치권력과는 대체로 타협적이었으며, 전반적으로 예술적 깊이보다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협주곡들은 전문적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난이도를 추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어린이 음악교육에 깊이 관여한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후기] 러시아-소련의 작곡가들은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블로거는 이 연주를 통하여 카발렙스키를 처음 접했고, 협주곡에 대하여 남들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고 접근하였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연주 또한 프로페셔널이 아닌, 단원 중 한 명이 협연을 하였죠.




Jean Sibelius (1865-1957)

Violin Concerto in d Op.47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14 신입생 환영 연주회)


- 본래 시벨리우스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무대공포증과 자신감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작곡으로 완전히 전향한 개인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뒤로도 시벨리우스 자신은 바이올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고, 이런 사정이 있다 보니 바이올린에 대한 이해 또한 상당히 깊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이 작품은 1903년 완성되어 이듬해 초연되었지만 당시 연주는 협연자의 능력 부족으로 엉망이 되었고, 이후 시벨리우스는 전체적인 틀을 일부 개정하여 1905년 다시 공개하였는데 이 연주는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후기] 아마추어 악단의 협주곡 연주는, 연주도 연주지만 협연에 대한 감상 그 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기도 합니다.





Camille Saint-seans (1835-1921)

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Op.28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3 가을 연주회)


- 바이올린 협주곡의 형태를 띤 이 작품은 파블로 데 사라사테(1844-1908)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라사테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하나였고(그가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려고 만든 작품이 바로 유명한 <치고이네르바이젠>), 그의 연주를 본 생상스는 강한 인상을 받고 사라사테를 위한 바이올린 곡을 만들어 헌정하는데 바로 이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입니다. 단일 악장으로, 느린 서주와 상당히 변형된 론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기] 항상 언급하지만 아마추어 악단이 연주하는 협주곡은 협연자의 연주를 함께 감상하고 받쳐주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큰 해프닝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협연자가 연주를 어떻게 했는지 정도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곡의 연주는, 괜찮았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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