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dály Zoltán (1882-1967)

<Háry János> Suite



[코다이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이며, 음악학자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합니다. 바르토크와 함께 헝가리의 '진짜' 민속음악을 발굴하여 세계에 알렸으며, '코다이 교수법(Kodály method)'이라는 음악교육이론을 제창하여 음악교육에도 큰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는 1882년 헝가리 중부의 케치케메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철도노동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음악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모 모두 취미로 악기와 성악을 즐기는 음악애호가여서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코다이 역시 어릴 적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익혔습니다. 그는 중등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 처음으로 작곡을 시도했는데, 16세 때 학교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작곡한 서곡이 처음 세간에 알려지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18세 때 그는 부다페스트 대학에 입학하여 독일어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음악 또한 포기하지 않고 리스트 음악원에 동시 입학하여 한스 쾨슬러(1853-1926)를 사사하였습니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애호가였음에도 자신의 아들이 음악 전공자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작곡가는 남자가 할 만한 직업이 아니다"라고 ㅡㅡ; 코다이를 말렸고, 그는 일단 자신의 진로를 교사 쪽으로 결정했습니다. 1905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로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때마침 헝가리의 다른 대작곡가인 바르토크를 처음 만났는데, 바르토크는 이미 헝가리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를 거치며 브람스의 <헝가리 춤곡> 등 집시 음악이 헝가리 음악으로 세계에 알려져 진짜 헝가리 민속음악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민과 서민들의 음악들을 채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1906년 첫 결실인 <헝가리 민요집>을 출판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코다이는 「헝가리 민요의 운율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따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수십 년간 코다이와 바르토크는 헝가리의 수백 개 마을에서 수천 곡의 민요를 수집하여 진정한 '헝가리 음악'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후원하던 샹도르 엠마(1863-1958)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코다이와 결혼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헝가리가 잠시 공산화되자 코다이는 이에 협력하였지만, 이 정권이 얼마 뒤 무너지자 잠시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음악 관련 활동은 지속하여 1923년 <헝가리 시편가>를, 1926년에는 오페라 <하리 야노슈>를 완성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대표작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헝가리 민속음악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고, 음악교육 관련 활동도 지속하였습니다.


 1940년대 들어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나치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바르토크와 달리 코다이는 끝까지 헝가리에 남아 음악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종전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에는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음악교육 등에 남긴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 음악계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헝가리 국립음악원장, 음악가협회장, 과학기술원 명예회원을 역임하고, 헝가리 정부로부터 많은 훈장과 포상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58년 첫 아내 엠마가 사망하자 다음 해 58세 연하인 셔롤터 피첼리(1940-)와 재혼하였습니다. ㅡㅡ;


 말년에는 작곡가, 음악학자, 음악교육자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제창한 특유의 리듬 및 선율학습, 모국어처럼 어린이에게 친숙한 민요 선율을 바탕으로 한 음악교육 등 '코다이 교수법'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아 음악교육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권위와 명성의 정점에 오른 그는 1967년 사망하였고, 그의 두 번째 부인은 현재까지 생존하여 코다이의 음악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리 야노슈> 모음곡은 동명의 오페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리 야노슈'란 헝가리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 시골 마을에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허풍을 떨곤 했다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곡은 관현악의 '재채기'로 시작하는데 헝가리의 속설에 따르면 이야기를 하다가 듣는 사람이 크게 재채기를 하면 그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말이 있다는군요.




참고 : 

http://sound.or.kr/bbs/view.php?id=music3&no=872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vegalaxy1&logNo=60039228809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5071&logNo=120190904187

http://ihsnews.com/11125

한글 위키백과, 영문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Carl Philipp Stamitz (1745-1801)

Clarinet Concerto No. 3 in Bb



[카를 슈타미츠]


 카를 슈타미츠는 체코-독일계 작곡가로 고전파 초기에 활동한 소위 '만하임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 하나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타미츠(1717-1757)는 만하임 악파의 형성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며, 동생 안톤 슈타미츠(1750-1809?) 또한 작곡가 겸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만하임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통하여 처음 바이올린을 익혔습니다.


 아버지 사후에도 음악 수업을 이어간 슈타미츠는 1762년부터 만하임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1770년에는 파리로 이주하여(동생 안톤 또한 함께 이주한 것으로 보임) 유럽 전반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노아유 공작의 궁정 작곡가로 근무하였고 동시에 헤이그, 상트페테르부르크,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벌였습니다.


 1794~95년경 슈타미츠는 독일 중부의 도시인 예나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카펠마이스터와 대학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그는 경제적 곤란을 겪은 듯하고 자녀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 말년을 보냈습니다. 몇 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그의 서재에서 연금술에 관한 다수의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는군요. ㅡㅡ;


 슈타미츠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50편을 넘는 교향곡, 38편 이상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60여 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실내악곡도 다수 있습니다. 그의 협주곡은 바이올린, 비올라, 비올라 다 모레, 첼로, 클라리넷, 바셋 호른, 플루트, 바순 등 많은 악기를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클라리넷의 경우 명연주자인 요제프 비어(1744-1812)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하이든-모차르트 스타일의 고전적 양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Giuseppe Domenico Scarlatti (1685-1757)

Keyboard Sonata K.96 <La Chasse>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738년]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겸 건반 연주자로, 바흐, 헨델 등과 함께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수놓은 작곡가입니다. 그의 아버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 역시 당대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하나로 주로 오페라와 칸타타 등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바 있습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는 음악을 매우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랐으며, 초기의 음악 수업 또한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도 가에타노 그레코(1657?-1728?),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661-1727) 등의 음악가들이 그를 가르쳤습니다.


 스카를라티는 1701년 나폴리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2년 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페라 작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베네치아로 보냈는데 이후 1709년 무렵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해에 그는 로마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폴란드 여왕 마리 카시미르(1641-1716)의 전속 음악가가 되어 3년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왕의 소극장에서 공연할 목적으로 만든 몇 편의 오페라 등 작품들이 알려지며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1715년에는 교황청 줄리아 성가대의 악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1719년 그는 로마를 떠나 런던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의 오페라 <나르시스>를 상연하였습니다. 얼마 뒤에는 포르투갈로 거처를 옮겨 궁정 음악가로 임명되었는데 왕녀 마리아 바르바라(1711-1758)의 하프시코드 교사 일도 병행하였습니다. 계속 포르투갈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727~28년 사이에는 잠시 로마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1729년 바르바라가 스페인 왕자(후에 왕이 되는) 페르난도 6세(1713-1759)와 혼인하면서 바르바라를 따라 사은품 1+1 스페인으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스카를라티는 세비야를 거쳐 마드리드에 정착하였고, 여기서 바르바라를 위하여 수많은(수백 곡이나 되는!) 건반 소나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은 멀찍이 런던에서 출판되어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페르난도 6세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에 즉위하자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국왕 부부의 지원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6세 부부는 때마침 전설적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1705-1782)의 후원자이기도 해서 그는 파리넬리와도 교류하며 그를 위한 성악곡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곡 뿐만 아니라 건반(특히 하프시코드) 연주자로도 당대를 수놓은 거장이었는데, 한번은 동년배 음악가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건반 연주 대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대결에서 하프시코드 연주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 연주는 헨델이 승리하였고 두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친한 사이로 지냈다고 합니다. 헨델은 자신의 작품에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의 주제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사례, 헨델 합주 협주곡 Op.6 No.1의 마지막 악장 - 스카를라티 건반 소나타 K.2).


 스카를라티의 작품은 오페라 등 다른 장르도 많이 있지만, 역시 그를 대표할만한 것은 수백 곡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들입니다. 명연주자의 작품답게 화려한 기교를 세련되게 담고 있으며, 고향 이탈리아 뿐 아니라 말년을 보낸 스페인의 음악 스타일이 녹아있는 등 대단히 풍부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근대 이전의 음악가답게(?) 그의 작품은 양이 방대하고 소실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은 등 목록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데, 현재는 건반 소나타에 한하여 대체로 하프시코드 연주자 겸 음악학자인 랄프 커크패트릭(1911-1984)가 총 555개의 목록으로 정리한 번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Sir Michael Kemp Tippett (1905-1998)

Symphony No.3 Part.2




 마이클 티펫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로, 벤자민 브리튼(1913-1976)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의 집안은 영국 서남부의 콘월 출신이고, 할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아버지는 성공하여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결혼 후 런던 근교에 정착하였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둘째가 바로 마이클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그의 가족은 동부 서포크 주의 웨더덴으로 이사하였는데, 티펫은 이곳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재능은 그 때부터 있었는지 어린 나이에도 나름 즉흥연주 같은 것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그는 남부 스와니지에 있는 기숙학교에 진학하고, 1918년에는 에딘버러의 명문학교인 페테스 스쿨에 진학하여 다른 과목들과 함께 파이프 오르간 등의 음악교육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는데 주변 학생들의 괴롭힘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친구 남학생과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부모는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링컨셔의 스탬포드 스쿨로 전학하여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득이 되었는데, 학문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스탬퍼드 스쿨에서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학업에 매진하면서도 그는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조금씩 음악인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티펫은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기대하는 부모와 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고, 그 무렵 무신론 옹호 등 반항적인 활동으로 학교와 충돌한 끝에 결국 스탬퍼드 스쿨도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티펫은 동네 교회의 음악가들 등을 통하여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자신의 가능성과 의지를 인정한 아버지가 그를 지원하면서 왕립음악학교에 정식으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작곡과 지휘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고, 아마추어 합창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 경력도 착실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1928년 학위 시험을 통과하여 학사 학위를 딴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옥스테드에 정착한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계를 위해 작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때마침 그곳에는 시인이자 극작가인 크리스토퍼 프라이(1907-2005)가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훗날 공동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옥스테드 합창단과 함께 헨델의 <메시야>를 지휘하였는데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원전 연주'를 선보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32년에는 인근 림스필드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이 때의 정치적 교류를 바탕으로 그는 좌파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뒤 그는 런던 카운티 정부가 후원하여 백수실직한 음악가들을 모아 설립한 사우스 런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위촉됩니다. 당시 그는 런던 근교의 광산을 돌며 노동자를 위한 음악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티펫은 1935년 영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감명받아 트로츠키주의자가 된 그는 스탈린주의를 지지하던 공산당과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 또다시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의 혼란상,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관한 정체성 혼란 등(그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분명치 않은데, 한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의 문제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심리 치료를 받았고,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를 배경으로 한 오라토리오 <우리 시대의 어린이>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지자 그가 재직하던 몰리 칼리지가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사회는 난장판이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 후에 3개월 징역을 선고받습니다(이후 2개월간 복역하고 어찌어찌 출소했다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여 작곡가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을 오가며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음악에 대한 많은 경험을 얻었고 그의 음악에 재즈와 블루스 등 미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BBC에서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고, 평화주의자 단체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사회정치적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쌓은 업적을 인정받아 티펫은 1966년 기사 작위를 받고 Sir 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병역거부까지 한 사람에게 선선히 작위를 내리다니 한국적 정서에서는 신기하긴 하지만 이후 1970년대를 지나며 그는 시력이 크게 악화되는 등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는 런던 음악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1998년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음악적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티펫은 처음에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 작곡을 배웠고, 따라서 초기 작품은 비교적 보수적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대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대담한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교향곡 3번은 1972년 완성되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블루스 요소가 적극적으로 들어가 있으며 특히 2부에는 곳곳에 베토벤 교향곡 <합창>의 부분들이 패러디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Fanny Mendelssohn-Bartholdy / Fanny Hensel (1805-1847)

Notturno in g



[파니 멘델스존. 1842년]


 파니 멘델스존(결혼 후에는 파니 헨셀)은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인 또한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음악적 활동도 꽤 활발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다만 보수적인 그의 아버지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음악가로 정식 데뷔를 하지 못하고, 평생을 아마추어로 만족해야 했던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멘델스존은 1805년 태어났고, 부유한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동생과 함께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생 펠릭스의 재능도 물론 대단했지만, 파니 역시 12세 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마스터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은 동생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동생처럼 그 또한 어린 나이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하였고, 많은 피아노 관련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19세기 초 유럽에서 살아간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는 게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펠릭스가 음악가로 활동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파니의 경우에는 연주활동은 물론 자작곡을 출판하는 것조차 못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파니에게는 그저 장식용일 뿐이다" 라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ㅡㅡ;


 결국 멘델스존은 이러한 부조리에 저항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타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음악가로 정식 데뷔하는 것을 포기했고, 음악을 아예 놓지는 않았지만 아마추어 음악가로 활동하며 동생의 음악 활동을 돕는 역할에 그쳤습니다. 1829년에는 화가로 활동하던 빌헬름 헨셀(1794-1861)과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동생과 남편만큼은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비공식적으로나마 그가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습니다. 특히 동생 펠릭스와는 음악적, 인간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펠릭스는 "나보다 누나의 음악적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도 언급하였습니다. 펠릭스는 파니의 몇몇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도용이라거나 작품을 훔쳤다거나 한 건 아니고, 자기 이름을 빌려 누이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것).


 정식 데뷔를 하지 못했을 뿐 그는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460편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이름으로 조금씩 정식 데뷔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1838년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생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한 것이 알려져 있고, 1846년에는 몇몇 자작곡을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Op. 1이 됩니다.


 이제 정말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세상에 선보일 찰나, 1847년 그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던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펠릭스는 며칠 뒤에야 누이의 부고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장례식이 끝난 이후였고, 충격에 과로가 겹쳐 몇 달 뒤 동일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한 비슷한 이유로 사망한 것을 볼 때 가족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헨셀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초기 낭만파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동생처럼 다수의 <무언가(無言歌)>도 작곡하였습니다(애초에 무언가 자체가 파니와 펠릭스의 음악적 교감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특히 피아노 쪽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 부분에서는 동생 펠릭스보다도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녹턴은 1838년 작곡되었습니다.



 

Louis Moreau Gottschalk (1829-1869)

<Souvenir de Porto Rico>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


 - 고트샬크는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미국 출신으로는 거의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올리언스에서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영국 출신의 유대인 기업가였고, 어머니는 이 지역 출신 크리올(아메리카에서 태어나 자란 스페인계 백인)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뉴올리언스는 다양한 음악적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고, 고트샬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특출난 재능을 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0년 11세 때 뉴올리언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고트샬크는 2년 후 유럽으로 유학하여 파리음악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그의 국적을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요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미국은 문화적으로는 유럽에게 개무시를 당했다고). 그래도 여기서 그는 베를리오즈에게 음악을 배우고 쇼팽, 리스트, 알캉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 실제로 그는 위의 거장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례로 쇼팽은 그의 재능을 두고 "피아노의 왕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는군요.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는 1853년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신대륙을 대표하는 피아노 연주자로 전 대륙을 떠돌며 활동하였습니다.


 - 그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내내 떠돌이로 점철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865년에는 오클랜드 여성신학교의 학생과 스캔들을 내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리는 등 사생활도 썩 깔끔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을 떠난 고트샬크는 주로 중남미 쪽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때 중남미 특유의 음악 경향을 받아들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 그렇게 떠돌이 인생을 살던 고트샬크는 1869년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도중 황열병에 감염되고, 얼마 뒤 사망하였는데 키니네(퀴닌) 과다 복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추억>은 1857년 작곡되었으며, 그가 카리브 해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시기에 들은 음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Dieterich Buxtehude (1637?-1707)

Passacaglia in d minor, BuxWV 161



[비올을 연주하는 북스테후데. 생전의 그를 그린 유일한 그림]


 - 북스테후데는 17세기 북부 독일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특히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의 초년에 대하여는 기록이 부족한데(그래서 출생년도가 불분명) 일단 출생지는 스웨덴(당시에는 덴마크령)의 헬싱보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교회 오르간 연주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오르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헬싱보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던 북스테후데는 1668년 뤼베크로 이주하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는 당시 크고 아름다운 대형 오르간과 소형 오르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츠 툰더(1614-1667)의 후임자로 부임한 그는 툰더 시절에 시작된 '저녁 음악회(Abendmusik)'를 발전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오르간 연주자로도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 그런데 이 자리는 한 가지 관습이 있었으니 전임자의 딸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ㅡㅡ; 북스테후데 역시 부임 이후 툰더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7명의 딸을 낳았다니 금슬은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후 북스테후데는 남은 평생을 뤼베크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많은 제자를 두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유명 음악가들과도 교류하였는데 그 중에는 요한 파헬벨(1653-1706, 카논 변주곡의 원작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 수십 년이 지나 그가 노년이 되자 후임자 선정이 이슈가 되었는데, 이 무렵 헨델(마테존과 함께)과 바흐가 각각 1703년과 1705년에 그를 방문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특히 바흐는 자신이 일하던 아른슈타트의 교회에서 4주간 휴가를 얻어 400km나 떨어진 뤼베크로 왔는데, 북스테후데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복귀를 늦추고 4달 동안이나 머무르며 그와 교류하였습니다.


 - 북스테후데는 헨델과 바흐의 재능을 알아봤는지 후임자 자리와 함께 자신의 큰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는데, 큰딸을 본 두 사람은 하나같이 제안을 거절하고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ㅡㅡ; 음...... 결국 그는 큰딸의 혼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얼마 뒤 요한 쉬페르데커(1679-1732)가 큰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 당시의 음악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북스테후데 역시 다양한 장르에 수많은 곡을 썼는데,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300여 곡 정도가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250곡 정도입니다. 그나마 후대의 작곡가들(바흐 등)이 그의 작품의 필사본을 많이 만들어 놓아서 이 정도라도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 음악이며 초기 바로크에 가까운 간결한 형식이 특징입니다. 파사칼리아 d단조는 그가 쓴 유일한 파사칼리아입니다.




Alexander Nikolayevich Scriabin,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Скря́бин (1872-1915)

Symphonic Poem(Symphony No. 4) <The Poem of Ecstasy> Op. 54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스크랴빈은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입니다. 어머니 또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스크랴빈을 낳고 얼마 뒤 사망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와 숙모에게 양육되었습니다. 숙모 또한 아마추어 연주자였으며 그는 숙모를 통해 음악을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1882년 10대에 접어든 스크랴빈은 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여 1889년까지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몸이 작고 약했기 때문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 일단 유년학교 시절에도 스크랴빈은 음악교육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피아노 연주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원 연주회에 참여할 정도였다는군요. 결국 그는 군사유년학교를 그만두고 1888년 음악원에 정식 입학하여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 바실리 사포노프(1852-1918), 안톤 알렌스키(1861-1906)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 스크랴빈은 피아노 연주자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음악원 시절 라이벌인 요제프 레빈(1874-1944)을 의식한 나머지 과도한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합니다(다행히 회복됨). 1892년 피아노과 졸업 학위를 딴 그는 작곡과 학위도 따려고 했지만 작곡 스승인 알렌스키와 작품 스타일 관련 문제로 갈등하였고 결국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하게 됩니다.


 - 1894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였고, 얼마 뒤 음악 관련 기획자인 미트로판 벨랴예프(1836-1903)을 만나 그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돌며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897년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였고,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 다시 정착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습니다.


 -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스크랴빈은 1904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위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는데, 하필 이 때 타티아나 슐뢰저라는 사람과 바람이 나서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아내와는 이혼하고 <법열의 시> 뉴욕 초연이 취소되는 등의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파리와 브뤼셀을 오가며 작곡 활동에 전념하였고, 19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쇼팽 등의 낭만파 경향을 이어받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급속히 변화하여, 다분히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후기 음악은 불협화음을 과감히 활용하는 등 아주 몽환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후년에는 음악과 색채의 결합을 시도하여 1910년 교향곡 5번 <프로메테우스> 초연 때는 아예 '색광(色光) 피아노'라는 특수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던 스크랴빈은, 1915년 어느 날 윗입술에 생긴 작은 종기(혹은 뾰루지)를 잘못 건드린 것이 세균에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번져 ㅡㅡ;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법열의 시>는 1907~1908년 사이 작곡되었고, 간혹 교향곡(4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체로 그의 작품이 신비주의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작곡가는 같은 제목으로 신비주의적 내용의 긴 시를 쓰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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