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

Piano Quartet No.1 in g Op.1


 - 모차르트의 자녀는 총 4남 2녀였는데, 생후 1년 내에 죽은 네 명을 제외하고 살아서 장성한 자식은 아들 두 명입니다. 그 중 2남인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1784-1858)는 음악 교육을 중도에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막내아들인 프란츠 크사퍼만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모차르트가 사망한 1791년 태어났고,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4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프란츠 크사퍼'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유명한 제자 중 하나인 프란츠 크사퍼 쥐스마이어(1766-1803)의 이름과 같은데, 이 때문에 프란츠 크사퍼가 알고보면 쥐스마이어의 자식일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기도 했습니다(사실무근).


 - 어머니 콘스탄체 베버(1763-1842)는 모차르트 사후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과 재혼하였는데, 정식 재혼은 1809년으로 한참 뒤였지만 이미 1790년대 후반부터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니센은 덴마크의 외교관으로 모차르트의 팬이기도 했는데,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악보집을 출판할 때 협력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니센은 모차르트의 전기를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아무튼 콘스탄체와 니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두 사람의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때마침 둘 모두 생부를 닮아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콘스탄체와 니센은 이들에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프란츠 크사퍼의 경우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훔멜(1778-1837) 등 당대 굴지의 음악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음악적 재능은 동생이 더 많았는지, 중도에 음악을 포기한 형에 비해 프란츠 크사퍼는 아버지 못지않은 재능을 과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옥죄었는지 이후 프란츠 크사퍼의 음악은 아버지 시대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 그는 청장년기에는 주로 렘베르크(現 폴란드 리비우)를 중심으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음악교육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물론 렘베르크뿐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연주와 지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820년대에는 400명의 아마추어 가수로 조직된 '성 체칠리아 합창단'을 결성하여 지휘를 맡았고, 유명 작곡가 50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변주곡 프로젝트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1838년 비엔나로 돌아왔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설립식에서 합창 지휘를 맡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들이었으니 모차르테움의 음악감독을 맡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는데, 프란츠 크사퍼가 아버지의 후광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1841년부터는 카를스바트(現 체코 카를로비바리)에 거주하면서 교육에 전념하던 중, 1844년 위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상술했듯이 프란츠 크사버가 음악인의 길을 걷는 데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아버지의 후광이 크게 작용한 바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의 이름값이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주는 바람에, 그의 작품세계가 아버지의 그것을 벤치마킹한 수준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사후에는 아버지의 명성에 완전히 묻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값에 눌려 살다 보니 인간적으로도 그리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와 비교당하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으며, 성격 또한 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겸손한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담감과 성격 문제 때문인지 평생 솔로 독신으로 살았고 자녀도 없는데, 하필 그의 형도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모차르트의 대는 이들을 끝으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ㅡㅡ;


 - 피아노사중주 1번은 공식 작품 번호가 붙은 첫 작품으로, 11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들으면서, 과연 그가 '모차르트'가 아닌 '프란츠 크사퍼'로서 평생을 살았다면 과연 어떤 음악세계를 보여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짧게 해 봅니다.





Antonin Dvorak (1841-1904)

Cello Concerto in d Op.104

연주 : 하나클랑 졸업생 오케스트라 HALO (2015 정기연주회)


 - 드보르자크의 미국 생활은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간도 3년 남짓으로 길지 않았지만,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된 시기였습니다. 뉴욕 내셔널 음악원장으로 근무하면서 드보르자크는 '인종 불문 입학 가능'이라는, 당시로서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였고 그렇게 입학한 학생들을 통하여 아프리카계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첼로 협주곡은 1895년 완성, 1896년 영국에서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드보르자크의 후원자였던 브람스는 "이런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내가 진작 첼로 협주곡을 썼을 텐데"라며 탄식했다고 하지요.


[후기] 연주회 뒷풀이에서 협연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추어와 맞추다 보니 루바토를 주기 어려워서 철저히 정석에 맞게 연습을 했는데, 들어보니 대가들은 다 정석에 맞게 하더라" 뭐 이런 이야기도 했고, "음악을 업으로 하다가 음악을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다" 이런 이야기도 했던가요.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다 보면 이 자리가 전문가와 취미가의 연결지점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경험이 되겠지요.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Oboe Concerto in C K.314/K.271k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4 가을 연주회)


 - 모차르트의 오보에 협주곡은 그가 협주곡을 썼다는 정보만 있고, 작품의 실체는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의 사보된 악보가 발견된 것은 1920년이었는데, 놀랍게도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 D장조 K.314와 조만 다른 사실상 똑같은 곡이어서 논란을 낳았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원곡이냐 하는 것인데, 일단은 모차르트 연구의 권위자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1880-1952)의 의견을 따라 대체로 오보에 협주곡 쪽을 원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작품 분류에서는 플룻/오보에 협주곡에 같은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개정 번호에서는 물론 다름).


[후기] 사실 이 곡을 연주했는지 아니 했는지도 기억이 불분명했다가, 곡을 다시 들으면서 간신히 기억해 냈습니다. 남아있는 기억이 이 수준이다보니, 후기랄 만한 건 딱히 없습니다. ㅡㅡ;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1 in C Op.21

연주 : 한국 대학생 연합 오케스트라 KUCO (2014 여름 연주회)


 - 베토벤이 교향곡이라는 형태의 음악에 끼친 영향이라면, 무엇보다 음악회의 보조 음악이었던 교향곡을 음악회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베토벤이 1번 교향곡을 완성한 것은 1800년, 나이 30세 때로 그의 선배들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 비해 상당히 늦은 시작입니다. 실제로 그 이전에도 베토벤은 상당히 많은 교향곡 초안을 만들었지만 작품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았으니, 처음부터 교향곡 자체에 큰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번 교향곡은 지금에 와서는 선배들의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는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그래도 나름 새로운 시도가 많이 보이기 때문에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진보적인 음악으로 이런저런 논란을 낳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기] 베토벤 교향곡 입문용으로 괜찮은 작품. 좋게 평가하면 하이든-모차르트의 고전적 스타일과 베토벤 고유의 스타일을 모두 맛볼 수 있고, 나쁘게 평가하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작품이라 할만하죠.





Sergey Koussevitzky (1874-1951)

Double Bass Concerto in e Op.3

연주 : 한국 대학생 연합 오케스트라 KUCO (2014 여름 연주회)


 -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지휘자 겸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젊은 시절에는 주로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30대 중반쯤부터 지휘자로 활동, 본래 러시아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하였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습니다. 1924년부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 25년간 맹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별로 없지만, 평소 더블베이스를 위한 곡이 부족함을 아쉬워하던 중 직접 작품을 쓰기에 이르렀으니 유명한 더블베이스 협주곡입니다.


[후기] 더블베이스를 위한 협주곡 자체가 희귀하니, 진기한 경험을 한 셈이지요. 당시 협연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더블베이스 연주자 성민제씨가 연주한 바 있습니다.



[노년의 하이든]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말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를 넘어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대작곡가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가 1809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질 법도 했지만,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도중으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신나게 털리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ㅡㅡ; 큰 행사를 벌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 거기에 하이든 본인의 유언도 있고 하여, 시신은 간단한 장례 이후 비엔나 구역 내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치됩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 1820년, 하이든의 옛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하이든의 시신을 이장하여 자신들의 가문 묘지에 안치하기로 결정하고 무덤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은, 머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하이든의 반쪽짜리 시체였습니다.



1. 누구의 짓인가?


 - 당연하게도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시 가문의 수장 니콜라우스 2세(1765-1833)는 범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이전부터 나돌던 소문을 바탕으로 요제프 칼 로젠바움(1770-1829)과 요한 네포무크 페터(?-?)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로젠바움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비서였고, 하이든이 결혼을 주선한 적이 있을 만큼 그와 친분이 있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 당연히 니콜라우스는 로젠바움과 페터의 집을 수색하여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아나섰지만, 로젠바움의 부인 테레제 가스만(하이든에게 소개받은 그 사람)이 두개골이 숨겨진 매트리스를 깔고 앉아 버티는 바람에 찾아내는 데 실패합니다. 이후에도 니콜라우스는 로젠바움을 계속 추궁하고, 결국 사실을 실토한 로젠바움은 두개골을 니콜라우스에게 전달하는데 이게 또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ㅡㅡ;


 - 1829년 로젠바움이 사망하면서부터 하이든의 머리는 기나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일단 범행 동료인 페터에게 머리가 전달되었고, 이후에는 그의 주치의 칼 헬러, 그 다음에는 의사 겸 병리학자인 칼 폰 로키탄스키(1804-1878)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사방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1895년에는 비엔나 악우(樂友)협회가 하이든의 머리를 기증받고, 협회 내에 전시하기에 이릅니다.



2. 왜 그런 짓을?


 -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선 골상학(骨相學, Phrenology)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는 근대 의학의 태동기에 유행한 분야로, 현재는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뇌 각 부분의 지능이나 정신작용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연구자들에게 관심을 끌었던 부류가 범죄자와 천재의 두뇌였습니다.


 [골상학은 현재는 유사과학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 하필 로젠바움과 페터는 이 골상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에게 음악천재 하이든의 두뇌는 최고의 연구재료였던 것입니다. 하이든이 매장되고 며칠 후 두 사람은 묘지 관리인들을 매수한 후, 하이든의 머리를 도굴하여 빼돌렸던 것입니다. 페터는 실제로 하이든의 뇌를 연구해본 후 "음악과 관련된 부위가 매우 발달해 있었다"고 말했다는데, 과학적 신빙성은 저 너머에.


 - 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는, 천재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으면 자신과 자손들이 천재가 된다는 이상한 미신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예술가들은 사후 머리를 도난당하기 일쑤여서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베토벤 역시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친구들이 밤새 묘지를 지킬 정도였고, 매장지가 알려지지 않은 모차르트의 경우 매장에 참여한 인부에게 도굴을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3. 머리를 되찾기까지


 -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받은 가짜(?) 머리가 진짜인 줄 알았고, 그 사이 하이든의 진짜 머리는 비엔나 악우협회에서 방문객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새로운 당주 파울(1901-1989)은 머리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었고 하이든의 머리를 되찾아 온전한 유해를 안치할 계획을 세웁니다.


 - 이러한 계획에 따라, 하이든 탄생 200주년인 1932년에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젠슈타트의 교회에 하이든을 위한 영묘를 만들고 비엔나 악우협회에 머리의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악우협회의 비협조 속에 사태는 법정싸움으로 번졌고, 이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분쟁은 한참 동안이나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 결국 1954년에야 모든 소송이 마무리되고, 하이든의 머리는 죽은지 145년만에야 자신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하이든의 시신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성대한 추모행사와 함께 영묘에 안치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간 하이든의 몸과 함께한 가짜 머리 또한 함께 안치되어, 현재 하이든의 시신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군요.



 [하이든이 안치된 영묘]


참고자료 :

영문 위키피디아 "Haydn's head"

정준극씨 블로그 "하이든 머리 수난사건"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Symphony No.7 in A Op.92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4 봄 연주회), 한국교사오케스트라 (2016 여름 연주회)


 -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은 5번과 6번 교향곡이 완성된 지 4년쯤 지난 1812년에 완성되었고, 5-6번의 관계와 비슷하게 8번 교향곡과 거의 동시기에 작곡이 진행되었습니다. 동시기의 작품임에도 7번과 8번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른데, 7번의 경우 도취적일 정도로 힘차고 경쾌한 느낌을 전반적으로 주고 있습니다. 작곡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연속된 전쟁의 영향으로 애국주의가 판치고 있었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7번의 분위기는 대중들에게 큰 호평을 받아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다만 베토벤 본인의 경우 8번을 7번보다 오히려 더 뛰어난 작품으로 자평했다는군요.


[후기] 베토벤의 교향곡을 더블베이스 연주자는 대체로 싫어합니다. 보통 첼로와 더블베이스는 동일한 음형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첼로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들이 더블베이스에게는 거의 HELL 난이도가 되거든요. 뭐, 블로거는 첼로를 연주하고 첼로에게도 베토벤 교향곡은 어렵긴 하지만 아예 못 해먹을 정도까진 아닙니다. 7번 교향곡은 말 그대로 질주하는 마음가짐으로 연주해야 재미있고,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연주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더군요. ㅡㅡ;





Dmitry Kavalevsky (1904-1987)

Violin Concerto in C Op.48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4 봄 연주회)


 - 카발렙스키는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과 동시대 인물로, 주로 극음악 쪽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입니다. 소련의 정치권력과는 대체로 타협적이었으며, 전반적으로 예술적 깊이보다는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음악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협주곡들은 전문적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난이도를 추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어린이 음악교육에 깊이 관여한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후기] 러시아-소련의 작곡가들은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블로거는 이 연주를 통하여 카발렙스키를 처음 접했고, 협주곡에 대하여 남들과는 다른 인식을 가지고 접근하였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연주 또한 프로페셔널이 아닌, 단원 중 한 명이 협연을 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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