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briel Faure (1845-1924)

<Dolly> Suite Op.56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


 - 가브리엘 포레는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음악교육자로 활동하였으며 20세기 초 프랑스 음악계의 개혁에도 일정 부분 공헌한 인물입니다. 포레는 1883년 조각가 엠마누엘 프레미에(1824-1910)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고 여기저기 바람을 피우고 다녔습니다. 그 중 유명한 사례가 엠마 바르다크(1862-1934)와의 불륜염문이었는데, 바르다크는 가수이며 은행가의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바르다크에게는 엘렌이라는 딸이 있었고 '돌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포레는 엘렌을 위하여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만들고 그의 애칭을 제목에 붙였습니다. 이 작품은 이후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습니다.


[후기] 어느 시점부터 (듣거나, 연주하거나를 막론하고) 요란한 작품만큼이나 이런 잔잔한 곡들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글쎄, 그만큼 정신이 성숙해서일지 낡아서(?)일지는 잘 모르겠네요. 따지고 보면 저 둘은 비슷한 말 아니던가? 연주할 때 특별할 건 없는데, 리듬을 꼬아놓은 곡이 몇 있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듭니다.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BWV 1043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가을 연주회(2, 3악장))


 - 바흐는 총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BWV 1043은 두 명의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717~1823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는 바흐가 안할트쾨텐 후국(侯國)의 궁정에서 활동하던 때입니다. 이 무렵 바흐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해 있었고, 바흐의 대표작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BWV 1043입니다. 이 작품은 작곡 이후 악보가 분실되었는데, 바흐의 차남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1714-1788)가 기억을 되살려내어 복원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다수 연주자의 협연으로 연주되는 협주곡(합주 협주곡) 형식은 고전파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바로크 시대에는 상당히 인기있는 형태의 음악이었습니다.


[후기] 1악장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주해본 적이 있었는데(물론 블로거가 바이올린 협연을 했다는 소리는 아니고),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갔더니 해 본 적 없는 2, 3악장만 연주한다고 해서 순간 당황할 뻔한 일이 있었지요. 바로크 시대의 첼로와 베이스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을 연주할 일이 거의 없는데, 이 시기까지는 첼로에 엔드핀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연주를 해야 했고(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연주), 당연히 어려운 패시지는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Mily Balakirev (1837-1910)

Oriental fantasy <Islamey> Op.18


 - 발라키레프는 러시아 5인조의 리더로, 5인조 형성 당시 유일한 전업 음악가였습니다. 다만 발라키레프 역시 처음부터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으며, 대학에서는 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소년기에는 알렉산드르 우루이비셰프(1794-1858, 러시아 최초의 음악평론가)에게 음악을 배웠고, 대학 졸업 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미하일 글린카(1804-1857)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글린카는 발라키레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격려하였습니다.


 - 이후 1856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발표하며 음악가로 본격 데뷔하였고, 이후 2년 사이 자신의 두 후원자가 세상을 떠났지만 민족주의적인 스타일의 음악으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습니다. 이 무렵 큐이,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과 만나 교류하였는데, 이들의 모임에 몇 년 후 보로딘이 합류하면서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5인조'가 형성됩니다.


 - 이후 작곡, 지휘, 음악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서유럽식 낭만주의를 지지하는 루빈시테인 형제에 대항하여 무료 음악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870년대 들어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으니, 발라키레프는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되었고 음악 활동을 5년 이상 전면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이 시기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그를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초빙하려 하였지만, 자신의 음악이 "지식보다 경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가르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며 고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1883년 러시아 궁정 성가대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무료 음악학교 활동도 재개하였습니다. 1894년 음악감독직을 사퇴한 이후 말년에는 다시 창작 활동에 집중하여 두 개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소나타들을 발표하였고, 자신의 과거 작품에 대한 개정 작업도 병행하였습니다.


 - <이슬라메이>는 1868년 9월에 완성되었으며, 발라키레프가 캅카스(코카서스) 지방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어 약 한 달여만에 만든 작품입니다. 발라키레프의 대표작이며, 특히 그 엄청난 연주 난이도로 더 유명합니다. 피아노 솔로곡 중 가장 어려운 작품의 하나이며, 웬만한 피아니스트는 연주하기 곤란할 정도라 곡을 조금 쉽게 편곡한 많은 판본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도전하는 작품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Alexander Borodin (1833-1887)

Symphony No.1 in Eb


 - 알렉산드르 보로딘은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 작곡가, 사회운동가입니다. 사후에는 작곡가로서의 모습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생전의 본업은 화학자로 그의 이름을 딴 화학반응(보로딘 반응. 이후 하인츠(1904-1981)와 클레어 훈스디에커(1903-1995) 부부가 연구를 진전시켜 '훈스디에커 반응'으로도 불림)이 있을 정도의 업적을 남긴 바 있습니다.


 - 일단 출생 배경부터가 막장 범상치 않은데, 조지아계 귀족인 아버지와 유럽계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를 수 없어 아버지 소속의 농노의 가문으로 입적하고 그의 성을 따라 '보로딘'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출생 이후에는 어머니가 양육하였으며, 경제적으로 꽤 유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만 당시 가족 중 대부분이 여성이라 어릴 적에는 반(半) 여성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순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군요.


 - 취미로 악기를 배우며 9세 때 짧은 곡을 작곡하였을 정도로 음악에는 재능이 있었지만, 딱히 음악가 쪽 진로는 고려하지 않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화학과 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독일로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던 1862년 발라키레프를 만나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후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5년이 걸렸는데,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는 틈틈이 작곡을 병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보로딘이 작곡에 투자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활동 영역을 넓힌 후기에 더 심해져 거의 작곡에 신경쓰지 못할 지경까지 갔고, 결국 그가 말년에 작업하던 여러 작품들은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거나 후배 작곡가들의 추가적인 작업을 통해서야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 교향곡 1번은 완성 2년 후인 1869년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호평을 받으며 작곡가 보로딘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보로딘은 곧바로 교향곡 2번과 오페라 <이고르 공> 작곡에 착수하였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에 논문 표절 논란까지 겹쳐 연구 및 논문 관련 활동에 집중하는 바람에 두 작품은 오랫동안(<이고르 공>은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Symphony No.1 in g Op.13 <Winter Dreams>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5 가을 연주회)


 - 차이콥스키의 첫 번째 교향곡은 그가 28세 때 완성하였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던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법무관으로 진로를 틀어야 했는데, 법률학교에 재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음악원이 신설되면서 그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니콜라이 루빈시테인(1835-1881)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는데, 음악원에 재임한 1866년부터 교향곡 작곡에 착수하여 2년 후 완성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1번입니다. 차이콥스키는 각 악장에 각각 "겨울 여행의 몽상" "어둠의 땅, 안개의 땅" "춥고 오랜 여행에 지친 여행자의 꿈" "꽃망울이 열리고"라는 표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불분명하나 대체로 고향 러시아를 상징하는 '추운 겨울'에서 온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초기 작품이라 작곡 기법상으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초연에서 평이 괜찮았음에도 몇 차례 곡을 고쳐 1875년 출판하였습니다.


[후기] 블로거는 별로 연주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작품을 더 좋아합니다. 물론 완전 새롭게 연습을 해야 하니 부족한 실력에 고생이 많지만, 그래도 하던 것만 자꾸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이 작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딱 한 번 연습만 해 본 곡이라 어딘가에서 꼭 한 번 연주해보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Leonore> "Overture" No.3 Op.72a

연주 : 건국대학교 KUPhil (2015 가을 연주회)


 -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파란만장한 개작(改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판본은 1805년 완성되어 그해 말 초연되었는데, 하필 나폴레옹이 비엔나로 침공한 혼란통에 몇 차례 상연되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당시의 서곡은 <레오노레> 2번). 이듬해 초 베토벤은 작품을 다듬어 3막에서 2막으로 축소하고, 새로운 서곡(<레오노레> 3번)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으니 이것이 두 번째 판본입니다. 다만 이는 1차보다도 흥행에 실패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듬해(1807년) 프라하에서 상연 기회가 생기자 베토벤은 서곡을 다시 써서(<레오노레> 1번) 준비를 하였으나 이번에는 상연 자체가 취소. 이후 시간이 지나 1814년이 되어서야 작품은 다시 상연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베토벤은 음악을 대규모로 개작하였고 비로소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곡을 다시 썼는데(<피델리오> 서곡), 초연 당시까지 완성하지 못하여 얼마 후에야 새로 쓴 서곡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최종본에 이르기까지 3명의 다른 작가가 대본 작업에 참여했고, 제목도 <피델리오> → <레오노레> → <피델리오>로 바뀌었습니다. '레오노레'는 주인공의 본명, '피델리오'는 남장한 주인공의 가명입니다.


[후기] 은근히 어려워서 허를 찔린 기억이 있습니다. 곡 자체의 재미도 재미지만, 완성되기까지의 긴 사연이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





Arturo Marquez (1950-)
Danzon No.2

연주 : 서울교육대학교 에듀필 (2015 봄 연주회)


 - 아르투로 마르케스는 멕시코 출신의 작곡가입니다. 멕시코 북부의 알라모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라 푸엔테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멕시코 음악원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장학생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1990년에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MFA(Master of Fine Arts) 학위를 받았으며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수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로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음악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단존 2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단존(Danzon)'은 멕시코와 쿠바 등에서 유행한 2/4 박자의 춤곡입니다.


[후기] 흥겨움 하면 라틴아메리카 음악을 따라올 게 별로 없죠. 독특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곡은 제대로 연주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데, 블로거는 이런 곡이야말로 색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합니다.





Michael Haydn (1737-1806)

Symphony No.25 in G MH 330

(Mozart Symphony No.37 in G K.444)


 - 먼저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이 교향곡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교향곡 37번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려진 악보에 모차르트의 서명이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비엔나에서 초연된 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 곡의 작곡자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고,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80-1952) 등 학자들의 검증을 통하여 현재는 1악장의 서주만 모차르트의 것이고 나머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형이 비엔나 슈테판 성당 합창단에 입단한 이후 합창단 감독인 칼 게오르그 로이터(1708-1772)의 도움으로 미하엘을 비롯한 동생들 역시 합창단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하이든 형제는 변성기가 오면서 차례로 합창단을 떠났으며, 미하엘의 경우 퇴단 직후 그로스바르다인(現 루마니아 오라데아) 성당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762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하엘은 이후 남은 평생을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360곡 이상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 1768년 미하엘은 성악가로 활동한 마리아 막달레나 리프(1745-1827)와 결혼하였는데, 잘츠부르크에서 친분 관계를 맺게 된 모차르트 가문에서는 마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군요. 둘 사이에 자식은 딸(알로이지아 요제파)하나가 유일한데, 그나마 생후 1년 남짓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미하엘은 몇몇 부분에 대하여는 형인 요제프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종교음악의 경우 요제프 스스로가 자신보다 미하엘이 뛰어나다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미하엘은 주로 교회음악가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대표작들 또한 교회음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그문트 대주교를 위한 레퀴엠 c단조>는 미하엘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물론 고전시대 작곡가답게, 43개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다수의 세속음악도 만든 바 있습니다.


 - 다만 아무래도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대라, 그의 작품인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으며 요제프의 작품에 섞여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똑같은 '하이든'이다보니 풀 네임을 쓰지 않으면 헷갈리기 딱 좋았다고).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의 교향곡 25번이죠. 여담으로 미하엘은 술을 상당히 좋아했던 모양인데,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경우 미하엘이 술을 너무 마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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