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Schubert (1797-1828)

Symphony No.5 in Bb D.485

연주 : 서강대학교 ACES (2014 봄 연주회)


 - 변성기가 오면서 국립신학교를 퇴학한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일종의 대체복무 성격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는 초등학교의 조교사직을 맡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일은 그에게 맞는 일이 아니었고, 실제로 그는 교사직보다도 작곡과 음악 관련 활동에 열중하여 수많은 명곡을 만들었습니다. 1816년에는 견디다 못하여 라이바흐 초등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로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고, 결국 아버지와 충돌한 후 집을 나와버리게 됩니다. 교향곡 5번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고, 격동의 시기였음에도 3주 남짓한 기간동안 빠르게 작곡되었습니다. 다만 이 곡의 초연은 슈베르트의 사후인 1841년에야 실현되었습니다.


[후기] 규모가 '너무 작아서' 연주해보기 은근히 까다로운 곡이죠(아무래도 클라리넷이 없다는 게). 2악장은 슈베르트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이 인상적이고, 3악장은 딱 들어도 모차르트의 40번 3악장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옵니다. 또 해 보고 싶은 작품 중 하나.




Jean Sibelius (1865-1957)

Violin Concerto in d Op.47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14 신입생 환영 연주회)


- 본래 시벨리우스는 바이올린 연주자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무대공포증과 자신감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작곡으로 완전히 전향한 개인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뒤로도 시벨리우스 자신은 바이올린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고, 이런 사정이 있다 보니 바이올린에 대한 이해 또한 상당히 깊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이 작품은 1903년 완성되어 이듬해 초연되었지만 당시 연주는 협연자의 능력 부족으로 엉망이 되었고, 이후 시벨리우스는 전체적인 틀을 일부 개정하여 1905년 다시 공개하였는데 이 연주는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후기] 아마추어 악단의 협주곡 연주는, 연주도 연주지만 협연에 대한 감상 그 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기도 합니다.





Nikolay Yakovlevich Myaskovsky (1881-1950)

Symphony No.25 in Db Op.69


 -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폴란드 지방에서 출생한 니콜라이 먀스콥스키는, 어려서부터 음악 관련 활동을 했지만 공병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공병 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다만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고, 틈틈이 개인교습을 받다가 스승인 라인홀트 글리에르(1875-1956)의 추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 음악원에서는 아나톨리 랴도프(1855-1914)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를 사사하였고, 동시에 전위적인 모습을 보이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1872-1915)이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 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프로코피에프와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이후에도 오랫동안 친교를 유지하였습니다.


- 1911년 졸업 후 모교 강사와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장교로 재징집당했고,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시기에는 구 제국군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가족들 중 다수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은 붉은 군대에 동참하였고, 1921년 제대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 이후로는 음악교육자로 활동하면서 교향곡을 중심으로 한 작곡 활동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이 무렵부터 작품 성향이 상당히 보수화되었는데, 이 때문인지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별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프로파간다 작품을 발표하는 등 체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시베리아로 피신하였고, 그 와중에도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쟁 후 1947년 '즈다노프 비판' 때는 먀스콥스키 역시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여, 쇼스타코비치나 하차투리안 등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격을 당하고 gg를 선언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받은 스트레스에 암이 겹쳐, 결국 몇 년간의 투병 끝에 1950년 사망하였습니다.


-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기악, 특히 교향곡이나 현악사중주 쪽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가 발표한 교향곡은 총 27곡으로 역대 러시아 출신 작곡가 중 가장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사조의 음악에도 관심을 가졌고 오페라나 발레음악을 시도한 흔적도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교육자로서의 모습이 작곡 성향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 교육자로서도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작곡가 중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나 드미트리 카발렙스키(1904-1987) 등 다수가 구소련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Johan Halversen (1864-1935)

Suite Ancienne Op.31


 - 할보르센은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 지휘자 겸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초년부터 바이올린 연주자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스톡홀름 음악원 졸업 후 콘서트마스터(악장)로 활동하며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를 역임하던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다시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베르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 베르겐 국립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 크리스챠니아(현 오슬로) 국립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을 역임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오슬로 음악애호협회 오케스트라(현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대 음악감독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 그는 작곡가로서는 30곡 이상의 오페라와 연극 부수음악, 다수의 관현악곡 등의 작품을 썼으며, 에드바르트 그리그(1843-1907)의 노르웨이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외에도 대중들에게는 헨델의 하프시코드용 파사칼리아를 바이올린-비올라 이중주로 편곡한 것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Alan Hovhaness (1911-2000)

Symphony No.2 Op.132 <Mysterious Mountain>


  - 본명은 앨런 바네스 차크매키언(Alan Vaness Chakmakjian). 아버지가 아르메니아계였고, 자신의 음악세계 또한 아르메니아 쪽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4세 때부터 작곡을 했으며, 10세 때 이미 2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무대에까지 올릴 정도로 천재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 호바네스는 고등학교 졸업 후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1934년에는 핀란드 여행을 하였는데 이 때 장 시벨리우스(1865-1957)와 친분을 쌓게 됩니다. 1942년 탱글우드 뮤직센터에서 아론 코플랜드(1900-1990)와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이 그의 작품을 강하게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이후 호바네스는 그 때까지의 자기 작품 대부분을 폐기해 버렸습니다.


  - 1948년 보스턴 음악원 교수로 부임하지만, 3년 후 뉴욕으로 옮겨 작곡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1955년 초연된 교향곡 2번 <신비로운 산>으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의 지휘로 연주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 위에 언급한 작품 폐기 사건 이후 호바네스는 주로 전통 음악, 특히 아버지의 고향인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10여 년간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메니아뿐 아니라 아시아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일본과 한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을 직접 여행하며 이 지역의 음악들을 직접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 상당한 다작(多作)을 했는데, 작품번호가 붙은 것만 400곡 이상이고 그 중 교향곡은 67곡에 이릅니다. 전반적으로 현대문명의 파괴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 같은데, 197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공포스럽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유럽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특히 스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활동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에는 딱 한 번 방문하였는데 1965년 미국 정부의 후원하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것이 유일합니다.


  - 여담으로 교향곡 16번의 정식 제목은 <한국의 가야금, 타악,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16번>으로, 호바네스는 1963년 아시아 여행 중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전통음악을 접하며 받은 강한 인상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향곡 16번의 초연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1936-)씨와 KBS 교향악단의 연주로 이루어졌습니다.





Johannes Brahms (1833-1897)

Symphony No.4 in e Op.98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13 10주년 기념 연주회)


- 브람스의 마지막 교향곡. 브람스의 네 교향곡을 1-2번과 3-4번의 두 묶음으로 나누면, 앞의 두 곡이 비슷한 시기에, 뒤의 두 곡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브람스는 3번 교향곡을 완성한 다음 해인 1884년에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을 시작, 그 해 여름 휴가에서 앞의 두 악장을, 다음 해 여름 휴가에서 뒤 두 악장을 완성하였습니다. 곡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지나치게 복고적이라는 인식이 있어 발표 초기에는 평이 엇갈렸으나, 반대로 매우 혁신적인 작품이라는 상반된 해석도 존재합니다.


[후기] 브람스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 가장 까다로운 점이라면, 역시 마디의 구분점과 리듬의 구분점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겁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일단 마디수 세는 게 굉장히 어렵고, 곡의 느낌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헷갈려서 연주가 전반적으로 어그러지기 쉽거든요. 연주를 해 보면 자기가 어디를 쫓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 곡 전반에 걸쳐 정신줄을 꼭 잡고 있어야 합니다. 블로거는 이 곡까지 브람스 교향곡 4개 중 2번을 뺀 나머지 세 개를 모두 해 봤습니다. 2번은 언제 연주를 할 수는 있을까요?





Dmitry Shostakovich (1906-1975)

Festive Overture Op.96

연주 : 한양대학교 하나클랑 (2013 10주년 기념 연주회)


 - 1954년에 개최된 10월 혁명 37주년 기념 연주회를 위하여 작곡되었습니다. 음악회의 지휘를 맡은 바실리 네볼신(1898-1958)의 부탁을 받아 만들었는데, 부탁을 받은 시점은 불과 연주회 1주일 전이었고 ㅡㅡ; 그걸 또 수락한 쇼스타코비치는 불과 3일만에 곡을 완성한 후 연주회 전날 악보를 넘겨, 연주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급하게 작곡된 작품임에도 특유의 화려함으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작품이 되었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주제곡으로도 사용된 바 있습니다.


[후기] 블로거는 이 작품과 은근히 인연이 많습니다. 우선 군복무 시절에 한 번 연주를 해 봤고(당시 블로거는 클라리넷 초보였고, 군악대 분위기에서 이걸 연습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ㅡㅡ;), 오케스트라 버전으로도 연주를 해 봤죠. 당시 곡의 파트보를 구하지 못해 직접 파트보 제작을 맡아 했는데, 급하게 만든 곡이라서 그런지 구조 자체는 상당히 단순해서 작업을 하면서 Ctrl+CV를 엄청나게 눌러댄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튼 이 곡은 또 해 보고 싶네요.





Johannes Brahms (1833-1897)

Symphony No.3 in F Op.90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3 가을 연주회)


-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은 1883년 여름~가을에 걸쳐 작곡이 진행되었고, 전작인 2번 완성 후 6년이 지나 만들어졌습니다. 전작 완성 이후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작곡 자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구상해 두었던 이런저런 악상들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브람스는 여름 휴가 동안 곡의 기본적인 틀을 거의 만들었고, 비엔나로 돌아온 이후 관현악 편곡과 소소한 개정을 거쳐 가을에 완성하였습니다. 초연은 같은 해 12월에 한스 리히터(1843-1916)의 지휘로 연주되었고, 상당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후기] 개인적으로는 느린 악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3악장 처음의 첼로 연주는, 첼로 연주자라면 절대 놓칠 수 없죠. 예전에 많이 읽었던 관현악법 교재에서는 이 부분을 두고 "왜 바이올린도, 비올라도 아닌 첼로였을까?"라는 질문으로 썰을 풀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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