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ar Antonovich Cui (1835-1918)

<Orientale> for Violin and Piano Op.50 No.9


 - 큐이(혹은 퀴)는 '작곡가'로서는 5인조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생전에는 주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5인조의 활동을 옹호한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또한 그는 보로딘과 함께 자신의 본업을 끝까지 고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큐이는 1835년 비르노(現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망명한 프랑스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 어려서부터 주로 쇼팽 쪽에 흥미를 가져, 폴란드 작곡가인 스타니스와프 모뉴슈코(1819-1872)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잇기 위해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에 입학, 직업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1857년 졸업 후에는 모교 교수로 채용되어 수십 년간 재직하였는데, 여기서 니콜라이 2세(1868-1918)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를 교육하였습니다.


 - 18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큐이는 발라키레프와 만났고, 이때부터 그는 군인으로서의 삶과 함께 음악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둘의 만남은 '러시아 5인조'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1864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도모스티>에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글을 남겼고, 이후로 그의 음악적 활동은 주로 음악평론 쪽으로 많이 알려지게 됩니다.


 - 다만 큐이는 본업과 음악평론으로 바쁜 와중에도 꽤 많은 작품을 작곡한 다작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주로 가곡과 실내악 쪽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오페라나 관현악곡도 다수 썼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은 (특히 대편성의 관현악에 있어서) 5인조의 다른 인물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으며 5인조 중에서는 민족적 색채도 가장 약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사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으며 <오리엔탈> 등의 몇몇 소품들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큐이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군인(공병)이었고, 특히 축성법(築城法)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의 관련 연구는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1878)에서 효용성이 입증되었고, 큐이는 이러한 여러 업적을 바탕으로 1906년에는 중장까지 진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음악 관련 활동은 꾸준히 이어갔는데, 1897년에는 신진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교향곡 1번에 대혹평을 날려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으로 3년간이나 작곡을 중단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ㅡㅡ;


 - 큐이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힘이 떨어지며, 쇼팽이나 리스트 시절의 실내음악에 머물러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이미 당대로부터)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현악곡이나 오페라는 별로 볼 것이 없으며,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소품이나 실내악에서는 건질 만한 작품이 좀 있다고 평가되며, <오리엔탈>을 비롯한 몇몇 작품이 그나마 알려져 있습니다.




Carl Czerny (1791-1857)

<30 Etudes> Op.849


 - 체르니 교본 2단계. 다만 체르니가 모든 연습곡을 의식적으로 순서대로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작곡 순서는 30번이 가장 마지막입니다. 체르니 100번까지를 첫 번째 단계(물론 100번 역시 최후반부로 가면 결코 연주하기 쉽지는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30번은 두 번째 단계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 때쯤 하농 교본의 중반부, 바흐 인벤션이나 모차르트의 쉬운 소나타들을 같이 들어가게 됩니다. 블로거는 어렸을 적 진도를 야매로 빼느라 30번 끝날 때가지 소나티네를 못 끝냈지만


 - 체르니 30번을 전후해서 피아노 교습의 첫 번째 고비가 찾아오는데, 본격적으로 난이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피아노에 흥미와 소질이 없는 학생은 여기서 대부분 피아노를 포기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피아노를 시작하면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은 이상 30번 끝날 때쯤엔 5~6학년이 되기 때문에, 중학교 입학하면서(공부를 시켜야 하니까) 피아노를 그만두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Carl Czerny (1791-1857)

<100 Progressive Studies> Op.139


 -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 중 하나로, 수많은 작품(1000곡 이상)을 쓴 다작 작곡가이나 후대에 주로 기억되는 것은 피아노를 위한 일련의 교본들입니다. 실제로 체르니는 연주자, 작곡가만큼이나 피아노 교육자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그 유명한 프란츠 리스트도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후 대대로 이어져 19~20세기 내내 수많은 명 피아니스트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 체르니의 피아노 교본은 각각 표제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교본에 포함된 곡의 개수로 명명되는데, 쉬운 것부터 순서대로 100번(Op.139) → 30번(Op.849) →40번(Op.299) →50번(Op.740)으로 이어집니다. 이 연습곡들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피아노 교본으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19세기 중반 이후 발전된 피아노 테크닉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최근에는 50번과 같은 어려운 연습곡을 생략하고 바로 낭만파 연습곡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 체르니 100번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간추린' 체르니 100번>과 같은 형태로 출간됩니다. 100개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순서상으로는 바이엘을 마스터한 이후 하농과 함께 배우게 됩니다.





1~20번



충격과 공포의 60번


Charles-Louis Hanon (1819-1900)

<The Virtuoso Pianist in 60 Exercises>


 - 샤를-루이 아농은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이자 교육자로, 후대에는 거의 음악 교육자로서의 업적이 남아 있습니다. 19세기에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음악 훈련에서도 과학적 접근이 시도되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다섯 손가락 훈련(Five-fingers exercise)'입니다. 아농이 쓴 <명피아니스트가 되는 60 연습곡>은 이 개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대표적인 교본입니다.


 - 한국에서 흔히 <하농 60번>으로 알려진 이 교본은 1873년 출간되었으며, 출간과 함께 수많은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이 교본은 피아노 연주의 기술적인 측면(손가락의 터치력, 타건(打鍵)의 정확성, 손목과 손가락의 유연성, 민첩성 등)을 기르는 데 더없이 좋은 교본이었기 때문에 많은 음악가와 교육자는 교본의 등장을 반겼으며, 1878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출품하여 은상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 하지만 이 교본에 대한 비판도 19세기 이래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이 교본이 음악성을 무시한, 지나치게 기계적인 연습을 강제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잘못되었을 경우 오히려 잘못된 습관을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계적 연습만을 지나치게 반복하면 손목 부상 등 신체에 무리가 갈 위험이 크고, 연주자의 흥미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만한 문제제기입니다.


 - 이렇다보니 전문 연주자 사이에서도 교본에 대한 평가는 극을 달립니다. 매일같이 교본의 1번~60번까지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는가 하면, 교본 자체를 쓰레기 취급하고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있는 것. 어쨌든 세계의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애증의 존재인 것은 맞는 듯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에 교본 1번의 음형을 살짝 집어넣었는데, 이 곡의 초연을 자신의 아들(막심 쇼스타코비치, 1938-)이 맡았기 때문에 아들 놀려먹으려고 넣은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 한국에서는 <하농>이나 <하논>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며(실제로 아농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이름 첫 글자 h가 묵음), 일반적으로 피아노학원에서는 바이엘 교본을 뗀 학생에게 체르니 100번과 함께 주어지는 교본이기도 합니다. Welcome to the hellgate





Ferdinand Beyer (1803-1863)
<Vorschule im Klavierspiel> Op.101

 - 한국의 대부분 피아노학원에서 처음 펴드는 책은 대부분(아마 거의 98%) 다양한 '바이엘 교본'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엘 교본은 독일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가 작곡한 <Vorschule im Klavierspiel(번역기에 의하면 '피아노 연주 유치원')>을 기초로 합니다. 바이어는 다른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고 생전에는 순수하게 예술적 활동으로도 유명한 음악가였지만, 후세에는 대부분 피아노 교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비록 150년 이상 되어 그동안의 연주 스킬 발전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있지만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웃기게도 바이어의 고향 독일에서는 이 교본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군요. ㅡㅡ; 한국에 전해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거쳐서 처음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순수하게 한국에서 출판된 가장 오래된 책은 1954년 국민음악연구회가 출간한 <바이엘 피아노 교본>입니다. 이후 한국에서 출간된 다양한 바이엘 교본은 대부분 바이어의 원본을 기초로 일부 편집을 가한 버전입니다.





John Field (1782-1837)
Nocturne No.2 in c H25


 - '녹턴(Nocturne)'이라는 단어는 '밤의 기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Noturnus'에서 유래하였는데, 중세부터 쓰여 왔으며 당시에는 예배 용어로 쓰였습니다. 이후 18세기에 'Notturno'라는 명칭으로, 주로 저녁이나 밤에 연주되는 연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녹턴은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밤의 고즈넉하고 때로는 고독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주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악곡의 장르가 되었는데, 대중에게는 쇼팽의 녹턴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녹턴'이라는 장르를 창시한 인물은 존 필드입니다.


 - 필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음악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얼마 뒤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어릴 적에 이미 재능을 보여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에게 음악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재능은 대단해서 12세 때 이미 웨일스 공(영국의 왕세자) 주최의 음악회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며, 20세 때는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클레멘티와 함께 전 유럽에 순회 공연을 떠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된 순회 공연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끝났는데, 여기서 필드는 스승과 헤어져 그대로 러시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드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함께 교육 활동을 병행하였는데,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 중 한 명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최초의 녹턴이 만들어졌고, 필드는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 러시아 내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기반으로 모스크바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821년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주하였습니다. 이 무렵 필드는 상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 결과 보드카 알코올 중독이 찾아왔고 자연히 건강도 악화되면서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1820년대 후반에는 직장암까지 발병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 차원에서 오랜만에 서유럽으로 떠났습니다.


 - 필드는 요양차 서유럽에 와서 겸사겸사 음악 활동도 재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멘델스존 등의 음악가들과도 만나 교류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당시 이미 쇼팽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자신의 첫 녹턴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드와 쇼팽을 비교하기도 했고, 쇼팽이 필드의 제자 아니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습니다(음악을 들으면 알겠지만 둘의 스타일은 꽤 다름). 쇼팽은 필드의 음악에 관심은 있었지만, 썩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는군요.


 - 서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수술을 받는 등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필드의 건강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폴리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러시아에 있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18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필드는 마지막 몇몇 작품들을 작곡하고 마지막 음악회를 수행한 후, 1837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피아니스트답게 작품 중 많은 수는 피아노곡이며, 그 중에서도 자신이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 녹턴이 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필드의 음악은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간결한 테크닉과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며, '노래'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의 녹턴은 18곡 정도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녹턴으로 보기 애매한 작품이나 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도 있어 작품 수는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리스트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1859년 출판된 악보에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Kaikhosru Shapurji Sorabji (1892-1988)

<Opus Clavicembalisticum>





 카이코스루 소랍지는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런던 근교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도계로 뭄바이 파르시(조로아스터교도 공동체)의 후예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 시칠리아인으로 오페라 가수 출신입니다. 그의 본명은 '레온 더들리 소랍지'였지만 후에 개명하였는데, 자신이 파르시의 후예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소랍지가 음악을 배우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소랍지의 어머니가 음악을 그만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소랍지는 어머니에 의해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청소년기까지 주로 독학과 개인교습으로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인물은 작곡가 겸 음악평론가 피터 월록(1894-1930)으로, 그와의 친교를 통해 소랍지는 작곡과 음악평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페루치오 부조니(1866-1924)의 도움으로 음악계에 데뷔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소랍지의 음악세계에 영향을 준 것은 쇤베르크, 스크랴빈, 말러, 드뷔시 등 시대 전환기에 등장한 작곡가들의 독특한 음악, 그리고 자신의 출신에서 비롯한 인도 음악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점차 '난해하고 길며 어려운' 성향을 띠게 되었는데, 이를 상징하는 작품이 바로 1930년에 완성한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입니다. 이 작품은 총 12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곡 연주에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물론 이후의 작품 중에는 연주 시간이 훨씬 더 걸리는 것들도 있습니다. ㅡㅡ;


 곡이 연주하기 너무 어려운데다 소랍지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이 생겼고, 결국 소랍지는 타인이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수십 년간이나 금지하고 악보 출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1951년에는 런던을 떠나 이주하였고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였습니다. 소랍지는 자신의 작품을 녹음하는 것도 매우 싫어했는데, 그나마 주변 사람들의 제안으로 간간이 녹음이나 보존 작업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금령(禁令)은 1970년대 중반 마이클 하버만(1950-)과 욘티 솔로몬(1937-2008)에게 자기 작품의 연주를 허용하면서비로소 풀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1982년에는 존 오그돈(1937-1989)이 <오푸스 클라비쳄발리스티쿰>을 런던에서 공개 연주한 사례가 있습니다. 90세를 넘어서까지 건강을 잃지 않았고, 1988년 사망하였습니다.


 소랍지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연주 난이도가 높고 연주 기법도 상당히 독특(혹은 이상)한 것이 많은데다 대체로 연주 시간도 장난 아니게 길어서 연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의 사후에는 봉인 해제 많은 피아니스트가 도전하지만, 일단 정상급 기교에 체력을 겸비하지 않으면 곡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라 자주 연주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존 오그돈 등의 몇몇 연주자들이 음반을 녹음하는 등의 노력을 해 오고 있습니다.

 

[2018. 5. 23. 수정]




charles valentin alkan (1813-1888)

Etude <Le Festin D'Esope> Op.39 No.12


 - 샤를 발렌틴 알캉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전성기에는 쇼팽, 리스트와 함께 당대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본명은 '샤를 발렌틴 모랑주'이며, '알캉'은 역시 음악가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사용한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파리 음악원 입시를 위한 일종의 음악학원을 운영하였고, 이런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알캉은 유년기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산하여 불과 6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피에르 지메르만(1785-1853)을 사사하였습니다.


 - 이후로도 천재성은 가라앉지 않아 파리 음악원을 최우등(프리미에 프리)으로 졸업하였고, 20대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쇼팽, 리스트와 함께 젊은 비르투오소로 거대한 명성을 쌓게 됩니다. 폴란드 출생이지만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쇼팽과는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친구 사이였는데, 쇼팽이 자신의 연주회에 알캉을 초청할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 순조로운 젊은 시절을 보낸 알캉은, 절친 쇼팽이 병으로 요절하고 스승 지메르만이 은퇴한 후 앙투안 마르몽텔(1816-1898)과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알캉은 이후 오랫동안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성서와 탈무드에 천착하는 은둔 생활을 거의 30여 년 가까이 이어가게 됩니다.


 - 은둔 중에도 작곡과 출판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1877년에 비로소 알캉은 봉인 해제 은둔에서 벗어나 연주회를 비롯한 대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습니다. 1888년 자신의 침실에서 사망하였는데, 책장에서 탈무드를 꺼내다가 책장이 넘어지면서 깔려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ㅡㅡ; 다만 이는 약간 후대에 나온 이야기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답게, 알캉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곡이며 이외에 교향곡 하나와 몇몇 실내악곡이 있습니다. 동시대의 쇼팽과 리스트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의 작품세계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근래 와서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앞의 두 작곡가와 비슷하게, 알캉 역시 고난이도의 연습곡을 다수 작곡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Op.39의 12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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