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베트남 전쟁 : 끝없는 수렁에 빠지다


 - 베트남 개입 확대에 반대하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얼떨결에 대통령에 취임한 린든 존슨(민주당)은 베트남전 확전을 결정하고, 1964년 통킹 만 사건(하노이 앞바다의 통킹 만에서 미국 함선이 공격당한 사건으로, 현재는 이 사건 자체가 조작 혹은 왜곡일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공군기지 방어를 위해 상륙한 미국 해병대]


 - 미국은 처음에는 남베트남군까지 포함한 압도적 전력차이를 가지고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고, 북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지는 등 처음에는 미국의 계획대로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곧 미국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특히 전쟁을 끝없는 수렁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남베트남 내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이었습니다.


 - 베트콩은 무성한 정글과 여기저기 파놓은 땅굴 등, 지리적 이점을 총동원하여 미군(과 기타 동맹군)을 괴롭혔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북베트남에서 인적, 물적 지원도 받고 있었던지라 이들을 상대하는 미군과 남베트남군, 동맹군(이하 '미군'으로 통칭)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미군은 고엽제를 대량 살포하여 정글을 초토화하고, 농촌 마을을 폭하는 등 무리수까지 두었지만 전황은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유명한 사진 <소녀의 절규>. 사진 가운데의 판티킴푹(1963-)의 마을은 미국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불탔으며, 판티킴푹은 이후 여러 차례의 대수술로 생존한 후 현재는 


 -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습니다. 애초에 미국과 남베트남은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2년 후 총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명분에 있어서 북베트남에 크게 밀리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미국이 극도의 부정부패에 시달리던 남베트남 정부를 도와 전쟁에 개입하고, 남베트남 민중과도 적대하게 되면서 베트남의 민심은 갈수록 베트콩과 북베트남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


 - 부족한 명분은 미군의 전쟁 수행에 큰 제약을 가했습니다. 일단 육군은 소수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었고(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글에 만든 '호치민 루트' 또한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정치공작을 통하여 호치민 루트를 묵인하는 캄보디아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정작 혼란을 틈타 공산주의 반군(크메르 루주)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이 더 꼬여버렸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1975년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한 후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 이 때 남베트남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쿠데타가 횡행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고, 대규모 징병을 통해 겉으로는 100만 대군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썩어 있었습니다. 미국이 지원한 무기들을 남베트남의 장교들은 뒤에서 몰래 팔아먹었고, 나중에는 이러한 무기를 베트콩이 사들였기 때문에 베트콩과 남베트남군이 사이좋게(?) 미국 무기를 들고 서로 싸우는 촌극까지 벌어졌습니다. ㅡㅡ;




8. 미국의 GG선언, 모래성처럼 무너진 남베트남


 - 더 무너질 것조차 없던 남베트남군은 그렇다 치고, 명분 없는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 역시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탈영이나 군무이탈 같은 문제는 일도 아니었고, 곳곳에서 병사가 상관을 공격(하극상)하는 사건이 빈발하였습니다. 오죽하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프래깅(본 의미는 수류탄을 터뜨려 사고사로 위장한 상관 살해. 흔히 상관 살해를 통칭하는 말로 쓰임)'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


 - 그래도 미국은 대외적(특히 미국 내부적)으로는 자신들이 곧 승리하고 전쟁이 끝날 것이라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선전을 무력화하고, 결국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태가 터지니 바로 1968년 초의 '테트(설날) 공세'였습니다. 본래 베트남도 나름 중국문화권이기 때문에 설날을 명절로 치르고,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설날(베트남어로 '테트') 전후에는 (남베트남군 한정으로) 암묵적 휴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테트 공세 때, 공격을 개시하는 베트콩 부대]


 -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테트 시기의 풀어진 분위기를 역이용하여, 남베트남 전역의 주요 도시에 베트콩 부대를 침투시켜 대공세를 가하기로 계획합니다. 1968년 1월 30일 새벽, 명절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 침투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남베트남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길게는 일주일 이상 치열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하지만 원래 예정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베트콩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섬멸당하고 말았습니다.


 - 이 공세를 통하여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이 사실상 일망타진되었으니, 전술적으로는 북베트남의 완패였습니다. 하지만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이 건재함을 세계, 특히 미국인들에게 각인시켰고, 참혹한 전투가 TV 등을 통하여 그대로 미국인들에게 전해지면서 미국 내 반전여론이 대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베트콩 부대원이 남베트남군 장교에게 즉결처형당하는 사진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반전여론에 더욱 불을 지폈습니다.


[문제의 그 사진. 왼쪽은 사이공 경찰서장 응우옌응옥루안(1930-1998), 오른쪽은 베트콩 암살부대 소대장 응우옌반럼]


 - 결국 베트남 전쟁 확전을 주도한 존슨은 1968년 대통령 선거를 낙선도 아니고 불출마(첫 번째 후보 경선에서 탈탈 털리고 GG)하게 되었고, 본선에서도 '베트남 개입 중단'을 내건 리처드 닉슨(공화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닉슨은 1969년부터 베트남 파병군의 단계적 철군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후의 전쟁은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버티기'에 불과했고, 1973년 미국은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 휴전을 약속하고 완전 철군하였습니다(대한민국 국군도 이 때 함께 철군).


 - 이후의 남베트남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사라지자마자 휴전 약속에 "ㅗ"를 날리고 총공세를 시작, 남베트남군은 미국에게서 무기 지원은 받았지만 탄약 등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ㅡㅡ; 지리멸렬을 거듭하였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는 전황이 결정적으로 악화되자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야반도주, 이 와중에도 쿠데타는 계속되었고, 최후의 순간에 다시 대통령직에 오른 즈엉반민은 북베트남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결국 남베트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사이공 대통령궁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베트남군 전차]




9. 결론 :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 남베트남의 패망 자체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한국 역시 분단 상태이기 때문이겠죠. 오랫동안 한국 정부에서는, 남베트남의 패망을 두고 "전국민이 일치단결하고 반공정신으로 무장하여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남베트남처럼 패망한다"라고 프로파간다를 하였고, 이는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훌륭한(?)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블로거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남베트남이 패망한 것은 남베트남 국민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남베트남 권력자들의 잘못입니까? 남베트남의 다수 민중이 베트콩 게릴라를 지지했던 것은 남베트남 정부가 너무나도 썩었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국이 전쟁으로 황폐화되는 때에 권력층은 내부에서 권력투쟁에만 몰두했고, 결국 미국까지 등에 업고도 사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블로거는 농지개혁법이야말로 이승만 최대의 업적이라 감히 단언합니다.]


 - 남베트남의 사례는 오히려 '남한은 왜 북한에 패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좋은 반례이기도 합니다. 남한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농지개혁을 비교적 성공적(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토지를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한 것' 자체가 충분히 성공)으로 수행하였고, 새로 토지를 갖게 된 대다수 농민들은 남한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북한과 싸웠던 것. 국민의 '일치단결'이 중요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열쇠는 오히려 권력 스스로가 쥐고 있는 셈입니다.


 - 블로거는 남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민주적이지도 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돌보지도 않는,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일치단결을 핑계로 국민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것을 경청하는 민주적인 권력이야말로 건강하게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을 남베트남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http://travel.tourism.vn:808/main/publish/view.jsp?menuID=002001002017&type=P (베트남 독립운동)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521897627 (응오딘지엠)

http://gesomoon.com/Ver2/board/view.php?tableName=comm_discuss&bIdx=408793 (틱광둑 소신공양과 쩐레수언)

http://ppss.kr/archives/22141 (베트남 전쟁 관련)


4. 건국해놓고 보니 개판


 - 응오딘지엠이 성공적으로 권좌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남베트남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계속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정권이 바뀌었다보니, 내부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파벌(작게는 학연, 지연으로부터 크게는 왕당파도 있는 등등)이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응오딘지엠은 이러한 혼란상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친족과 측근세력을 정부 요직에 대거 앉혔습니다.


 - 그런데 이래놓고 보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단 응오딘지엠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고, 새로 등용한 친척이나 측근들도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겁니다(당시 베트남의 기득권인 지주 계층은 프랑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가 많았음). 이건 그냥 봐도 문제인데, 하필 베트남이 불교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게 문제를 더 키워버렸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전국민의 90%를 넘었습니다.


[호치민(사이공) 노트르담 성당]


 - 이렇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독재와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민중이 원하던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 속에 흐지부지되었고, 이승만이 이거 하나는 정말 잘 한 겁니다...... 나름 미국의 지원이 상당히 많았지만 이것이 대다수의 민중에게 제대로 분배될 턱이 없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남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막대한 토지와 이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도강 중인 베트콩 부대]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 내의 베트민 지지세력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을 형성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고, 이들은 착취와 부정부패에 지칠 대로 지친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남베트남 정부를 끊임 없이 괴롭혔습니다. 이런 썩은 국가의 군대도 제정신이 박혀있을 리 없어서, 남베트남군은 무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반정부 게릴라 하나 제대로 상대 못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5. 틱광둑의 소신공양과 쩐레수언의 패드립


 - 이런 지옥도가 몇 년 이상 흐르면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국내 각계 각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가톨릭 성향 정부 하에서 불교기(旗) 게양조차 금지당할 정도의 탄압과 차별을 당해온 불교계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정부는 수십 명의 사망자까지 내며 강경진압을 일삼았습니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장면(칼라를 첨가한 흑백사진). 잔인한 장면일 수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


 -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의 저명한 고승 틱광둑(1897-1963)이 소신공양(분신)을 감행하며 남베트남의 참상이 전세계로 퍼지게 됩니다. 1963년 6월 11일, 승려들의 침묵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틱광둑은 다른 승려들의 협조로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하였습니다. 이는 사진과 영상을 통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세계인은 '반공의 선봉장'이 아니라 '독재와 부패의 지옥'을 목도하였습니다.


[쩐레수언]


 - 물론 응오딘지엠 정부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며, 특히 응오딘지엠의 제수(동생 응오딘뉴의 아내. 통칭 '마담 뉴')이며 부정부패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쩐레수언(1924-2011)이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붓고 말았습니다. 이전에도 과격한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쩐레수언은,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사에 남을 패드립을 시전하였습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불교 지도자들이 한 게 대체 뭐가 있나요? 그들이 한 거라곤 승려 한 명을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실제로 한 말





 - 이 발언은 남베트남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분노를 당연히 샀고, 어떻게든 응오딘지엠을 밀어주려 했던 미국은 마지막 인내심마저 접고 응오딘지엠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6. 대 쿠데타 시대가 열리다


 - 몇 달 지나지 않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군의 즈엉반민(1916-2001) 장군은 미국의 묵인 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미국으로 망명시킬 계획이었지만, 정작 응오딘지엠 본인은 망명을 거부하고 대통령궁에서 동생 응오딘뉴와 함께 처형당했습니다(정작 패드립의 주인공 쩐레수언은 유유히 미국으로 도망).


 - 이것으로 남베트남의 혼란이 종식......될 리가 있나. 이때부터 남베트남은 허구헌날 벌어지는 쿠데타로 더욱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쿠데타의 주역 즈엉반민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동료 응우옌칸(1927-2013)의 쿠데타로 쫓겨났고, 이후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가, 응우옌반티에우(1923-2001)가 그나마 좀 오래 집권했다가, 베트남 전쟁 막판에 다시 쿠데타로 쫓겨나고...... 웃기게도 이 혼란상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은 첫 쿠데타를 일으킨 즈엉반민이었습니다. ㅡㅡ;


[그나마 오랫동안 권력을 지킨 응우옌반티에우]


 - 이렇게 쿠데타가 빈발하던 시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다는 게 이 상황의 막장성을 더합니다. 미국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시작하였고, 남베트남군에도 많은 지원을 퍼주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라고 준 거였는데, 남베트남군은 전쟁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쿠데타를 일으키기 바빴으니 제대로 전쟁 수행이 될 턱이 없었습니다. ㅡㅡ;


 - 그나마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대부분 응우옌반티에우 집권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역시 별로 유능한 인물은 되지 못했고, 지속되는 부정부패와 남베트남군의 거듭된 삽질을 어떻게 개선하지는 못했습니다. 전쟁 막판에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그는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글쎄요 그들이 딱히 누굴 욕할 처지가...... (계속)



1. 배경 : 식민지 베트남과 독립운동

 - 베트남은 1857년부터 정확히 30년에 걸쳐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후 기존 왕조(응우옌(阮) 왕조)는 '존속'은 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가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한 방에 날아간 이후, 사실상 관리 불능 상태가 된 인도차이나 반도를 낼름 집어먹은 건 다름아닌 일본 제국.

[사이공에 입성하는 일본군]


 - 일본은 처음에는 군대 주둔과 관련 시설 이용권 확보에서 시작하여 1945년 3월에는 프랑스 총독부를 완전 몰아내고, 응우옌 왕조의 '명목상' 황제인 응우옌푹티엔(바오다이保大, 1913-1997)을 역시 '명목상' 황제로 앉혀 베트남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국 동남아시아판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대규모 식량 수탈을 자행했고, 여기에 연합군 공격으로 인한 교통난까지 겹쳐 1945년 초에는 200만여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까지 발생했습니다.

 - 당연히 프랑스 식민 시기에도, 일본 식민 시기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존의 식민제국 프랑스가 일본에게 굴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은 사기탱천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호찌민(1890-1969) 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동맹회(베트민(월맹))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본과 프랑스의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확장한 베트은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무섭게 전국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 하지만 해방도 잠시, 중국(중화민국)군과 프랑스군(프랑스군 진주 이전에는 영국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목으로 베트남에 들어왔습니다. 일단 베트민, 중국, 프랑스는 1946년 초 베트남 독립 문제에 관해 합의를 보았으나, 여기에 대한 의견차이로 베트민과 프랑스 사이에 충돌이 재개되면서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됩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2.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당연하게도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프랑스가 압도적이었는데, 여기에 대항하여 베트민은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며 농촌과 지방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민에 의해 쫓겨나 외국으로 도망친 바오다이를 다시 불러와, 남부 최대도시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를 만들었습니다. 

 - 그런데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공세력의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도 사회주의 세력의 손에 떨어진 마당에, 사회주의 성향의 베트민이 베트남을 장악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이에 사회주의권의 소련-중국은 베트민을 지원하여, 전쟁은 점차 국제전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프랑스군은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1953년 들어 베트민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한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진격할 태세였습니다. 이에 프랑스군은 라오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거점을 건설하고, 이곳에서 베트민군과 싸우기로 결정합니다. 디엔비엔푸는 험준한 산악지대 가운데 분지 지형이었기 때문에, 베트민군이 들어올 길이 제한되었습니다(라고 프랑스군은 생각했습니다).

[디엔비엔푸의 대략적 위치]


 - 이는 육상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데다 산악지대를 베트민군이 확보하면 프랑스군이 그대로 포위되는 위험한 전략이었지만, 주변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대포 등의 중화기를 부품 단위로 분해, 인력과 자전거 등을 이용하여 산 위까지 실어날라 다시 조립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성을 선보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 산 위에서의 포격에 물자수송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하필 그 산은 정글이 우거진 곳이기까지 해서 공습으로 베트민군을 쫓아내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비행장까지 점령당하자 프랑스군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1만 6천 명 중 1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습니다. 베트민군은 포로를 상당히 가혹하게 대우해서, 최종적으로 풀려난 프랑스군 포로는 3천여 명에 불과했다는군요(다만 베트민에서는 프랑스군의 베트남인 학살을 들먹이며 코웃음을 쳤다고 합니다).

[디엔비엔푸에 입성하는 보응우옌잡]


 - 결국 북부는 완전히 베트민의 손에 들어왔고, 프랑스군은 GG를 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954년 제네바 합의(한국전쟁 정전 문제가 논의된 그 회의)에서 프랑스군 완전 철수, 2년간 한시적 정전선 설정 이후 1956년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 등의 내용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이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프랑스가 사라진 무대에,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3. 남북분단과 베트남 공화국 건립

 - 일단 2년 후 총선거가 실시되면 베트민이 정권을 잡을 것은 거의 확실했고, 이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정전선으로 결정된 북위 17도 이남에는 일단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이 (미국의 후원 하에) 다시 들어섰고, 베트남국과 미국은 합의 내용 중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응오딘지엠]


 - 다만 바오다이는 사실상 바지황제(?)였고, 미국이 밀어준 실세는 총리에 임명된 응오딘지엠(고딘디엠, 1901-1963)이었습니다. 응오딘지엠은 이전에도 바오다이 정부의 각료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항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일본 패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미국 등지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총리 응오딘지엠은 1년 후인 1955년, 국민투표를 주도하여 바오다이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후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 자세히 보면 뭔가 냄새가 나지요? 실제로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적극 밀어주었고, 그의 '선거 쿠데타'와 대통령 취임에도 미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바오다이 정부가 자신들의 목적(동남아시아 공산화 저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우익 성향 인사이면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커리어를 많이 쌓은(항일운동 등) 응오딘지엠에게 권좌를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국민투표에 참여하는 응오딘지엠]


 - 여기까지는 미국의 의도대로, 나름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공화국 또한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였고(아무리 그래도 총선거를 하면 남쪽이 이기기 어려우므로), 베트남의 남북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남베트남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였고 다른 하나는 응오딘지엠의 '종교'였습니다. (계속)




 면적 

 21㎢

 인구

 10,084명 (2015년 추산)

 1인당 GDP(PPP)

 $2,500 (2006년 추산)



 - '나우루'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 태평양 한가운데, 적도 바로 아래 위치한 작은 섬나라죠. 그 작은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넓이는 서울 면적의 1/30이고 인구는 한국의 웬만한 읍 하나보다도 적습니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국가이며, 특히 공화국 중에서는 가장 작은 나라로 꼽힙니다(나우루보다 작은 바티칸이나 모나코는 '공화국'이 아니므로). 어찌나 작은지 명시된 수도(首都) 자체가 없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 위치나 크기 등에 비하여, 나우루는 언론이나 인터넷 등을 통하여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그 정체가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관광이라든지 국제정치라든지 하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고, '자원으로 흥하고 자원의 고갈과 함께 쫄딱 망한'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원 고갈 이후 인류(혹은 중동의 석유 부국들)의 미래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라입니다.




1. 시작 : 바다새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작은 섬


 - 이곳은 그야말로 태평양에 점점이 흩어진 수많은 섬들 중 작은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섬에는 뭔가 특별한 게 하나 있었으니, 태평양에 서식하는 알바트로스 등의 바다새들이 오랜 기간 이 섬을 오가며 화장실(?)로 썼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이 섬에는 수천 수만 수억(?)년간 바다새의 배설물이 쌓이게 되었는데, 이 배설물은 오랜 시간동안 굳어 인(P) 성분이 많이 함유된 인광석으로 변모하였습니다.


 - 바다새가 만든 인광석만 잔뜩 쌓인 이 섬에는 태평양을 누비던 원주민(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들이 언제부턴가 들어와 정착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작은 마을에 서양 세력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나우루 섬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곳을 찾은 유럽인들은 섬 전체에 지천으로 널린 인광석에 주목하게 됩니다. 인광석은 비료, 폭약, 의약품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에 쓰이는 중요 자원이었거든요.


 - 자원의 보고로 밝혀진 이 섬은 이후 본의아니게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손을 떠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초에는 독일 폭격기가 이 섬 일대를 폭격하여 연합군의 시설을 파괴한 일이 있었으며, 얼마 뒤 일본이 이 섬을 점령하여 1945년 항복할 때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은 외부의 전염병이나 강제이주 조치를 겪어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섬에 귀환한 원주민은 7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폭격을 당하는 나우루 섬]


 -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국제연합을 대표하여 신탁통치를 하였으며, 1960년대 정부를 구성한 이후 1968년 완전히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우루의 신화가 시작됩니다.




2. 리즈시절 :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


 - 독립 직전인 1967년, 나우루 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인광석 개발권을 완전히 넘겨받았습니다. 독립 이후 나우루는 국가 차원에서 인광석 개발에 나서 엄청난 이익을 쓸어모았으며, 주민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배불리 먹고 살 만큼 막대한 부를 얻게 됩니다. 1980년대 초 미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갓 넘을 때, 나우루의 1인당 GDP는 2만~3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1980년대 초입니다.


[저게 다 돈입니다 돈!]


 - 인구도 1만 명 남짓으로 많지 않으니 나우루 정부는 인광석 관련 수익을 아예 전국민에게 골고루 분배했고, 신석기시대 나우루 주민은 그야말로 허공에 태워도 남아돌 만큼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웃기게도 정작 나우루 주민은 인광석 채굴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단지 외국인들이 인광석을 채굴하는 대가로 지불한 로얄티만으로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것.


 - 사실 아무도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외국에서 사 오고, 필요한 노동력은 외국인을 불러와서 시키고(심지어 공무원이 외국인이었을 정도!), 술 한 잔 마시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돈이 남아돌 정도였습니다. 세금은 당연히 없고(애초에 그 돈을 누가 줬는데요), 주택, 교육, 병원 또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지요. 현실 유토피아 심하게는 화장실에서 1달러짜리 지폐로 뒤를 닦을 정도였다는군요.


[물론 돈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이 분은 나우루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다만 당시에도 (주로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나우루의 행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원은 영원한 게 아니니까요. 나름 나우루 정부에서도 이 돈을 가지고 여기저기 투자도 하고, 돈놀이도 하곤 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성공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장의 영광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나우루의 그 누구도 걱정을 하지 않았고, 정부에서는 "자원이 떨어지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보면 되겠지" 정도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그리고......




3. 몰락의 시작 : 인광석이 바닥났다!


 - 우려했던 상황이 1990년대 이후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80% 이상이 채굴된 나우루의 인광석 생산량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정부는 더 이상 인광석 개발로 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부랴부랴 해외에 투자한 자산을 매각하거나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 당장 급한 불을 끄고, 어항을 확장하여 주민들이 새로운 직업을 갖게 하려고 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나우루 주민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기본적인 노동 개념조차 잊어버린 겁니다!


 -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온갖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일하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려서, 빨래나 설거지 등 기본적인 가사조차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하질 않는데다 식품이라곤 죄다 외국산 가공식품 투성이였으니, 90% 이상의 주민이 비만 상태로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바론 디바베시 와카(1959-) 現 대통령. 대부분의 주민이 이런 상태]


 - 다급해진 나우루 정부는 전략을 바꾸어, 세계의 검은 돈(부정축재라든지, 범죄조직이라든지......)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세피난처와 돈세탁 천국으로 변모한 나우루는 세계의 욕을 처먹으면서도 그럭저럭 경제수준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정부는 영국에서 상연된 어느 뮤지컬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고, 런던에서 열린 초연에는 정부 각료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녀왔으며, 투자한 돈은 쫄딱 날려먹는 등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습니다.


 - 결국 국제사회의 금융 제재를 먹으면서 이 전략도 끝장났고, 나우루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4. 나우루의 현재 : 자원에만 의존한 사회의 최후


 - 이후 나우루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대가로, 오스트레일리아로 흘러들어온 난민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우루가 이들을 제대로 먹여살릴 여력이 있는 곳도 아니고, 사실상 난민들을 수용소에 가둬놓다시피하는 수준이라 난민들의 거센 불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2003년 이후 지금까지 나우루는 잊을 만하면 수용된 난민들의 폭동으로 나라 전체가 난장판이 되는 일을 겪고 있습니다. 대통령 청사가 불탄 적도 있다는군요.


[나우루 섬을 촬영한 항공사진]


 -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인광석 개발이 지속되면서 사실상 인광석 더미나 다름없었던 나우루 섬의 높이는 계속 낮아졌고, 개발이 거의 끝나가는 현 시점에는 해수면과 거의 높이 차이가 없을 만큼 섬의 고도가 낮아져 있습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져버리니, 나우루는 장기적으로 바다 밑에 통째로 잠겨버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 현재의 나우루는 사실상 국제 사회의 원조로 연명하고, 그 대가로 난민을 수용하거나 국제연합에 한 표를 던져주는 신세입니다. 소수의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은 실업 상태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리며(당뇨병 환자가 전체의 40%) 제대로 일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나라 주민의 평균 수명은 에이즈나 다른 전염병의 요소가 거의 없는 환경임에도, 58세(남자)/65세(여자)로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 나우루의 번영과 몰락은 인류 문명 전체에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자원을 빨아먹으며 번영을 누리는 현재의 인류 문명이, 바로 그 자원이 고갈될 때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우루의 역사는, 현재의 번영에 도취되어 미래의 환경 변화를 대비하지 않을 때 인류는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참고 :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http://www.nauru.or.kr/

http://skccblog.tistory.com/1070

http://clankorea.com/index.php?document_srl=16368&listStyle=webzine&mid=mission_south_pacific

경향신문 "[지구의 밥상] (1) 태평양의 '콜라 식민지'"

연합뉴스 "태평양 나우루의 호주 난민수용소, 폭동에 초토화"



 -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는 현재의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여 '미래에 어떤 재앙이 닥칠 것이다' 라는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연이 인간에게 여러 차례 역습을 가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잘 나가던 문명 여럿이 절단나기도 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동네도 한때는 잘 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출처 : 영문 위키피디아 "Ur")


 -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더미 위에 사는 우리들이라 잘 느끼지 못할 뿐이지, 사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이라는 토대 위에서 살아왔고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숱한 부침을 겪어왔습니다. 개중에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른 것도 있고, 인류문명이 자초한 변화도 있지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1. 메소포타미아 : 관개농업으로 흥한 자 관개농업으로 망하다


 -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스라엘에서 출발하여 시리아-이라크를 거쳐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도시국가가 형성된 게 기원전 4000년 무렵이라니 대단하죠(고조선의 성립이 좋게 봐줘야 기원전 2000년 무렵이라는 걸 감안해봅시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이름 자체가 '두 강의 사이'라는 의미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이곳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이라는 두 개의 강이 물을 공급한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 물론 이쪽도(남쪽의 아라비아 사막만큼은 아니지만) 비교적 건조한 기후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토양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사람들은 수로를 만들어 강의 흐름을 농토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관개농업'의 시초입니다. 중요한 물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이 동네는 많은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땅이 될 수 있었지요(건조 지역은 일반적으로 물 문제만 해결되면 농사짓기 좋은 땅인 경우가 많습니다).


[농사짓기 좋은 땅] (출처)


 - 그런데 영원히 잘 나갈 것 같던 이 동네에 문제가 생깁니다. 농사가 점차 잘 되지 않게 되었던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근본 원인은 '염류화'였습니다. 강물이나 지하수 등의 민물이라도 아주 약간의 염분은 포함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농사를 위해 관개시설로 물을 끌어오면, (건조 지역이니까) 끌어들인 물은 많은 양이 증발되어 사라집니다. 물론 증발되는 건 H2O 뿐이죠. 원래 물에 포함된 염분은 증발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남게 됩니다.


 -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면 자주 내리는 빗물에 염분이 씻겨 내려가서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는 비가 많이 오는 곳이 아니죠. 물을 끌어오면 끌어올수록 염분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계속 쌓여 나갑니다. 10~20년 정도라면 별 탈이 없겠지만, 이러한 과정이 수천 년간 반복된다면? 땅에 염분(염류)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식물이 자라기 어렵게 됩니다(뿌리가 물을 흡수하는 데 문제가 생기던가 그렇습니다. 삼투 작용이죠).


 - 결국 수천 년에 걸쳐 생산력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력도 서서히 떨어졌다는 이야기. 더구나 이곳은 넓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힘이 약해지면 주변 지역의 침입을 방어하기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기는, 북부와 동부에서 밀고들어오는 수많은 이민족의 정복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 물론 두 강이 주는 이점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적어도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비교적 잘 나가는 동네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중심지는 바빌론에서 크테시폰을 거쳐 바그다드로 이어졌고, 모두 당대 손꼽히는 대도시였죠. 물론 사막화가 더욱 진행된 현대에 와서는...... 사담 후세인? ISIL?



2. 화산 한 방에 날아간 미노스 문명


 -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는 게 '에게 문명' 입니다. 그리스 옆 에게 해의 수많은 섬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대체로 이 지역 사람들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해상무역으로 먹고 살았으며 그래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게 해 최남단의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스(미노아) 문명이 대표적입니다.


[미노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


 - 근대 이후에야 재발견되었고,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2700년경부터 발전하여 천 년 이상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1500년경 미노스 문명은 갑자기 쇠퇴 기미를 보이더니, 불과 수십여 년만에 그리스 본토의 세력에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잘 나가던 해양문명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배경에는, 에게 해 한가운데 있던 한 화산섬이 있었습니다.


 - 지금은 포카리스웨트 절벽 위 하얀 집으로 유명한 관광지 산토리니 섬이 에게 해에 있습니다. 지금이야 평화로운 관광지로만 보이는 섬이지만, 알고보면 이 섬은 화산섬이며 심지어 인류 역사 이래 손꼽히는 대폭발을 일으킨 곳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 하나의 커다란 화산섬이었던 산토리니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발생하였고, 땅 속에 있던 마그마와 가스, 화산재가 뿜어져나오자 그 빈 자리가 그대로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이것을 '칼데라'라고 합니다).


[그 결과 산토리니는 이렇게 여러 개의 섬으로 토막나 버립니다. 섬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바다가 대폭발의 흔적]


 - 일단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진을 동반하게 마련이니, 산토리니 섬의 폭발로 생긴 지진이 크레타 섬을 강타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무너진 분화구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면서 대규모의 해일이 발생, 크레타 섬의 해안을 직격해 버립니다! 당시 지중해 최강이었던 크레타의 해군이 이 해일 한 방에 싸그리 날아가 버렸고, 해안의 도시와 마을에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화산폭발로 날아간 많은 양의 화산재는 공기 중에 떠다니며 햇빛을 차단하고, 그 결과 지구의 평균 기온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실제로 산토리니 폭발과 맞먹는 규모로 추정되는 1815년 탐보라 화산의 폭발에서는, 화산재 때문에 기온이 떨어져 이후 몇 년간 '여름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기후 변화가 발생한 적도 있지요. 산토리니 폭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가뜩이나 큰 피해를 입은 미노스 문명에 마지막 일격을 날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이후 미노스 문명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고, 수십 년간 사회 전반이 혼란에 빠지는 양상을 보이다가 그리스 본토 세력의 침공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해군의 위용을 믿고 수도에 성벽조차 쌓지 않았을 정도라니, 해군이 사라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죠. 이후 크레타 섬은 다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와 터키의 입구에 있다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만 역사에 몇 번 반짝 등장하는 처지가 됩니다.



3. 1℃의 역사 : 기온 변화는 문명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 약 1만여 년 전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빙하기가 끝난 이후로도, 지구의 평균 기온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그 변화라는 게 대략 1~2℃ 미만의 작은 변화였다고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각 지역의 식생이나 서식하는 동물들, 나아가서는 인류문명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쳐 왔지요.


 - 고대 문명이 번성하던 2000~3000년 전쯤에는 전반적으로 평균기온이 지금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온이 높으면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고, 당연히 인류는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문명이 발전하죠.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딴 짓(?)을 하고 싶게 마련이거든요. 이를테면 중국의 황하 유역은 당시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진 온대(내지는 아열대) 기후였고, 황하 근처에서까지 코끼리와 코뿔소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국 상나라 시대의 코끼리 모양 유물. 코끼리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 모양을 디테일하게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


 - 물론 그동안에도 기온은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평균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 대략 3~4세기 무렵부터입니다. 이는 농업생산력의 저하를 유발했고, 당시 지구의 양대 문명(로마, 중국)은 약속이나 한 듯이 혼란기에 빠지게 되죠.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당시 알려진 세계의 양쪽 끝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온도 변화에 따른 세계적인 변화 요소를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 이후 수백 년간의 암흑기(임과 동시에 평균기온이 낮았던 시기)를 거쳐 9~10세기 무렵에는 평균기온이 상승합니다. 그리고 12세기 무렵부터 다시 평균기온이 떨어지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전 세계에 흑사병+몽골제국 콤보의 시대로 기억됩니다. 이후 잠깐의 조정기를 거쳐(하필 이 때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16세기부터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소빙하기'가 도래합니다(넓게 봐서 12세기부터를 소빙하기로 보는 경우도 있음).


[3000년간 지구의 평균기온 변화 양상] (출처)


 - 소빙하기는 비교적 근래의 일이기도 하고, 비교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 서쪽에서는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가 끝장나고 대규모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지기 시작하며, 흑사병은 여전히 잊을 만하면 창궐하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형성됩니다. 동쪽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섰으며, 한가운데서는 아랍 종족의 국가가 북쪽 이민족의 국가인 오스만 튀르크로 완전히 대체됩니다.


 -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문명의 변화는 (어쩌다보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상으로 벌어졌고, 거기에 기온 변화가 상당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최근에도 (다분히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급격한 기온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류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황하 문명의 마지막 유산, 황사경보


 - 늦겨울~늦봄 사이에 블로거는 황사(내지는 미세먼지)로 인해 인생이 고난에 빠집니다.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 먼지가 많은 환경이란 아주 최악이거든요. 도대체 저놈의 황사는 어디서부터, 왜 날아드는 걸까요? 과학적인 요인을 따지기 이전에, 동아시아의 황사는 수천 년 전부터 열심히 살아온 중국 문명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 현재 중국의 산시(陝西)성과 간쑤성 동부 일대, 황하 중류가 휘돌아 흐르는 넓은 지역을 '황토고원'으로 칭합니다. 말 그대로 고운 황토가 엄청난 면적에 걸쳐 퍼져 있는 곳으로, 대체로 건조 기후에 속합니다. 지금 이곳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수천 년 전 이곳에 울창한 삼림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죠.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울창한 숲과 비옥한 황토지대, 황하의 물이 합쳐져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과거 숲이 우거져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 따라서 고대 중국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황하 중하류 일대였습니다. 상술했지만 기후가 지금보다 따뜻하고 황하 유역에 숲이 우거져 있던 고대에는, 황하 바로 아래까지 코끼리와 코뿔소가 살고 있었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러던 곳이 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은, 기후의 변화도 있겠지만 인류의 삼림 파괴가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황하 중류의 삼림 면적 변화. 3000여년 전 / 현재] (출처 : NHK 고대문명 다큐멘터리에서 캡처)


 - 삼림 파괴의 결과 이 지역은 점차 사막화되고, 대규모의 문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초기의 중심지였던 장안(現 시안)과 낙양(뤄양)은 예전의 영광을 잃고, 현재는 중국 전체에서도 낙후된 동네의 지역 중심지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삼림이 사라지면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고운 황토는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 숲이 황토를 잡아주지 못하게 되자, 흙과 모래는 바람이 불면 공기 중으로 쉽게 날아갔고 이는 공기의 흐름을 타고 수천㎞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황사'입니다. 황사는 일종의 퇴적작용을 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호흡기에 해를 끼치며 특히 현대에는 공장 매연의 유해성분이 섞이는데다 반도체 산업처럼 먼지에 민감한 분야가 늘어나면서 피해를 매우 키우고 있죠.


 - 여담으로, 황하 문명이 삼림을 파괴한 결과는 다른 쪽에서도 나타납니다. 황토가 강으로 쓸려들어가면서 황하는 우리가 아는 그 싯누런 흙탕물이 되었고, 강바닥에 흙이 계속 퇴적된 결과 황하는 주변 평야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천정천'이 되고 말았습니다(당연히 홍수에 아주 취약해집니다). 최근에는 수자원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아예 황하의 흐름이 중간중간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 자원문제+환경문제까지 유발하고 있다는군요.



1. 배경 : 전쟁의 장기화


 - 1937년 말 일본군의 대규모 상륙전으로 상하이가 함락되고 난징이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의 중국 국민정부는 긴급 회의를 열고 행정부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군사령부는 우한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도 나름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난징에는 탕셩즈가 남아 방어작전을 총괄하였지만 그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막판에 우한으로 도망쳐오고 말았습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앞의 글 참조)


 - 우한(우창, 한양, 한커우 시가 1927년 통합)은 양쯔강 중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자 군수산업의 중심지로,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중국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면서도 군사 부문은 우한에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3개월이면 충분하다던 호언장담이 잘못임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최대 요충지인 우한을 점령하면 중국에게 결정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커우 지역을 향하여 진격하는 일본군 전차부대]


 - 결국 1938년 4월 1일부로 일본은 본국과 식민지에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병력을 추가 편성하여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일본군은 40만 가까운 대병력을 우한 공략에 투입했고, 히로히토 덴노는 독가스의 사용을 허가하였습니다. 이런데도 히로히토가 전범이 아니라고? 결국 버티지 못한 중국군은 10월 17일 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철수했고, 10월 27일 우한의 세 지역은 모두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특이하게도 여기서는 일본군 특유의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데 실패하면서 일본군의 계획은 또다시 어긋났습니다. 1938년 11월 장제스는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징병령을 발동하고 각지 군벌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등 장기항전 태세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예상보다 훨씬 굳건하게 버티었고, 이 시점에서 일본은 완전히 수렁에 빠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2. 일본군의 무차별 폭격


 - 이미 전쟁을 중지하기에도 너무 멀리 가버린 일본은, 중국군과 중국 민중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먹여 전반적인 사기를 꺾고자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중국 임시수도인 충칭에 화력을 집중하였는데, 우한이 점령되기도 한참 전인 1938년 2월부터 이미 일본군 폭격기는 충칭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1939년 초까지 약 1년간은 별로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 충칭은 1년 내내 안개가 심하고, 특히 겨울에는 구름이 끼는 날이 많아 폭격기의 공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 봄 들어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서 충칭 시가지는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1939년 5월 3~4일에 걸쳐 일본군이 충칭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는데, 하필 이 날 월식이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힐 겸 월식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일본군의 폭탄을 몸으로 받아냈고, 사망자만 수천 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 충칭은 그 당시 이미 대도시이긴 했지만,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는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방어태세 역시 부실했습니다. 사람들은 폭격을 피하여 열악한 환경의 방공호로 대피했고 일부 시민은 난징에서처럼 외국 공사관으로 몰려들었는데, 영국 대사관은 무차별 폭격에 함께 휘말렸고 독일 대사관은 피난민에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아 수백 명이 몰려드는 인파에 깔려 압사하거나 폭격에 휘말려 타죽었습니다.


[일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충칭 시가지]


 - 일본군의 폭격은 대부분 민간시설과 민간인 거주구역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는 민간인들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전쟁 수행 의지를 감소시켜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군 폭격에 포함된 소이탄(인화성 물질을 잔뜩 포함하여, 화재를 일으켜 피해를 주는 형태의 폭탄)은 충칭 시가지 곳곳에 화재를 일으켜 막심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때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건물들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있었으므로......


 - 충칭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은 창사 일대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일본군이 독가스를 살포하는 등 발악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음에도(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대규모로 사용한 건 일본군이 사실상 유일) 결국 창사를 점령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육지에서의 진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와 함께 충칭을 향한 일본군 폭격기의 공습은 한층 더 격렬해졌습니다.


 - 1941년 6월 5일에는 충칭 대공습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또 하나의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날 5시간에 걸쳐 일본군 폭격기 24대가 공격을 벌였는데, 이를 피해 18제대터널(방공호)로 피신한 다수의 민간인은 터널 입구가 폐쇄된 이후 통풍이 되지 않으면서 대부분 산소부족으로 질식사하고 말았습니다(6·5 대터널 참변). 당시 희생자는 1200명, 최대 4000여 명에 달합니다.




3. 그래도 저항은 계속된다


 - 많은 사람들이 폭탄에 맞아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압사하고, 소이탄 화재에 타죽거나 질식사하였습니다. 이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250여 명의 부자들이 충칭 중국은행 지하실에 피신했다가 건물의 붕괴로 모두 압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옷과 소지품은 역시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생존자들이 가져다가 써야 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충칭 대공습을 상징하는 사진. 죽은 사람들의 옷은 생존자들이 벗겨 가져갔다.]


 -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폭격이 끝난 이후에는 식당들이 '공후반(공습 후 식사)'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재개했으며, 은행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많은 상점들에서는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기가 그려진 계란을 팔았는데, 여기에는 '도쿄 직송 계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 폭격이 시작되면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도시 내의 모든 차량이 징발되었는데, 이 중에는 최고 권력자 장제스의 개인 리무진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폭격과 누적되는 피해에도 중국 정부와 군은 점차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해갔고, 대공 방어체계와 방공호 확충이 이루어지며 희생자는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충칭 시의 인구는 다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모여든 충칭 시민]


 - 충칭에 대한 폭격은 1943년 8월 23일까지 약 5년여간 이어졌으며, 이는 단일 지역에 대한 최장기간 공습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 수는 11889명,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1만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거나 불타 사라졌습니다. 5년간 일본군의 공습은 218차례 이어졌고 연 9513대의 폭격기가 21593발 가량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4. 폭격 이후


 - 충칭 대공습은 소이탄이 대규모로 사용된 사실상 첫 사례로, 이미 소이탄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개발되어 있었지만 이것이 도시 공격에 특출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이 이 때 증명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교훈은 일본의 적국(敵國)도 똑같이 얻었고, 미국은 이 교훈을 바탕으로 1945년 일본의 도쿄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 난징 대학살 때만 해도 (심지어 자신들의 군함이 공격당했음에도) 일본에 대한 개입을 자제해온 미국은, 1939년 5월의 대폭격 이후 방침을 바꾸어 비행기 부품 수출금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제재에 들어갔습니다. 양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로를 가상적국으로 간주해 왔고, 일본은 미국의 경제제재가 점차 강력해지자 이를 핑계로 1941년 12월 하와이를 급습하며 태평양전쟁의 문을 활짝 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일본의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 유족의 시위. 충칭 고급인민법원 앞]


 - 당시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2004년부터 소송단을 꾸려 일본정부에 사죄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후 다른 지역의 폭격 피해자들도 합세하였습니다. 2015년 2월 도쿄지방법원은 "이 사건에서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당연하게도 원고의 소송을 기각하였습니다. 기사보기



1. 배경 : 일본군의 허난성 침입


 - 중일전쟁의 시작점인 베이핑(베이징)-톈진 방어선은 1937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부터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허난성 최북단 안양을 점령하며 허난성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북 방면 총사령관은 군벌 출신 펑위샹(1882-1948)이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병력은 40만 명에 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군벌들의 집합체인 오합지졸에 가까웠기 때문에 3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주력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허난성의 위치]


 - 한푸쥐(1890-1938), 쑹저위안(1885-1940) 등 휘하 군벌들이 잇따라 도망치는 등 졸전 끝에 산둥성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장제스는 펑위샹을 해임하고 한푸쥐 등 적전도주와 부정부패를 일삼은 군벌들을 싸그리 체포하여 처형하는 강수를 두어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황하 북쪽을 대부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선을 단절하기 위해, 간선철도의 교차지점인 정저우(허난성)와 쉬저우(장쑤성)를 다음 목표로 잡았습니다.


 - 일본군은 먼저 쉬저우로 진격하였지만, 쉬저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타이얼좡(산둥성 최남단)에서 1938년 3~4월에 걸쳐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고 후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타이얼좡 전투). 흐름을 꺾인 일본군은 이 쪽을 담당한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을 왕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1887-1990)로 교체하였고, 그의 지휘하에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 상하이 전투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장제스는 쉬저우 일대의 병력에 체계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고, 후퇴하는 중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 일본군의 작전은 지휘관들이 공적을 놓고 갈등하느라 협조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중국군이 철수한 쉬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1938년 5월 19일).


 - 한편 정저우 방면으로 진격한 일본군 제14사단은 정저우의 길목이자 과거 북송의 수도이기도 한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중국군에 포위당했고, 인근 제16사단의 지원을 받고서야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제14, 제16사단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카이펑을 다시 공격, 6월 6일 카이펑을 함락시켰습니다. 카이펑을 넘어 정저우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장제스는 인근의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수공(水攻)을 벌이기로 결정합니다.



2. 대재앙으로 번진 수공


 - 국민혁명군 제53군 1단은 정저우 인근 화위안커우(花園口)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는 작업을 벌여, 6월 9일 제방 일부를 터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황하는 천정천(주변 땅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천)이기 때문에, 뚫린 제방을 넘어선 강물은 걷잡을 수 없이 주변 평야지대로 쏟아집니다. 황하의 물살은 정저우에서 카이펑에 이르는 지역을 침수시켰고, 이 곳에 있던 일본군 제14, 제16사단은 차오르는 홍수에 그대로 휩쓸렸습니다.


[홍수에 휩쓸린 일본군 전차부대]


 - 장제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6월 10일 황하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불어난 물 때문에 제방 붕괴가 확대되면서,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양의 강물이 평야지대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허난성 동부는 물론이고 동남쪽의 안후이성, 장쑤성으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수천 km에 달하는 평야지대에서 넘치는 물을 막을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 중국은 애초에 작전지역인 화위안커우 인근 지역에만 홍수경보를 내리고, 나머지 지역에는 아무 경보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수많은 주민들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물벼락에 그대로 휩쓸려 죽어갔습니다. 이 홍수로 사망자만 최소 9만, 최대 89만 명이 발생하였으며 이재민은 12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은 남쪽으로 바뀌어, 회하와 양쯔강 하구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1947년 제방 복구와 함께 원상복귀).


 -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허난성은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피해복구는 꿈도 꾸지 못했고, 이는 4년 후 벌어지는 훨씬 더 큰 재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3. 대기근, 지옥도가 열리다


 - 전쟁과 홍수 피해가 누적되어 허난성 일대의 경지면적은 이전의 1/3 가까이로 줄어든 상태였지만, 전쟁과 부정부패, 행정력 미비라는 복합적인 문제가 피해복구를 계속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42년 봄부터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정도의 가뭄이 시작되고, 가뜩이나 피폐할대로 피폐한 이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 농민들은 봄과 여름 내내 하늘만 쳐다보았지만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빗방울 대신 가을 하늘을 채운 것은 다름아닌 메뚜기떼.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을 메뚜기떼가 죄다 쓸어가면서 허난성은 생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산나물과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산나물이 사라지자 나무껍질을 벗겨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곧 바닥을 드러냅니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가족]


 - 사람들은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찾기 시작했고, 기러기 똥이 절찬리에 식용으로 쓰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소화가 덜 된 곡식 종자가 있어 그나마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혹은 땅을 파서 관음토(일종의 백색토)를 파먹기도 했는데, 당장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당연히 열량도 없고 소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흙을 계속 먹는 사람들은 소화기에 장애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이런 참상 속에서 도대체 중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나름 20세기 중반인데, 중국 정부가 이 지역을 구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허난성 주민에 대한 지원을 가로막았습니다. 허난성 정부의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기 바빴고, 상부의 추궁을 피하고자 피해상황을 무시하거나 축소 보고하였습니다.


 - 쉬창(허창) 지역의 경우 5만여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고 성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이조차 축소 의혹이 있었음에도 성에서는 "왜 이렇게 많이 보고하였는가"를 이유로 보고서를 반려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마당에 제대로 된 구휼체계가 돌아갔을 턱이 없습니다. 당시 허난성 일대를 취재한 후 장제스를 만난 저널리스트 테오도르 화이트(1915-1986)가 허난성의 참상을 전했을 때, 장제스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 그나마 지원되는 부족한 식량마저도, 태반은 부패한 관료들이나 군벌의 손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인육(人肉)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길거리에 널린 시체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죽여서 그 고기를 뜯어먹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극도의 굶주림에 피폐해진 위장은 갑자기 들어오는 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게 인육을 뜯어먹은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급성 소화질환으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가뭄은 1943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사이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최대 300만 명에 달했습니다.



4. 결말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트라우마


 - 장제스와 중국 정부는 기근의 실태를 파악하고서도, 중일전쟁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한 보도통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정부의 선전 기사 사이에 허난성 재해의 실태를 짧게 보도한 충칭의 지역 신문 <대공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무기정간을 당한 사례가 있습니다(그리고 화이트는 이 기사를 목격한 후 허난성 취재를 시작했다고).


 - 자신들의 죽음을 외면한 정부와 군부에 대한 허난성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급기야 1944년 중탸오산 전투에서는 허난성의 농민들이 후퇴하는 중국군 5만 명을 습격하여 무장해제시키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당시 군사령관 탕언보(1900-1954)는 이들을 일제 앞잡이 혹은 반역자로 규정했지만, 그렇게까지 된 사연을 돌이켜보면......


 - 이러한 일련의 실정(失政)으로 장제스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최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사이익을 얻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비록 중일전쟁 발발 이후 힘을 합쳤다지만(제2차 국공합작) 실질적인 연계는 거의 되지 않았고,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동시에 농민들의 민심을 얻는 대민전략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수탈에 절망한 농민들은 앞다투어 공산당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민심을 완전히 잃은 국민당은 신식 무기를 들고도 공산당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제스는 민중을 외면한 대가를 '중국 대륙의 상실'로 뼈저리게 치렀던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이후 강력한 부정부패 처벌과 경제개발그리고 극악의 1인독재을 통하여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고자 하였지만, 그런다고 잃어버린 대륙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엎질러진 물.


 - 예전 수천년간 중국의 중심이었던 허난성 일대는, 중일전쟁 당시의 피해를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일전쟁기 덧씌워진 반역자의 이미지,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하는 허난 출신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겹쳐 중국 내에서는 허난 출신자들에 대한 심한 지역차별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현대 중국의 큰 사회문제 중 하나라고 합니다.



1. 배경 1 : 상하이 전투


 - 1937년 7월 일본군의 한 병사가 똥 싸느라 늦은 것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중일전쟁은, 8월 초까지만 해도 베이핑(베이징)-톈진 등 북동부 지역에 한정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호구이며 우리는 3개월 내에 중국 전체를 털어먹을 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에 빠져있던 일본군 지도부는, 중국의 수도를 직격할 심산으로 난징(당시 중국의 수도) 코 앞 상하이에 대규모로 상륙하였습니다(상하이 전투, 혹은 제2차 상하이 사변).


 - 하지만 중화민국 지도자 장제스는 상하이를 사수하고자 독일식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를 대규모로 상하이에 때려박았습니다. 또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륙을 시도한 우쑹 해변에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1878-1966)과 한스 폰 젝트(1866-1936) 등의 조언에 따라 건설한 강력한 방어시설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결사항전에 고전을 거듭했고, 중국 대륙을 정복하겠다던 3개월이 되도록 상하이 하나 점령 못하는 촌극을 연출합니다.


[상하이 전투에서 활약한 중국군 방어진지]


 - 결국 일본군은 교착상태를 끝장내고자 파견 병력을 3배(10만)으로 늘렸고, 이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화중-화남 지방의 거의 전병력(80만)을 상하이에 집결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좁은 공간에 쏟아부은 게 오히려 패착이 되어, 중국군은 10만을 훨씬 넘는 사상자를 냈고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장제스는 10월 26일 전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 중국군은 3개월간 일본군을 저지하고 큰 피해를 강요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방어라인은 무너졌고 독일식 정예병력도 절반 이상 날려먹는 등 방어력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상하이와 인접한 난징을 방어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별 의미도 없다고 판단한 중국 정부는 내륙의 충칭으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 이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끝까지 남아 난징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군사참의원장 탕셩즈(1889-1970)였습니다.



2. 배경 2 : 난징 전투와 적전도주


[탕셩즈]


 - 중국 정부는 11월 15일 충칭으로 피난하였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탕셩즈는 난징지구 사령관이 되어 남았습니다. 당시 난징은 정부와 함께 피난하려는 난징 시민들과,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도망쳐온 외부 주민들이 뒤엉켜 온통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하이에서의 고전으로 광기분기탱천한 일본군은 11월 들어 상하이와 난징 주변의 지역들을 공격하여 말 그대로 '싹쓸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나마 방어병력이 있는 난징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 11월 19일 쑤저우에서 학살이 발생하여 35만 인구가 5백 명으로 줄어드는 등, 이미 대학살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탕셩즈와 방어군은 일본군의 학살을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까지 지켜야 했지만, 정부가 피난하고 남은 것은 패잔병 수준의 15만 병력과 형편없이 저질인 지휘관들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탕셩즈는 방어병력을 난징 성(城)에 집중시키고 도시 밖으로 이어진 교량과 선박도 파괴하는 등, 고립을 자초하는 뻘짓을 벌였습니다.


 - 지나친 확전을 경계한 대본영의 명령까지 씹어먹은 일본군은 외곽의 방어라인을 쓸어버린 후 난징을 포위하고 방어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날렸는데, 탕셩즈는 이에 "ㅗ"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탕셩즈는 덜컥 겁을 먹었는지 장제스에게 전갈을 보내 후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장제스가 탕셩즈에게 "ㅗ"를 날려버렸습니다. ㅡㅡ;


 - 일본군의 최후통첩 기한인 12월 10일 오전이 지나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성곽을 방패삼아 싸우는 중국군은 10만 일본군의 공세를 이틀간 잘 막아냈지만, 12일 오후 일본군이 성문 한 곳을 폭파하는 데 성공하고 독가스까지 사용하면서 중국군을 무력화시켜 최후 방어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난입하는 일본군과 방어하는 중국군의 시가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과 함께 양쯔강을 건너 도망쳐 버렸습니다.


 - 사령관이 사라진 중국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15만 명 중 2만 명만 난징을 탈출,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일본군에 잡혀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13일 오전 4시 정부청사 함락을 끝으로 난징은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 그리고 난징 시내에 남겨진 50만 명 이상의 패잔병, 시민과 피난민들에게는, 지금부터가 본격 인세지옥(人世地獄)의 시작이었습니다.



3. 대학살과 '국제안전지대'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 그동안 광기와 살기를 풀파워로 충전한 일본군은 약 6주에 걸쳐 난징에서 피의 폭풍을 일으켰습니다(자세한 학살 내용은 다른 곳에도 많고 너무 잔인하니 이곳에는 가급적 올리지 않기로). 강간이나 총살은 기본이고, 사무라이 전통을 이어온 일본군답게(?) 그들은 전도(戰刀)로 민간인과 포로를 마구 베어제꼈는데 심지어 이를 스포츠 혹은 총검술 훈련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학살에 참여한 한 군인의 일기에는 "심심하던 차에 중국인을 죽여 무료함을 달랜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 당시 난징의 일본군, 아니 일본 전체가 얼마나 미친 상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100인 참수 경쟁이었는데, 두 명의 일본군 초급장교가 '누가 더 빨리 중국인의 목을 베는가'를 주제로 시합을 벌였고 언론은 이를 중계하여 신문으로 보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 죽이기로 시합을 벌인 놈들도 미친 놈들이거니와, 이를 자랑스럽게 자국 언론에 중계했다는 것으로 당시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미쳐돌아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신문기사. "100인 참수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 거기에 연장전]


 - 물론 당시 난징에는 외국인도 다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구역에 최대한 많은 중국인을 받아들여 학살의 희생자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노력의 중심에는 독일 나치 당원이자 지멘스 중국지부에서 근무하던 욘 라베(1882-1950)가 있었는데, 라베는 자신의 나치 당적(나치 독일은 당시 일본의 동맹이었으므로)을 내세워 자기 집과 그 일대 구역에서 중국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비록 효과적인 보호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백 명의 중국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 그를 따라 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기업인, 외교관들이 대사관, 학교 등지를 확보하고 많은 중국인들을 수용하였는데 이 구역을 '국제안전지대'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비무장인 외국인들이 일본군의 발광(發狂)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수시로 안전지대를 침범하여 강간과 살육을 자행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난징의 중국인에게는 불완전하나마 국제안전지대만이 살 길이었고, 약 20~30만 명의 중국인이 국제안전지대로 몰려들어 학살을 피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구원받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중국인은, 중국 정부 추산 30만여 명에 달합니다.



4. 뒷이야기


 - 당시 일본군은 중국인 학살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자국민을 싣고 양쯔강을 통해 철수하던 미국과 영국 소속 초계함들을 공격하여 한 척을 침몰시켜 버렸습니다(파나이 호 사건). 충칭으로 도망친 장제스는 이 사건으로 미국과 영국이 발끈하여 일본의 발목을 잡아주기를 기대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 두 나라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여 발을 빼버리고 말았습니다. ㅡㅡ;


 - 전쟁이 끝난 이후 1946~47년에 걸쳐 '난징 전범재판'이 열렸고, 학살의 중심에 있었던 제6사단의 사단장 타니 히사오(1882-1947), 100인 참수 경쟁의 두 주인공 무카이 도시아키(1912-1948)와 노다 츠요시(1912-1948) 등 다수의 전쟁범죄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무카이와 노다는 "그런 일 없었다"고 발뺌하였지만, 위의 신문기사가 증거로 제출되자 "이건 왜곡이다"라고 발악하면서 죽어갔다고.


 - 도망자 탕셩즈는 우한까지 달아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분노한 장제스에 의해 모든 직책과 권력을 빼앗겼고, 종전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국공내전 때 공산당으로 전향하여 후난 성 부주석을 역임하는 등 잘나갔으나,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어 홍위병에게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81세로 병사(病死)하였습니다.


 - 욘 라베는 학살 직후 히틀러에게 "학살을 멈출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동맹국을 건드리기 싫었던 히틀러와 나치 정부에게 무시당하고 오히려 비밀경찰에게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다만 학살의 증거자료를 보전하는 것은 허가받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지멘스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종전 후 나치 당적 때문에 체포당하였습니다. 비록 재판에서 무죄함을 입증받아 석방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재산을 날리고 건강까지 해친 라베에게 중국인들은 성금을 모아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하는군요.


 - 종전 후 이 사건에 대한 중국(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정부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피해배상 요구를 실질적으로 포기해 버립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총리에게 마오쩌둥 주석이 "우리가 승전국이니 피해배상 따위는 요구하지 않겠다"는 만행소리를 하는 바람에,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ㅡㅡ; 실제로 당시 난징에서는 격렬한 반대시위가 벌어졌고,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 중국 정부가 난징 대학살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마오쩌둥 사후의 일입니다. 난징 대학살 기념관이 1985년에야 건립되었을 정도. 최근 들어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일본 관계악화 등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2014년 1월에는 대학살 사건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하였고 이후 사건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여 2015년 10월 마침내 등재되기에 이릅니다. 일본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지만......


[난징 대학살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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