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를 통하여 블로거가 말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친일파라 묶어 이야기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그들을 각각의 '인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친일행위를 한 의도와 목표가 제각각이었으니 이를 면밀히 분석해야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다룰 이규완(1862-1946)처럼 '진심 민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함께 고민해 봅시다. 어차피 역사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이규완, 1930년

 

1. 갑신정변의 행동대원

 이규완은 1862년 서울 한성부 교외(뚝섬)에서 종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친이라고 말은 하지만 왕실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면 수백 년 전 임영대군(세종대왕의 4남)까지 무려 15대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별 의미는 없고, 아버지 이기혁 또한 나무를 파는 행상을 하며 여느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형과 누나, 동생 몇 명이 있다는 정도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9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아버지가 곧 재혼하였지만 계모 또한 그가 1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본적지인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사는 숙부 집에 가서 자랐는데, 나름 큰 뜻이 있었던지 한번은 서울로 올라갔다가 박영효(1861-1939)의 행차를 목격하고는 무턱대고 박영효의 집에 쳐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었지만 그는 하인들과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이내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습니다. 면식도 없는 귀족집안에 감히 들이대는 배짱을 높이 평가하였는지, 아니면 그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 박영효는 글조차 모르던 이규완이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게 했고 나중에는 유학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박영효

 이규완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불과 한 살이 많았던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으며 최고 명문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와 친해진 이규완에게도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1883년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2개월간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으며, 돌아온 직후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관비(官費)유학생에 선발,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과 도야마 하사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택견의 명수였는데 이 시절에 서재필에게 개인적으로 무예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1년 뒤 이규완은 하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병조 소속 무관으로 임용되었습니다. 박영효 등 개화파는 이 시기 이미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개화파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군사조직을 창설하였습니다. 총대장은 서재필이었으며 이규완 역시 별동대 대장으로 여기에 참여하였습니다. 나름 갑신정변의 주축 중 하나였지만 이 시기 그는 정변 지도자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로 영 미덥지 않아 했다네요.

갑신정변의 진앙지 우정총국

 아무튼 1884년 12월, 거사의 날 이규완은 자신의 별동대를 이끌고 정변에 참여합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별궁 점거 및 방화, 요인 암살 등이었는데 특히 우정총국에서 민영익(1860-1914)을 직접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것이 이규완이었다고 합니다(알려져 있듯이 민영익은 호러스 알렌에게 수술과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집니다). 그렇게 정변의 중요 인물로 활약하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으며, 이규완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향합니다. 피신 당시 그는 부상을 입은 서광범과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달렸다고 전해집니다.

 

2. 망명생활과 귀국, 다시 망명(무한반복)

 이규완은 다른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망명자들은 자객에게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하여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였다고 합니다. 정변 지도자들은 계속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1894년 김옥균 암살을 주도한 이일직이 일본에서 박영효 등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이규완은 이를 알아내고 이일직을 체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일직을 감금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행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와중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이 진행되고 이규완을 비롯하여 생존한 정변 지도자들이 사면됩니다. 이에 이규완 역시 박영효 등과 함께 귀국한 뒤 3품 경무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동학군과 연계하여 시도하려 한 쿠데타 계획에 대하여 경무관 신분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흥선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갑신정변 때 이규완이 민영익의 귀를 벤 일은 유명했던지라, 송병준과 이완용은 이규완만 보면 "X알 간수 잘 해야지" 하는 성희롱농담을 지껄이곤 했다는군요.

 고위 관료로 평탄하게 흐를 것 같던 이규완의 삶은 그의 은인 박영효와 함께 다시 폭풍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는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친러 행보를 우려하여 계획한 암살 미수사건(을미사변 한 달 전 발생한 별개 사건)에 참여하였는데, 이 계획이 누설되어 박영효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변복을 하고 함께 몸을 피하였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다음 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유길준 일파와 일본의 합작으로 정말로 살해당한(을미사변) 뒤 귀국하였지만, 얼마 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건청궁 옥호루

 1898년 그는 조선(대한제국)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고 이후 한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지원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부의 탄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승만 등 활동가들을 포섭하여 고종 폐위 운동을 획책합니다. 고종 황제를 쫓아내고 박영효를 추대하려는 시도였는데 이는 얼마 뒤 발각되었고 이규완은 체포당한 이승만, 이상재 등을 뒤로 하고 또 ㅡㅡ;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이런저런 고종 폐위 음모를 추진하며 비밀리에 한국을 오가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는 없었고 그 와중에 궐석재판에서 교수형 선고까지 받습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박영효, 이준용, 유길준 등 망명자의 사면을 제안할 때 그의 이름도 있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여 신변을 넘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당하자 그는 고종에게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연히 별 소용은 없었습니다.

 

3. '진심으로' 청렴했던 친일 관료

 그가 최종 귀국한 것은 1907년으로 그 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비로소 사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통감부의 추천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취임하는데, 처음 그는 "문맹이 관료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양하려 하였지만 글 배웠다며? 통감부의 거듭된 강권에 결국 관찰사 직책과 중추원 찬의 직책을 수락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으며 직책명이 도지사로 바뀐 1924년까지 직을 수행한 뒤 퇴임하였습니다.

함경남도지사 재직 시기 이규완

 그는 전형적인 '자치론' 지지자였는데, 다른 유명한 자치론자들과 비교하면 3 · 1운동 이후가 아니라, 병합 직후부터 꾸준히 이런 주장을 반복하였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은 기왕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상 조선의 주민들을 동등한 일본인으로 대우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조선인 역시 일본에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일본과 총독부의 방침과 달랐으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는 끈질기게 총독부에 건의를 날렸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후 민원식, 박중양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적 자치론으로 이어집니다.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겠지만, 이규완의 경우 자기 자신이 그야말로 철저히 검약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는 그 맥을 달리 합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하고 남은 땟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말고 텃밭에 거름 등으로 활용하게 했고, 평소 어디로 이동하거나 출장을 갈 때도 비용을 절약하고자 기차 3등칸을 타거나 싸구려 주막을 이용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시기에는 어떤 사람이 진수성찬을 차려 접대를 하자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며 뒷간에 똥통(!!!)을 지고 가서 거름을 옮겨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 이후 사람들이 그를 거창하게 대접하는 일이 없어졌고, 그 청렴함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리기에 이릅니다.

이규완의 사상이 압축된 '일생역행'

 그의 청렴함은 조금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하겠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밑바닥에서 자기 노력으로 출세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도전과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한 그는 조선이 남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를 '게으름'에서 찾았던 것 으로 보입니다. 나태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그 결과 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노력하여 민족적 역량을 키워야 그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극단적일 만큼 부지런히 살고 근검절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독립운동 중 실력양성론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이러한 노력의 목표가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자'였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규완의 생각은 우리가 부족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하자는 데 머물렀고, 그래서 결국 독립론이 아닌 '자치론'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3·1운동 당시에도 그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하고 여기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항일운동의 반대편에 서서 활동했습니다.

 

4. 퇴임 이후, 말년

 1924년 도지사직을 퇴임한 이후 이규완은 더 이상 중요한 공직에는 나서지 않았고, 함경북도지사나 중추원 참의 등의 자리를 제안받기도 하지만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청량리와 춘천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운영하였으며, 여러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김천고등보통학교(現 김천고등학교) 설립 자금을 후원하는 등 이런저런 사회사업을 벌여 자신의 신념을 조금씩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동양척식회사 고문 자격으로 황해도 봉산·재령 지역에서 발생한 소작쟁의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 강령 발표 소식.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1927년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출범한 조선물산장려회의 회장에 추대되어 1년간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신간회는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단체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협력했던 이규완이 항일운동 차원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신간회 활동의 한 축이었던 실력양성론이 자신의 신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기꺼이 참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거기에 어쨌든 신간회는 합법단체였으니 관료 출신인 그가 활동을 꺼릴 필요도 크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그는 일관되게 각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바닷가를 간척하여 농지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개간한 땅의 일부를 자기 아들들에게 경영하도록 넘겨주기도 했는데, 한번은 삼남 이영일(1903-1984. 화가, 교육자로 활동)이 자기 몫으로 받은 야산을 매각하려 하자 강하게 반대하여 팔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외에는 조선산림협회 이사로 10년 이상 활동하거나 한성시탄(柴炭)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자기 사업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춘천 농장의 사과나무와 차남 이선길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규완에게도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라는 요구가 들어오는데, 친일 관료 출신으로는 조금 특이하게도 그는 이런 쪽에서 일본에 협력하는 것은 최대한 회피하였습니다. 신문에 전쟁 독려 기사를 기고하는 일은 사회사업이 바쁘다는 핑계와 문맹이라는 핑계로 글 배웠다며?(2) 최대한 거절하였고, 방공호를 건설하라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행사에 연사 등으로 참여하기는 했는데, 대부분 조선인 참전 병사를 위한 후원회 등 조선인과 직접 관련된 행사에 치중하였다니 나름 일관성은 있었던 셈입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일본 온천에 요양을 다녀오는 등 활동이 뜸해졌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개간 사업에는 계속 관여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는 "우리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라"고 발언하였습니다. 일관성 甲 그가 사망한 것은 1946년으로 그와 젊어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승만뿐 아니라 김구 역시 자신의 측근을 조문단으로 보내는 등 사회 각계의 추모를 받았다고 합니다.

 

5. 정리 : 친일과 항일의 경계, 그리고 의도와 결과의 문제

 여러모로 평가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고위급 관료를 역임한 친일부역자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진심으로 조선 민족에 애정을 가지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평생 보여준 삶의 모습은 표리부동한 자의 보여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철저하고 나름 진실된 구석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열심히 노력하여 민족의 운명을 바꿔보자"는 그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진심이 실제로 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상술했듯이 이규완의 주장은 실력양성주의 항일운동과도 상당 부분 통하는 데가 있고, 양쪽은 1920년대 말 신간회에서 만나 함께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가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라는 출신이 발목을 잡았는지,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주권을 잃었다'는 데 너무 강박적으로 집착하였는지 그의 생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일본 아래에서의 자치'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며 한 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일까요, 아니면 결과일까요? 이규완의 의도가 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지만, 결국 그것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어떤 식으로든 협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와 결과, 아마도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규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글을 쓰는 블로거,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각자 선택할 문제이겠지요.

 여담 하나. 항일유공자 중 그와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이규완(1901-1961)이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안성 원곡면 지역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주재소(파출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니 그 활동이 꽤나 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후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여담 둘. 이규완은 갑신정변으로 첫 부인과 이혼한 뒤 일본 망명 중에 이매자(1880-1961?, 초명 나카무라 우메코)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매자는 일본인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스페인 왕족 출신 캐나다인 마가렛 고츠(1855-1928)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인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무려 2억 달러나 되는 유산을 상속하였다는 떡밥이 존재합니다. 요즘 기준으로도 거액인데 1920년대 당시에는 지금 돈으로 무려 3조 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나름 유언장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실물이 현재 남아 있지는 않으며, 이야기 자체도 확실한 게 없고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냥 그런 전설이 있더라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규완 가문의 상속비화. 일요신문 1963년 7월 7일

 

참고자료 : 
 "땟물까지도 아낀 조선 최고의 자린고비 관리 이규완", 대한기계학회 (링크)
 "근면성실한 친일파 이규완 이야기", DVDPrime 프라임차한잔 게시판 (링크)
 "이규완(李圭完)-3.1운동-애국장", 블로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링크)
 "日帝 함남지사 이규완 가문의 2억 달러 유산, 과장인가 사실인가", 월간조선 (링크)
 "이규완", "신간회", "물산장려운동", 한국어 위키백과
 "이규완(1862)", 나무위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겸 소설가 유진오(1906-1987)는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그가 한때 사회주의자였고, 이 경험이 그의 학문 및 사상체계의 기반이며 그가 만든 헌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학문과 문학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한 나라의 헌법을 쌓아올렸으면서도 그의 인생은 항상 억압과 고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를 돌아본다면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들의 모순적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유진오

 

1. 명문가의 자식은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유진오는 1906년 한성부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치형(1877-1933)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하다가 멸망 후 퇴직하여 한성은행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유치형은 근대 학문을 공부하였지만 일상에서는 구시대적 관습을 고수하였고, 유진오는 이러한 분위기의 집안에서 억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결혼 또한 부모에 의하여 14세 때 해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일본에서 온 근대문학은 하나의 해방구였으며, 근대적 개인주의를 접하는 창구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現 대학로에 위치했던 경성제국대학


 이 시기의 여러 지식인들처럼 유진오 역시 대단한 수재였는데 1924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예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였는데 한때 철학과로 전과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였고,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 교수 등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었는데 이 영향을 받아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재학 중 유진오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인 '경제연구회'에 참여하고, 정치적 성향 때문에 일본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졸업은 수석으로 무사히 했습니다. 이 때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은 구시대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사유체계를 새롭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그 역시 개인과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이상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진오와 교류하던 인물 중에는 경성제대 1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로 해방 후 북한 헌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최용달(1904-1953?)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1929년 졸업한 뒤 경성제대 연구소 조수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낙산구락부(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학문을 통한 사회운동을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단체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는 훗날 남로당의 주요 인사 중 하나가 되는 리강국(1906-1956)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당국에게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1933년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유진오는 이를 마지막으로 실천적 사회운동에서 사실상 발을 빼고, 학문연구의 길에 집중하게 됩니다.

 

2. 사상과 행동의 괴리, 그리고 그로부터의 해방

 유진오는 졸업 후 사회운동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경성제대 교수를 목표로 학문에도 매진하고, 재학 중이던 1927년 소설가로 등단한 후에는 틈틈이 작품활동도 병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처참히 실패하고, 목표하던 경성제대 교수직 역시 한국인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스카웃(?)되어 동료 최용달 등과 함께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로 직을 옮겼습니다.

 학자로서 유진오가 천착한 분야는 서양 법사상, 법률이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추인 제국대학을 나왔지만, 동시에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개인주의와 단체(전체)주의의 대립을 중심으로 각 시대를 해석하고,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체계의 기초였지만 동시에 실천적 동기로 작용하지는 못하였고, 이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성과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모순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에 대한 고민은 그의 소설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

 그런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이자 사상가인 앙드레 지드(1869-1951)가 소련에 다녀온 후 1936년 <소련 기행>을 써 소련 체제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처음에 소련을 지지했던 지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이 정작 획일성과 비판정신 결여로 물든 전체주의 사회였다고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는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유진오는 지드의 비판을 접하고 마음 속에 남아있던 고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버리지 못하던 사회주의의 현장이 결국 파시즘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마르크스를 붙잡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다가왔겠지요. 그는 지드의 전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활동을 벌여 좌익 문학계와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9년을 기점으로 결국 친일 노선으로 완전히 전향하고 말았습니다. 이 해 그는 법학 교수를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집중하였으며, 동시에 친일 성향 논설을 언론에 발표하거나 친일 문학단체에 참여하는 등 전형적인 친일 부역자 행보를 걷게 됩니다.

 

3. 해방 이후 :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

 그는 1944년 퇴계원으로 낙향하였다가 해방 후 보성전문학교로 복귀하였습니다. 당시 유진오는 이미 독보적인 헌법학자로 그 위상을 얻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새로 수립할 국가의 헌법 초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는 그가 만든 초안을 바탕으로 헌법 제정을 논의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헌법(제헌헌법)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헌법을 매개로 정치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초대 법제처장에 취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법령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유진오가 직접 쓴 헌법 초안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그의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한 줄기로 남았습니다. 우익과 좌익의 전체주의를 모두 배격한 그가 헌법의 모델로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었습니다. 이 위에서 유진오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연구해온 모든 법적 지식과 사상을 쏟아부었고, 이후 여러 차례 개헌과 많은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대한민국 헌법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 없는 헌법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지요.

 헌법 제정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진오는 헌법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하였지만, 이것이 좌익 용어가 아니냐는 윤치영(1898-1996)의 반발 때문에 모든 단어를 '국민'으로 바꿔야 했고 그는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당시 그는 좌익 전력 때문에 이런저런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관철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정부 전횡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헌법에 반영하려 하였으나,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한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대통령 중심제가 채택되었지요.

 

4. 만년과 죽음

 아무튼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195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1965년까지 장기간 재임하였습니다. 총장 재직 당시 고려대학교 운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1960년 4.19 혁명 때는 4월 18일 국회 앞까지 행진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설득하고, 경찰의 안전 귀가 약속까지 받아 시위대를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귀가 도중 시위대가 깡패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며 혁명의 확산에 본의 아니게 중요한 역할을 한 바도 있습니다.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반대농성을 밤새 지휘하는 유진오(오른쪽 아래). 1969년

 총장 퇴임 이후 유진오는 한동안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96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윤보선과 단일화하며 사퇴한 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에는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여 3선개헌 반대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1969년 뇌졸중이 발병하여 이듬해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1년에는 국회의원에 불출마하면서 오래 활동하지는 못하고 정계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로는 병석에서도 유신 반대 운동에 이름을 올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80년 돌연 신군부가 만든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민주화 세력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유진오는 6월항쟁 이후 개헌 논의가 진행되던 1987년 8월 사망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오랜 기간 재직하며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그의 빈소를 설치하고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보니 일부 학생과 교수진은 친일 부역을 한데다 전두환 정권에도 원로로 참여한 인물을 추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고, 학내에서 이와 관련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5. 정리 : 우리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처럼 유진오 역시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역사적인 법학자로, 혹은 근대문학에 큰 흔적을 남긴 소설가로 기억할 수도 있고, 적극적 친일부역자 내지 변절자, 전두환 군부 협력자로 기억할 수도 있지요. 사실 그 모든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얼핏 보면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어딘가에서는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들을 최대한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유진오가 기초한 대한민국 헌법을 보면 그가 불과 수 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스피커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고, 이를 볼 때는 또 몇 해 전까지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한 법사상가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요. 어쩌면 그 모순이야말로 유진오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였을지 모릅니다. 구시대와 근대의 모순 속에서 성장하여,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가운데 학업을 잇고, 실천적 사상과 실천하지 않는 현실의 모순 속에 갈등하며 삶을 지낸 것이 그의 일생이었지요. 어쩌면 그의 친일행각은 그 모순을 억지로 지워버린 데서 나온 치명적인 오류였을지도 모릅니다.

유진오 빈소 관련 시위를 다룬 뉴스. 경향신문 1987년 9월 2일

 네. 그를 바라보는 블로거의 시선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차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던 사람이 여기서는 왜 이렇게 애매한 말만 지껄이고 있을까요? 물론 블로거는 그의 친일행각을 옹호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친일인명사전 등의 목록에 오르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업적(?)들을 남긴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헌법 초안이나 친일행각 전후의 모습들을 보면 전혀 모순되는 그 모습들 또한 유진오 자신의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순이야말로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은 아닐까요?

 여담으로, 그의 동문이며 오랜 기간 함께 일한 최용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골 자작농의 아들로 성장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더 실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유진오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 그는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리게 되지요. 해방 후 그는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고 일찌감치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의 법체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헌영과 남로당계가 몰락할 때 그 역시 사라졌고, 아마도 함께 숙청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참고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사, 2008.
한국교육신문, "⑭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 植民기획 부정한 지식인… 미친놈 취급받으며 불행 감내" (www.hangyo.com/news/article.html?no=898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치형"
한국어 위키백과 "유진오", "앙드레 지드"
나무위키 "유진오", "최용달"

 

 대한민국 경제사에 그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대기업은 많습니다. 1990년대 재계 1위까지 다투었지만 엄청난 분식회계로 몰락한 대우그룹이나, 자기 한 몸 쓰러져 IMF를 앞당긴 한보와 기아, 분가(分家)들은 여전히 번창하지만 본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대그룹, 조금 앞으로 가면 부산의 상징이었지만 전두환의 장난질에 공중분해된 국제그룹도 있지요. 그밖에도 재계에서 한가닥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을 나열하자면 아마 이 지면과 글 쓸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 기업들 가운데 '율산그룹'이라는 기업이 있었습니다. 이 기업은 1970년대 창업하여 불과 3~4년만에 재계 10위권을 넘보는 대기업으로 폭풍 성장하였지만, 올라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지요.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 배경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아무튼 잠시나마 대한민국 경제의 '주인공'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간신히 기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했다가 뜬금없이 사라진, 율산그룹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선호 율산그룹 창업자 (출처 에브리뉴스)

 

1. 창업과 폭풍성장 : 겁 없는 20대 청년들의 반란

 창업주 신선호(1947-)씨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는 서울(경기고등학교)에서 다녔습니다. 아버지 신형식(1901-2003)은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강원도 평창과 전남 등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역임하며 농지개혁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자녀가 9명(7남2녀)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엄한 교육에 힘입어 대부분 학자와 기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중 6남인 신선호씨 역시 경기고등학교(평준화 이전)와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엘리트 집안 출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 신형식의 교육방침에 따라 9남매는 모두 고학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선호씨는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고, 처음에는 오퍼상(수출-수입업자를 연결하고 커미션을 받는 일)으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본금 100만 원을 마련한 그는 1975년 6월 자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 몇 명과 함께 '율산실업'을 창업하였습니다. '율산'이라는 이름은 자기 아버지의 호에서 따 왔는데, 이는 동시에 고향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는군요.

율산그룹 경영 당시 신선호 (출처 머니그라운드)

 율산실업의 초기 성장을 이끈 것은 중동지역에 시멘트를 수출하는 무역업이었습니다. 율산은 사업성이 낮아 다른 기업들이 꺼려하는 거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수출 선박을 직접 임대하여 운영하는 식으로 채산성을 높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의 항만 사정 때문에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헬리콥터와 상륙함까지 동원하여 납기일을 지켰고, 현지 바이어의 신임을 얻은 율산실업은 무역량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창업 첫 해, 고작 6개월 남짓 기간 동안 율산실업은 340만 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1975년 대한민국 수출액 총계는 50억 8천만 달러), 같은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수출실적은 해마다 퀀텀(?) 점프를 하여 이듬해(1976년)에는 4,300만 달러, 1977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율산을 제외하면 현대, 삼성, 대우 등 12개뿐이었으니, 율산은 창업 3년만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업이 된 것입니다.

 작은 무역회사로 출발한 율산그룹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사업 첫 해 신진알미늄을 인수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해운업(금룡해운 인수)과 건설업(동원건설 인수)에도 진출하였고, 계속 사업을 확장하여 중공업, 패션업, 전자, 관광호텔 등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습니다. 1979년 당시 율산그룹은 14개의 계열사와 27개 해외지사, 6개의 합작법인을 운영하였으며 직원은 8,000여 명, 자본금은 100억 원에 달했습니다.

 

2. 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우선 전제할 것은 신선호씨, 그리고 그와 학연으로 이어진 경영진이 천재적인 사업 수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율산그룹은 창업 직후부터 다른 기업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성공함으로써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사람들은 초기부터 계속된 성공의 경험이 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큰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무역업'을 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출 중심, 아니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제개발을 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출과 관계된 일을 하는 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퍼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수출라인 하나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율산그룹

 당시 수출기업이 누리는 금융 차원의 특혜가 어느 정도였냐면, 이들은 외국 바이어로부터 신용장만 받아 은행으로 가면 이를 담보로 즉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이율은 6% 정도였습니다. 너무 높은 거 아니냐고요? 당시 은행 대출금리가 25% 정도였습니다. ㅡㅡ; 심지어 이 대출금은 거의 눈먼 돈에 가까워서 기업들이 실제로 이 돈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든 부동산 투기를 하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특혜지요.

 율산그룹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율산은 1977년 금룡해운을 인수하여 율산해운으로 개편하였는데, 당시 인수자금 10억 원은 서울신탁은행에서 연 9% 이자로 빌린 것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 공식 금리는 25% 이렇게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율산그룹은 단기간에 계열사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거의 모든 대기업들의 사업 확장 방법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경영진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애초에 '중동지역에 시멘트 수출하기'라는 대박 아이템을 잡은 것도 그렇고, 인수한 계열사들을 단기간에 각 분야별로 최상위권 기업으로 성장시킨 업적도 부정하기 어렵지요. 이제 갓 서른이 될까 말까한 율산의 젊은 경영진은 대한민국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율산그룹은 1977년 말 서울종합터미널(現 센트럴시티) 부지를 사들이고 과천 서울대공원 설계도 맡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 율산그룹 공중분해, 왜?

 1978년 여름 발생한 한 사건이 모든 파국의 시작점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해 봄 율산실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법률상 외국 기업이 할 수 없는 유통업에 관여했다가 적발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거액의 벌금을 납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에 알려지며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율산그룹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쫓겨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입니다.

 중동, 그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율산그룹에는 매우 중요한 해외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 율산그룹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산그룹이 이에 해명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런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기금융회사(단자사)들이 대출자금을 대거 회수하여 그룹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애초에 기업 자체가 은행 빚을 쌓아올려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금융권의 신뢰가 꺾이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거기에 1978년 8월 발표된 부동산 투기 억제조치(8·8조치)가 그룹을 한 번 더 직격하였습니다. 그룹의 주요 돈줄이던 율산건설이 새로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이 조치 때문에 집이 잘 팔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9월쯤 되면 율산그룹 전체가 자금난에 빠져 주거래은행(서울신탁은행)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만큼 사정이 나빠졌고, 이에 서울신탁은행을 중심으로 시중은행들이 모여 총 70억 원의 구제금융을 퍼주었지만 이 돈은 대부분 단자사 빚을 갚는 데 소진해 버렸습니다.

 해가 바뀌고 1979년 1월에는 실로 괴이한 사건이 터지는데,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을 방문하던 신선호씨가 정부기관을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신선호 납치기도사건). 워낙 해괴한 일이라 그 전말을 두고 권력 개입설, 자작극설 ㅡㅡ; 등등 온갖 추측이 무성하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후 정부와 금융권의 태도가 율산그룹에 비우호적으로 돌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런 태도 변화에 납치기도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혹자는 "신선호씨가 언론에 경위를 설명하면서 괴한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것이 비서실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 추측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서석준(1938-1983)이 재계 인사들에게 "율산은 억울하게 당했다"라고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율산그룹 붕괴에 정치적 개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재판장의 신선호.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럴드포토)

 당시 정부와 금융계는 율산그룹에 대해 추가 금융지원(총 90억 원)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납치기도사건 이후 모두 무산되었고, 동앗줄이 끊어진 율산그룹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1979년 4월 3일 신선호씨가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고(율산 사건) 3일 후 율산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일괄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말았습니다. 해체 당시 율산실업의 부채비율은 2600%, 율산건설은 670%, 율산알미늄은 470%나 되었다니 정치적 개입과 무관하게 기업 자체가 이미 빚 위에 쌓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던 셈입니다.

 

4. 후일담

 율산그룹 회장은 공식적으로는 신선호씨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자 언론인, 관료, 친일부역자였던 부완혁(1919-1984)이었는데, 그는 <사상계>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등 야당 성향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선호씨의 출신(전남 고흥)이 겹치면서 김대중과의 커넥션 의혹, 호남계 기업에 대한 경계 아니냐는 등 이와 관련한 온갖 의혹과 음모론이 판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 이후 율산그룹의 계열사들은 대부분 다른 대기업에 인수되었는데, 이게 그룹 차원의 자금난 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계열사들은 나름 알짜기업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해당 기업들은 인수된 이후에도 나름 잘 나가다가 IMF 전후로 새로운 모기업이 무너지며 함께 사라지거나, 혹은 모기업의 사업 재편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고 흡수합병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됩니다.

건설 중인 서울대공원 조감도

 기업 자체는 이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율산그룹이 짧은 기간 동안 벌인 일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공원은 1970년대 말 율산그룹에서 설계 의뢰를 받고 미국 용역회사 PRC와 협력한 계열사를 만들어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대공원 부지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장막성전'은 해체된 후 2020년 초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모 사이비 종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와도 조금이나마 접점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산그룹이 구입한 고속터미널 부지는 그룹 해체 이후로도 오랫동안 신선호씨의 소유로 남았습니다.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해당 부지를 매각하면서, '터미널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제3자에게 양도하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채권단이 처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ㅡㅡ; 율산그룹이 계획한 20층짜리 복합터미널 계획이 날아가고, 신선호씨 및 그와 함께 남은 직원들은 가건물 상태이던 임시 터미널을 20여 년이나 지킵니다. 우주방어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센트럴시티가 완공되고 신선호씨는 수천억 자산가로 화려하게 재기하였습니다... 몇 년 뒤에 다시 경영권을 넘기기는 하지만요.

센트럴시티는 이후 애경그룹, 통일교를 거쳐 현재는 신세계그룹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센트럴시티 홈페이지)

 

# 참고자료 #
 "102세 율산 신형식 옹 타계", 서울신문(https://www.seoul.co.kr/)
 "197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율산그룹 신선호, 첫 공판", 해럴드포토(http://photo.heraldcorp.com/)
 "고흥 출신 신선호 前 율산그룹 회장 재기 성공", 아시아뉴스통신(https://www.anewsa.com/)
 "대우 건설 뒤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머니그라운드(http://mground.kr/)
 "[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
 "신선호씨 집안 스토리", 일요신문(https://ilyo.co.kr/)
 "[실록! 한국경제]⑨ “무너진 신화”… 율산(栗山)", 블록미디어(https://www.blockmedia.co.kr/)
 "율산그룹의 드라마틱한 기업 흥망사", KOSME 기업나라(http://nara.kosmes.or.kr/)
 "‘율산 신화’ 신선호 20여년 만의 인터뷰", 일요신문(https://ilyo.co.kr/)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 고교시절 100만원으로 기업 성장", 에브리뉴스(http://www.everynews.co.kr/)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https://tfmedia.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부완혁"
 신세계센트럴시티 홈페이지(http://www.shinsegaecentralcity.com/)
 한국어 위키백과 "율산그룹"
 나무위키 "센트럴시티", "율산그룹"

 

 윤리적 기업가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덕분에 유한양행은 지금도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곳도 흑역사랄 것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일한의 동생 유명한(1908-1950)이 기업을 운영하던 일제강점기 말기였습니다. 하필이면 형 유일한이 항일운동에 매진하던 때 이 사람은 기업 차원에서 친일행위를 일삼은 것이지요. 말할 필요도 없는 형 유일한,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긴 동생 유특한(1918-1999)과 비교됩니다. 이번에는 형만 못한 아우, 아우만 못한 형이었던 유명한의 일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명한

 

1. 사전 지식 : 유일한과 유한양행

 

 우선 유한양행이라는 기업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은 192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할 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버드나무 모양의 CI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유한양행 CI

 

 유일한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당시 한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한양행이 주력으로 삼은 분야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다가 자체적인 생산체제도 갖추었는데, 유한양행이 자체 생산한 의약품 1호는 바르는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이었다고 하지요. 거의 약장수 수준의 홍보가 판치던 당시 제약업계에서, 유한양행은 제품의 구체적 효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 등을 광고에 실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만주, 베트남 등 해외로도 진출하였습니다.

 

 유일한은 철저한 윤리경영을 추구하여 당시에는 판매가 합법이었던 메스암페타민(히로뽕) 등 마약성 제품의 판매를 철저히 막고, 1930년대 후반에 이미 종업원 주주제를 실시하는 등 상당히 선진적인 경영을 하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한반도와 미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미육군전략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공작원으로 비밀리에 입대하여 50이나 된 나이에 고도의 훈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이는 그의 사후 20년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집니다).

 

말년의 유일한

 

 미국에서 유일한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 당국에도 알려졌는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당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유일한의 귀국을 불허하였습니다. 사장이 미국에 발이 묶이자 회사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12월 15일 긴급 이사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사람이 당시 부사장으로 일하던 동생 유명한이었습니다. 유명한은 1936년 유한양행 대주주로 처음 경영에 참여하였고 1938년에는 이사, 1940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형이 부재중일 때 회사 운영을 맡고 있었습니다.

 

 

 

2. 유명한의 '덜 유명한' 친일행적

 

 그런데 형이 하던 일을 생각하면 유명한의 행적은 사장을 맡기 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1941년 8월 그는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일본 육군에 1만 원의 자금을 헌금하는 등, 형의 신념과 정 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었습니다. 일단 당시는 그가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형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으며, 유일한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명한은 정식으로 사장직에 오르고 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를 펼쳐나갔습니다. 그가 사장에 선임되고 며칠 뒤, 유한양행은 본사+사장(유명한)+계열사+직원 명의로 총독부에 소위 '애국기'를 헌납하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한양행이 헌납한 금액은 총 5만 3천 원으로, 조선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헌납한 3만 원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였습니다.

 

유한양행의 애국기 헌납을 다룬 기사. 매일신보 1941년 12월 28일

 

 유명한의 친일 행적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3년 1월 1일에는 유한양행과 계열사들이 <매일신보>에 신년기념 합동 광고를 실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도 소위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다든지 신년 맞이 전승(戰勝)을 기원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일본 제국주의 찬양 광고였습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는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유원박)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형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지 유명한이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녔을까요? 블로거가 추정해 보자면 유일한의 당시 행보 때문에 회사가 일본 당국에 탄압을 받았고,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이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굳이 변호하자면 '회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나 군사정권기에 권력과의 유착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이런저런 탄압과 견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유한양행 명의 친일광고.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3. 말년 : 형제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다

 

 물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와 회사의 친일행적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설립자 유일한과 막내동생 유특한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유일한은 다시 사장으로 복귀하였고, 유명한 역시 유한제약 이사장과 한국제약협회 2대 회장을 지내는 등 기업가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반민특위에 끌려가지도 않는 등 잘 살았지요.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적산을 불하받아 '고려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 기업은 해방 직후 출판업계에 큰 영향을 준 회사였다고 합니다.

 

 이와 별개로 형과 동생은 민족반역자가 되어 자신들의 신념과 회사 경영이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을 했던 형 유일한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유명한이라는 동생은 알아도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일본인은 모른다"라며 사실상 큰동생과 연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막내동생 유특한이 일본 유학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이것조차 나중에 형에게 깊이 사죄했을 정도라고 하니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나머지 형제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특한은 나중에 일부 계열사를 가지고 독립하여 '유유그룹'을 창업하고, 역시 양심적 기업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기업인으로 잘 나갔을지는 몰라도 그는 형제들에게 인간적으로 버림받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지만 당연히 모두 무시당합니다. 그래도 당시 생존해 있던 삼형제의 어머니는 그가 모시고 피난하였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산 다대포에 정착한 유명한은 배를 타고 부산 중심가에 출퇴근하던 중 침몰사고가 발생하여 허무하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형 유일한은 말년에 막내동생 유특한에게 "친일파만 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라는 내용의 말을 건넨 적이 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 유명한의 친일 행적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합니다. 동생 자신뿐 아니라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전체의 역사에도 큰 흠집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름 피를 나눈 형제여서 그랬던지, 형 유일한이 동생의 부고에 깊이 안타까워했다는 뒷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 정리 : 흑역사도 역사다

 

 형 유일한이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그런지, 동생들은 나름 사회적인 활동이 많았음에도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블로거의 능력과 노력 부족을 탓하시오 그래서 유명한의 행적은 이름과 달리 그리 유명하지 않고, 일제강점기 언론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친일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일생은 형 유일한과 비교하여 그 그늘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의 행적이 회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거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단언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회사를 지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친일분자로 돌아선 많은 이들을 만났고, 이들이 위의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 또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습니다. 자신과 회사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작원 훈련까지 받아가며 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일한이야말로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한양행 연혁. (유한양행 홈페이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유한양행에서 유명한과 그 시대의 행적을 철저히 감추고 언급조차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한양행은 일제강점기부터 세무조사 등 정치적 탄압을 버티며 성장한 것이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유명한의 주도로 애국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지울 수 없는 사실이지요. 블로거는 유한양행이 양심적 경영과 사회공헌을 전통으로 하는 깨끗한 기업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비록 일부나마 명백한 흑역사를 감추는 데는 약간의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과거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적 기업이라는 전통에 더 어울리고, 설립자 유일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참고 : 

유일한박사 온라인기념관 (www.yuhan.co.kr/Founder/founder_main.html)

뉴스워커, "[광복절 기획] ‘민족기업’ 유한양행이 친일 행위를?…90년 역사 ‘옥에 티’" (www.newswork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3)

오마이뉴스, "[한국 기업인 열전 7]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4800)

일요신문, "[8·15 특집 기업과 친일] 유한양행 ‘유명한 악몽’" (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96461)

CNB뉴스, "[임정 100년 - 겨레 기업 (2)] 유일한 박사 독립정신 잇는 유한양행·유한킴벌리" (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7516)

정운현, "민족기업 유한양행도 '친일행적' 있다" (web.archive.org/web/20190109013236/storyfunding.daum.net/episode/4740)

한국어 위키백과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나무위키 "유일한", "유명한(기업인)", "유한양행"

 


 답사장소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일자

 2019. 2. 12.


 역사를 전공하는 이에게 신채호(1880-1936)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흔히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끌어 간 인물 중 하나이며, 또한 민족주의 역사학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세수를 할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강직함을 상징하는 몇몇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역시 흔히 그렇듯 이 이상의 인간 신채호에 대하여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람들의 관심도 적은 듯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신채호는 단순히 저런 몇 줄로 정리될 만큼 단순한 삶을 살아간 인물은 아닙니다. 계몽운동가, 언론인, 사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아나키즘 혁명가에 이르는 그의 일생은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거대한 불의(不義)와, 때로는 자기 자신과 평생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살았던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신채호는 충청도 회덕현, 현재의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생가 터는 현재 신채호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하여 오늘은 신채호 생가를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이곳은 대전광역시에서도 가장 외진 지역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만약 버스를 이용하고 싶다면 대전서남부터미널이나 산성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32번 버스(서남부터미널 ↔ 백암리)를 타고 도리뫼 정류장에서 내리면 됩니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려서, 버스가 들어온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표지판이 나옵니다.



 사실 표지판 이전에 버스정류장 근처에서부터 웬 기와집 하나가 보여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엄밀히 말해서 이곳은 신채호 홍보관이고 실제 복원한 생가는 안내판을 참고하여 조금 더 걸어들어가야 나옵니다.



 사실 이곳에 무언가 '볼거리'가 많다고 보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신채호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생가라고 해봐야 그냥 평범한 초가삼간이고, 그 외에는 신채호 동상과 작은 홍보관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신채호의 '숨결'을 느끼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생가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신채호 생전의 건물은 아니고, 세월의 바람에 사라진 것을 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기록에는 1992년 발굴조사를 시행한 후 지역 주민들의 고증 등을 참고하여 현재의 초가집을 재건했다고 하는군요. 신채호가 건국훈장을 수훈한 독립운동가였던지라 국가보훈처에서도 나름 현충시설로 지정하고 표지판도 박아 놓았습니다. 표지판에 붙은 스티커가 떨어져 덜렁거리던데 관리 좀


 신채호가 이곳에서 거주한 것은 대략 8세 무렵까지로, 본래는 할아버지의 처가(안동 권씨)가 있던 마을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신성우는 사헌부 장령을 역임한 고위관료였지만 낙향하여 지금의 청주 귀래리 지역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 신광식은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며 가세도 기울어 이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것입니다. 신채호는 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였고, 이후에는 집안의 고향인 청주 귀래리로 이주하여 학문을 닦았습니다.



 복원한 생가 앞에 있는 안내판. 신채호의 일생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초가집의 안채에는 '단재정사(丹齋精舍)'라는 소박(?)한 현판을 붙여 놓았습니다. 방 안에 전시된 인형은 아마도 신채호의 어머니가 길쌈하는 모습을 모티브로 한 듯합니다.



 안채의 다른 방에는 어린 시절의 신채호를 재현해 놓은 인형이 있고, 그 앞으로는 어린 신채호의 몇몇 일화와 그가 어릴 적 지었다는 한시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았고, 20대 중반에 성균관 박사(요즘식으로는 교수)를 역임했을 정도로 학식도 출중했으며, 한 번은 집에 불이 나 책이 소실되자 그 책의 내용을 토씨까지 통째로 암기하여(!!!) 그대로 복원해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천재였습니다.



 복원한 생가는 아담하지만 나름 고즈넉하니 편안한 분위기를 줍니다. 안채 옆켠에는 곳간도 복원되어 있습니다.



 생가를 나오면 그 옆켠에 서 있는 신채호 동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블로거는 본래 거창한 '모뉴멘트'를 아주 싫어합니다만, 이곳에 있는 동상은 쓸데없이 거창하지는 않으면서 나름 방문자들에게 신채호를 마주할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라 싫지많은 않군요. 왼쪽 건립기가 좀 거슬리긴 하지만 넘어가기로 잠시 모자를 벗어 신채호의 위대한 일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처음 들어올 때 보였던 기와건물인 단재 홍보관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역시 홍보관이라고 뭐 거창한 볼거리가 있지는 않습니다. 딱히 신채호 관련 유물들이 있다기보다는 신채호의 삶의 과정을 설명한 글과 미니어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신채호라는 인물을 알고 싶다면 홍보관을 찬찬히 둘러보며 글을 음미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단체예약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도 함께 들을 수 있다고 하네요.



 신채호의 일생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말년에 아나키즘(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이고 아나키즘 혁명가로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그에게 아나키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아나키즘이 억압적인 지배권력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아나키즘이 그때까지의 독립운동과 단절된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아마 이회영(1867-1932)과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블로거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그의 문구라면 역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조선상고사』 첫머리의 일갈입니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나와 상대(나 아닌 놈)가 싸우는 것' 쯤으로 이해해 버리면 심히 곤란합니다. ㅡㅡ; 신채호는 주관적 존재(아. '나'는 주관적이므로)와 그렇지 않은 존재(비아)를 전제하고(이는 상대적인 개념. 비아 역시 스스로는 '나'일 것이므로) 각각의 '나'가 외부(비아)의 자극에 반응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사회를 변혁해 온 그 거대한 흐름이 바로 역사의 본질이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홍보관 입구에는 간단한 운영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홍보관은 월요일을 제외한 주6일 개관하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홍보관을 제외한 생가 자체는 이외 시간에도 둘러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홍보관을 나오면서 처음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 명의 작은 역사학도에게 있어 신채호란 어떤 의미일까요? 분명 신채호 역시 인간이었고, 그의 행적과 사상에는 이런저런 비판이 따라붙습니다. 역사학자 신채호가 주장한 여러 학설들은 시대가 지나며 여러 후학들에 의하여 대부분 논파되었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의 독립운동은 분명 위대한 것이었지만 한켠에서 그는 (관점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도 맹렬한 비판으로 임시정부 활동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말년의 아나키스트 활동은 아예 무시되거나 단편적으로만 언급되는 게 현실입니다.


 물론 그 비판적 시각들은 일정 부분 타당하지만, 그것으로 인간 신채호의 위대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블로거의 생각입니다. 그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가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 특히 독립군과 의열운동 등의 무장투쟁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족'의 각성이 필요했던 시대에 역사를 통하여 '한민족'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한 그의 업적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요?


 슬프게도 그의 역사학적 업적이 많은 후손들에게 오해 또는 곡해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신채호는 실증주의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기에 만주벌판을 헤집으며 고구려의 흔적을 찾고 과거 사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시도했던, 어떤 의미로는 철두철미한 '실증주의자'였습니다(단지 참고할 사료가 아직 너무 부족했고 그가 민족의식 고취의 방편으로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렇게 치열하게 쌓아올린 그의 역사관이 역사를 빙자한 소설이나 쓰는 유사역사가들이나 역사를 이용수단으로 삼는 정치꾼의 말장난에 오용되고 있는 현실, 저승의 신채호가 바라보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참고자료

 - 한글 위키백과 "신채호"

 - 나무위키 "신채호"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위키문헌)

 - 신채호, 『신채호 수필선집』, CommunicationBooks, 2017. (구글 도서)

 - 신복룡,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7(1),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친일파를 생각할 때 한국인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만,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한국인들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일본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중에도 일본 당국에 적극 협력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지요. 특히 그런 사람이 세계적인 종교의 중요 인물 쯤 되는 거물이라면 여기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 살펴볼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다진 위인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본에 적극 협력한 친일행위자라는 거대한 어두움을 함께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귀스타브 뮈텔 주교]




1. 뮈텔 선교사 조선에 오다


 뮈텔은 1854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조선에 온 것은 1881년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면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정식 수교하기 전까지 양측은 적대 관계였고(병인양요 등 무력충돌도 있었다보니) 프랑스 선교사의 활동도 그 때까지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로 온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뮈텔은 1885년 본국의 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조선을 잠시 떠났습니다(30세 무렵에 교수로 임용된 것을 보니 능력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1890년 가톨릭 조선대목구(現 서울대교구) 교구장 장 블랑(1844-1890)이 선종(사망)하자 후임으로 그가 임명되었고, 제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다시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이후 그는 사망하는 1933년까지 무려 43년간 교구장 자리를 지켰고, 이제 막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잡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사제를 양성하였고,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또한 그의 재임기에 지은 것입니다. 독일의 성 베네딕토회에 요청하여 한국에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예를 들어 한국에만 존재하는 판공성사 제도가 그의 재임기에 정착된 것입니다.


[명동성당]


 그가 재임하는 동안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일대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이 때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바뀝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함경도, 간도)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메리놀 외방전교회 관할)가 신설되는 등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부임할 당시 17,000여 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도 1930년대가 되면 서울대목구에서만 50,000~60,000명에 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여러 대목구와 지목구가 분리된 이후의 통계입니다).


 뮈텔 주교는 주교로 임명된 날부터 죽기 며칠 전까지 꾸준히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와 편지, 각종 사목문서 등을 통틀어 '뮈텔 문서'라 부르며 초기의 한국 가톨릭과 뮈텔 주교 개인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국 가톨릭의 큰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와 관련한 사적지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종교지도자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겠습니다만......




2. 주교 뮈텔의 그림자 : 민족을 팔아 부흥을 얻다


 한국 가톨릭의 성장 뒤에는 바로 일본 당국과의 지저분한 협력관계가 있었습니다. 뮈텔 주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심지어 이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일본의 인정과 협조를 얻어냈고, 그 바탕 위에서 급속한 교세 확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잘 알려진 사례로 뮈텔과 안중근 사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중근은 부자(父子)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뮈텔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데,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 뮈텔은 그와의 모든 우호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심지어 안중근에게 세례성사를 준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1860-1936) 신부가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겠다고 요청하지만, 일본 당국까지 허락한 사안을 뮈텔은 거부하고 빌렘 신부가 안중근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뮈텔의 입장은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성사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동생 안명근이 그를 찾아 고해성사를 집전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다시 거절하면서 "안명근이 아주 무례했다"고 일기에 써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빌렘 신부는 그의 금지령을 씹고 뤼순으로 건너가 고해성사를 집전하였는데, 뮈텔은 정치적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빌렘에게 2개월 성사 금지 징계를 내렸습니다. 이에 빌렘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교황청 포교성성에 직접 탄원하였고 교황청은 빌렘 신부가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고 징계를 직권으로 철회했습니다. ㅡㅡ;


[안중근을 면회하고 있는 빌렘 신부]


 안중근과 그의 악연은 이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추진하던 대학 설립에도 반대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유란 게 무려 한국인이 학문을 익히면 가톨릭 신앙에 소홀해진다는 말 같지도 않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ㅡㅡ; 오죽하면 안중근이 충격을 받아 외국어 공부를 그만두기까지 했다는군요. 물론 이후 한국 가톨릭에서 교육사업에 힘쓰긴 했지만 이는 초등교육에 한정된 것이었고, 이는 '교육은 하되 지식인을 양성하는 고등교육은 하지 않는다'는 식민 당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유명한 일로는 105인 사건의 결정적 단초가 된 고해성사 밀고 사건이 있습니다. 안명근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계획을 두고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에서 계획을 털어놓자, 미리 뮈텔로부터 안중근 집안의 일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빌렘은 뮈텔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고 이를 뮈텔이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안명근 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신민회가 풍비박산나고 말았습니다.


[아카시 모토지로]


 이는 종교지도자가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이며,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논란의 소지가 많은 행동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가톨릭계의 골치를 썩이던 명동성당 진입로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고개(現 충무로) 방향 진입로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침범하여 사실상 길이 막혀 있는 상태였고, 성당 측에서는 1906년부터 계속 소송을 걸었지만 번번이 패소해 왔습니다. 이에 뮈텔은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그 대가로 성당의 부지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1운동에서도 그는 당연히 신학생들에게 시위 참여 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고 참여한 학생들은 여지없이 퇴학 처분을 내렸습니다(이러한 입장은 뮈텔 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독립운동 미참여를 비판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약(?)상은 그의 일기에 꼬박꼬박 기록되어 있어 후세에 그 전말이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3. 종교적 고찰 : 과연 그는 제대로 된 사제로서 자격이 있는가?


 이런 짓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그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닦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긍정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뮈텔 문서 등 그와 관련한 사료들이 많이 발굴되고, 다양한 각도에서의 연구가 진행된 최근에는 그의 행적이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다수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후술할 고해성사 밀고 논란까지 가면 그가 아예 사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단 그는 한반도 선교에 일생을 바친 주제에 심각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한국의 법정에 출두하면 한국인의 눈에는 '유럽인이 한국 법정의 재판권에 굴복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면서 대놓고 한국 정부와 법정을 무시하도록 권유한 적이 있는가 하면, 한국인 신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만큼 한국인을 아래로 보았습니다. 한국인 사제들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아, 훗날 부산교구에서 활동하는 사제 김명제(1908-1960)가 그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의 재임기에 한국인을 위한 많은 사업이 벌어진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우매한 한국인'을 위한 동정적 시각이 강하게 들어있었고 자신들(유럽인)과 한국인을 동등하게 보고 벌인 일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안중근과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뮈텔은 오로지 가톨릭 선교에만 몰두해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폭압적 식민지배에 협조함은 물론,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들을 우매하게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연루된 가장 큰 떡밥으로 단연 '고해성사 밀고'를 들 수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제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결코 어디에도 발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겼을 경우 즉각 파문당하거나 이에 준하는 중징계를 받습니다. 물론 안명근이 '이미 저지른 범죄'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앞으로 저지를 범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고해성사의 형태로 고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큰 논란을 자초한 셈입니다.


[뮈텔 주교의 일기는 현재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빌렘 신부가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하러 가는 것을 막은 것 또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제의 기본을 망각한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빌렘 신부는 비록 105인 사건 당시에는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한 1차 책임자라는 문제는 있지만 뮈텔의 반(反)한국인 성향에 반발하여 사사건건 충돌하였고, 결국 1914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독립운동을 방해한 뮈텔의 이러한 행적들은 그 상당수가 교회법조차 무시한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더 큰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짓거리들을 행한 결과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거의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를 상당히 앞서서 수용하기도 했습니다(다만 이는 일본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교황청에서 직접 이를 수용하도록 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후로도 한국 가톨릭은 몇몇 신자들의 개별적 활동을 제외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등장 이전까지 정치적으로 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권력에 협조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당장의 교세를 확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결국 한국인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가톨릭의 교세는 일제강점기 들어서도 꾸준히 성장은 하지만 그 정도는 점차 감소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에 밀려 '기독교'라는 명칭 자체를 사실상 개신교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의 행적은 한국 가톨릭을 위해 좋은 것이었을까요?




4. 정리 : 무엇을 위한 종교여야 하는가?


 뮈텔 주교의 행적은 이러저러하게 연구가 되고 있지만,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근래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재임기가 한국 가톨릭의 (사실상) 태동기였기 때문에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도 있겠습니다. 뮈텔과는 거의 반대 방향의 사목을 한 김수환 추기경조차도 그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옹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선이 이후의 한국 가톨릭에 두고두고 걸림돌이 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톨릭은 한국 사회와 문화에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동안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였습니다. 19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정의구현사제단 등 사회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가진 사제들이 다수 등장하여 활동하고 나면서부터야 가톨릭의 교세가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한국 가톨릭에 끼친 해악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분명 그가 주장했던 중요한 논리는 '정교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독립운동 기밀을 일본에 밀고하고, 이를 대가로 종교시설 유지에 편의를 얻어내는 모습은 정교분리보다는 차라리 '정교유착'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며 정당한 사회참여마저도 막아세웠던 것입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한국 순교자 124인 시복미사. 광화문광장]


 사실 블로거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서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당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개신교와 이를 막아세웠던 가톨릭의 처지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정 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은 사회문제에 적극적 모습을 보이며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반대로 개신교는 정교분리 운운하면서 정작 뒤로는 심한 권력지향성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리를 떠나 사회적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종교의 역할이란 사회의 소외당한 자, 탄압받는 자,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교세 확장을 명분으로 탄압받는 한국인의 목소리를 외면한 뮈텔 주교의 행적, 그리고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재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는 과연 제대로 된 종교인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느 쪽을 더 옳다고 하실까요?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나무위키

가톨릭평화신문, 「[특집]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주년④ 안중근과 빌렘 신부, 그 운명적 만남

가톨릭프레스, 「명동성당 길과 바꾼 105인 사건

연합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통신문> 국내 최초 공개

중앙일보, 「[분수대]뮈텔 주교와 김추기경

한겨레,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김정환,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교회사연구』 3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김정환, 「뮈텔 주교 재임기의 교세 변화」,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읽다」, 『교회사연구』 3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 지금은 거의 사라진 20세기의 직업으로 식자공(植字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직역하면 '글자를 심는 장인'이라는 뜻인데, 인쇄를 위한 활판에 활자를 배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아마 활판에 활자를 심어넣는 것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이 직업은 나름 전문직이었고 꽤 잘 나갔다고도 하는데,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가 대세가 되면서 불과 이삼십 년 사이에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려일보의 식자공. 출처]


 - 실제로 식자공이 활약하던 시대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던데다 활자의 특성상 좌우가 뒤집힌 글자를 노상 판독해야 하기 때문에, 식자공으로 일하려면 글을 해독하는 능력은 기본에 고도의 숙련 기술도 필요했습니다. 특히 인쇄 과정이 분초를 다투게 마련인 신문 인쇄에서는 때때로 식자공이 임시 편집자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식자공은 비교적 대우가 좋고 인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숙련된 식자공이라도 깨알같이 배열된(심지어 좌우가 뒤바뀐) 수백 수천 자의 한자들을 완벽하게 구별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간간이 오타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오타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간혹 있었던 모양입니다. 20세기 독재정권 시절 이야기입니다.




1. 대구매일신문의 수난


 - 대구매일신문은 1946년 '남선경제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몇 차례의 제호 번경을 거쳐, 현재는 '매일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고 있는 대구의 지역신문입니다. 6.25가 발발하여 온 나라가 쑥대밭이던 1950년 8월 29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 기사 중, '이(승만)대통령李大統領'이라는 글자가 '이견통령李犬統領'으로 인쇄되는 오타가 나왔습니다. 大(큰 대)와 犬(개 견)의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식자공이 혼동한 것입니다. 설마 의도적인 건 아니었겠지


 - 오타야 아무리 노력해도 간간이 나오기 마련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헷갈린 글자가 '개'를 뜻하는 한자였다는 데서 문제가 커집니다. '대통령'이 '견통령'으로 둔갑했으니, 요즘 말로 표현하면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본의 아니게 욕해버린 겁니다. 요즘이라면야 그냥 짤방 해프닝으로 웃고 넘어가겠지만 당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이 하나의 오타가 추상같은 독재권력의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건드린 것입니다.


 - 결국 오타 하나 냈다는 이유로 사장이 구속되고 편집주간은 사임했으며, 신문사는 무기정간 조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장 이상조는 2개월 후에야 풀려났지만 신문사 운영을 더 못하고 회사를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후 천주교 쪽에서 신문사를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관련기사. 1955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3면.]


 - 그런데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대구매일신문은 이승만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55년에는 관제데모 학생 동원을 비판하는 사설이 신문에 실리자, 자유당이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신문사를 때려부수고 여러 직원을 다치게 한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경찰 간부의 망언은 길이 전설이 되었습니다.




2. 후폭풍 : 언론사의 오타 노이로제


 - 이후로도 대통령 오타 사건은 몇 차례나 더 벌어졌습니다. 1953년에는 전북의 삼남일보와 충북의 국민일보(지금의 국민일보가 아님)에서 동일하게 '견통령'이라는 오타를 내서 홍역을 치렀고, 국민일보는 몇 달 뒤 똑같은 오타를 한 번 더 내는 바람에 아예 폐간당하고 말았습니다. ㅡㅡ; 이듬해에는 부산일보에서 '이승만 대령'이라는 오타를 냈는데, 이 때는 욕설은 아니어서인지 주의조치만 받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 다른 오타도 있습니다. 1955년 동아일보는 활자 배치를 실수해서 다른 기사에 들어갈 '괴뢰(꼭두각시)'라는 글자를 '고위층 재가 위해 대기 중'이라는 제목 앞에 붙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괴뢰 고위층'이라는 말이 나온 건데, 괴뢰는 북한에 붙는 수식어였고(흔히 말하는 '북괴') 당시에 고위층이라 하면 이승만의 최측근을 말하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역시 난리가 났습니다. 다행히 360부만 발행하고 수정이 됐지만 책임자가 해임되고 신문사는 1개월 정간을 당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견통령'을 검색하면 이게 의외로 흔한 실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ㅡㅡ;]


 - 일이 이렇게 되니 신문사들은 오타, 특히 '대통령' 같은 중요 단어에 대한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실수 한 번에 신문사가 날아가게 생기니 각 신문사들은 아예 '개 견犬' 자를 활자에서 없애버리거나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ㅡㅡ;


 - 이것도 어찌 보면 필화(筆禍), 혹은 문자옥(文字獄)이라 하겠습니다. 글자 하나에 꼬투리를 잡아 지식인을 탄압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을 '개통령'이라고 인쇄했다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지만, 이런 사소한 오타에 공권력의 탄압까지 가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의 일환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오타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 마당에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대놓고 실을 엄두가 날까요?




3. 요즘에도 오타는 나오지만......


 - 1990년대 이후 인쇄에 컴퓨터가 사용되고 활판이 퇴출되었지만, 요즘의 인쇄물에도 간간이 오타는 나옵니다. 몇 쪽 이상의 긴 글을 써 보았다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글 어딘가에 오타가 숨어 있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ㅡㅡ; 어쩌면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일에 대한 인간의 집중도는 떨어뜨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 그래도 요즘에는 그 오타 하나로 누군가가 고초를 치를 일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2012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1면 톱기사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오타(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퇴임)를 냈을 때도 네티즌들의 비웃음과 함께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난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셀프 탄핵 2013년 아시아경제는 '자치단체'를 '자X단체'로 인쇄하는 오타를 내고, 다음날 "19금 바로잡습니다"라는 희대의 정정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ㅡㅡ; [기사보기]


[조선일보의_속내.jpgee 출처]


 - 물론 오타가 자꾸 나온다는 게 언론의 입장에서 바람직할 리는 없습니다.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 차이로 '대통령'이 '개통령'으로 변신하는 식의 의미 전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식자공의 시대에 비해 훨씬 편리해진 작업 환경에서 이런 오타가 나온다는 것, 특히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기사에 툭하면 발견되는 대량의 오타들을 보자면 한국 언론의 최근 수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여담으로 언론의 오타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한국 뿐 아니라 독재정치가 이루어지는 수많은 나라의 공통된 현상인 것 같습니다. 2011년 인민일보는 당시 총리 원자바오의 이름(溫家寶)을 '溫家室(찜질방이라는 의미가 있음)'으로 찍어 내는 바람에 무려 17명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ㅡㅡ; [로동신문의 오타 검열]




참고 : 

한글 위키백과 "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

『한국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7. (Google 도서검색)

노컷뉴스 "이승만 견통령, 대령… 막 나가는 언론 열전"

머니투데이 "대통령이 '犬통령'..오·탈자 사고 처벌사례 보니"

머니투데이 "사라진 식자공을 기억하라"




김순남 (1917-1983?)

<산유화>



 - 이번에는 한국인 작곡가를 다루어 보겠습니다(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히려 한국인 작곡가들을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순남은 다수의 가곡과 한국 최초의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를 쓴 대작곡가이지만 해방과 분단의 격동기에 북한을 선택하고, 북한에서도 정치적 숙청과 복권을 거듭하며 그 존재 자체가 묻혀 버린 비운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 김순남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낙원상가?? 어릴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며, 1932년 경성사범학교(現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피아노 연주나 취주악단 지휘 등 음악적 활동에 열중하였다고 합니다. 졸업 후 몇 년간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다음 해 도쿄 고등음악학원 작곡부에 입학하였습니다.


 - 도쿄에서 김순남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하라 타로(1904-1988)가 있는데,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음악가로 김순남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재학 중 그는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의 창작 발표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품하였는데, 당시 출품작인 피아노 소나타 1번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작법을 사용하여 보수적인 일본 음악계에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 1942년 귀국 후 김순남은 '조선음악협회'에 음악가의 일원으로 가입하였는데, 이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관제 단체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좌익 성향의 비밀 조직인 '성연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니, 그가 딱히 친일부역자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해방 전까지 그는 버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 당대 첨단을 달리는 작곡가들의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꽤 전위적인 곡을 썼습니다.


 -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고 그의 작품도 사회 참여적인 색채를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소위 '해방가요'를 다수 작곡하여 인기를 끌었고, '조선음악건설본부'에 가입하였지만 이 단체가 좌익-우익 및 친일-민족 대립으로 쪼개진 후에는 좌익계와 민족계가 합세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겨 활동하였습니다.


 - 이 시기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1번, 합창 교향곡 <태양 없는 땅> 등 본격적인 관현악곡 또한 작곡하였는데, 각각 한국 최초의 작품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악보는 전하지 않습니다. 김순남은 좌익 인사였음에도 그의 재능은 미군정 쪽에서 주목할 정도였고, 문화 담당 장교인 엘리 하이모비츠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고도 했지만 본인과 미군정 양쪽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이 시작되자, 김순남은 아내와 외동딸을 놔둔 채 다른 인사들과 함께 월북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작곡 활동도 계속 이어갔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오페라 <인민유격대>는 한반도에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입니다.


 -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김순남은 소련으로 유학하여,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을 사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전 직후인 1953년 그는 돌연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주변인들은 여러 유학생 중 그 혼자만 소환되는 것을 의심하였지만 본인은 별 생각 없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옥죄는 고난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 그가 소환된 것은 실제로 그가 남로당 쪽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음), 남로당을 숙청하면서 그를 엮어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강한 사상 비판을 당하고, 1958년에는 창작에 관한 권한을 모두 박탈당하고 함경남도 신포조선소의 주물공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64년이 되어서야 다시 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창작 권리를 회복한 김순남은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뒤 폐결핵이 발병하면서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생활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투병이 길어지면서 그는 북한 사회에서 조금씩 잊혀졌고, 결국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채 1983년 경 신포에서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는 남한에서는 소위 빨갱이였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커녕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1980년대 말 좌익 음악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이후 조금씩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남한에 남은 외동딸 김세원(1945-, 성우로 활동)씨가 자료를 수집하여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김희조(1920-2001), 백남준 등의 거장들도 김순남에게서 음악을 배우거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 하지만 교향곡과 협주곡 등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면이 있어서 김순남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나마 현재 알려진 것들은 주로 가곡과 해방가요들이며, 그 중에서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산유화>의 경우 조수미 등의 유명 성악가들이 녹음한 바 있어 일반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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